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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일 연중 8주일
제1독서 : 집회 27,4-7
제2독서 : 1코린 15,54-58
복 음 : 루카 6,39-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43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44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야,
형제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제대로 빼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형제의 눈에 있는 티가 뚜렷이 보이지 않는데도
자신은 뚜렷이 보고 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빼내 주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뚜렷이 보지 못하고 있음을
먼저 살펴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를,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상황에 적용해 봅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면
감정에 영향을 받아 이성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못한 것이,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면서 그것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단죄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상처를 받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눈에 들보가 박히게 됩니다.
상처로 내 눈에 박힌 들보를 빼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고와 판단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처받은 감정을 돌보고 용서하는 과정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용서에는 의지적 용서와 영적 용서 사이에
감정적 용서의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과정이기에
인내와 영적 용서 사이에 감정적 용서의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과정이기에 인내와 용기 그리고 지혜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의 말씀이 이 긴 여정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나의 말들로 나의 마음속 생각들이 드러납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입으로 드러난 말들로 마음속 생각들을 살펴볼 때,
우리는 내 눈에 박힌 들보를 빼내고 용서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몇 년 전, 조금 특별한 곳에서 강의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천주교 교정사목위원회에서의 부탁으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강의입니다.
간곡한 부탁에 허락을 하기는 했지만, 강의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걱정이 커졌습니다.
솔직히 구치소가 어떤 곳인지 잘 몰랐고,
그래서 우락부락한 험상궂은 사람이 가득할 것만 같았습니다.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게 욕하며 소리치지는 않을까?,
전혀 관심이 없어서 ‘너는 말해라. 나는 잘련다.’며 잠만 자는 것이 아닐까?
“그만합시다”라며 강압적으로 나를 통제하려 들지는 않을까? 등의
부정적인 생각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생각들로 전날 밤을 꼬박 새우고 구치소에 갔습니다.
입구에 신분증을 맡기고 들어간 뒤, 몇 개의 문을 통과해 넓은 강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재소자들을 드디어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긴장하며 강의를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어떤 곳에서 보였던 반응에 뒤처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대답해 주었고, 힘찬 반응을 보여 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 가지고 있던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잘못된 생각을 했던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미리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는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누구를 판단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죄 많은 사람입니다.
그 판단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고,
그 결과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만이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들보’는 조그마한 것이 아닙니다.
무거운 하중을 지탱하는 구조물 또는 구조 요소입니다.
‘보, 빔(beam)’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자기 안에 커다란 문제를 안에 가지고 있으면서
남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죄를 안고 있을까요?
교만, 육욕, 재물에 대한 욕심의 죄 등등 적지 않은 죄로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남 탓만 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좋은 나무의 모습을 갖춘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남을 고쳐 주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부터 깨끗하게 하고 고쳐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죽음을 너머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3월의 첫 주일입니다.
기승을 부리던 겨울이 가고 봄이 옵니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사순시기를 준비하면서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우리의 ‘혀’와 ‘눈’을 통해서 ‘마음’을 보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혀)에서 드러나고”(집회 27,4),
“사람의 말(혀)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집회27,6)고 말하며,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45)라고 말합니다.
또한 복음은 눈 속에 있는 ‘티’와 ‘들보’도 ‘마음의 곳간’에서 흘러나옴을 말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루카 6,45)
그러니 이제는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찬미하오며,
우리의 ‘혀’가 “아침에는 당신 자애를, 밤에는 당신 진실을 알리나이다.”(시 92,3) 하고
화답송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마음의 '선하신 뜻'(루카 10,21)을 품으신 아버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1코린 15,57)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고, 그 승리를 우리에게 주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14-15)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1코린 15,58)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며,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시 13,6) 하고
영성체송을 바쳐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하신 말씀입니다.
