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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62
5월16일 [주님 승천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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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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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hVNqKyFbqI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78626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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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승천 사건 앞에서 사랑의 눈, 희망의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부활에 이은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 이 모든 사건들은 인류 역사 안에서 전무후무했던 특별하고도 기상천외한 대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 기이한 사건이었기에 목격자들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 없이, 어린이다운 전폭적인 의탁 없이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 각자 앞에 던져진 하나의 큰 과제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는 우리 각자의 시선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사랑의 눈, 희망의 눈이 필요합니다.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어린이다운 신뢰심이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와 함께, 교회 공동체 안에서 깨어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승천 앞에 뭐가 뭔지 제대로 파악이 안 된 우리들, 어리둥절한 표정 짓고 있는 우리를 향한 외침은 날카롭기만 합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이제 하늘이 아니라 땅, 우리 모두가 아등바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라는 말입니다. 이제 이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가르침과 업적을 찬양하며 인간 세상 안에서 그분의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말입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라는 말입니다.
승천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다시 한번 스승과의 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지난번 이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이별입니다. 지난 번 헤어짐이 고통과 슬픔의 이별, 엄청난 상처와 충격, 큰 두려움을 가져다준 이별인데 비해, 이번 이별은 축제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영영 이별, 이제 떠나가면 다시 못 뵐 마지막 작별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을 전제로 한 잠깐의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첫 번째 이별 때의 분위기가 기억납니다. 떠나가시는 예수님께 대한 예의도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목숨이 두려웠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후환이 두려워 멀리 멀리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비겁하게 골방에 숨어서 전해오는 소식을 듣곤 했습니다. 제자로서의 도리를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철저하게도 다른 분위기입니다. 예수님 부활 체험 이후, 눈이 밝아진 제자들, 늦게나마 귀가 뚫린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제야 드디어 그분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이었기에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기쁜 얼굴로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스승께서 자신들을 떠나가지만, 제자들은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무엇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진리 말입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그 어떤 두려움도, 죽음조차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떨어트려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상황에서나 스승께서는 자신들과 함께 하시리라는 사실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더 이상 외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소외시킨다할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내 일생 전체에 걸쳐 함께 해주실 것이니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 드리는 일, 그것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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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cuQiScyw3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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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승천이 말해주는 비밀 :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있다>
오늘은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신 날입니다. 이는 결국 우리가 향해야 할 방향이 이 세상이 아닌 하늘이란 상징적 의미를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 복음이란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하늘로 승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탈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개인은 자아로부터 탈출하고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곳은 하늘이지,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악마의 지배 아래에 있어서 우리는 악마의 나라를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탈출하고 이웃도 탈출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5,19)
이 세상이 악마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면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여 아버지 오른편에 앉으실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이란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만들 수 있다는 소식이 아니라 이 허물어져 가는 세상에서 탈출할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만이 목적인 사람들은 악마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 세상을 파괴하는 주범이 되게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환경 단체는 자연을 살리자는 좋은 취지로 활동합니다. 그러나 자칫 이 세상이 전부인 양 활동한다면 그 환경 단체도 악마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고, 어쩌면 세상이 망하게 만드는 선봉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다가 우리가 버리는 플라스틱으로 죽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환경 단체가 그렇게 주장하고 대부분 사람이 그 말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다거북의 코에서 빨대를 제거하는 동영상과 플라스틱 쓰레기를 먹고 죽은 고래, 남한 면적 14배의 쓰레기 섬과 같은 동영상을 보며 우리는 진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플라스틱 빨대를 줄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바다에 버려져 바다짐승을 괴롭히거나 죽이는 플라스틱 빨대는 바다에 버려지는 쓰레기의 0.03%에 불과합니다. 수치상으로는 당장 그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수준입니다. 더 중요한 쓰레기가 있는데, 버려지는 양이 모든 쓰레기의 46%를 차지하고, 이것이 바다의 물고기를 죽이는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어부들의 ‘그물’입니다. 그물에 의해 수많은 물고기가 학살당하고 또 그렇게 버려진 그물 때문에 물고기와 바다 생물이 죽습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씨스피라시’에서 감독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다 생물이 사라지는 진짜 이유는 기후 변화 때문도, 해양 오염 때문도,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업 때문이죠. 하지만 그 누구도 이야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플라스틱 때문에 죽는 바다거북은 연간 1천 마리로 추산합니다. 그러나 그물에 걸려 죽는 거북은 연간 25만 마리입니다. 그런데 환경 단체는 바다를 살리자고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자고만 말합니다. 하루 동안 바다에 새롭게 쳐지는 그물은 지구를 500바퀴 돌릴 수 있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또 얼마나 많은 그물이 바다에 버려지고 있을까요?
일본은 고래잡이를 합니다. 그물망에 돌고래를 가둬놓고 무자비하게 학살합니다. 우리가 참치회라고 많이 먹는 참다랑어는 이제 거의 멸종 위기에 놓였습니다. 게다가 상어의 지느러미만 잘라내고 다 버립니다. 대부분은 샥스핀 요리를 위해 중국에 수출됩니다. 1시간에 1만 마리에서 3만 마리의 상어가 죽고 있습니다. 상어가 사람을 죽이는 숫자는 1년이 10명 정도입니다.
이렇게 바다의 포식자들이 사라지면 바다 생물은 멸종하게 됩니다. 상어가 사라지면 그 밑의 물고기들이 급증해 먹이 부족으로 멸종하게 되고 그러면 그 밑의 물고기들이 또 그렇게 되며 그다음에는 물고기들의 배설물로 사는 바다 식물들도 그렇게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1분마다 바다에서는 2조7천억 마리의 물고기가 잡히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2048년에는 바다에 어떠한 생물도 살지 못하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고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전기차로 바꿔 타고 탄소를 줄인다고 해봐야 바다의 해조류나 바다 자체가 잡아놓는 탄소량에 비하면 새 발의 피와 같습니다.
