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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8일 연중 7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집회 6,5-17
복 음 : 마르 10,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1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2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 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혼인한 이들은 물론이고, 사목현장에서
혼인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을 돌보는 사목자들과 교우들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가르침 앞에서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가르침이 마치 우리 시대의 인간적 현실을 무시한
이론적이고 이상적인 멍에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의 가정은 사실혼, 동성 간의 결합, 출산 기피,
기술혁명으로 말미암은 출산 행위의 조작이나 성별에 대한 편견 등
그리스도교적 혼인을 위협하는 수많은 요소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을 실제로 혼인을 지속하는데
어려움을 가진 가정의 상황만을 기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적 혼인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사’(1코린 7,7)이고,
무엇보다 먼저 성직과 축성 생활에 앞서는 하나의 성소이기에
신중한 식별로 응답해야 하는 부르심입니다.
따라서 “혼인의 불가 해소성은 사람들에게 부과된 ‘멍에’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혼인으로 결합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은사’로 이해하여야 합니다.”(「사랑의 기쁨」, 62항)
위기에서도 인내로 혼인을 지키는 사람들,
혼인 생활의 위기 앞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사랑과 기도로 동반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현대 감각을 거스르지 않고자,
…… 또는 인간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에서 서류에 뒤쳐져 있다고 느껴서,
혼인을 옹호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를, 멈춘다면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고
주어야 하는 가치관을 제시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35항)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공부 잘하지 못하는 아이의 차이는
정리하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평소에 주변 정리를 하고,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아이는 시험공부를 하기 직전에 주변 정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내일인데 주변 정리만 하다 끝나니 좋은 성적이 나올 리가 없겠지요.
주변 정리는 집중을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결과를 위해서는 임박해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깔끔하게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 삶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요?
버릴 것은 버리고 잘라낼 것은 잘라내고 정리할 것은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흩어진 것은 모으고, 쌓인 것은 흩어내야 합니다.
그때가 언제일까요?
이 세상 삶을 모두 마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직전일까요?
아닙니다. 지금부터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주변 정리를 평소에 잘하는 사람입니다.
사람과의 불편한 마음을 계속 간직만 하는 사람이 아니고,
죄로 기울어진 흩어진 마음을 그냥 두는 사람도 아닙니다.
이렇게 정리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특히 가정 안에서 이 정리를 잘못해서
성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소한 다툼을 정리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 주기만을 바랍니다.
갈등의 골은 더 커지기만 하고, 사랑을 찾기 힘들어집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그냥 이혼해야 할까요?
서로의 잘못만을 생각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살아간다면
자기 역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라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혼인은 사랑하는 남녀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은총으로
‘둘이 한 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은 생각하지 않고, 상대의 잘못만을 생각하고
상대와의 불편한 마음을 계속 간직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은총을 생각하면서 주변 정리를 해야 합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상대와의 불편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완벽하지 않은 사람끼리 사랑하며 성숙해 가는 과정이
바로 혼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관계를 잘 정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을 사는 데 집중한다면,
관계를 잘 정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을 떠나 유다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군중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결혼에 대한 진정한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10,3)고 되물으시고,
그들이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 10,5)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을 허락해 준 이유가 이혼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모세가 그렇게 한 것은
여성이 이혼장이라는 서류도 없이 버림을 받게 될 경우,
여성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생활하다 붙잡히게 되면
간통죄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내의 사소한 일을 꼬투리로 잡아
이혼하는 일이 많아 사회적 문제 꺼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혼이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10,9)는
창조 때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이라고 번역한 “짝 지우다”라는
단어의 원래 뜻은 “함께 멍에를 매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는 결혼이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일치를 향한 공동의 운명을 지니고
함께 협력하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결혼이란 ‘한 몸’, 곧 일치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일치를 이루기 위한 조건적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고’
‘하나 됨’으로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 10,7)는 말씀을
교부들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관계로,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로 해석해 왔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이사야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하여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하여 기뻐하시리라.”(이사 62,5)
이처럼,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과 인간은 한 몸을 이루어나가야 하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의 일원이 되는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하는 혼인성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과의 이 깊은 관계가 우리를 가장 품위 있는 존재로 끌어올려 줍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거룩하고 놀라운 일인지요.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르 10,8)
주님!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음은 제가 부족해서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음은 당신이 필요해서만 아니라
당신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당신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과 더불어 한 곳을 함께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인내로 견디고, 사랑으로 이겨내기
반영억 라파엘 신부
결혼을 앞둔 젊은이에게 결혼은 왜 하느냐? 고 했더니
“사랑하기 때문에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항상 예뻐해 주고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며
어떤 이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살아가면서 그것도 체험해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좋은 면만 봤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면도
감싸줄 수 있는 마음을 키워가겠다고 다짐하는 젊은이에게
그 약속 변치 않기를 기원하며 마음 다해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면 계약에 충실할 수 있고,
계약에 충실함으로써 또 사랑을 지키게 된다는 깨우침을 얻기를 기도 했습니다.
