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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성령충만땅에천국
061224 찬송하는 사람들 (눅2:13-20)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지난 12월 1일부터 15일까지 카타르 도하에서 ‘2006 아시안 게임’이 열렸습니다. 그 대회의 MVP 최고 스타는 ‘박태환’이라고 하는 17살 고등학생 수영선수였지요. 그는 자유형 200M, 400M, 1500M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3관왕일 뿐만 아니라 100M에서 은메달을 따고 배영 3종목에서 모두 은메달을 따서 모두 7개의 메달을 땄습니다. 대단한 사건이지요. 그러나 또 하나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20년 전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육상 3관왕을 했던 임춘애 선수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그때 뭐라고 말했냐하면 ‘라면 먹고 뛰었어요.’ 20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주어 졌어요.
금메달리스트들을 보는 눈이 변했어요. 금메달을 따려면 뼈를 깎는 수고와 땀이 그제나 이제나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점이 달라졌어요. 박태환선수가 주는 이미지는 몸짱에다가 얼짱에다가 이어폰을 탁 끼고 물속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음악으로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멋쟁이의 모습, 소위 ‘럭셔리하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수고와 땀은 감추어지고 아주 멋있는 모습으로 그렇게 보고 그렇게 보여 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20년 전 헝그리정신에서 이제는 럭셔리로 이미지가 바뀌었어요. 사회가 그만큼 변하고 있는 것이고 변화된 사회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요구도 바뀌고 있는 것이지요.
언제까지나 시합은 계속될 것이고 금메달리스트들은 계속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뛰는 선수들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 뛰어야 할 것이냐. 겉으로만 들어나는 멋있는 모습이 아니라 거기에 걸맞는 생각이 따라가야 하는 것이지요. 소위 예전에는 국가대표하면 무조건 나라에 대한 충성. 이것으로 족했습니다마는 이젠 더 이상 그런 의식에만 머무르는 시대가 아닌 것이지요. 이제는 뭔가 자발적인 책임의식을 가지는 프로정신이 요구된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요. 저희는 25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원래 유대사람들의 의식 속에 크리스마스는 저녁에 시작하는 거예요. 원래 하루는 저녁에 시작하는 거예요. 저녁시간이 알고 보면 첫 시간이에요. 첫 번 크리스마스, 화려한 트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주 작지만 따뜻한 감동과 은혜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어제 그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현장으로 시공간을 넘어서 한 번 가봤습니다. 도대체 그 천군천사가 나타나 찬송을 했다고 하는데 베들레헴 바깥 들판에서 현장을 목격한 목자들은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뭐, 구름떼같이 많았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어요. 틀림없이 양은 많이 있어도 그것을 지키는 목자는 몇 사람이면 충분하거든요. 아마도 천사의 음성을 함께 들을 정도의 숫자, 또 그것을 듣고 난 이후에 ‘우리 이렇게 하자’ 라고 서로 말하고 함께 내달릴 수 있는 정도의 숫자는 그리 크지 않았을 거예요. 아마 그저 많아봐야 열 명 되었을까요. 그들이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목격자였다는 것이지요. 또, 왜 하나님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목자를 택해서 그들에게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초대장을 보내셨을까요.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유대사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제사장이라든지 바리새인이라든지 서기관들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서 누구보다도 더 박식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인데 그들을 제쳐놓고 목자들을 찾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곤고한 사람들이지요. 그 사회에서 도저히 율법을 지키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지저분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요. 종교적인 울타리밖에 내쳐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망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소망도 뭐 좀 있어야 소망이지요. 소망조차도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헛된 꿈조차 꿀 수 없는,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셨어요.