결국, 바다가 죽으면 세상도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다의 30% 정도는 어획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실제로 0.5%만이 보호되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환경 단체들이 계속 플라스틱을 줄여야 한다고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해양 환경을 위한 환경 단체는 그 자금을 어업 협의회에서 지원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환경 단체들은 자신들이 받는 돈 때문에 세상이 이런 더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출처: ‘당신이 알고 있는 바다 오염에 관한 진실은 모두 틀렸다’, 유튜브 채널, ‘엉준’]
이 세상이 악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환경을 통해 세상을 살리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리며 그 속에서 안위를 누리려는 마음이 있는 이들은 좋은 뜻으로 활동하고 있더라도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좋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이 목적인 이들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세상에 해악을 끼칩니다.
우리 교회도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수백 년 갈 것 같은 커다란 건물을 짓고 영원할 것 같은 단체를 만들고 세상에 오래 머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당장 내일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만 매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이유는 이 세상의 운명을 악의 손에 넘겨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다에 가라앉는 배와도 같은 이 세상에서 탈출하는 법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탈출하는 방법은 세상으로부터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배를 탈출하려면 배를 버려야 합니다. 배를 버림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죽는 것이 두렵다고 배만 꽉 붙들고 있다가는 진짜 죽습니다.
주님 승천은 우리 삶이 ‘탈출기’여야 함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앞서시어 홍해를 건너신 것이 승천의 의미입니다.
이 세상은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허물어지는 땅에다가 커다란 건물을 지어봐야 무엇하겠습니까?
주님 승천은 이 세상이 허무하고 악의 지배 아래에 있어서 빨리 탈출해야 하고 그 방법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임을 명확히 보여주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 집착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주님 승천은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의 상징입니다. 악마의 무게로 가라앉는 이 세상에서 오래 머물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1요한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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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은 마침내 제자들의 곁을 떠나 당신이 취하신 인성이 함께 하느님의 영광으로 들어가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다. 이제 우리는 천국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상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도행전은 성령 강림을 예고하고 있다.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신다. 교회는 이 성령 안에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성령을 보내주시는 분은 바로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 승천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욱 직접적으로 친밀하게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바로 성령 안에서 가능하다.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은 왕권과 권능을 가지신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계획안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안에서 실현될 것이다. 즉 구원의 충만성은 이제 교회의 선교사명을 통해 완전하게 표현되고 교회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실현한다.
복음: 마르 16,15-20: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선교사명”을 주신다. 이로써 교회는 선교활동을 통해 구원의 중재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 교회는 삶으로 증거가 돼야 한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지렁이였고 말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만민에게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 인류에게 증언하였다. 사도들이 이렇게 파견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으며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기의 창조주를 알아 뵙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복음 선포는 모든 나라와 도시에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섭리는 온 우주를 통틀어 펼쳐지고 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9절) 부활절에는 주님의 부활이 우리 기쁨의 이유였지만, 이제는 그분의 영광으로 들어가심 때문에 기뻐한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고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부활하신 후 당신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완성되기까지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기 위해 육체적 현존을 끝내셨다. 여기서 오른쪽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오른쪽이라는 것은 복됨의 의미이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복됨 속에는 오른쪽만 존재한다. 이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제자들은 사방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20절). 예수님 부활의 참된 목적은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과 통치권이 드러난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복음 선포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승리자이심을 실제로 드러내야 한다(2코린 2,14). 그리스도께서는 천상에 오르시어 아버지 오른편에 영광을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천상에 오를 수 있는, 즉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내는 축제는 기쁨과 기다림의 축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바로 우리들의 고양(高揚)을 당신을 통해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닮음으로써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요한 16,7)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적을 행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한다. 주님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따를 수 있는 온갖 악을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주님의 말씀대로 독을 마셔도 죽지 않을 것이며, 마귀를 쫓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복음 선포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이기고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용감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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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주교회의 사무국장)]
주님의 승천은 주님께서 떠나심과 동시에 우리에게 새롭게 찾아 오신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늘 위 몇 미터까지 올라가셨을 때 승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100미터? 아니면 1,000미터인가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면 될까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상상력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수치로 측정하려고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어느 공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늘’이라는 장소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눈앞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화와 부활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듯이 부활과 승천 또한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고 떠나심이 아니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는 주님 약속의 이행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분을 믿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든 시간에 대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승천의 또 다른 의미는 우리에게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보고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땅의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살고, 세상의 기준으로 나의 삶에만 집중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다하고 복음을 전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홍보 주일입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그 구원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산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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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9-20)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의 승천’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50-5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사도 1,9)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는 말은, ‘제자들이 직접 본 일’을 증언한 말이고,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 계시는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1) 예수님께서 오르신 그 ‘하늘’은 어디일까? 어디에 있을까? 그 ‘하늘’이 우리가 늘 바라보는 그 ‘하늘’은 아니라는 것, 또 예수님께서 대기권을 지나서 지구 밖의 우주 공간 어딘가로 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르신 그 ‘하늘’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은 어떤 특정 공간이나 장소로 가신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 영적인 체험일까, 환시일까?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보았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 일은 실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일은 하느님의 신비에 속하는 영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2)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은 ‘모든 곳’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모든 곳’으로 가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의 승천은 성령을 통하여 모든 곳에 계시기 위해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동안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이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라고 말합니다.(사도 1,11) 이 말은, “왜 하늘만 쳐다보느냐?(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땅을 보아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보려면, 또는 만나려면 하늘이 아니라 땅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자기가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을 예수님의 승천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옆에 있는 이웃 안에서 예수님을 보아야 하고, 만나야 합니다. 사람이 있는 그곳에 예수님께서 계시고,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3)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모든 곳에 계시는 것으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신 일”이 승천이기 때문에, 승천은 ‘떠나심’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계심’입니다. 사도들은 바로 그것을 믿었고,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본 뒤에,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루카 24,52) 만일에 사도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떠나심’으로만 생각했다면, 그들은 크게 슬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떠나심’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계심’이라는 것을 알았고, 믿었기 때문에 크게 기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이 약속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지켜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라고 표현했습니다.(마르 16,20)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일하는 생활입니다.
