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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장 1408년 6월 2일 새벽
대초열지옥.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지하팡장에 길게 울리다가 사라졌다.
혈문룡은 소리가 난 곳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 속에
천강시(天 屍)의 손에 두 조각으로 길게 찢겨진 시체 한 구가
들어왔다.
시체에는 원래는 옷이었을 검은 천조각이 걸려 있었다.
검은 옷은 흑룡사(黑龍社)에서도, 여기 지옥성의 한족들도 입
었다. 혈문룡은 그 시체가 그 둘 중 어느 패거리의 것인지 창황
중에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비명 소리는 그의 것이었
다. 그리고 그는 '우리 편'이었다.
혈문룡은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분노의 신음성을 토해 냈다.
천강시들은 마치 양 몌 속에 뛰어든 이리와도 같이 거칠 것
없는 살육을 벌이고 있었다. 그 손이 거치는 곳마다 검은 옷,
붉은 살들이 뜯어지고, 찢어지는 것이다.
"비켜--!"
목이 쉬었는가, 아니 극도의 분노가 목을 막아 버린 탓일 것
이다. 혈문룡의 긴 호통 소리는 끝이 갈라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몸은 공중으로 떠올라 천강시를 향해 날고 있었
다. 손에 들린 반룡도가 광채를 뿜어내었다.
"죽기 싫으면 비켜!"
혈문룡은 다시 외쳤다.
그는 그의 가슴속으로 격류(激流)를 이루며 흐르는 분노만큼
은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반룡도의 광채도 공중에 헛
되이 뿌려지고만 있었다.
천강시는 여덟이나 있었지만 그 어느것에도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와 천강시의 사이에는 한족들이 겁먹은 양 떼처럼 이
리저리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강시에게 떼지어 덤비는 것도, 그렇다고 도망치는 것도 아
닌 무의미한 손짓과 움직임들……!
단지 그들이 느낀 공포만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그 무의미한
반응들이 그들의 명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나마 천강시들을 상
대할 수 있는 혈문룡과 같은 고수가 효과적으로 움직일 공간을
만드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혈문룡이 다시 뛰었다.
죽는 것보다는 다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는 겁먹은 한족
누군가의 머리를 밟고 공중에 떠서 목표를 정했다.
"죽어--!"
혈문룡이 다시 누군가의 머리를 밟고 뛰어올랐다.
반룡도가 그의 양손에 잡혀 허공으로 치켜 들렸다가 직선으로
내리쳐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오직 무엇인가를 자르기 위한 공
격이었다.
깡--!
혈문룡의 온몸이 떨렸다. 반룡도의 두꺼운 도신이 눈에 보일
정도로 흔들렸다
그러나 거기 맞은 천강시의 머리에는 금 하나 가지 않았다.
그저 잠시 주춤거렸을 뿐…….
그 잠시 동안의 시간에 혈문룡은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였다. 열
손가락 모두가 반룡도의 손잡이에 눌어붙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간신히 피를 통하게 하고 다시 반룡도를 움켜잡았을 때 천강
시의 손이 눈앞에 다가왔다. 피와 살점--아마 그 자신의 것은
아닐 것이다.--이 지저분하게 묻은 손이었다.
혈문룡은 자신을 향해 다가드는 그 손의 아래로 파고들었다.
형편없이 느린 손짓이었다. 천강시의 손은 어설픈 몇몇을 잡
을 수는 있어도 혈문룡은 잡을 수 없었다.
그는 천강시의 손짓을 가볍게 피하고 반룡도를 우측 아래로부
터 비스듬히 치켜 올리며 오른손을 떼서 용이 새겨진 반룡도의
뒷등을 잡았다.
칵!
반룡도가 천강시의 왼쪽 갈비뼈 어림에 부딪쳐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혈문룡은 허리에 힘을 주었다. 오른손은 칼의 뒷등을 최대한
으로 누르고 있었다. 왼손이 반룡도를 힘차게 잡아당겼다.
슈왁!
칼날이 반달그림자를 그렸다. 천강시가 주줌 옆으로 밀려갔다.
혈문룡이 거기 따라붙었다. 그의 눈은 방금 반룡도가 베고 지
나간 자국을 보고 있었다.
붉은 줄 하나!
그게 끝이었다.
강철도 베어 버릴 그의 반룡도가, 있기만 하다면 용의 목이라
도 잘라 버릴 반룡도법이 천강시에게는 붉은 줄 하나만을 남긴
것이다.
풀잎에 스친 상처 정도밖에 안되는 한 줄기 흔적만을…….
전문적으로 접근을 위주로 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각(死
角)으로부터 공격을 한다는 반룡도법의 묘용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보통의 도검으로 베어 버리지 못할 것도 베
어 버릴 수 있다는 장점이 그의 반룡도법에는 있었다. 칼날의
선에 직각으로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선을 따라 그어 버리는 것
이기 때문이었다.
단단한 뼈를 위에서 내려치면 끊기 힘들지만 칼을 대고 옆에
서부터 밀며 자르면 의외로 쉽게 잘린다는 원리였다.
그러나 천강시에게는 이 모든 것이 소용이 없었다.
부웅!
천강시의 팔이 혈문룡의 머리를 옆으로부터 후려쳤다. 회심의
일격이 무위로 끝난 것을 보고 잠시 망연해 있던 혈문룡이 본능
적으로 칼을 들어올려 막았다.
팡--!
혈문룡의 몸이 들썩 들리더니 옆으로 다섯 걸음이 넘게 밀려
갔다. 속도는 느릴지 몰라도 천강시의 힘만은 일류고수를 휠씬
넘어서 있는 것이다.
거기에 가공할 정도의 단단함이라니!
비척비척 물러서면서 혈문룡은 아픔보다 먼저 절망감을 느꼈다.
'누가 이 괴물들을 없앨 수 있을 것인가?
늦으면 소용이 없었다.
어찌어찌 없앤다 해도 만약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그땐 살아 남
은 소수도 몽고족들의 손에 죽고 말 것이다.
그 자신 집단전(集團戰)의 경험으로 다수와 소수의 싸움에서
는 무공이 그리 결정적인 것이 못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천하제일고수도 백 명, 이백 명을 흘로 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도망가려 해도 갈 곳도 없었다.
이렇게 사방이 막힌 곳에서 어디로 도망갈 것인가?
문득 그의 머릿속으로 과거 철골강시들에게 백 명의 수하 전
부를 잃던 날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오늘도 그렇게 될 것인가?'
그는 강한 반항심을 느꼈다.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저항감!
그것은 단순히 죽기 싫다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앞
선 어떤 것, 바로 지기 싫다는 오기였다. 죽을 수는 있어도 지
기는 싫다는 정신이었다.
천강시는 그가 밀려가자 손 닿는 곳에 있는 먹이를 찾고 있었다.
집이 부서진 개미 떼거리처럼 도망가는 그의 수하들, 그리고
이제는 '우리 편'이 되어 버린 한족들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손을 돌려 반룡도를 도갑(刀匣)에 꽂았다. 그 손에 십여
개의 철봉이 새로 잡혔다.
쇠사슬로 연결된 철봉!
그는 그것을 두 손으로 나누어 잡았다.
촤라락!
쇠사슬들이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철봉 속으로 밀려들어가고
그의 손에 일 장이 넘는 긴 창이 들려졌다. 여의색자창(如意索
子槍)이었다.
반룡도와 더불어 그의 양대 절기 증 하나인 창술을 발휘하려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착각한 것이 있었다. 참을 쓰려면 보통
의 몇 배나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반룡도조차도 사람들이 걸려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는데 하물
며 창이야!