그러니까 위로와 소망도 진심으로 가난하고 깨어질 때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교만한 사람은 사람이 와서 위로하면 위로받기를 거절해요. 기분 나빠해요. 네가 뭔데 나를 위로하느냐 그래요. 사람이 악하기가 이 정도에요. 성탄절에 선물을 나누지만 부자들에게는 선물하기가 어려워요. 뭘 해야 그 입맛을 맞출 수 있을까요. 그 수준을 맞출 수 있을까요. 자그마한 것도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그 사람이 진정한 부자이지요. 그래 하나님이 곤고한 사람들에게 천사를 보내시는 거지요. 한밤에 빈들이니 얼마나 깜깜합니까 중동 밤하늘이 얼마나 깜깜합니까. 별들이 쏟아지지 않습니까. 자, 그러니 그 한밤중에 빈 들이라고 하는 것은 요즘 유행하는 자동차 극장같이, 하늘을 열고 천군천사가 모든 것을 펼쳐 보이기에 완벽한 무대이지요. 또 하나 한밤중에 빈들에 나와서 추위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자그마한 것도 크게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이지요. 한밤중에 빈들이야말로 정말 처절한 시간입니다마는 알고 보면 주의 영광이 드러나기 직전의 시간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다 잘 살기를 원합니다. 그걸 마다하는 사람은 없지요. 또 모든 일이 잘 될 때 주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아픔이 있고 깨어짐이 있는 시간에 주님을 제대로 만나게 되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이에요. 그래서 혹시 우리와 같이 예배드리는 믿음의 식구들 중에 누가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사업의 부도를 맞았다, 가정이 깨어지는 아픔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런 소식을 들을 때 너무 쉽게 판단하면 안돼요. 좀 기다려 주세요. 뭔가 하나님이 그 가정에 손을 대고 계시구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의 마음에 붓고 계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자, 저들에게 천군 천사가 놀랍고 화려한 찬송의 무대를 펼쳐 보여주었어요. 그랬더니 그들이 반응이 어떠합니까. 천사들이 다 사라지고 나서 ‘빨리 가서 우리가 듣고 본 것이 과연 사실인가 베들레헴에 가서 확인해보자.’ 당장 달려가는 거잖아요. 아마 좀 배운 사람 같으면 도대체 우리가 본 이것이 무엇이냐. 자기의 생각, 자기의 논리,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서 이야기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첫 번 크리스마스의 놀라운 축복을 목자들에게 준 것이지요. 하나님이 그들 앞에 내어 놓은 것을 복잡한 자기 논리를 가지고 판단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 주신 것을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가지고 갈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첫 번 크리스마스를 주신거지요. 자, 이들이 베들레헴에 갔습니다. 두루두루 찾아서 말구유를 찾아 갔습니다. 과연 거기에 가보니 한 아기가 구유에 뉘어 있고 젊은 부부가 그 아기를 둘러서 있습니다.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모습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굳이 목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말씀하셔서 베들레헴까지 가게 하셨을까요. 차라리 그 천사들의 환상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직접 보여 주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우리의 신앙은 두 가지가 필요해요. 마리아는 이미 예전에 천사로부터 아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잉태되는 그런 아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사람의 경험을 넘어선 사건이지만 그것을 받아 들였고 그 결과 자기 뱃속에 생명이 잉태되는 것을 느끼고 체험했습니다. 신앙의 주관성이지요. 자기 고백과 자기 체험이 중요해요. 그러나 또 하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는, 간접적으로 듣는 신앙의 객관적인 증거들 또한 중요해요. 이번에 마리아만 들은 것이 아니라 목자들이 와서 그들이 듣고 본 것을 말하고 있어요.
이와 같이 신앙에 두 가지가 필요해요. 그래서 여러분, 혼자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할 수 있어요. 그런 습관을 갖는 건 아주 훌륭한 거예요. 그러나 계속 그러기만 하면 안돼요. 이런 공적인 예배에 같이 나와서 예배의 규범을 따라서 함께 기도하고 다른 사람이 기도하는 것을 들으면서 내 마음으로 같이 기도하고 같이 찬송하고 말씀을 같이 듣고 은혜를 같이 나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혼자 떨어져서 신앙생활하면 다 이단이 되기 쉬워요. 그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에요. 우리가 다 허물이 많고 부족해요. 심지어는 좀 보기 싫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런 것을 핑계로 교회를 떠나가면 자기 손해에요. 그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연약하지만 함께 모여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를 따라 예배를 드릴 때에 은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일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자, 여기 모였습니다. 여기 지금 갓난아이가 구유에 누워있어요. 그 부모들을 보니 행색이 초라하기 그지없어요. 가난해요.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상황을 보면 소망도 없어요. 정치적 억압도 있어요. 그런데 목자들이 와서 말합니다. ‘오늘 이 밤에 우리가 방금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오늘 이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구원의 사건이다’ 그것을 듣고 다시 아기를 봅니다. 이렇게 가난한 모습으로 형편없는 모습으로 내 품에 안긴 이 아기가 과연 메시야일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지만 이제 목자들이 말하는 그 하늘의 뮤지컬을 듣고 나서 다시 아기를 보니까 그 안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고 소망이 있고 삶을 살아갈 새로운 용기가 주어지는 거지요.