4)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서 동시에 우리의 부활도 믿고 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믿으면서 동시에 우리의 승천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자리를 마련하면’이라는 말은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이 모두 이루어지고 나면’으로 해석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승천은 우리만 바라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서 간절하게 바라시는 일입니다.
5) 승천해서 예수님과 함께 살기를 바란다면 ‘지상에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려오셨던 그분이 바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고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에페 4,9-13)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에페 4,15) 실제로 어떤 직책을 맡았든지 안 맡았든지 간에,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 일치를 통해서 예수님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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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장례미사를 할 때입니다. 자녀들이 홀로되신 어머니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남아계신 어머니에게 효도하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몫까지 다해서 어머니를 모시겠다는 자녀들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예비자 교리를 받았고, 성당에서 봉사하면서 어머니가 외롭지 않도록 함께 하였습니다. 그 뒤로 저는 장례미사를 할 때면 당부의 말을 하였습니다. 홀로되신 어머니와 아버지께 효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님께서 신앙 안에서 사셨으니, 가족들도 신앙 안에서 살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아버님은 10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고, 작년에 어머니도 아버지가 계신 하느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서 남아있는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먼저 자녀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평생 신앙 안에서 사셨으니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직자와 수도자인 자녀들이 맡겨진 소임에 충실하기를 바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예수 승천 대축일’입니다. 비록 삶의 길이는 짧았지만 달릴 길을 다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이어 달리기 선수처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겨 주십니다. 예수님의 수난, 부활 그리고 승천은 제자들에게는 추억 만들기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추억을 만들어야 하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저 하늘만 바라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문하는 추억은 3가지입니다. 첫째는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분열과 갈등을 넘어, 시기와 질투를 넘어서, 두려움과 걱정을 넘어서 참된 기쁨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참된 기쁨과 평화를 주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기쁨을 추억으로 만들어 가라고 하십니다. 둘째는 마귀를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마귀는 집요하게 우리들의 영혼을 찾아옵니다. 때로는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은 마귀가 자주 사용하는 미끼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게으름으로 유혹하기도 하며, 탐욕과 욕정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셋째는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합니다. 육신의 병을 치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교만의 병에 걸린 사람, 분노의 병에 걸린 사람, 시기의 병에 걸린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영혼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혼이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는 것이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앞으로도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신념과 희망은 우리를 미래라는 항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란 지금 현재를 옹골차게 딛고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승천은 좌절과 두려움에서 희망과 신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야하겠습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변화된 삶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승천’입니다.
교회는 예수 승천 대축일을 ‘홍보주일’로 정하였습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미주지역을 다니면서 신문을 홍보하는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작년에는 코로나19로 홍보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백신을 맞고 있지만 올해도 신문홍보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5년 전입니다. 은경축을 지내면서 글을 모아 ‘사제생활 할 만하십니까?’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원하시는 분에게 신청을 받았고, 신청하신 분들에게 나누어 드렸습니다. 예전에도 읽었던 책을 인터넷을 통해서 신청을 받아 나누어 드렸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신청해 주셨고, 기쁜 마음으로 책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인터넷을 통해서 신문구독 신청을 받고 싶습니다. 미주지역에서 신청하시는 분들에게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화번호, 주소, 이름을 메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도움을 주시면 제게는 코로나19를 이길 수 있는 큰 힘이 될 겁니다. 저와 직원들은 매주 후원회원과 독자를 위해서 미사 중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 E mail : peacetimes9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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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변종찬 마태오 신부님]
<주님의 승천과 희망의 하늘>
오늘 제1독서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사도 1,9)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떠나실 것을 이미 예고하셨지만, 승천 광경을 목격하는 제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이상 자신들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고, 더 이상 자신들의 손으로 만질 수 없다는 사실과 더 이상 자신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 사실을 사도들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주님께서 가신 곳, 즉 하늘만 유심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진정 그들에게 있어 하늘은 현재의 좌절과 불안의 감정을 선사하는 곳이요, 예수님과 함께 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입니다. 또한 희망 없는 미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던 이를 떠나보내고 그 자리에 서서 그가 간 길을 바라보면서 함께 나눈 시간과 장소를 떠올리며 행복에 잠기지만, 더 이상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지 않다는 서러움에 눈물짓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제자들에게 있어 하늘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의 투사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에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라는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의 질문은 덧없이 하늘만 바라보던 사도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예수님 승천의 의미와 그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라는 말씀은 하늘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장소로 변화됨을 가리킵니다. 때문에 더 이상 공허함의 장소가 아니라, 역동적 희망의 장소가 된 것입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그것은 눈물로 점철되지 않고 오히려 얼굴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시간입니다.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시간이며, 더욱이 그가 부탁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더더욱 열과 성을 다해 그것을 지켜야 할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라고 승천하시기 전에 말씀하십니다.
또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라고 부탁하십니다.