"비켜라, 제발--!"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족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광장의 한편으로 몰리고 있었다. 좁은 웅덩이에 가득
몰린 미꾸라지처럼 부글거리는 것이 지금 그들 흑룡사와 한족들
의 모습인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혈문룡은 장내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그들 흑룡사만이라면 전멸을 당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비참한,
저항조차 한번 제대로 못하는 꼴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 흑룡사도, 지옥성의 한족들도 흔란 속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흔란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 자신도 마찬가지
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혈문룡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야광충은 냉정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통하는 입구였고
그곳에는 다가오는 자를 감시하기 위해 약간 올라간 바위 턱이
있었기 때문에 사방을 둘러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여기 지옥성의 어느 지옥이나 마찬가지 구조로 되어 있지만,
여기 대초열지옥도 반경 삼십억 장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광장을
중심으로 시설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이 끝이 막힌
통로로 주거지로 쓰이는 곳이라는 것은 적들도 알고 그들도 알
았다.
누구도 그 방향으로는 도망갈 수 없었다. 그것은 목전(目前)
의 공포를 피하려 뒤통수에 붙어 있는 절망을 선택하는 일이었
으므로,
'적' --언제부터 그들이 적이 된 것일까!--은 천강시 여덟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뒤로 물러나 버렸다. 그들 스스로도 천강시
의 파괴적인 힘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적어도 여덟 천강시만으로도 그들 한족들을 괴멸 상태에 몰아
넣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전일 고란고성에서도 그와 화영 거
기에 황룡까지 힘을 모아서야 하나를 제거하지 않았던가!
물론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지만 말이다.
양인장으로 천강시를 깰 수 있을까?
그와 화영, 황룡은 그런대로 하나나 둘씩은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는?
천강시를 하나라도 상대할 만한 사람은 있을까?
하나라도 자유롭게 놓아준다면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
이었다. 지금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그 모습처럼…….
유리구슬처럼 차가운 눈에 비치는 저 흥건한 선혈의 광장, 울
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야광충은 강시 같은 괴물들의 장점이 어디에 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일반 무림고수는 아무리 강해도 인간인 만큼 지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괴물들은 지치는 일 없이 무한정 싸우고, 살육을 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괴물들은 상대할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면, 예를 들어 천
강시의 단단한 가죽을 뚫을 뾰족한 방법이 없다면 그냥 당하고
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죽을 것인가?'
야광충은 긴 숨을 토하며 한 천강시의 가슴팍에 작렬하는 금
라 섬광(閃光)을 바라보았다.
천강시의 발이 허공에 떴다. 그의 가슴팍이 뒤로 홱 밀려 마
치 고개를 앞으로 뻗은 것처럼 보였다.
가슴팍 옷자락은 그렇게 뒤로 날려 가 몇 바퀴나 디구는 도중
에야 터졌다. 옷자락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도 그때였다.
방금 작렬한 금빛 광채의 잔상(殘像)이 아직도 그의 가슴팍에
희미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천강시는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인세(人世)에 보
기 드문 기공(奇功)에 정면으로 격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강
시는 옷자락을 조금 태운 것말고는 거의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은 천강시를 후려쳤던 황룡 역시 마찬가
지였다.
그는 무표정했다. 그의 얼굴에서는 전혀 실망이라든가 놀라움
이라든가 하는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냉정하다고 부를 수도 없었다. 단지 자신의 강기( 氣)에 얻
어맞은 천강시와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이미 외계의 사물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 부동심(不動心)
의 경지에 올라 있는 듯했다.
황룡의 두 손이 다시 모였다. 손끝에서부터 금빛이 반짝이더
니 이내 두 손을 완전히 가리고, 곧 금광은 그의 온몸을 휘황하
게 감쌌다.
보리무상강기(菩提無上 氣)였다.
그가 혈문룡처럼 같은 편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고 비교적 자
유롭게 천강시와 싸울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강기의 벽에 막혀서 한족들은 누구
도 그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얻어맞고 뒹군 천강시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황룡은 허리를 구부리며 가슴 앞에 합장했던 두 손을 펴서 손
바닥을 위로 보게 한 채 앞으로 천천히 내밀었다.
동자승(童子僧)이 부처에게 절하는 모습, 동자배불(童子拜佛)
이었다.
무공에 기본적인 지식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보는 초
식, 하지만 그 누구도 진지하게 쓰지는 않는 초식이 그것이었
다. 상대에게 예를 표하는 동작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황룡의 동자배불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온몸을 감싸고 흐르던 금팡이 내민 두 손끝에서 용트림
하듯 눈부신 금라을 발하더니, 한 순간 두 자루의 창이 되어 전면
을 향해 격사되었다.
무거운 격중음(擊中音), 비산(飛散)하는 금빛 광채가 한 순간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어떤 자세, 어떤 부위를 통해서도 무형의 기(氣)를 유형의 힘
으로 만들어 보낼 수 있는 보리무상강기의 위력에 놀랜 눈들이
었다.
천강시는 그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한족들의 눈에, 실망이, 역으로 몽고족들의 눈에 찬탄과 희열
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 눈들은 이내 반대로 변했다.
천강시의 동작이 어딘지 어색했다. 마치 관절이 제대로 움직
여지지 않는 둣한 모습.
당연한 일이었다. 가슴을 관통해 두 개의 구멍이 나며 뼈대를
으스러뜨려 놓았는데 아무리 아픔을 모르는 천강시라지만 정상
적으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오옴……!"
황룡이 묘한 소리를 내며 양손을 번갈아 내밀었다.
따다당!
천강시의 양쪽 어깨와 목에 다시 세 개의 선명한 손자국이 새
겨졌다. 처음 것은 보통의 손보다 크고, 두번째는 손바닥 크기
만하고, 마지막은 두번째 것의 반밖에 안되는 자국이었다.
어느것이나 한 치 이상의 깊이였지만 그 중 세번째 것은 세
치 깊이에 이르러 거의 목덜미를 반이나 파고들었다.
밀종아뇩다라삼먁삼보리(密宗阿 多羅三 三菩提), 일명 삼첩
인(三疊印)이라 부르는 기공이었다.
장인은 점점 작아지지만 위력은 오히려 베가(倍加)되는 기공.
"오오옴……!"
황룡의 입은 분명히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소리는 그
치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는 한 손은 반쫌 오므리며 뒤로 끌어당기고, 다른 손은 활
짝 펴서 앞으로 내미는 시늉을 했다.
삼첩인을 맞을 때까지 꼼짝 않고 서서 당하기만 하던 천강시
가 발은 뒤로 한 채 땅에 끌리고 상체는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앞으로 불쑥 내민 채 황룡을 향해서 주르륵 끌려왔다
그 얼굴에 황룡의 내민 손이 닿았다.
퍼억!
끌려오기는 했지만 분명 일 장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상태였
다. 그런데 마치 황룡의 손이 순간적으로 길어진 듯하더니 천강
시는 머리가 홱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보리반야인(菩提般若印)이었다. 유가밀공(瑜伽密功)의 일종인
대수인신공(大手印神功)과 같은 부류에 들어가는 기공이었다.
바바바방!
튕기둣 삼 장 밖으로 날려 간 천강시의 온몸에 다시 금빛 광
채가 작렬했다.
천수패엽장(千手貝葉掌).
황룡은 손이 천 개라도 되는 듯이 연속적으로 권장을 날려 그
와 천강시 사이를 금빛 손그림자로 채우고 있었다. 그 손끝에서
천강시는 도마 위의 북어처럼 으깨지고 있었다.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군!"
등평이 팔짱을 끼고 서서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싸움 구경을
하다가 문득 한마디했다.
야광충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에게는 시급히 해야 할 일
이 있었다.