“인내로 견디고, 사랑으로 이겨내기.
이는 그리스도인 고유의 은총입니다”(프란치스코교황).
예수님께서는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10,7-9)고 하시며
결혼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부부, 즉 합당하게 결혼한 부부는
두 인격체이면서도 동시에 한 인격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흔히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일부다처제, 남편이 아내를 일방적으로 쫓아내는 소박 등
남존여비 사상이 빚어낸 결혼, 이혼, 재혼은
가부장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가능할지언정
이제 하느님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는 혼인의 단일성, 즉 ‘일부일처’,
그리고 혼인의 불가 해소, 즉 ‘이혼 불가’,
혼인의 성사성 즉 ‘부부애’, 창조 사업의 직접적인 참여,
다시 말하면 ‘자녀의 출산’을 중요시하여 가르칩니다.
그런데 요즘 결혼하는 부부 2쌍 중 1쌍이 이혼한다는 통계가 나오고,
출산율도 0.79로 여성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아이가
한 명도 안 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족함을 채워주고 계약에 충실하며 사랑하겠다는 다짐은
어디 가고 그리 쉽게 헤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때는 사랑했던 사람이고 아이들의 어머니요, 아버지임이 분명한데
그들을 뒤로하고 차라리 몰랐던 사람보다도 더 악하게 마주 서고 있으니
그러고도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염려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닌지요?
어려움이 몰려올 때 그래도 사랑해야 할 나의 동반자임을 다시 한번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시다!
“말로나 혀 끝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1요한3,18).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커지면 그에 상응하는 법률이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서로를 갈라서게 하는 일이 아니라 일치를 도모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결혼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예레31,3)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써
한 몸을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서원한 사람은 하느님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오늘이길 바랍니다.
하느님과 나를 갈라놓는 것은, 무엇인가요?
인내로 견디고 사랑으로 이기는 은총을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혼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오직 한 사람 하와만을 짝을 주신 것은
두 사람이 모든 일에 동등하게 하나가 되고
모든 것을 나누고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혼에 대한 가르침은 남성과 여성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5절) 라고 하신 말씀은
처음에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아담이 하느님께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그리고 여자는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먹었습니다.”(창세 3,13)라고
핑계를 대는 것에서 나온 법이다.
혼인으로 둘은 각자의 소임에서 동등하다.
그들 사이에는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갈라짐이 없고,
참으로 “둘이 한 몸입니다.”(창세 2,24; 마태 19,5; 에페 5,31).
몸이 하나이면 마음도 하나이다.
부부는 함께 기도하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권고하고, 서로 위로하는 관계이다.
서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소홀하지도 않고, 서로에게 짐이 되지도 않는다.
이것은 혼인 생활을 절제 있게 엮어 가고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9절)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주님의 가르침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이 가르침은 간음의 경우 외에는 모든 이혼을 금한다.
그 간음은 여자나 남자가 아내이기를, 남편이기를 원하지 않았고
혼인의 신의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살아 있는 동안 서로에게 매여 있다(참조: 1코린 7,39).
부부는 항상 서로에 대한 믿음 안에서 서로를 위하여
어떠한 경우에라도 부부간의 도리와 혼인의 신성한 의무를 충실히 하여야 한다.
부부는 하나라고 한다. 둘이면서 하나이다. 그리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그리고 사랑으로 주님을 그 안에 모시기 때문에
주님을 모신 삶으로 삼위일체의 삶을 사는 것이다.
가정의 모습은 삼위일체의 모습이어야 한다.
친구와 재우자 선택할 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집회서는 가히 친구론(親舊論)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앞부분만 보면 명심보감 같은 데서 하는 얘기가 아닐까 생각 할 정돕니다.
아무튼 친구는 중요하고 그래서 잘 사귀어야 합니다.