먼저 '눈먼 스승의 비유', 곧 제 눈에 들보를 깨닫지 못하고
형제 눈에 있는 티를 빼려고 하는 위선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앞 장면과 연결해 볼 때,
결국 ‘판단하지 말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판단보다 앞서, 하느님의 '선의(호의, 자애)의 마음'(헤세드)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3)
구약에서 ‘열매’는 주로 행동을 가리키고(이사 3,10; 예레 17,10;21,14; 호세 10,13),
‘나무’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거짓 열매를 맺고,
참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참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가시나무가 무화과를 내지 못하고, 가시덤불이 포도를 내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매’는 ‘혀와 눈’, 곧 ‘말과 판단’을 통해 드러나는 행실로,
‘나무’는 ‘마음의 곳간’으로 표현됩니다.
곧 ‘열매’는 우리의 입으로 하는 ‘말’과 눈으로 하는 ‘판단’으로 드러납니다.
곧 ‘마음의 곳간’에 선한 것이 담겨 있는지 악한 것이 담겨 있는지에 따라
말과 판단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은 말과 판단의 곳간이요,
‘말과 판단’은 마음의 열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열매인 말과 판단을 보면, 나무인 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분명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이기에,
‘그리스도의 마음’, 곧 ‘호의의 마음’을 품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말과 판단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몸으로 하는 ‘실행’으로 드러나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하면서
'아버지의 선하신 뜻'(루카 10,21)을 실행하는 것을 당신의 ‘일’로 삼으셨고,
오늘 복음의 뒷 절에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라고 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선하신 뜻'(루카 10,21)의 ‘실행’이야말로 진정한 향기일 것입니다.
비록 홍수가 들이닥쳐도 떠내려가지 않는 반석 위의 집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향기일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삶이 당신 말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열매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으로 속이 꽉 찬, 좋은 열매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형제의 눈에서 티가 아닌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온다.
조욱현 토마 신부
지난 주일에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그가 하느님을 만나게 해줄 수 있는
사랑의 문화를 이룩해 나가는 것에 대해 들었다.
오늘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행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도구 중 하나가 언어이다.
한마디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슬픔과 분노를 자아내기도 한다.
집회서에서는 말이 인격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한다.
한 사람이 사용하는 말이나 말씨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재는 저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속뜻을 드러내신 것이 말씀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말씀은 창조적인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인간을 해방할 수도 있고 구원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니
우리가 하는 말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말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늘 하느님의 말씀과 일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평지설교의 결론 부분이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스승을 따라 행동하라고 가르치신다.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으며, 올바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또한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쳐 주는 것도 힘들다.
먼저 자신의 삶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하신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자신이 스승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제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자신은 큰 잘못을 범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남이 범하는 조그만 잘못도 참아주지 못하고 드러내려는 위선적인 면을 없애라고 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 8,7) 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위선이다.
나무에 대한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잘 기른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절대로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반대로 나쁜 나무 즉, 손질을 받지 못한 나무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열매를 맺는다(43절).
나무가 어떤지는 그 나무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아주 맛있는 무화과를 거둘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둘 수 없다(44절).
이제 이 비유는 사람에게 적용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착하다면 좋은 나무와 같이 자기 마음의 좋은 보물창고에서 선을 내어놓을 것이다.
반대로 악한 사람은 그의 마음의 악한 창고에서 오직 악만 흘러나올 것이다(45절).
사실 인격을 나타내는 마음은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통하여 말하게 되는 것이며,
선이나 악을 말한다면 그것은 각자 안에 담겨 있는 창고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입은 인격의 도구이며, 행위에 있어서 전 인격을 가리킨다.
이것은 긍정적일 수 있거나 파괴적일 수 있다(45절).
그러므로 좋은 나뭇가지에 시간에 맞추어 붙어있으면서 좋은 나무를 기르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자녀의 마음에 하느님 자신이 주시는 아주 귀한 보물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 있어서도 망가지고 말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부활의 희망이 주어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 때문에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은 헛되지 않다고 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닮고 또 잘 따라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행하지 않고
사탄의 말에 마음을 빼앗긴 결과 죄를 지었다.