등평 따위의 말에 일일이 반응을 보이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며 황룡이 천강시 하나를 동작 불능
(動作不能)의 상태로 몰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동작 불능이라니!
등평의 말대로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무공으로도 고작 동작
불능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천강시의 두려움을 새삼 일
깨워 주는 표본이었다.
다른 일곱은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한족은 이미 반으로 줄
어 있는데……!
야광충은 다시 긴 숨을 내뱉었다. 단전으로부터 극한(極寒)의
기운이 솟구쳐서 폐부(肺腑)를 식히고는 입을 통해 배출되었다
그러나 이내 그 차가운 기운의 뒤를 따라 솟구쳐 진기를 흔들
어 놓는 뜨거운 기운. 현음지맥(玄陰之脈)의 야광충에게 그것은
죽음의 기운이었다.
혈부용(血芙蓉)의 일격은 정확했고, 또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감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그녀는 그의 가장 깊숙한 곳을 찔렀다.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며 이마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혈맥
이 소리내며 뒤틀렸다. 창자가 꼬이는 둣한 아픔이 가슴으로 바
로 밀고 들어왔다.
이 상태로는 움직일 수도 없다.
야광충은 길고 낮게 숨을 들이마셔 기혈(氣血)을 안정시키며
등평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저 친구도 대단하군!"
등평의 턱은 화영을 가리키고 있었다.
칵!
화영의 청풍검(靑風劍)은 분명히 천강시의 어깻죽지를 내려쳤
지만 쇠에 부딪친 것도 아니고, 나무에 부딪친 것도 아닌 둔탁
한 소리만 났을 뿐이었다.
천강시의 팔에 남은 상처도 그렇게 잘 안 드는 칼로 후려친
것처럼 작은 반달 모양의 생채기뿐이었다.
"역시 안되나……?"
화영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검을 회수해 가슴 앞에 세웠다.
말은 아쉽다는 둣이 하지만 방금의 일검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거두었다는 것을 화영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일검으로 천강시의 팔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월몽영을
구했던 것이다.
월몽영의 주무기는 대선룡(大旋龍), 길이가 이 장이 넘는 긴
채찍이었다.
혈문룡이 사람들 때문에 여의색자창을 휘두르지 못한다면 그
녀는 더욱 그러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한, 반경 오 장여의 공간
은 이 대초열지옥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터였기 때문이었다.
화영과 그녀, 방각과 현현소녀에, 살아 남은 몇몇 대주들까지
여기 한데 섞여 천강시 다섯을 상대로 드잡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곳의 한족들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 봐야
갈 곳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자연 그들의 싸움은 필사적이었다.
현현소녀의 주 무기도 채찍과 마찬가지로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채대(彩帶), 허리띠였다.
그러나 그녀는 월몽영과 달리 무기의 특성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 비대한 몸을 거의 무게감 없이 움직이는 것도 신기할 정도
인데 거기에 채대로 천강시의 팔다리를 얽어 묶고, 걸어 넘기
며 제법 효과적으로 하나를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무산신녀궁 비전의 절기 중 그녀가 이어받은 단 하나, 현녀
십구대(玄女十九帶) 중의 하나인 포쇄결(捕鎖結)을 사용하고 있
는 것이다.
그녀에 비해 월몽영은 강했다. 용맹했다.
그녀는 채찍을 여러 겹으로 감아 오 척 정도의 길이로 짧게
모아 쥐고 그것으로 천강시를 후려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사부에 비해서 적을 잘 다루지는 못하
고 있었다. 천강시는 그녀의 공격을 고스란히 다 받아들이면서
도 꿈쩍도 않는 것이다.
강하 것을 상대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
보다 강한 것으로 꺾어 버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부드러움으
로 강함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월몽영이 천강시보다 강하지 않은 바에야 그녀의 강함은 소용
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현현소녀의 포쇄결이 천강시를 상대하는 데에는 더욱
적합했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 포쇄결을 익히지 못하고 있었다.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포쇄결을 익힐 수
가 없었다.
그녀의 성격상 부드러움이 강함을 꺾는다고 하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상은 포쇄결의 중심이 되
는 부드러움이라는 원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잘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
서 그녀는 곧 천강시의 손에 잡혀 버렸다. 화영이 구해 주지 않
았다면 죽고 말았을 위험에 처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대주들에 비하면 나았다.
살아 남은 몇몇 대주들은 무공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계속 살아 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것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해 피하면 반드시 죽지만 두려움없이 죽음을 직
시(直視)하면 혹시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약했고, 천강시는 너무 강했다.
가장 먼저 죽은 것은 종리매(從 魅) 팽거(彭鉅)였다. 그는
대과조(大瓜爪) 상음(常陰)을 제외하고는 대주들 중에서도 가장
고수 죽에 드는 자였지만 천강시의 손에서 버티기에는 부족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그의 긴 허리가 꺾일 때,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그 허리가 구부러질 때, 그가 죽어 가며 내뱉는
마지막 숨소리가 꺾여진 허리를 홀러 입밖으로 토해질 때, 그때
에는 이미 그 과정을 돌이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저 압도적인 무력 앞에 힘없이 꺾여지는 동료의 시신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음풍영(陰風影) 형사랑(邢四郞)이 오랜 동료의 죽음을 보고
분노의 절규를 터뜨렸다_
"우와아아앗, 더러운 괴물……! 죽어랏!"
의미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그 절규가 끝나 갈 즈음에는 그는
팽거의 시체를 들고 있느라 드러난 천강시의 양 옆구리에 두 자
루 단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그의 애병인 한 자 반짜리 쌍비단
검(雙飛短劍)이었다.
"안……!"
상음은 형사랑의 무모한 공격을 저지하려 소리를 치다가 중도
에 말을 끊었다. 말로는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고 판단한 것
이다.
적어도 이 경우에는 그랬다.
천강시는 팽거의 시체를 떨어뜨렸다.
형사랑의 공격에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좀더
싱싱한 먹이를 노리려니 자유로운 손이 필요했던 것이다.
상음은 형사랑의 두 자루 쌍비단검이 들어갈 때만큼이나 빠르
게 다시 튀어 오르는 것을 한눈으로 흘리며 바닥에 몸을 던졌다.
쉬왁, 컥!
천강시의 발 밑에서 바닥에 깐 배를 축으로 회전하는 상음.
그의 손에 들린 대과조, 그 낫처럼 구부러진 긴 날의 끝에 천
강시의 발목이 걸렸다. 그는 잉어가 물을 차고 튀어오르는 이
어번신(鯉魚飜身)의 신법으로 몸을 튕겨 일어나며 대과조를 끌
어당겼다.
형사랑은 단단한 철벽에 단검을 부딪친 것 같은 막막함을 느
끼며 한 발 물러서던 참이었다.
그에게 천강시의 두 손이 내밀어지고 있었다. 그때 천강시가
휘청 뒤로 기울어졌다.
쌔액!
색명귀(索冥鬼) 하석(賀晳)의 색명도(索冥刀)가 바람을 가르
고 천강시의 목에 틀어박혔다. 상음의 대과조가 천강시의 발목
을 당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형사랑은 천강시가 두 손은 자신을 향해 내민 채 뒤로 기우뚱 쓰
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죽엇!"
그는 쌍비단검을 양손에 단단히 거머쥐었다. 그리고 몸을 위
로 뻗어 올리며 두 손으로 술잔을 권하는 쌍수경주(雙手敬酒)의
자세로 단검을 찔렀다. 하석이 내려친 칼날의 바로 아래, 만약
강시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면 천돌혈(泉突穴)이라 불러야 할 곳
이었다.
펑--!
천강시가 바닥에 뒤로 길게 누워 버렸다. 상음, 형사랑, 하석
의 무기들이 그 위로 쏟아져 내렸다.