여러분, 어떤 게 현실일까요. 말구유에 놓여있는 아기가 현실입니까. 아니면 조금 전에 목자들이 보았다는 밤하늘에 펼쳐진 천상의 뮤지컬이 현실입니까. 이게 우리 신앙이에요. 우리 신앙은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 두 가지가 다 현실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한발은 몸의 현실에 내딛고 또 한발은 영적인 현실에 내딛고 두 가지를 다 같이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를 포기한 사람은 날개가 하나 부러진 사람이에요. 제대로 날 수 없는 사람이에요. 두 날개가 우리에겐 다 필요한 거지요. 두 가지가 우리에게는 현실입니다.
또 하나 여긴 이런 의미가 있어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먼저 믿고 들은 사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도록 하지 않으셨어요. 설령 너무나 갈급한 가운데 하나님을 부르짖다가 잠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고 어떤 환상을 볼 수도 있습니다마는 늘 그렇게 하시지는 않아요. 그것은 잠깐 우리로 하여금 교회공동체로 들어올 수 있는 발판을 그렇게 마련해주신 거예요. 먼저 믿는 사람들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도 신앙을 갖도록 말이지요.
오늘 보세요. 천사가 하늘의 비밀을 목자들에게 말했고 천사들은 사라졌어요. 이제 목자들이 듣고 본 바를 가지고 가서 마리아에게 이야기해요. 또 목자들의 반응을 보세요. 천사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 천상의 뮤지컬을 다 본 다음에는 호기심이 불일 듯 일어났어요. 그래서 우리도 한 번 가보자. 가서 믿어지건 믿어지지 않건 그저 듣고 본 대로 말합니다.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그마한 믿음을 부여잡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돌아갑니다.
신앙은 이렇게 자라나는 거예요. 누군들 단 한번 하나님을 만났다고 신앙이 자라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마치 갓난아기가 태어나서 자라는 이치와 똑같아요.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 그 말씀에 대해서 생각하고 때로는 그것을 가지고 갈등하고 그것에 의문을 던지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 간접적인 신앙의 고백이 은혜가 되면서 우리의 믿음은 날마다 자라가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그러므로 이제 신앙의 선배들을 통하여 믿음을 받아들였다면 그것을 내 안에서 잘 일으켜 세워서 큰 나무를 이루어 다시 씨앗을 만들어서 내 자녀들에게 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지요. 오늘 보니 하늘의 뮤지컬은 잠깐 사라졌습니다마는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깊이 듣고 마음에 지키어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나중에 누가복음이 기록되었을 때 도대체 누가라는 의사가 이 사건을 누구에게 들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전설에 의하면 마리아는 오래도록 살았으니까 마리아 본인이든지 혹은 마리아로부터 들었던 사람을 다시 만나서 아기 예수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지요. 그것이 오늘 성경에 기록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자, 첫 번째 크리스마스예요. 이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역사를 통해서 흘러흘러 내려오다가 드디어 조선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에 들어옵니다.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우리나라에서 크리스마스를 지키게 되지요.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예배드리면서 자그마한 선물을 교환했어요. 그러다가 1887년에 새문안교회 또 정동감리교회가 세워 지면서 한국 사람들도 성탄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어요. 기록에 이런 것이 나옵니다. 1894년 그러니까 선교사들이 들어온 지 채 10년이 되지 않았지요. 노블선교사 부부가 자기들에게 말을 가르쳐주는 어학선생을 통해서 ‘우리가 성탄 파티를 오늘 저녁에 열 터이니 동네사람들에게 당신이 좀 알려주시오.’ 그리고 과자와 여러 가지 음료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밤에 하기로 했는데 글쎄 낮부터 사람들이 몰려든 거예요. 그 추운 겨울에 떨면서 밖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안 되겠다. 이따가 밤에 시작하려고 했는데 이거 도저히 안 되겠다.’ 온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았어요. 아직도 이 나라사람들은 뭐 자그마한 일만 있으면 그냥 구름떼처럼 몰려드는데 백 년 전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죽 했겠어요. 그 집 앞에 가득 모인거지요. 그래 다 들어오라고. 거실에 하나 가득 애들과 부녀자들이 포개 앉았습니다. 한 선교사가 아직도 답답한 조선말을 가지고 첫 번째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전해 주었어요. 그러고는 ‘기도 합시다.’ 기도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머리를 숙이고 기도해요. 다 끝난 다음에 과자를 나누어 주고 음료를 주자 서양과자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좋아했어요. 이제 다 돌려보냈어요. 한바탕 일을 치르고 선교사 부부가 피곤해서 저녁밥을 먹고 숟갈을 놓는데 밖에서 와글와글 하는 소리가 들려 내다보니까 아, 이번에는 진짜 약속시간에 맞추어서 온 사람들이 마당에 하나 가득 모인 거지요. ‘안 되겠구나.’ 다시 문을 열어서 안에 들여서 똑같이 다시 한 번 했던 거지요.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으로는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남긴 글에 ‘오늘 사람들을 초청해서 파티전도를 했습니다. 오늘 이 일을 통해서 저들의 마음속에 믿음의 씨앗이 심겨진 줄 믿습니다.’ 어설프게 들었지요. 뭘 알았겠어요. 정말 우습지요. 복음은 그렇게 시작된 거예요.