오늘 집회서 말씀이 아니더라도 친구 잘못 사귀면
자기 인생도 망치고 패가망신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면담하다 보면 자기 아들이 참 착한 아들인데
친구 잘못 만나 나쁜 짓을 하게 되었다고 하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부모가 된 입장에서
자기 아들의 잘못을 아들 친구 탓으로 돌리려는
비겁함이랄까 무책임함 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런 친구를 친구로 택한 것부터 끊지 못하고 계속 사귄 것이 아들이지요.
이는 마치 책을 만드는 것이 사람이지만 책이 사람을 만들기도 하는 것과 같지요.
책방에 가서부터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고르는 것까지 내가 잘해야 하는 거지요.
이런 뜻에서 오늘 집회서의 앞부분은 다른 가르침과 별로 다르다고 할 수 없고
그래서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끝부분은 신앙인의 친구 선택이라는 면에서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고
자신의 우정을 바르게 키워 나가니 이웃도 그의 본을 따라 그대로 하리라.”
이 말씀을 쉽게 풀이하면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교회 친구와 사귀고,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도 신자 가운데서 찾음으로써
신앙생활을 같이 이어가고 서로 신앙의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개신교 젊은이들은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심하면 할수록 자기와 신앙이 다른 사람과 사귀지 않으려 하고,
많은 시간을 교회 안에서 같이 보내는데 그것도 꼭 같은 교회 안에서 보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런 친구 관계가
오늘 복음이 얘기하는 결혼 관계로 이어지고
자녀 관계와 자녀 교육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기준으로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기준으로 친구와 배우자를 택했기에 배우자를 자기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이 짝지어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지요.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을 볼 때마다 제가 놀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들의 교리와 하는 짓을 제가 좋게 보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배우자의 선택을 교회에 맡긴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입니다.
자기의 싫고 좋고가 없으며,
자기의 싫고 좋고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뜻에 따라 부부의 인연이 맺어졌기에 하느님 뜻에 따라 살겠지요.
물론 이 얘기는 신자하고만 친구를 사귀고 결혼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신자 아닌 사람에게도 열려있고, 그런 열린 자세로 신자 아닌 사람을 사귀어
하느님께로 인도하면 더 적극적이고 좋겠지요.
저의 육신의 형제들을 보면 한 명만 빼고 신앙이 없거나
다른 신앙인과 결혼했지만, 지금은 다 가톨릭 신자로 살아가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니 좋은 결과를 냈다고 할 수 있는데
관건은 그래도 신앙이 중심이었던 거지요.
그러므로 오늘 얘기하는 친구 관계나 부부관계는
갈수록 하느님이 중심과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자기의 싫고 좋음에 따라 선택하고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자기의 싫고 좋음이 기준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사랑에서 멀며 하느님 사랑에서는 더 먼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두 번째 결혼으로 두 배 더 멀어지는 행복
전삼용 요셉 신부
결혼은 우리 모두의 화두입니다.
누구나 태어나면 결혼을 할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25살까지는 결혼하고 싶었고, 그 이후에는 결혼에 대한 희망을 품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재혼을 반대하시는지를 살짝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결혼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명확히 하시며,
결혼이 단순한 인간의 합의가 아닌,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신성한 결합임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대화 중, 결혼의 파기 불가능성을 강조하시며,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이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이 맺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말라.”는 교훈을 주십니다.
물론 두 번째, 세 번째 결혼해도 잘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첫 번째 결혼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두 번째도 그렇게 믿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친구들의 순교’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친구들은 1950년대 중반,
에콰도르에서 원주민 부족인 아우카 부족과의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짐 엘리엇은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어린 자녀가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의 삶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결국 짐 엘리엇과 그의 네 명의 동료는 아우카 부족원들에 의해 순교하게 됩니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점은 짐 엘리엇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이 순교한 후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명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며,
자신이 남편과 함께했던 사역을 이어가며 원주민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의 순교가 하느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믿고, 그 뜻을 따라갔습니다.
그녀의 삶은 결혼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졌을 때,
그 결혼이 얼마나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예입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친구들이 순교한 뒤, 그들의 아내들은 고통을 겪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그 고난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고통과 희생은 단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속 계획의 일환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졌을 때,
그 결합은 시간이 지나면서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의 순교 후에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큰 영적 열매를 맺은 인물입니다.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찾은 ‘행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분명 남편과 함께 자녀를 키워가며 느낄 수 있는 행복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같은 선교의 길을 감으로써
남편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남편은 하느님이 맺어 주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죽었어도 더는 결혼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불행했을까요? 엘리사벳의 말을 들어봅시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짐 엘리엇의 순교 이후,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어가면서
“내 삶을 목적과 의미 있는 것으로 살아가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는 그녀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세속적인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선택한 결과임을 나타냅니다.