이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승천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온 세상 사람들에게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에서 우리는 그분을 증거해야 하며 우리의 구체적 현장 안에서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을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는 하늘, 그래서 그분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만나는 장소로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기 어렵다고 느껴질 때, 마음이 지쳐 성경을 읽어도 감흥이 없고 기도하기조차 싫을 때 하늘을 바라봅시다.
하늘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희망 속에 기뻐하게 해 줄 것입니다(로마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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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교구 최성우 세례자 요한 신부님]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마르 16,20)
오늘은 주님승천대축일입니다. 사도행전의 시작부분인 오늘 제 1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넋을 잃었습니다. 그분은 점점 작아져만 갔고, 결국 구름에 가려 사라져 버렸습니다. 제자들은 다시금 ‘스승의 부재’를 떠올리며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안 계셨던 그 사흘 동안 그들이 겪었던 상실감과 두려움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자신들의 스승이며 희망이신 예수님을 잃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방황했었습니다.
문을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다락방은 아래층 방보다는 안전했습니다. 세상이 무서웠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만큼 ‘스승의 부재’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남의 기쁨도 잠시 주님이 떠나가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체념하려고 했던 순간,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방황하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난 제자들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짧지만 엄청난 이별의 고통을 체험하고 다시 뵙게 된 예수님이었기에 다시는 헤어지지 않으리라 다짐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 곁을 떠나 승천하셨던 것일까요? 제자들도 얼마나 황망한지 그저 한없이 하늘만 쳐다보고 두 다리가 얼어 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이 전해주고 있는 예수님의 승천 일화는 제자들과의 ‘헤어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승천은 인간사에서 흔히 체험하게 되는 ‘관계의 단절이라는 의미에서의 이별’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성숙한 관계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지 않고 제자들 곁에 영원히 머물러 계셨다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셨을까요? 사도행전과 서간들이 전해주는 바처럼 제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초대교회 신자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았을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승천하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면 그들에게는 편안함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없었다면 제자들 스스로 일어서고, 걷고, 뛰어가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스스로 일어 설 수 있도록 묵묵히 곁에서 지켜보는 부모의 사랑처럼 주님께서는 제자들 곁을 떠나가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마르코 16,15)”하라는 사명을 주시면서 그들과 더 깊이 하나가 되셨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코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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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창신 이냐시오 신부님]
<하실 일을 다 하시고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
어렸을 때 극장에서 슈퍼맨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하늘을 날고, 한 손으로 자동차를 들어 올리고, 못하는 게 없는 영웅. 하지만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이를 극복하고 마침내 지구를 지켜낸 주인공.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지구를 바라보며 홀로 고요하게 편안하게 하늘을 납니다. 어린 저는 영화가 끝난 아쉬움과 영웅에 대한 그리움으로 애틋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무한한 하느님의 존재,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정의를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러 가르침과 표징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하느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당신의 삶을 통해 증명하신 그분은,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고 충분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당신 역할을 마치신 그분은 육의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으시고 본래 계셨던 하느님의 곁으로 가십니다.
승천은 예수님과 제자, 예수님과 세상의 이별을 뜻하기는 하지만 믿음과 기다림, 복음 선포의 사명을 돌아보게 합니다.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오르신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길은 믿음입니다.
과연 우리는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만으로 어떤 존재나 사실을 분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감각은 더욱 자극적인 것을 원하고, 오히려 더 의심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메마르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감각으로 만날 수 없는 분이기에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는 더욱 자유롭게 그분과 교감할 수 있습니다.
승천은 또 다른 기다림의 시작입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던 그분은 엄중하면서도 자상한 심판자로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떠나심, 그리고 기다림, 또 다른 만남은 자세히 살펴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가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기다림과 만남의 신비를 이해하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기다림의 자세로 참된 예수님을 만나고, 그 만남의 기쁨으로 이웃과 이웃의 아픔을 함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의 삶을 살고, 전할 때 여러 가지 표징으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전혀 기쁨이 없고 기쁨의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이웃들에게 기쁨을 전하는 일은, 우리를 좌절하게 하고 무력하게 하기도 하지만, 그분의 약속을 믿고 다시 일어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상의 시간이 끝났지만 떠나도 함께 하신다는 그분이, 더욱 듬직하고 가깝게 느껴지고 자랑스러운 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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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오늘의 전례는 환희로 가득 차 있습니다. <화답송>은 승리자이신 하느님께서 환호소리 드높은 가운데 성전에 오르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백성 너희는 손뼉을 쳐라. 기쁜 소리 드높이 주님 부르라. ~노래하라, 노래하라, 하느님께 노래하라, 고를 타며 우리 왕께 노래를 불러라.”(시편 46,2-7)
이처럼, 승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떠나시지만, 영광을 입으시어 왕으로서 성부 곁에 좌정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이는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간성이 그분과 함께 영광 중에 승천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의 승천을 암시해줍니다. 이에 관해 레오 교종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를 위한 고양이요, 앞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자리하신 거기에는 그 지체인 우리를 위한 희망이 있다. ~오늘 우리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확언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상에 들어간 것이다.”(예수승천강론)
이에 관해서, <본기도>도 다음과 같이 경탄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우리의 성장이 촉진되며, 또한 머리이시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이 올라가신 그곳으로 지체인 우리 희망도 따르오니,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기쁨에 용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드리게 하소서.”