여러분, 오늘 밤에 성탄축하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아이들과 다같이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또 이어서 새벽송을 돕니다. 그때 여러분은 과자를 준비해 주셔야 돼요. 우리가 새벽송을 집집마다 돌지는 못합니다. 그저 몇 군데 모임장소를 정해놓고 그곳을 돌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예배를 마치고 가까운 곳으로 또 아는 분이 있는 곳으로 가셔서 잠깐 기다려 주시면 우리 새벽송 팀들이 가겠습니다. 여러분이 과자를 이왕이면 좀 푸짐하고 넉넉하게 한보따리 준비했다가 주세요. 마치 백 년 전에 선교사들이 그러했듯이 여기 어린이전도협회 선교사님들이 나와 계셔요. 그분들이 현지인 아이들을 위해서 파티전도를 합니다. 마을마다 가서 합니다. 파티전도를 하면 이슬람 아이들도 다같이 모여 들어요. 꼭 백 년 전 우리 한국에서 일어난 그 일이 오늘 이 밤에 재현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어설프게 선교사들에게 이렇게 들었지만 놀랍게도 채 5년도 지나지 않아 그 당시 선교사들이 발행한 기독교신문에는 어느 한 교회의 크리스마스이야기가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1898년 성탄절을 지킨 인천 담방리교회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성탄일에 인천 담방리교회에서 남녀 교우들이 열심히 연보한 돈이 4원 50전인데 처음으로 십자가를 세우고 등 36개를 십자모양으로 달고 교회당 문 위에 태극기를 세웠으니 남녀 교우 합 54인이 모였는데 전도 듣는 사람은 200여 명이요, 구역장 이근방씨가 기도하고 권사 옥정채씨가 목사 조원시씨를 대신하여 (감리교 선교사 존스 선교사를 우리식 표현으로 조원시라고 하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2장 1절로 24절까지 읽고 애찬을 베풀며 하나님 성자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을 설명하는데 남녀 교우 외 구경하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
이것이 100여 년 전 우리 한국에서 있었던 초기 크리스마스지요. 여기 보니 성탄헌금을 드리고 십자가를 세우고 이건 복음을 의미하고, 또 등을 36개 달고, 왜? 고종황제가 즉위한지 36주년이 되니까 그 다음해는 37개 등을 달았어요.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까지 교회에서는 등을 달았어요. 새벽송 팀들은 등을 들고 다녔어요. 이게 역사와 전통이 있었어요. 언제부터인가 등은 다 사라졌어요. 원래는 불교의 연등행사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거지요. 오늘 기쁜 날이다 하고 등을 밝힌 것이지요. 몇 년 전만해도 과자 얻어먹는 재미에 모여 들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스로 모여서 대표로 구역장이 기도하고 권사는 말씀을 읽고 이렇게 함으로 예배를 드린 거지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태극기를 걸고 왕을 기억하는 마음으로 등을 걸고 그리고 복음을 상징하는 의미로 십자가를 걸고 이렇게 시작한 것이지요.
원래 유대 사람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그 지방의 악사가 찾아와서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 그들의 풍습입니다. 그런데 말구유에 놓인 아기를 위해서 노래 불러줄 악사가 없었어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천군천사를 보내어 하늘의 찬송을 보여주신 거지요. 이제 그것을 보고 들은 목자들이 와서 불러준 것이지요. 그 밤에 노래를 불렀던 전통이 새벽송이 된 거예요. 그러니 새벽송을 가볍게 알지 마세요. 가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받아들이는 분들도 그래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집에 오셨다.’
백 년 전 머나먼 조선 땅에 와서 잘 알아듣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헌신했던 선교사들같이 이제 우리들도 찬양해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바 이 소중한 은혜를 이웃들에게 나눠야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기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첫 번째 크리스마스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성탄절은 지켜져 왔고 이천 년 흘러흘러 오늘 이 밤까지 왔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무지하고 어리석고 허물이 많지만 먼저 말씀을 들은 그 한 사람의 깨끗한 순종을 통하여 생명은 피와 같이 흘러흘러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어 오늘 온 세계를 뒤덮는 바닷물이 된 것 같이, 오늘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하며 우리에게 주신 이 소중한 생명을 함께 나누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