'피해야……!'
야광충의 구슬 같던 눈이 잠깐 흐려졌다.
그러나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겉보기에는 평온한 신색이
었지만 사실은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었다.
한마디라도 내뱉는다면 그는 한동안 정상으로 회복되기 힘들
것이었다. 그땐 한족들은 누구도 살아 남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비참하겠군!"
둥평이 안됐다는 둣 중얼거렸다.
화영이 돌아섰다.
그는 장내가 아무리 소란해도 상황을 하나하나 파악하고 있었
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 그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들
이 그림처럼 새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심시신청대법(心視神聽大法).
눈이 아니라 마 음으로 보며, 듣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들을
수도 있는 거짓말 같은 경지, 신선들의 이야기에나 나올 것 같
은 그 경지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것이 그의 눈 대신이었
던 것이다.
지금 그의 뒤통수를 향해 뻗어 오는 천강시의 일권도 그래서
알 수 있었다.
그는 검을 겨드랑이 사이로 돌려 내뻗었다.
킥!
천강시의 주먹이 화영의 검끝에 멎었다. 가공할 만근지력(萬
斤之力)이 가느다란 검끝에 막혔던 것이다.
의식이 없는 천강시도 이 순간만은 잠시 주춤하는 것처럼 보
였다. 그리고 이내 다른 주먹을 뻗어 화영을 후려치려 했다.
화영은 어느새 몸을 돌려 천강시를 향해 서 있었다. 표정없는
보석 같은 눈이 이 순간 유난히 빛났다.
그는 지난 몇 달 간 고란고성에서 여문량의 지도를 받아 가며
연마했던 검의 새로운 경지를 여기에서 처음으로 시험하려 하고
있었다.
천강시의 주먹이 다가오고 있었다.
화영은 검을 가슴 앞에 세우고 움직이지 않았다. 검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천강시의 주먹이 코끝에 닿을 듯이 다가들었다.
주먹보다 그 주먹이 일으키는 날카로운 경기가 먼저 피부를
찔렀다.
화영의 검, 보검은 절대 아니지만 질 좋은 강철로 벼려진 청
풍검의 끝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청풍검은 뱀의 혓바닥처럼 미
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칙!
짧은 소음이 발해졌고 모든 것이 멈추어졌다.
천강시의 주먹이 완전히 뻗었다. 방어를 생각지 않고 무지막
지하게 휘두른 주먹은 화영의 머리가 중간에 걸리는 큰 반원을
그렸다. 천강시의 상체는 내민 주먹을 따라 비틀어져 뒷등이 보
일 정도였다.
그는 그 자세로 멈추어 있었다.
화영은 처음의 그 자리에서 반 자 옆으로 비껴 서 있었다. 천
강시의 주먹을 비껴 홀릴 수 있을 정도의 위치, 그리고 청풍검
을 천강시의 목에 꽂아 넣을 정도의 위치였다.
천강시와 화영은 그렇게 서로 끌어안을 둣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우호적인 자세가 아님은 천강시의 목덜미
뒤쪽으로 튀어나온 청풍검의 끝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화영의 청풍검이 거기 빛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섬광과 함께 내밀어진 검끝은 천강시의 목을
두부처럼 꿰뚫고 거기 멈추어져 있는 것이다.
화영은 천강시의 목을 뚫었다.
그러나 천강시를 죽이지는……, 아니 파괴하지는 못했다.
천강시가 몸을 움직였다.
화영이 검을 뺐다.
어느쪽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거의 동시였을 것이다.
그 시점에 청풍검을 빼지 않았다면 검은 부러지고 말았을 것
이었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다행히 검도 부러지지 않았다.
천강시가 다시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목덜미에 뚫려진 구멍 하나는 분명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조금 전과 변함이 없었다.
화영의 표정에도 변함은 없었다.
비록 검강(劍 )의 초기 단계가 기대한 것처럼 파괴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효과가 있음은 천강시의 목을 뚫음으로써 실증되었
다. 목을 뚫을 수가 있다면 다른 곳도 뚫을 수 있는 것이다.
검강을 검신을 따라 흐르게 함으로써 베는 것도 찌르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게 하기 위해서는 좀더 수련이 필요하지만 아쉬
운 대로 일단 쓸 정도는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화영은 발끝만으로 미끄러지듯 뒤로 움직여 자신의 앞
에 있는 천강시를 내버려두고, 상음의 가슴을 밟고 있는 천강시
를 향해 검을 찔러 갔다.
등평의 말대로 비참한 결과였다.
대주들의 협공에 의해 땅바닥에 누워 버린 천강시는 단지 중
심을 잃었던 것뿐이었다.
그 뒤에 쏟아져 내린 공격들이 그에게 타격을 입혔다면 얘기
는 달라졌겠지만 불행히도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천강시가 바닥에 누운 채 발을 들어 하석을 걷어찼을
때 대주들은 가슴이 멎는 듯한 충격과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하석의 가슴은 이미 멎어 버렸다.
천강시가 팔을 휘둘러 상음의 다리를 때리며, 다른 한 손으로
형사랑을 잡아갔을 때 그때 이미 그의 가슴은 소리 내어 터져
버렸다. 천강시의 일격이 만든 결과였다.
형사랑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천강시의 발에 걷어차인 하석의 가슴이 움푹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물러섰다.
피를 담아 놓은 가죽주머니를 누르면 볼 수 있을 것 같은 모
습으로 피를 뿜으며 일 장이나 허공으로 들렸다가 다시 떨어지
는 하석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물러서고 있었다.
상음은 천강시의 손에 발목을 맞고 쓰러져 버렸다. 천강시의
만근지력 앞에 그의 발목은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갔다.
그는 바닥에 손을 짚고 급히 되일어나려다가 쓰러져 버렸다.
발목에서부터 타는 둣한 아픔이 기어올라와 온몸이 마비될 정도
로 저렸던 것이다.
겨우 허리를 들고 힐끗 바라본 발목에 하얀 나뭇가지 같은 것
이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예리한 각도로 부러져 나간 끝, 핏라 끈 같은 것이 이리저리
붙어 있는…….
그것이 정강이 살을 뚫고 튀어나온 자신의 다리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한참이 더 걸렸다.
기절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보다 시급한 일
이 있는 것이다.
상음은 몸을 굴려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그의 가슴팍에 육중한 무게가 실
렸다.
상음은 자신의 가슴을 밟고 있는 천강시를 절망적으로 보았다.
우두두둑!
갈비뼈 부러지는 소리가 귓가에 천둥처럼, 염라대왕의 망치소
리처럼 들려 쾅다.
통렬한 아픔!
상음의 꽉 다물어진 이빨들이 부러져 튀어나왔다. 고통에 못
이긴 그의 마지막 몸짓이었다.
화영의 검은 천강시의 무릎을 꿰뚫고 있었다
상음의 가슴을 으스러뜨린 그 발을 거슬러 올라가면 볼 수 있
는 무릎이었다.
이제는 꿰뚫어도 파괴해도 소용없는 무릎이었다.
"상(常) 아저씨!"
화영의 귓가에 들려 온 월몽영의 절규는 이 발에 밟힌 사람,
그래서 죽어 버린 그 사람의 신분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여기 광장에 뒹구는 무수한 주검과 마찬
가지로 그가 생전에 지녔던 이름이 무엇이든 이제는 상관없게
된 것이다.
화영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약간의 분노
를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싸움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의 생애를 통틀어서도 그리 익숙한 감정은 아니
었다.
쉭!
청풍검의 검끝이 작은 원을 그렸다.
검은 이미 천강시의 무릎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원
은 무릎 안쪽에서 그려졌다.