또한, 이를 <감사송>에서는 아주 훌륭하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영광의 왕이 되신 주 예수, 죄와 죽음의 승리자로 개선하시어~우리의 으뜸이 되시고 머리가 되시어, 앞서 가시면서 당신 지체들인 우리도 당신이 가신 데로 따라가게 하셨나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천상에 오르심으로써,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광 중에 천상에 오를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한편, <제1독서>는 베일 속에 가려진 신비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며,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해 보다 깊은 인식을 요청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어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이지를 알게 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여러분에게 알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에페 18-23)
그리고 <복음>의 <첫째 장면>은 “복음전파”의 사명과 그에 따른 표징을, <둘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심을, <셋째 장면>은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의 복음전파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첫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하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이제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단지 복음 선포의 명령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 따르게 될 표징도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
이는 새 창조로서의 복음 선포입니다. 그야말로, 복음은 사물들의 질서 전체를 전복시키는 힘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마음은 완전히 바뀌게 되고, 창조의 구조자체를 새로운 관계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마르 16,19)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부 오른 편에 앉으심으로써 취하신 왕권과 권능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의 통치와 권능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에페 1,20-22)
<셋째 장면>에서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고 말씀하시면서,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의 명령에 순명함을 말해줍니다. 이는 특별히 승천과 관련하여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승천의 참된 목적이 바로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임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와 권능을 복음 선포와 성령의 선물을 통해서, 교회와 세상 안에 실현시키게 됩니다.
이처럼, 승천은 주님께서 멀리 가버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심임을 말해줍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때와 시간의 제약 없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승천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시고, 우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동행하시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4-15)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늘만 쳐다본다고 해서 하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이 바로 그분의 동행으로 하늘이 열리는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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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주님께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주셨다.”(마르 16,20)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면서도 결코 홀로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너무도 겸손하신지라 저희의 도움을 받아 일하시기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당신의 소중한 파트너가 되게 하소서.
당신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하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하게 하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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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16,19)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는 복음 선포의 사명을 위해 애쓰는 우리 모두와 가톨릭 신문 등 홍보 매체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1,11)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맡겨주신 사명은 죄인들의 구원이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의 구원을 위해 땀 흘리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께 주어진 이 모든 일을 마치시고 하늘로 오르십니다. 이 기쁨이 얼마나 크실까? 그리고 이것도 부족해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십니다.
모든 사명을 이루시고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 선포의 사명을 완수하고,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 신자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 선포의 사명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먼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1테살5,16-18)
내가 먼저 복음이 되고, 말과 행동으로 이 복음을 전하는 멋진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저희를 들어 높이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기쁨에 가득 차 감사의 제사를 바치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 나라에, 그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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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 편히 오르소서>
마르코 16,15-20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승천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주님, 편히 오르소서>
주님
편히 오르소서
당신의 사랑
어느 누구도
어느 무엇도
빼앗을 수 없게
제 마음 깊이
새겨주시고
주님
편히 오르소서
당신의 열정
제 스스로
식힐 수 없게
제 심장 뜨겁게
타오르게 하시고
주님
편히 오르소서
당신의 기쁨
온 누리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나눠지도록
저를 고이 남겨두시고
주님
편히 오르소서
오르심은
떠나심이 아니라
늘 새로
머무르심임을
날마다
깨닫게 하시고
주님
편히 오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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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캐리어’(Carrier) 하면 생각나는 전자제품이 있나요? 어떤 사람은 여행용 가방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더 유명한 것은 ‘에어컨’으로 유명한 상표입니다. ‘캐리어’는 1902년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라는 엔지니어가 현대적인 에어컨을 발명하면서 세운 회사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에어컨을 만들었을까요? 사실 그의 직업은 인쇄소 엔지니어였습니다. 인쇄 기계에 문제가 생기면 그가 달려가 고쳤습니다. 그런데 종이가 출력되면서 구겨지는 현상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기계 자체에 특별한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그래서 그 이유를 살피다가 인쇄소의 높은 습도 때문에 종이가 구겨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그는 습도와 온도를 낮추는 기계를 만들었지요. 이것이 바로 지금의 에어컨 탄생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라고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일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딱 한 가지 그 문제만을 해결해주는 것 같지 않습니다. 더 많은 가치를 문제 해결의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가 생겼다고 좌절하고 포기할 것이 아닙니다. 한 단계, 아니 그 이상의 진보를 이룰 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고통과 시련을 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내 옆에 어떤 선물이 놓여질 지를 살펴보십시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큰 기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세상 삶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제자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힘들까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생긴 부재로 인해 갈팡질팡하고 두려움에 벌벌 떨었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다시 주님을 직접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또한 유다인들의 반대를 예수님 없이 모두 받아내야 한다는 사실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재는 그들에게 정말로 커다란 고통과 시련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전달하면서 동시에 선물도 주십니다. 바로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낫게 하는 치유의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를 통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완성해가면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더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이가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커다란 선물이었습니다. 피하고 싶은 순간이 분명 있습니다. 그때 좌절과 포기가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발견할 기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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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신학생 때의 제 모습은 지금과 아주 달랐습니다. 우선, 당시에는 늘 완벽함만을 추구했습니다. 조금의 실수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그래서일까요? 다른 신부님들이나 선배님들께는 칭찬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후배들은 힘들었나 봅니다. 몇 년 전에, 한 후배 신부로부터 신학생 때 제가 정말 무서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기 힘든 사람이었다고 하더군요. 너무 완벽함만을 추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완벽함을 추구하는 나 자신도 힘들거든요. 그래서 완벽의 삶을 내려놓으려고 힘을 쏟았습니다. 실수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때로는 일부러 실수하기도 하는 약간 불완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실수도 하고 남의 실수도 받아주다 보니 점점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함께 사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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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영원하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에게 사랑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길 부탁하시고 다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닌 ‘부활을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그 큰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애타하던 제자들에게 부활은 더없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충만한 기쁨을 끝까지 누리고 싶은 것이 제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느님 품으로 가십니다. 아직도 미성숙한 제자들을 남겨둔 채 떠나가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노래 한 곡 불러 드리겠습니다.