그녀는 자주 “행복은 세상적인 기준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 짐의 순교 후에 겪은 고통 속에서도
“기쁨과 슬픔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녀는 이 슬픔을 통해 고통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에서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삶이 전적으로 외적인 쾌락이나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추구했음을 보여 줍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짐 엘리엇의 순교 이후
“다시 이 길을 가야만 한다면, 그 길을 계속 걷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평생 자신이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통해 얻은 경험과 교훈들이 자신을 더욱 성숙시키고
하느님을 더 깊이 신뢰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으며,
고난과 아픔을 통해 그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주실 만큼 충분히 가치가 있다,
심지어 슬픔까지도.”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추구한 삶의 자세를 나타냅니다.
저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한 경험들이 결혼의 경험과 비교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경험이 사제 생활을 하는 데 방해가 될까요?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묵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상대에게 잘못 했던 것, 상대가 나에게 잘못했던 것,
내가 상대에게 잘했던 것, 상대가 나에게 잘했던 것 등은
모두 내가 하느님께 가는 길에서 큰 묵상 거리였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귀중한 다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만큼이라도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행복은 인간적인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행복해지면
인간적인 관계에서 더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행복을 위해 하느님께서 맺어 주셨다는 믿음을 포기하게 된다면
그 하느님께 참아나가며 나아가야 하는 길을 외면하게 되고
다시 살게 되더라도 그 믿음을 쉽게 회복할 수 없게 됩니다.
첫 번째가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는데,
두 번째가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포기하고 싶었지만, 끝까지 결혼의 유대를 유지하며 참사랑을 알게 되고
그 참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했음을 깨달은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토비트서에서 토비아와 사라의 혼인은 이런 면에서 큰 의미를 줍니다.
토비트는 결혼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이를 위해 하느님 자비를 청합니다.
십자가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결혼의 참 의미는 하느님께 가는 길이라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멘.
혼인법은 멍에가 아니라 은총을 실현하는 도구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1) 구약성경 토빗기를 보면, 토비야는 혼인 첫날밤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대대로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하늘과 당신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협력자며 협조자로
아내 하와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둘에게서 인류가 나왔습니다.
당신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와 닮은 협력자를 우리가 만들어 주자.’ 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토빗 8,5-7)
이 기도에는, 혼인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일이라는 믿음이 들어 있는데,
그 믿음은, 혼인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믿음입니다.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라는 말은,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나타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일’을 함께한다는 믿음으로 결혼합니다.
<인간적인 욕망이나 욕심으로 결혼하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라는 말씀은,
“혼인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
또는 “혼인은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셔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결정해서 결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그 모든 과정에서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다고,
또는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셨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일’이라고 믿는다면,
하느님께서 끝까지 지켜 주신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보호를 잘 받는 방법입니다.
더 좋은 방법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을 잘하는 비결은 ‘기도’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또 가족이 ‘함께’ 바치는 기도는 그 가정을 지키는 힘이 됩니다.
3)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혼장에 관한 모세의 규정은, 인간들이 하느님도 잘 모르고,
하느님의 뜻도 모르던 시절에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위해서 만든
과도기적 규정일 뿐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 규정은 하느님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의 규정일 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규정을 당신의 권한으로 폐지하셨습니다.>
4) 2절의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라는 뜻인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혼인과 이혼에 대해서 질문한 것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이혼과 재혼을 꾸짖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마르 6,17-29).
그래서 바리사이들의 질문에는,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은 정당한 일인가?”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단순하게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 라고 대답하셨다면,
바리사이들은 헤로데에게 가서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를 비난했다고 고자질했을 것이고,
‘버려도 된다.’고 대답하셨다면 산상설교의 가르침(마태 5,31-32)과는
다른 말을 했다고 사람들을 선동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창세기의 내용을 언급하신 것은,
바리사이들의 함정을 피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5) 바오로 사도는 혼인에 관해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라고 말합니다(1코린 7,15).
혼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회의 혼인법’은
신앙인들을 속박하기 위한 멍에가 아니라,
신앙인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의 혼인법에도 적용됩니다.
혼인법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혼인법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혼인과 가정의 거룩함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동시에, 여러 가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그 고통을 잘 극복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