하얗고 조그만 둥근 것이 검의 회전을 따라 천강시의 무릎에
서 빠져 나왔다.
인체와 골격에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슬개골(膝蓋
骨), 즉 무릎의 중앙에 있는 종지뼈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슬개골을 잃어버린 그 천강시가 이제 적어도 두 발로
서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도 동시에 알 수 있을 것이고……,
칙!
한쪽 무릎을 지탱해 주는 축을 잃고 기우뚱 쓰러져 버린 천강
시의 어깨에 청풍검이 다시 박혔다. 천강시는 바닥에서 일어나
려 버둥거렸다.
칙!
반대된 어깨.
칙!
목덜미였다.
화영의 검은 관절과 관절을 연결하는 부분만을 정확히 꿰뚫어
버리고 있었다.
천강시는 이제 벌레처럼 꿈틀거릴 뿐 누구에게도 위헙적인 존
재가 될 수 없었다.
위협적인 존재는 그의 등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또 하나의 천
강시였다.
화영은 뒤로 돌아서면서 검을 휘둘렀다. 마치 기다리고 있다
가 회심의 일격이라도 가한 것처럼 침착한, 달빛처럼 매끄러운
일검이었다. ,
독목야차(獨目夜叉) 방각(龐覺)은 애초부터 강(强)일변도의
무공을 가진 사람. 상대가 누구든 물러서 본 적이 없다.
천강시와 싸우고 있다고 해서 변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가
장 먼저 쓰러진 사람이 그였다.
금빛 방패가 빙그르르 돌며 허공에 떠올랐다. 그 한쪽이 형편
없이 우그러져 있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
다. 이 상황에서 자기자신 이외의 사람에게도 신경을 쓸 수 있
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월몽영은 물론 여유를 부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월몽영이기 이전에 방소접(龐少蝶), 한 아버지
의 딸이었고 딸은 아버지의 안위에 무관심할 수 없는 법이었다.
한 순간, 방패가 떠오르자 사부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버텨
오던 월몽영은 천강시보다는 아버지의 방패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땀과 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이 아버지의 쪽으로 향했을 때,
방패는 포물선의 정점을 지나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고 방각은
도끼의 구부러진 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천강시의 머리를 내
려치고 있었다.
그녀는 보았다.
붉게 물든 얼굴, 산발한 머리카락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
고, 두 눈에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주저하거나 두려워하는 라이
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이 신념에 가득 찬 모습으로 단호하게 도
끼질을 하는 모습을.
아버지는 예전의 아버지와 변함이 없었다. 항상 강하고 꺾이
지 않는 용기를 가진 남자였다. 지금의 아버지는 더욱 그랬다.
그런 용기와 단호함은 아버지에게는 변하지 않는 가치였다
비록 당신의 온몸이 이미 상처투성이였다고 해도, 반쫌 허공
에 뜬 당신의 배가 천강시의 손가락에 걸려 반쯤 찢겨지고 있다
고 해도…….
설흑 이것이 당신의 마지막 도끼질이라고 해도…….
세상엔 변하지 않는 가치라는 것도 있는 법이니.
그녀는 결과를 보기도 이전에 먼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기
이전에 먼저 눈물부터 흘렸다.
그러나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볼 수 있었다.
방각의 거대한 도끼가 한 순간 일그러졌다고 할 정도로 강하
게 천강시의 머리를 때리고, 때린 그 힘보다 더 강하게 되튕겨
나가며, 방각의 몸 또한 그렇게 튕겨져 구르는 것을……
한 줄기 선연한 핏자국이 아버지의 뒤로 장식처럼 그려지는
것을…….
"아버지!"
월몽영의 부르짖음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이 떨쳐지고, 여태 짧게 감겨 있던 대선룡이 주르르
그 긴 몸을 펼치고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얘야!"
현현소녀가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이미 방각을 날려 버린
천강시만을 전심전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장내에 가득한 신음 소리와 비명, 거친 숨소리들은 이미 그녀
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와 천강시 사이에 있는 숱한
군상들도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쐐액!
이 장에 달하는 대선룡이 검은 몸체를 꼿꼿이 세워 창처럼 찔
러 갔다. 머리의 세모꼴 금속이 독사의 그것처럼 곤두서서 흔들
리고 있었다.
천강시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 검은 채찍의 머리가 잡혔다.
월몽영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채찍의 끝이 자신을 움켜쥔 천강시의 팔뚝을 감았다. 마치 살
아 있는 뱀처럼…….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대선룡을 잡아당겼다. 채찍의 몸체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천강시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끌려왔다. 어쩌면 그가 그냥 다
가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에게는 거리가 필요했다. 천강시를
자신의 영향력으로 다룰 수 있는 거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현현소녀의 눈빛이 다급해졌다.
월몽영이 지금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또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천강시를 부서 버
릴 수 있는 방법이 없는 한 어떤 시도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녀는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가 죽음의 길로 스스로 걸어 들
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도와 줄 수가 없었다.
그저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
는 방금까지 제자가 맡고 있던 천강시까지 둘을 한꺼번에 상대
하고 있었다.
끽……! 끽……!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들려 오고 있었다. 월몽영이 천강시의
목을 감아 당기고 있는 소리였다.
그녀도 결국 고란고성에서 야광충이 한 것과 같은 생각에 도
달했던 것이다.
그냥 자를 수 없다면 감아서 당겨 보면……, 이라는 생각이었다.
정 안되면 목이라도 졸라 보자는 발악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하면 어떤 결과가 되는지 알고 있었기 때
문에 현현소녀는 말리고자 했던 것이다. 바로 지금 드러나는 것
이 그 결과였다.
천강시의 다른 손이 대선룡을 잡았다. 그리고 당겼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월몽영은 몸을 젖히고
버텼지만 주르륵 당겨 가고 말았다. 천강시의 두 손이 그녀의
머리를 향해 내밀어졌다.
월몽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 손을, 그리고 눈을 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 분명 그것은 인간의 눈은 아니었다.
달려오는 마차의 바퀴에 깔려 죽는 순간에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인간은 분명히 아닌, 의식이라곤 없는 물건 같은 것에 치여
죽는 기분이라는 것이…….
검은 두 손이 눈앞에 극도로 확대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저
두 손에 잡히면 그녀의 머리는 계란처럼 깨지고 말 것이었다.
문득 당기는 힘이 사라졌다. 천강시는 잠시 중심을 잃은 모습
이었다. 천강시의 목과 팔에 오색의 채대 하나가 걸려 있었다.
월몽영은 그것이 누구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도…….
그녀는 대선룡의 손잡이를 비틀었다.
한 손으로 대선룡을 잡아당기면서 그녀는 천강시에게 덮쳐
갔다.
그녀의 다른 한 손에 들린 단검, 소용아(少龍牙)가 천강시의
눈에 파고들었다. 대선룡의 손잡이에 감추어져 있던 용의 이빨,
소용아였다.
천강시는 그녀보다는 현현소녀에게 더 우선권이 있다고 생각
했던 모양이었다. 소용아가 눈을 후벼 파고 있는데도 천강시는
현현소녀의 채대를 당기고 있었다.
현현소녀는 비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섬세한 손을 극도로
영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포쇄결은 사량발천근(四兩拔千斤)과 같이 상대의 움직임과 힘
에 섬세하게 영향을 받는 무공이었다.
당기면 당겨 가며 밀고, 밀면 역으로 밀리면서 당긴다. 강하
면 강한 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거기에 알맞은 힘을 사용해야
하고, 한 치라도 힘의 방향이 틀리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
는 것이었다.
천강시는 현현소녀에게 밀려 오히려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채대는 마치 꼭두각시라도 조종하듯 그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
었다.