“떠나는 이 마음도, 보내는 그 마음도 서로가 하고 싶은 말, 다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 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사랑의 기쁨도 이별의 슬픔도 이제는 너와 나 다시 이룰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 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한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면서도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면서 떠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요한14,2).고 하시며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진정 제자들에게는 예수님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또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영광에 함께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제 더 이상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로 바뀌셨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과 천사들, 성인들은 하늘에 머물고 땅속에는 마귀나 악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의 사명을 다 마치시고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가셨다는 뜻을 담아 승천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셨지만. 인간의 세계를 떠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서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님으로서’ 활동을 계속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외적으로 증거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이는 단죄를 받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명과 죽음입니다. 신명기에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30,19)고 적혀 있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구원과 생명, 믿지 않는 이에게는 단죄와 죽음이 놓여있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드러나지 않아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표징이 따랐는데 믿는 이들이 대표 격인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를 말하며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았으며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았습니다.
오늘날도 그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함으로써 신자들에게 악한 영들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게 하는 일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러냐! 하고 우리 신자들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래도 성당을 나오기 때문에 고만하다. 성당 안 나왔으면 더했으면 더했지…’ 자기도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남을 흉보는 그 선하지 못한 마음을 빼어버리는 것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자기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티를 잡고 험담하는 마음을 빼어버리는 것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매번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고 걸려 넘어지더라도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를 받고 새 삶을 시작하려는 마음이 더욱 소중합니다.
마르코복음 8,33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습니다.
“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 사탄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던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해주는 것이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새로운 언어를 말한다는 것도 단순히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페소서 4,29에 보면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하고 말합니다.
어떤 분이 전에는 그야말로 남 얘기 좋아해서 흉보고 비방하며 허물을 들춰냈는데 이제는 남을 칭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집회서 19장 10절에서 12절을 보면 “무슨 말을 듣거든 마음에 묻어라. 어리석은 자는 무슨 말을 들으면 옮기지 못하여 산고를 치르는 여인처럼 고통을 느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아니겠지요?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은 네 말이다’ 하십니다. 12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말을 옮기지 못하면 넓적다리에 화살을 맞은 양 못 견뎌 한다.”하고 말합니다. 정말 입이 싼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말, 남을 기쁘게 해줄 말을 찾는다면 그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눈을 뜬 만큼, 귀가 열리면 열린 만큼 새로운 언어로 듣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뱀은 사탄을 상징합니다. 사탄인 뱀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였듯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오늘날에도 유혹 거리가 많고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유혹에 빠진다는 것은 독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엄청난 해를 입히게 됩니다. 말이나 행동, 다양한 여건들이 상처를 주고받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으면 아무리 우리를 해치는 말을 들어도, 또 유혹하는 말이나 행동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유혹이나 독을 마시지 않으려고 외부환경을 고칠 것이 아니라, 그런 독이 들어와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내 안에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손으로 뱀을 쥐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그 말씀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악을 몰아낸다면 그것이 바로 ‘손으로 뱀을 집어내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15절에 보면, 야훼께서 뱀에게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뱀으로 표현된 악의 세력이 인류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그리고 그 후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정복된다는 것을, 예언해 주는 말씀입니다. 레지오마리애 회합 때 사용하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성모마리아 상’을 보면 어머니께서 뱀을 밟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역시 천주교 신자는 뭐가 달라도 달라!’ 하는 품위를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뱀을 집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독을 마셔도 죽지 않으려면, 다시 말하면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으려면 그만큼 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을 읽어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미사 안에서 영성체하고, 내 안에 오신 주님을 통해서 힘과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다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깊게 뿌리내려서 어떤 처지나 여건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육적인 병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치유를 말합니다. 병중에 가장 심각한 병은 영적인 병을 앓는 것입니다. 육신은 건강하지만, 영적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고, 육적으로는 환자이지만 영적으로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고자 하시는 것은 육신의 병보다 영혼의 치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혼을 치유하는 명약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성체는 영혼을 건강하게 해주는 보약중의 보약입니다. 이 보약은 어떤 중병도 치유합니다. 이 보약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간은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능력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칭찬하며 새로운 언어로 말하고 우리에게 희망과 구원을 안겨준 주님의 승천을 기뻐하며 천상에 우리의 집을 마련해 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찬 날을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계단”의 동의어는 “단계”랍니다. 단계는 걸려 넘어지지 않게 지쳐 쓰러지지 않게 여러 계단 건너뛰지 않고 하나씩 밟고 가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계단”의 반대말은 “다단계”입니다. 다단계는 걸려 넘어질 때까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여러 계단 건너뛰다 결국 바닥을 확인하는 인생이랍니다.
천국을 향한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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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승천의 순례 여정>
-희망, 깨달음, 복음선포-
오늘은 부활 제7주일이자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매일이 주님 승천 대축일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사실 참으로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매일이 부활 대축일이자 승천 대축일입니다. 이런 축제를 지낼 수 있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가 얼마나 고마운지요! 전례 축제없이 살 수 없는 인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팍팍한 사막같은 현실 너머 천국을 내다 볼 수 있게 하는 전례 축제는 그대로 영혼의 샘터가, 쉼터가, 배움터가 됩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때만 되면 떠오르는 모두가 흥겹게 승천의 희망과 기쁨중에 노래했던 “환호소리 나는 중에 하느님 오르시도다- 하느님 오르시도다” 화답송 시편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노래 못한지도 벌써 두 해째입니다.
