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단부단반수기란(當斷不斷 反受其亂)
[요약] (當: 당할 당. 斷: 끊을 단. 不: 아닐 부. 斷. 反: 되돌아올 반. 受: 받을 수. 其: 그 기. 亂: 어지러울 란)
당연히 처단해야 할 것을 주저하여 처단하지 않으면, 훗날 그로 말미암아 도리어 어지러움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결단을 내려야할 때 놓치지 말라는 의미.
[출전] 《사기(史記) 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
[내용] 이 성어는 사기(史記) 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을 끝내면서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司馬遷)이 춘신군을 평하는 말에 나온다.
먼저 춘신군(春申君; 미상 ~ BC 238년)을 살펴보겠다.
춘신군은 전국 시대 말기 초(楚)나라 사람으로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과 함께 전국시대 사공자(戰國公子), 혹은 사군(四君)으로 불린다. 성은 황(黃)씨고, 이름은 헐(歇)이다.
초(楚) 경양왕(頃襄王) 때에 관직에 올랐으며, 진(秦)의 장수 백기(白起)가 초(楚)를 공격해오자 사신으로 진(秦)에 파견되어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을 설득하여 진(秦)과 초(楚)가 동맹을 맺도록 하였다. 이후 태자인 웅완(熊完)과 함께 진(秦)에 볼모로 다시 파견되어 여러 해를 머물렀다. 초(楚) 경양왕(頃襄王)이 병이 들자 진(秦)의 재상인 범수(范睢)를 설득하여 웅완(熊完)을 초(楚) 나라로 탈출시켰다. 얼마 뒤에 경양왕(頃襄王)이 죽고 태자인 웅완(熊完)이 고열왕(考烈王)으로 즉위하자, 재상인 영윤(令尹)이 되었으며, 춘신군(春申君)으로 봉해지며 회수(淮水) 북쪽의 12현(縣)을 봉읍으로 받았다. 초나라의 내정을 쇄신하고 군법, 행정 편제, 법전 등을 정비해 쇠퇴일로에 놓인 초나라를 마지막으로 부흥시키고자 노력했다.
당시 초나라 고열왕(考烈王)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춘신군으로서는 후계자 문제로 걱정을 했다.
그때 조(趙)나라 사람 이원李園이란 자에게 무척이나 아름다운 누이동생이 있어 초나라 왕(고열왕)에게 바치려 하다가 고열왕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전략을 변경하여 춘신군에게 접근하여 그 누이를 바쳐 임신을 하였다. 그러자 그 이원의 누이는 춘신군에게 말했다.
“초나라 왕이 당신을 아끼는 것이 친형제보다 더 합니다. 당신은 이제 20년이나 재상으로 계셨는데 왕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이대로 돌아가신다면 분명 왕의 형제 중에 한 명이 왕위에 오를 것이고 그 형제들 모두 당신을 시샘하고 있으니 그들 중 누가 왕위에 오르더라도 당신에 대해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니 당신에게 재앙이 닥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 제가 임신한 것을 아무도 모르니 저를 초왕에게 바친다면 초왕은 반드시 저를 총애할 것이고 하늘이 도와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당신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이니 초나라는 모두 당신의 것이 되는 셈이 됩니다. 당신이 뜻하지 않은 재앙을 당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좋습니까?”
이에 춘신군이 초왕에게 이원의 누이를 왕에게 추천했다. 초나라 왕도 그녀를 받아 드려 그녀를 무척 총애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이 태어나자 태자로 삼고 이원의 누이동생은 왕후가 되고, 이원도 벼슬길에 올라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리 되면 모두가 행복해 진 듯 보였으나, 이원은 춘신군 입에서 비밀이 새어 나오거나 점점 권세가 커질 것을 걱정해 춘신군을 제거 하고자 했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지 이십오 년째 되던 해에 고열왕이 병에 걸렸다.
이때 춘신군 식객 주영(朱英)이 춘신군에게 말했다.
“고열왕 돌아가시게 되면 섭정을 하거나 초나라를 차지하는 생각지도 않은 복이 올 수도 있고, 이원은 당신이 있으면 권력을 잡을 수 없으므로 당신을 죽여 입을 막는 것이 생각지도 못한 불행입니다. 저를 낭중(郞中)에 임명해 주시면 제가 당신을 위해 이원을 죽이겠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재앙을 막아 낼 수 있는 뜻밖의 인사입니다(臣為君殺李園。此所謂毋望之人也).”
그러나 춘신군은 “그만 두시오. 이원은 나약한 사람이며 나는 그를 정성껏 대접하고 있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소(足下置之,李園,弱人也,仆又善之,且又何至此)!” 라며 주영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로부터 십칠일 후 왕이 죽자, 이원은 주영의 말 그대로 궁궐로 들어와서는 군사를 숨겨 두었다가 궁궐로 들어오는 춘신군을 에워싸고 난도질하여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문 밖으로 던져 버리고, 춘신군의 집안사람도 모조리 죽여 버렸다.
태사공(사마천)은 말한다.
“내가 초나라에 가서 춘신군의 옛 성과 궁실을 보니 정말 웅장하고 하려 했다.
처음에 춘신군이 진나라 소왕을 설득하고 몸을 던져 초나라 태자를 돌아오게 한 것은 얼마나 뛰어난 지혜였던가? 그런데 마지막에 이원에게 당한 일은 늙어서 사리 판단이 어두워진 탓이리라. 세인 말에 ‘마땅히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춘신군이 주영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두고 한 말일까?”
太史公曰:吾適楚,觀春申君故城,宮室盛矣哉!初,春申君之說秦昭王,及出身遣楚太子歸,何其智之明也!後制於李園,旄矣。語曰:「當斷不斷,反受其亂。」春申君失朱英之謂邪?
이하 [네이버 지식백과] 왕승작 [王僧綽]
남조 송나라 낭야(琅邪) 임기(臨沂) 사람. 왕담수(王曇首)의 아들이다. 예녕현후(豫寧縣侯)를 습봉했고, 송문제(宋文帝)의 장녀와 결혼했다. 처음에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의 사도참군(司徒參軍)이 되었다. 문제 원가(元嘉) 중에 거듭 승진하여 상서이부랑(尙書吏部郞)과 시중(侍中)을 거쳐 관리 선발을 관장했다. 원가 30년(453) 문제가 태자 소(劭)를 폐하려 하여 그와 강담(江湛), 서담(徐湛) 등과 논의했지만 오래토록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가 빨리 결단을 내리라고 다그치면서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내리지 않으면 거꾸로 재난을 몰고 올 것이다.(當斷不斷 反受其亂)”고 말했다. 일이 매듭지어지기 전에 소가 황제를 죽였고, 그도 피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