월몽영은 그 사이에 천강시의 목을 잡고 매달렸다. 눈 하나가
빠져 굴러 나왔다. 소용아는 다른 눈을 후비고 있었다.
애초에 현현소녀가 상대하던 두 천강시가 그 싸움에 붙었다.
현현소녀의 등을 향해 발톱을 세운 것이다.
그 중 하나가 갑자기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고 고개
를 돌렸다.
형사랑이 창 하나를 주워 들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그 천강시의 발목을 때려 현현소녀를 향해 다가가지 못하게 한
것이 그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천강시는 아무런 방해 없이 다가갔고, 현현소녀
의 넓은 등판에 손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현현소녀는 등짝에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월몽영이 매달린 천강시의 중
심을 잃게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만 떨어져!"
월몽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녀는 사부의 말을 듣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생각한 가장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려 하고 있었다. 천강시의 눈을 통해 소용
아를 머릿속 깊숙이 찔러 넣고 있었던 것이다.
머릿속을 휘저어 놓아도 움직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움직일 수 있었다.
천강시는 한 손으로 현현소녀의 채대에 계속 저항하면서 다른
손을 돌려 월몽영의 어깨를 잡았다.
으스러지는 고통이 한 순간에 심장까지 밀고 들어왔다. 월몽
영은 더 이상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모아 소용아를 한바퀴 돌렸다.
눈구멍에 긁힌 칼날이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천강시가 다시
휘청거렸다. 현현소녀의 채대에 의한 결과였다.
거기 화영이 있었다. 그리고 달빛처럼 싸늘한 검기가 말려왔다.
화영은 순간적으로 검을 멈추었다.
검끝은 천강시의 목에 매달린, 그러나 이제는 어깨를 잡혀 움
직이려야 움직실 수도 없게 된 월몽영의 목에 실낱 같은 차이로
멈추어져 있었다.
달빛이 달빛 그림자[月夢影]를 잘라 버릴 뻔했던 것이다.
현현소녀의 등짝은 완전히 터져 있었다. 갈가리 찢겨져 등골
이 보일 정도였다.
저편에서는 형사랑이 휘두르던 창이 천강시의 손에 수수깡처
럼 부러져 나가고 있었다.
방각은 배가 터져 바닥에 쓰러져 있었지만 미약한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월몽영의 어깨가 조금씩, 천천히 으스러지는 소리가 그의 귀
에 들려 왔다.
광장의 저편에서는 혈문룡과 원도살, 그리고 황룡이 각각 하
나씩의 천강시를 맡아 싸우고 있었다.
자신이 하나, 예전에는 석두의 후예라 불리던 황룡이 또 하나
의 천강시를 동작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놓았지만 아직 천강시
는 여섯이나 남아 있었다.
그리고 천강시는 황룡과 자신 외에는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
람이 없었다.
화영은 찰나의 순간에 그런 정세를 파악했다.
'하나씩!'
하나씩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힘이 닿으면 다행이고, 그렇
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냉정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었다.
그는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귓전에 울리는 비명과 병장기 소
리 속에서 조용히 숨을 골랐다. 청풍검의 끝이 다시 빛을 발하
기 시작했다,
천강시의 손이 팔꿈치까지 깊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살이 쪘다고 해서, 설흑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살이 쪘다고
하더라도, 뼈까지 같이 커지는 것은 아니다.
현현소녀의 뼈대도 그래서 보기보다는 작았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등뒤로부터 파고든 천강시의 손은 두터운 살덩어리를
한참이나 파고들어가서야 딱딱한 늑골에 부딪쳤고, 그것을 부러
뜨리고 허파를 갈가리 헤치더니 양쪽으로 넓게 퍼진 허파의 사
이에서 심장을 찾아내었다.
그녀의 움직임이 딱 멈주었다. 두터운 피부 위로 굵은 핏줄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무어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그녀의 넓은 얼굴에 비해 작기 그지없는 입술이 벌어졌지만
말보다 피가 먼저 튀었다.
목구멍에서 쌔액, 쌔액 하는 소리와 함께 피거품이 홀러나왔
다. 폐에 구멍이 뚫렸기 때문이었다.
"사…… 부……!"
목이 메어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월몽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현현소녀의 입술이 발작적으로 벌어졌다.
그 입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피가 그리 두렵지도, 추하지도 않다
고 월몽영은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사부의 뒤를 따라가는 것도 머지않을 것이
다. 천강시의 손아귀에서 이대로 빠져 나가지 못한다면, 그녀도
결국은 사부와 같은 모습으로 죽고 말 것이다.
그것이 다소나마 사부에게 덜 미안한 이유가 되었다.
'사부님……, 아버지……!'
어깨에서부터 밀려오는 통증이 점점 세력권을 확대시키고 있
었다.
현현소녀의 죽음으로 자유로워진 천강시의 다른 한 팔이 눈앞
으로 다가왔다.
'이제 곧……!'
월몽영은 죽음을 각오했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죽음이 차라리
달콤한 휴식의 손길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를 쉬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변화는 소리없이 다가왔다.
그녀의 눈앞에 빛이 번뜩였다.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로 다가오던 천강시의 주먹이 강한 벽에라도 부딪
친 것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천강시가 그 반동으로 기우뚱하는
가 했더니 월몽영은 자유로운 몸이 되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천강시의 온몸에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어깨에 난 구멍이 아마도 그녀의 자유를 되찾아 준 주원인일
것이다. 천강시의 힘없이 늘어진 팔이 증거였다.
그 다음은 목이었다.
빛, 화영의 청풍검이 만들어 내는 검광은 천강시의 목을 수없
이 왕복했다. 그때마다 목은 조금씩 바람구멍을 만들었고, 결국
몇 줄기 가죽에 매달려 어깨 위로 처져 흔들리게 되었다.
머릿속이 뒤집어지고도 움직이던 천강시가 그 상태에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결국 아무리 천강시라도 그냥 장식
으로 달려 있는 머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화영의 발이 가볍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녀의 얼굴 옆을 스쳐
갔다. 그는 현현소녀를 죽인 또 다른 천강시를 상대하려 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튀어나왔다.
월몽영은 바닥에 맥없이 쓰러진 상태에서도 무슨 소리일까,
하고 의아해 했다.
화영이 다시 소리쳐 불렀다.
"야광충!"
월몽영은 머리를 천천히 움직여 야광충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간지옥의 입구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싸움
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취하고 있던 그 자세였다.
그러나 월몽영은 문득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 싸움을
해결하려면 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여태 안 나선 거지?'
검을 쓰는 이 사내와 저기 혈문룡이라는 사내는 사실 야광충
때문에 여기 온 것 같았다.
그들 한족들의 입장에서도 옥주가 모두 쓰러진 상태에서는 지
휘할 사람이라고는 야광충밖에 남지 않았다. 수심결의 일원으로
서, 그리고 회주의 제자로서…….
양쪽 모두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는 것이다.
월몽영은 야광충이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까
맣게 잊고 여태 그가 나서면 유리하다는 생각을 않았던 것이 신
기하기만 했다. 게다가 그는 다른 통로도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 야광충이 팔짱을 푸는 것이 보였다.
"갈라라!"
"음?"
등평은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야광충을 보았다. 야
광충이 하는 말을 몰라서는 아니었다. 갈라놓으라는 그 말과 손
가락으로 광장의 절반을 가르는 시늉을 하는 야광충의 동작을
보면 무슨 뜻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상황을 분석해 보아도 그것 외에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으
니 말이다.
'일단 천강시와 한족들을 갈라놓자는 이야기겠지? 혼전 상태
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그러나 왜 그 말을 그에게 하는가?
등평은 팔짱을 풀고 양쪽으로 손을 벌려 보였다.
"내가 왜?"