어제는 성 빠코미오 아빠스 기념일이자 스승의 날이었고, 저는 주님 승천 대축일에 앞서 스승의 날에 참 좋은 분들을 통해 감동적인 선물을 받았으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자랑을 좋아하는 사람을 일컬어 ‘팔불출八不出’이라 한다는데 이를 무릅쓰고 약간 길다 싶지만 우선 자랑부터 한 후 본격적 강론을 시작할까 합니다.
매일 일찍 일어나기에 끝기도가 끝나면 기진맥진 상태인데 마침 낯익은 착하고 열심한 아름다운 자매님들 네분이 미사신청겸 집무실에 잠시 들렸다 ‘스승의 은혜’를 참 고운 목소리로 정성껏 불러 주어 감동했습니다. 두둥실 하늘에 떠오르는 승천의 기쁨 가득한 분위기 였습니다. 즉시 사진에 담아 잠자기 전 메시지와 함께 전송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매님들! 스승의 은혜! 노래 선물 너무 너무 감사, 감동입니다! 예수님 위로와 평화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스승의 은혜, 3절까지 불러 주었고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어제 1절은 ‘스승’을 ‘주님’으로 바꿔 산책중 여러번 불러 보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스승은 주님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주님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주님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주님의 은혜”
이어 40여년 전 그러니까 지금은 50대 중반의 초등학교 6학년 때 제자들 셋으로부터의 친필 편지와 더불어 메시지에도 감동했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께 올립니다. 이렇게 선생님께 편지를 써본 지가 6학년 때 써보고 41년 만에 처음이네요. 선생님 제자임이 항상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스승의 날 축하드립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셔서 함께 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 멀리서 킥서비스로 보낸 축하선물 떡상자 안에 있던 편지글 일부입니다. 이어지는 두편의 메시지 편지글도 소개합니다.
“선생임, 저 은경이예요. 스승의 날에 못 뵈어서 죄송합니다. 마음은 굴뚝 같으나 여의치 않아 못 가 뵈었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선생님을 만났고 저도 선생님으로 불리고 있지만, 진정 선생님으로 생각나는 분은 이수철 선생님밖에 없네요. 그만큼 철없고 어린 저에게 따뜻하고 자상하게 대해 주신, 참으로 소중하게 기억되는 분입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사랑하는 선생님, 스승의 날 축하드립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큰 관심과 칭찬이 제 삶을 얼마나 변화시켜 주셨는지 모르실 거예요. 자존감 약한 저에게 ‘나도 잘 하는 것이 있구나’ 희망을 주신 선생님의 차별없는 사랑에 힘든 시절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건강하세요. 가까운 날 찾아 뵙겠습니다. 근거없는 비방 기사들도 넘쳐 나지만 코로나 백신도 꼭 맞으시고요.”
참 좋으신 주님께서 당신 승천 대축일에 앞서 스승의 날에 보내 주신 참 좋은 선물이 승천 대축일의 기쁨을 한껏 더하고 있습니다. 팔불출이란 말을 들을 각오한 자랑들입니다. 昇天과 더불어 소천召天이란 말과 귀천歸天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모두 하늘의 본향집으로 돌아간다는 죽음을 뜻하는 참 아름다운 말마디입니다. 늘 들어도 좋고 아름다운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런 귀천의, 승천의 죽음을 맞이하고 싶음은 누구나의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죽어서 승천이 아니라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날마다 승천의 여정에, 하늘길 여정旅程에, 하늘길 등정登程에 오르고 있는 우리들 입니다. 죽음은 승천의 여정의 끝으로 하늘문 통과와 더불어 끝날 것입니다. 어떻게 아름답고 행복한 성공적인 승천의 순례 여정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희망입니다.
희망에 저절로 따라오는 기쁨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세상적 희망이 아니라 현실 ‘너머’ 영원하신 분이시자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희망입니다.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이신 주님을 향해 주님과 함께 희망의 여정, 승천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제2독서 에페소서에 밝히는 분,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모든 권세와 권능과 주권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이런 그리스도께 영원한 희망의 닻을 내린 우리들이야말로 천하무적天下無敵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유혹할 수 없고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너머’를 말마디를 꼭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시선을 언제나 보이는 것 너머 영원하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제 어렸을 때 좋아했던 60년대 ‘박재란’이 부른 ‘산너머 남촌에는’ 가사를 소개합니다. 가사 내용도 곡도 너무 좋아 제가 요즘 산책중 자주 부르는 노래입니다. 산너머 남촌이 상징하는 바 바로 우리 주님 계신 곳입니다.
-1.“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아---
꽃피는 사월이며 진달래 향기, 밀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는 것 한 가진들 실어 안오리, 남촌서 남풍불 때 나는 좋대나”
2.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하늘 저빛깔이 그리 고울까
아---
금잔디 넓은벌에 호랑나비떼, 보리밭 실개천에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지들 실어 안오리, 남촌서 남풍불제 나는 좋대나.”-
바로 이 거룩한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전례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는 영적 현실을 상징합니다. 보이는 너머 저 위로부터 오시는 주님 성령의 남풍이 우리를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둘째,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지혜, 깨달음의 순수, 깨달음의 기쁨, 깨달음의 자유, 끝이 없습니다. 승천의 순례 여정은 그대로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히면서 빛의 자녀로, 하느님의 자녀로, 주님을 닮아 참 나로 살게 하는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 전반부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바오로 사도가 간절히 청하는 깨달음의 선물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의 깨달음의 은총을 청하는 참 아름답고 깊은 내용들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깨달음의 선물들이 얼마나 좋고 아름답고 풍요합니까! 바로 승천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시는 은총의 선물, 깨달음의 선물들입니다.
