원숭이들의 영원하고도 막강한 순환
날 바라보는 눈은 날 관찰하는 듯 했다. 내가 그를 관찰하듯. 가만히 앉아 편안히 응시했다. 어떠한 흥분도 경직도 없었다. 마치 사람처럼. 되려 나는 주둥이를 쭉 내민 체 그 좁아진 입술 사이로 흥분의 거친 숨을 내보내고 들이켰다. 마치 원숭이처럼.
불이 꺼졌고 난 침대에 누워있었다. 캬악 거리는 소리가 좀 떨어진 다른 침대에서 들렸다. 바로 미친 듯이 웃는 두개의 목소리가 어둠안에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가 가라앉힐 수 없는 흥분을 소리로 나마 잠시 주리며 이리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 눈은 보였다. 참을 수 없는 흥분과 약간의 쾌락에 빠진 듯한 시선이었다.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 초점이 어디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주둥이를 모았다. 언젠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저 사내놈이 나의 눈을 보았다. 무엇일까, 나는 원숭이가 돼있었다. 마치 사람 같은 원숭이가. 반면 그는 사람이었는데 마치 원숭이 같은.
원숭이들의 놀이는 효율적고 건강했다. 한 놈이 냅다 누우면 한, 두 놈 정도 달려 들어 몸 속에 들러붙은 벌레를 따주고 곧바로 입으로 집어 넣었다. 조금의 불합리함도 있었는데 등치가 큰, 무리의 대장 정도가 오면 원래 누워있던 놈도 일어나 그 대장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 때는 못해도 서너 명이 달라 붙었다. 저 뒤쪽으로는 어린 것들이 두 놈이 뒤엉켜 싸움 같은 놀이를 하고 있었다. 폭력적이지도 감정적이지도 않았다. 그냥 사내놈들의 놀이 같은 것이었다.
사내들의 놀이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오로지 본능으로만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혼자 누워있었는데 두 놈이 나에게 달려든다. 벌레를 때 주려 하는 것일까? 아니, 그냥 냅다 내 위에 누워서 다시 미친 비명 소리를 낸다. 어떤 효율도 건강도. 정말 그저 본능적인, 감정적이었다. 그냥 원숭이들의 놀이 같은 것이었다.
날 바라보는 그 눈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는 그 짧은 시간을 이리 풀어 썼는데. 그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2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어도 그와의 잠시의 추억이 맴돌아 이렇게 글을 시작하는데, 그는 무엇을 포기할 만큼 나를 느꼈을까, 그 정도의 특별한 시간은 아니었을까. 같은 사람이어도 타인이라면 단 조금도 완전한 공감 없이 그저 추정을 통해, 또한 가정을 통해 이해하는 척 할 뿐인데 원숭이는 어떨까. 난 그가 도대체 무슨 감정이었는지, 생각이었는지, 그 후에 무엇을 어떻게 받아드렸는지 알 수 없다. 애초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감정과 생각과 무엇을 받아드릴 정도의 무언가가 그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눈은 날 바라보았고 그 시선은 사람보다 나았기에 그들은 평온했고 본능적이지 않았기에, 최소한 사람보다는. 그 손으로 어떤 도끼도 만들지 않았고 그들의 땅에서 어떤 비행기도 만들지 않았기에. 정말 났기 때문에 최소한 사람보다는. 그래서 이런 실례를 범하는 것을 조금은 미안한 감정이 있다. 그저 돌담에 누워 서로의 벌레나 때 주고 있는 그들을 정말 영원히 미련한 짓만 하는 인간 따위와 동일시 여기는 것이.
역사는 반복된다. 그런데 왜 원숭이들의 역사만 반복되는 것일까? 그들보다 못한 그 버러지들의 역사만이 어째서. 정말 그 손과 뇌를 잘라내고 로케트에 매달려 날아가야만 하는 그 원숭이들의 역사만이 반복되는 것일까? 애초에 원숭이가 아니던 인간이 있었나?