야광충이 그를 싸늘한 눈으로 보더니 손을 뻗쳤다.
"죽기 싫으면!"
등평은 피식 웃었다. 그는 구경만 하다가 거미줄 같은 지하통
로로 다시 도망가 숨으면 되는 것이다. 망명자, 한간들을 위해
손을 빌려 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의 신형이 흐려졌다. 붉은 안개는 피어오르지 않았지만 예
의 은신술을 발휘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라져 버리면……!"
원래는 '어쩔 셈이냐!'고 조롱 조로 물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 야
광충의 그것이 그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화십삼수가 발휘된 것이다.
등평의 눈이 복잡한 감정으로 얼룩졌다. 그 얼룩의 대부분은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의 감정이었다.
연막은 없었지만 은신술의 위력이 크게 감소되는 것은 아니었
다. 도구보다는 본신의 신법에 의지하는 것이 그의 은신술이었
던 것이다.
그런데 왜?
어젯밤에는 통했는데 지금은 왜 통하지 않는 것인가?
야광충이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둥평은 달리 제압된 곳
이 없는데도 그 손길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야광충이 그의 눈
에 눈을 마주치고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하자는 대로 않으면……, 장담하지! 넌 반드시 죽을 것
이다."
그는 등평의 목덜미를 놓고 돌아섰다. 이것은 일종의 도박이
었다.
그에게는 한번 더 등평을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이번에는 그는
준비했고 등평은 준비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금 등평이 욀요했다. 아니, 등평 정도의
무공을 지닌 협조자가 한 사람 있는 것은 이 시점에 중요한 의
미를 가졌다. 간신히 움직일 정도가 되긴 했지만 그는 아직 정
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몸이 대강이라도 회복된 지금 첫 공격의 목표를
등평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등평은 돌아선 야광충의 등을 묘한 눈길을 띠고 바라보았다. 그
는 야광충을 돌려 세워서 한번 더 잡아 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가 망설여졌다. 한번 더 그의 손에 제압당하면
그는 심령상 중대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 타격으로 그는 영영 야광충이라는 이 사내에게 위
축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팔 할 이상의 성공
률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는 도박은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
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게다가 야광충이 돌아서기 직전에 한 말이 마 음에 걸렸다. 그
의 죽음을 예고하지 않았던가!
'그는 내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짐작하고 있는가?'
그럴 수 있었다.
'그는 지하통로에 다른 위험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럴 수도 있었다.
'흑은 단순한 위협?'
그럴 확률이 가장 높았다.
그러나 역시…… 도박은 할 수 없었다.
등평이 야광충의 뒤를 스치듯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갈라놓으면 되는 것인가?"
야광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형사랑을 향해 몸을 날렸
*. 그는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되어 한족들 사이를 스쳤다. 등
평의 모습도 이미 사라져 있었다.
변화는 순간적으로 시작되었고,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끝이 났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야광충의 목표는 애초부터 천강시의 제거가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단지 천강시를 한족들로부터 분리시키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륜나라는 것이 있음으로 해서 손쉽게 이루어졌다.
그는 화영의 도움 아래 겨우 죽음을 면하고 있던 형사랑의 옆
에 내려섰다.
화영은 그의 등장을 예민하게 느끼고 천강시 하나에게서 손을
뗐다. 그 천강시가 야광충에게 달려들었다.
야광층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천강시의 주먹과 그의 손이
스치둣 지나가는 그 순간, 야광충의 손이 천강시의 소맷자락을
잡고 발은 무릎을 건드렸다.
천강시가 순간적으로 허공에 떴다. 야광충에게 소맷자락을 잡
힌 그대로였다.
야광충의 양손이 원을 그렸다. 천강시는 수레바퀴 돌 듯이 회
전하며 일 장 밖에 나가떨어졌다.
고란고성에서 귀조가 기마대를 던져 버리던 바로 그 수법 전
륜나였다.
야광충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처음 사용하는 수법이지만 대강의 묘리를 습득했다는 것이 명
확해졌다. 야광충은 이제 조금 더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
다면 이제 망성일 것이 없었다.
그는 천강시가 꿈틀거리며 일어서고 있는 곳으로 미끄러지둣
다가갔다. 겨우 일어난 천강시가 그의 손 아래 다시 한번 날려
갔다.
"껍질만 단단하지 정말 쓸데없는 것들!"
야광충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그의 눈은 새로운 먹
이를 찾고 있었다.
화영의 상대는 이제 하나였다. 혼자서도 여유있게 상대할 수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야광충이 끼여들었다.
또 하나의 천강시가 나가떨어졌다. 화영의 검에 맞부딪쳐 주
춤 물러서는 천강시의 목덜미를 나꿔채 던져 버린 것이다.
화영의 검이 움직이는 방식을 바꾸었다. 그도 이제는 애써서
부수려고 하지 않았다.
야광충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그는 한걸음씩 전진하며 일단
멀리 던져진 천강시들이 다시 다가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야광충이 멍하니 서 있는 형사랑과 한족들을 돌아보며 짧게
명령했다.
"생존자!"
비교적 그와 오래 지냈던 형사랑이 그 뜻을 재빨리 짐작했다. 그
는 천강시의 마수에서 벗어난 한족들을 지휘해 생존자를 찾았다.
월몽영은 방각의 곁에 앉아 있었다. 방각은 의식은 없었지만
살아는 있었다.
그 외에는 거의 산 사람이 없었다.
형사랑은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자 조금은 침착해졌다. 그리
고 그제서야 생존자를 어디로 옮겨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
달았다. 그것은 이후의 행동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문제였다.
그가 소리쳤다.
"어디로 옮깁니까?"
천강시 둘을 화영에게 맡기고 황룡이 싸우는 곳을 향해 가던
야광충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무간지옥!"
등평은 야광충보다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그는 천강시보다
는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아우성치는 한족들을 집어 던졌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긴 했지만 천강시보다는 다루기 쉬운 존재
들이었다.
여기에는 천강시가 셋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를 황룡,
혈문룡, 그리고 원도살과 민심창 조훼가 맡고 있었다. 흑룡사의
사대천왕 중 또 한 명, 청두사 복군무는 이미 비참하게 죽은 후
였다.
그리고 그들은 화영보다 눈치가 덜 빨랐다. 황룡은 그렇다 치
고, 혈문룡과 원도살은 등평 덕분에 장내가 약간 정리되는 기미
가 보이자 잘됐다는 듯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혈문룡이 본격적으로 여의색자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동
안 쌓였던 분노를 한꺼번에 털어 버리려는 둣 광풍노도(狂風怒
濤)와도 같이 매서운 기세였다.
원도살도 살기에 있어서는 그에게 지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
렇게도 냉철하던 그가 한번 피를 보더니 광분의 경지를 보여 주
고 있었다.
거기에 야광충이 이상한 고함을 치며 끼여들었다. 서장어로
황룡에게 말한 것이다.
황룡이 문득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뒤집어 연달아 삼십여 장
을 내갈겼다. 천강시가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뒤로 밀려갔다.
야광충은 혈문룡과 천강시 사이에 파고들었다. 여의색자창의
날카로운 끝이 바람을 끊으며 휘둘러지고 있었다. 야광충이 그
에게 소리쳤다.
"수하들을 살릴 생각을 해!"
혈문룡을 향해 달려들던 천강시가 그의 손끝에서 한바퀴 맴을
돌더니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챙!
여의색자창이 멈추었다. 야광충의 왼쪽 팔목에 감겨진 비구에
막혀서였다.
혈문룡의 충혈된 눈이 야광충을 꿰뚫어 버릴 듯 노려보고 있
었다. 그의 숨소리가 분노를 말해 주고 있었다.
야광충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퍼퍼펑!