셋째, 복음선포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사명이자 명령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내 몸담고 있는 오늘 지금 여기가 세상의 중심이자 복음 선포의 장입니다. 기후재난을 겪고 있는 작금의 절박한 현실이기에 지구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생태적 회개가 포함된 복음 선포의 과제입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내 존재 자체가, 내 삶자체가 살아 있는 복음이 될 때, 걸어다니는 복음 성서가 될 때 저절로 이뤄지는 복음 선포입니다.
교황님은 “와서 보시오”(요한1,46)란 주제의 55차 홍보 주일 담화를 통해 사람들을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만나 소통하기를 당부 하시면서 발로 뛰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바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살아있는 복음서로 살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어제 읽은 기사입니다.
“백척간두! 이 사자성어만큼 인류의 운명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기후변화 연구자들에 의하면, 2100년까지 지구 평균 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1.5도로 억제하지 못한다면 사피엔스 문명은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적어도 2050년까지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을 제로(탄소중립)로 만들어야 한다.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다.”(장대익 교수)
지구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 형제들을 포함한 복음 선포는 교회의 본질적 존재이유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보다 위대하고 거룩한 사명은 없습니다. 복음 선포를 통해 오늘 지금 여기서 앞당겨 실현되기 시작한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맛보며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밖에 멀리 있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자리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를 역동적 승천의 순례여정으로 이끌어 줍니다. 승천하시는 주님을 넋놓고 멍청히 바라보는 제자들을 향한 두 천사의 말씀은 그대로 ‘영적 갈릴래아 사람들’인 우리를 향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이미 오셔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복음의 제자들의 현실은 다음 복음 묘사 그대로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참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는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 모두가, 승천의 순례 여정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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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 승천의 의미를 들려 주십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
부활하신 후 "사십 일 동안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사도 1,3 참조)신 예수님을 아버지께서는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에페 1,20) 그래서 교회는 대대로 성령 강림 대축일 전에 이를 기념하고 경축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냅니다.
그런데 승천은 예수님께서 저 위 하늘 나라 대기권 속으로 올라가셨다는 의미보다는, 물리적으로 취하셨던 육신을 벗고 원래 계셨던 당신 신성의 자리로 돌아가셨음을 가리킵니다. 육신을 벗으신 예수님은 이제 더 자유롭게 우리와 함께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그저 보잘것없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제자들이 주님에게서 사명을 받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마르 16,15)합니다. 그들을 지탱하는 힘은 그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나오니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전하는 바를 친히 이루어주심으로써 말씀을 확증해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에 이르시기까지의 일들이 차근히 서술됩니다.
"땅끝에 이르시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선포 내용을 확증해 주시고, 그럼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이제 제자들은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고 온 세상, 땅끝까지 힘차게 뻗어 나가 주님을 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의 증인들과 함께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 나가실 것입니다.
제2독서는 예수님과 우리의 영원한 동행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에페 1,22)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기에, 우리 모두는 그분 몸의 구성원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한 교회 역시 존재하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 주님과 우리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확증하고 증언하며 하나로 나아갑니다. 천상 예루살렘 교회의 완성에 이를 때까지 이 동행은 지속될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으로 우리는 그분을 잃은 것이 아니라 더욱 확고한 현존으로 선사받았습니다. 그분은 눈에 보이지도 않으시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분이시지만 그래서 더욱 생생하게 함께 존재하고 일하시지요.
나약한 우리가 주님 때문에 가슴이 뜨겁게 타올라 부활의 증인이 되고, 그런 우리가 전하는 말씀이 이루어지며, 죄인인 우리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이 세상에 또 다른 선한 영향력의 고리가 되는 일. 이 모든 놀라운 기적들은 당신 말씀을 확증하시는 예수님 헌신의 자취입니다.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우리는 주님의 '떠남'과 '다시 오심' 사이에서 그분과 동행하여 걸어 가는 중입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시어 지상 순례길에서 맺힌 눈물을 닦아 주시고 사랑의 심판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서로 격려하며 말씀의 등불을 꺼뜨리지 말고 빛을 향해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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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ZFVrol7bYE&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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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 19)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깨닫게 된다.
예수님의
삶과 함께
하늘로
오르신다.
헤어짐이
아니라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하늘 나라는
더욱 우리와
가까워졌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다.
승천으로
예수님 영광이
확실히
드러났다.
하느님
사랑으로
탄생이
이루어지고
승천이
이루어진다.
참된 믿음은
하늘을 울린다.
승천의 길은
신앙의 길이다.
신앙의 길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삶이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들이다
주님 승천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유를
가르쳐주신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자유는
관계의 참된
가치이다.
마침내
하느님의 뜻이
우리들 안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신 분이
승리하시고
승천하신다.
더 좋은
삶을 위해
끊어버려야
할 것과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승천의 의미는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는
은총과 감사이다.
삶이
새로워지고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알게하여 주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 자체를
만나고 알리는
삶이다.
낮아지시고
낮추셨던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신다.
올리시는 분도
내리시는 분도
하느님이시다.
++++++++++++++++++
(2)
내려오신 분이
올라가십니다.
하늘을 알려
주신 분이 하늘로
오르십니다.
하늘과 땅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늘을 보게 됩니다.
하늘을 먹고 사는
우리의 삶입니다.
사랑은 하늘처럼
높고 높습니다.
사랑의
순간순간이 모여
하늘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하늘이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 여정의
전체가 됩니다.
사랑은 성숙되고
성장하듯 사랑은
하느님을 향합니다.
우리에게
하늘을 알려주시고
우리에게
하늘을 내어주신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알리고 선포하는 홍보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 때문에
내려오시고
오르셨듯이
홍보매체또한
하느님 사랑이
가장 큰 중심이
되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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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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