신동엽은 자신이 경험했던 것, 보았던 것, 느꼈던 것, 이 모든 것들로 평가 필요한 사회에 대해 어느때는 거침없이 어느때는 깊은 고심 끝에 연필을 휘두른 사람이었다. 과거의 인물인 신동엽의 그렇게 개인적이면서 시대적인 글은 우리에게는 철저히 과거에 기록과 그 시대의 사람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느낌의 글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마땅하다. 헌데 신동엽을 소개하는 김응교 교수는 그의 글을 "내일의 잠언"이라고 소개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과거 인물의 철저히 경험적이고 시대적인, 이것들을 거스르고 이 문제들에 대해여 도망치지 않으려 노력한 작가의 글이 어떻게 오늘날, 더 넘어가 내일을 위한, 도움을 주는 글이 된다는 말인가? 그 대답은 아주 단순하다. 그 과거의 모든 일이 그가 느낀 모든 개인적인 감정이 미래의 일과 그리고 그 일이 대해 느낄 우리의 감정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희망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신동엽이 겪은 시기, 우리의 입장에서 과거는 반복된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정부의 독재와 4.19민주화 운동, 이에 따른 모든 참사들, 이 사건들을 온 몸으로 느낀 그의 감정이 우리에게는 내일의 잠언으로 다가오고 말 것이다. 이런 개똥같은 역사가 지랄맞게 반복되고 말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인지하고 “역사는 반복된다. 그렇기에 역사를 배워야만 한다.” 따위의 말을 명언으로 받아드리면서도 그 반복은 막을 수가 없다. 이미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타국을 지배하려는 강국의 움직임, 인간이 모든 기술이 결국은 서로를 겨누는 새로운 무기가 되고 마는 것들과 폭력에 두려움 속에 평생을 보내는 인류, 현재도 진행중인 전쟁들, 자신들의 입맛대로 국가를 바꾸려 하는 정부의 움직임, 다 정당을 다 악으로 치부해 버리고 악으로 만드는 정권 싸움, 이 일들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움직임과 아무렇지 않게 묵살하는 정부의 움직임. 이 모든 것이 반복되다 못해 그냥 계속, 단 한순간도 끊기지 않고 모든 삶을 지배한다. 영원한 순환. ”반복, 한 번 다시“이런 조금은 마치 ‘어떤 것이 있다가 잠시 없어진 후에 다시 생기는’듯한 뉘앙스의 단어로는 설명이 안되는 단 한 번도 끊기지 않은 이 원숭이들의 영원하고도 막강한 순환은 아주 절망적이다. 어떤 선인이 나와 진리를 전파해도, 수많은 제자들이 세상 땅끝까지 이르러 전수 받은 모든 가르침을 온전히 전하여도 이런 인간들의 역사는 말그대로 가끔씩 반복된다. 혹은 아주 미미하게. 다 죽이는 원숭이들의 이야기는 아주 두꺼워 절대 끊기지 않는 미친 철 쇠와 같이 모든 인류의 역사와 각 시대의 인간들의 심장을 뚫는다. 그러고는 그들까지 원숭이 놈들로 바꿔버린다.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충동의 행동들이 끝없이 순환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건 그저 인간에게 존재하는 부분이며,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 되는 상태, 이것이 내가 순환이라 정의한 인류의 기본 베이스다. 이 기본은 정말로 원숭이 같다. 오히려 원숭이보다 못하다. 벌레 같은 걸 때주기는 개뿔, 상대 입에 밀어 넣어 억지로 씹게 하는 것이다. 미친 듯이 비참해 져서 원숭이보다 못한 삶을 산다. 그런 하나의 순환을 만든다. 원숭이들의 역사를 보아라 어느 원숭이가 지시 한 마디로 한 민족을 없애는가? 어느 원숭이가 자신을 위하여 국가 단위의 타인을 희생하는가? 원숭이놈들의 역사를 보아라, 그보다도 못한 버러지들의 역사를 보아라. 이 미친 것들이 전부 현실이다. 이것들이 반복될 것임을, 아니 이미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지도 못하고 침대 위 몸을 던지는 원숭이놈들을 보아라.
이렇게 삶을 사니 진화론을 믿지 않고 배기겠나. 이 추한 모습을 변명하지 않고서는 배기겠나. 원숭이처럼 사니까 원숭이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나, 짐승처럼 사는데 어찌 짐승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헌데 인간은 원숭이만도 못하다. 버러지다. 돌은 나락으로 가도 돌이상으로 떨어질 수 없다. 원숭이는 원숭이보다 더 떨어질 수 없다. 그러니 사람은 사람만큼 떨어지고 떨어져 죽어버릴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원숭이 만 못하다는 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버러지로 평가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원숭이는 인간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추하고 추한 모습의 원숭이보다는 버러지를 사용하며 자책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내버려 두면 나락으로 간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조정하면 위대해 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편한 것을 선택한다. 원숭이가 그저 돌담 위에 누워 버리듯이. 그저 침대에 누워 자신 위로 올라오는 그 무거운 몸을 받아내는 것처럼. 반향도, 저항도, 반대도 하지 못하고 이렇다 다 지나서야 회고하고 후회하는 것처럼. 그냥 버러지처럼. 원숭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