나가떨어졌던 천강시가 일어서더니 중풍 걸린 노인처럼 몸을
떨며 물러서고 있었다. 황룡이 그에게도 삼십여 장을 선물했던
것이다.
황룡은 제자리에 다리를 벌리고 선 채 두 천강시를 각각 한
손씩만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아까처럼 어렵지가 않았다. 그저 다가오면 밀어서 제자리로
돌려보내면 되는 것이다.
혈문룡이 먼저 눈을 깔았다.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
왔다.
"수하를 살리는 게 먼저라……! 옳은 말이다."
그는 여의색자창을 거두더니 원도살과 천강시 사이로 찔러 넣
었다. 원도살이 주춤 물러섰다.
야광충이 그 천강시의 앞에 바짝 붙더니 손을 내밀었다. 천강
시가 양손을 들어 그를 후려쳐 왔다.
야광충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꺼지더니 천강시의 뒤에 다시 나
타났다. 그의 손이 천강시의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천강시는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야광충의 두 손이 원을 그렸다. 그의 발이 천강시의 하체를
가볍게 차는 것과 동시였다. 천강시는 공중에 솟구치더니 격렬
히 회전하며 뒤로 날아가 버렸다.
원도살이 여의색자창을 비켜 천강시를 향해 다시 덮쳐 들려
했다.
혈문룡이 소리쳤다.
"냉정을 찾으세요! 대열을 정비해야 합니다!"
원도살은 뭉툭한 도를 여의색자창에 대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시커멓게 물들고 있었다. 이빨 가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더니 이내 짐승의 울부짖음 소리처럼 변했다.
"으…… 으……, 으아악!"
원도살이 칼을 들어 여의색자창의 강철창대를 세 번이나 두드
렸다. 혈문룡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원도살의 눈이 굳게 감겼다가 다시 뜨였다. 그의 검게 죽어
들었던 안색이 순식간에 제 색을 찾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좋아, 물러서자!"
* * *
지하통로.
그 느낌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봄바람이 가늘게 불어 뺨을 간질이고 사라지고 나면, 그렇게
가볍게 존재했다가 사라지고 나면 경험하는, 방금 바람이 불었
는지도 의심스러운 그런 느낌.
너무도 가벼운 느낌이었기 때문에 착각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벼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느낌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종의 움직임이 확실히 있었으며, 그 움직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해도 이런 식으로 가벼운 존재감은 단 하
나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천둔귀(天遁鬼)!
숨고자 하면 누구도 찾을 수 없으며, 움직이면 그 형체를 알
아볼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천둔귀였다.
그가 만들어 낸 작품 중 하나가 그를 알아보고 앞길을 터 준
것이다.
로부 옹고트는 칠흑 같은 지하통로의 어둠 속에서 이빨을 드
러내고 웃었다. 누군가 이 어둠을 뚫고 사물을 환히 볼 수 있다
면 로부 옹고트의 모습에 경악했을 것이다. 온통 피로 물든 옷,
피로 물든 얼굴 가운데에 하얗게 드러난 이빨을 보고 말이다.
그는 마치 방금까지 핏물에 절이고 있다가 꺼내어진 고깃덩이
처럼 유혈에 정어 있었다.
그것이 그 자신이 흘려 낸 피는 아닌 모양이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피를 흘리고 살아서 움직이기는 불가능하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와 다름없이, 아니 오
히려 극도로 유쾌한지 춤추듯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보기에도 끔찍한 물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시체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머리만 남은 시체였다.
그는 목에서부터 끊겨진 한 개의 머리통을 들고 무간지옥에서
지옥연무장으로 통하는 지하통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통로는 길고 좁았다. 그리고 어두웠다.
지옥성의 어디에도 횃불을 밝힐 수 있지만 여기는 불가(不可)
했다. 그것이 쌍고르마에게 내린 명령이었었다. 이십여 년 전
에……!
로부 옹고트는 다시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이 지하통로의 존재를 내가 알면서도 그냥 둔 것을 알까?'
지옥성이 그의 것이 된 지 이미 이십억 년이었다. 그는 이십
년 동안이나 자기 영역에 미지의 공간을 남겨 두고도 편히 자기
에는 지나치게 섬세한 신경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하통로는 단지 필요에 의해 덮어두었을 뿐이었다. 알면서도
그냥 덮어둬야 할 일이 세상을 살다 보면 부지기수로 있다. 그
렇게 덮어두고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그것이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오늘처럼……!
"알 수도 있겠지!"
그는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야광충이 그 사실을 알 수도 있었다. 시간이 가면 반드시 일
게 될 것이다.
문제는 야광충이 언제 그것을 아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선택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가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를 보면 그 그릇의 크기를 짐작
할 수 있으리라! 나는 네가 되도록 큰 그릇이기를 바라 마지않
으니……!"
로부 옹고트는 마치 야광충이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앞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이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한 색
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한때 그는 그를 진정으로 걱정하
고 아낀 적이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런지도 모른다. 그는 야광충을 가까운 곳에
서 지켜보는 동안에 스스로의 모순된 심경을 깨닫고 놀란 적이
적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는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너는 여기 있으면 안되겠다. 아직은 그를 죽일 때가 아니
니……!"
이번에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로부
옹고트의 앞에는 어느새 비대한 몸집의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그에게 말한 것이다.
분명 사람인데 사람 같지가 않아 보였다. 거대한 항아리를 연
상시킬 정도로 비대해서만이 아니었다.
로부 옹고트의 앞에 선 사내의 몸에서는 푸르스름한 광채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비오는 밤 무덤가를 나르는 귀화(鬼
火)의 빛과도 같은 푸르스름한 기운이었다.
천기칠사(天忌七邪) 중 또 하나인 아수라이화귀(阿修羅
鬼)가 통로 가운데에 석상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로부 옹고트는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따라오라!"
아수라이화귀는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비대한
덩치가 미끄러지듯 뒤로 반 바퀴 돌아갔다.
그는 마치 무엇에 의해 떠밀리기라도 하는 듯 천천히 움직여
로부 옹고트의 뒤를 따랐다.
그의 몸에서 은은히 뿜어지는 푸른빛에 의지해서 자세히 살펴
본다면 그의 발이 바닥에서 반 치 가량 떨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를 더 가자 또 한 사람이 통로의 중앙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수라이화귀의 몸에서 발산되는 푸르스름한 광채가 아니었다
면 역시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조용히 서 있는 그림자.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싼 그 사람은 멍한 표정의 여인이었다.
절색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예쁜 얼굴형을 가지고 있는 그녀
가, 마치 넋나간 둣 광채없는 그 눈과 멍한 표정의 그녀가 지금
지옥성에서 가장 위험한 일곱 명 중 하나라는 것은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독종독인(毒宗毒人), 손을 뻗치는 것만으로도 인간을
한줌 핏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의 괴물이었던 것
이다.
로부 옹고트도 그 앞에서는 아무 말 없이 지나쳐 갔다. 마치
입이라도 벌리년 중독될 것을 염려하는 듯이……!
한참 그렇게 걷던 로부 옹고트가 문득 중얼거렸다.
"조금 과한 것은 아닐까? 이러다가 그가 정말 저것들에게 당
하면……? 내가 이십 년을 꿈꿔 오던 것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
지 않을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이리 소심해졌는가? 만약 이런 것들에게 당할 정도
면 내게도 필요가 없으리니……!"
그는 멈춰 서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통로는 어둠
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 사람이라도 서 있는 것처럼 한참을 쳐다보
고 있었다.
입이 벌어지고, 말에 앞서 한숨이 나왔다. 그 뒤에는 중얼거
림이었다.
"이제 돌이키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늦었으니……, 나를 믿고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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