잘못된 말과 거짓된 말을 받아들여 표현한 것이 죄를 지었고 죽게 되었다.
우리 마음의 창고가 악으로 가득 차 있어
거기에서 거짓된 말이나, 잘못된 말을 꺼내게 되면, 죽음으로 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참된 좋은 말을 꺼내면 우리를 또 다른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사탄과 거짓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주셨다.
거짓된 마음에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우리의 마음에서 좋은 것을 꺼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할 때,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다.
그러기에 주님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다고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이제 우리의 마음이라는 창고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재고조사를 해보자.
재고조사를 하면서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더럽힐 수 있는 악한 것들은
모두 버리고 좋은 것들을 잘 정리하여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좋은 것을 꺼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 보자.
항상 좋은 열매를 꺼낼 수 있으려면 이러한 마음의 정리를 통하여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내 마음의 창고에서 무엇을 꺼낼 수 있을까?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1977년이면 48년 전입니다. 당시 저는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난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난 사람은 성공할 수 있고,
난 사람은 권력을 얻을 수 있고, 난 사람은 재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든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든 사람은 학문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식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은 문화와 문명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까?
맞습니다. 난 여러분이 공부를 통해서 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된 사람은 나는 누구인지를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된 사람은 나는 어디에 있는지를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된 사람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사람입니다.”
48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선생님의 말씀은 제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다고 합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고 합니다.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깊은 감동과 울림을 주는 말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의 마음을 닫게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옳고 합당한 말 같지만, 듣는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는 말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판단입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네가 하는 일이 제대로 되는 일이 있겠니’라고
판단하면 자녀는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피부색, 외모, 직업 등 외적인 모습으로 쉽게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비난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입니다.
바리사이파는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냈다고 비난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한 죄인은 예수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당신도 내려오고, 나도 내려오게 해 주시오”라고 비난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너는 왜 늘 그 모양이냐!’라고 말하면 자녀는 상처를 받습니다.
세 번째는 강요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재능과 능력을 보지 않고
의대나 법대를 강요하면 자녀는 상처를 받습니다.
네 번째는 당연시입니다.
한 신자가 교회에서 오랜 기간 봉사를 해왔지만,
몸이 힘들어 잠시 쉬고 싶다고 말했을 때,
신부님이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면 교우는 상처받습니다.
친구가 힘든 일을 겪고 속상해서 이야기하는데 때, 이렇게 말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정도로 왜 그래? 다들 그렇게 살아.”
이렇게 말하면 친구는 상처받습니다.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힘든 일이 있어서 위로받고 싶다고 했을 때,
남자 친구가 이렇게 말하면 곧 헤어질 수 있습니다.
"네가 나 좋아하면 그 정도는 이해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오늘의 제2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의 독침은 죄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말입니다.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선포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시니 걱정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2000년이 넘은 지금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장례미사의 독서에도 봉독 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진실과 정의를 선포하는 말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 별처럼 빛나도록 여러분은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야 합니다.”
사실 내 흠결이 가장 큰 것이 분명한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젊은 수도자들의 수련장 역할을 할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수련장은 수도회의 미래를 책임질 후배 수도자들의
전반적인 양성을 책임져야 하니 어깨가 많이 무겁습니다.
수련장은 이태리어로 Maestro, 영어로는 Master,
그러니 말마디 그대로 스승이요, 바꿔 말하면 수도자들을 만드는 장인(匠人)입니다.
주로 주어지는 일은 미우나 고우나 늘 수련자들 곁에 붙어있으면서
제발 인간 되라고 잔소리하는 일입니다.
목표치를 설정해 주고 밀어붙이면서 자극도 줘야 합니다.
그러나 마냥 그래서는 어린 수사님들이 견뎌낼 재간이 없습니다.
때로 상담가가 되어 위로도 해줘야 하고, 격려도 해줘야 하고 박수도 쳐 줘야 합니다.
당근과 채찍을 바꿔가며 사용하면서 수도자로서의 틀을 만들어주는
3D 업종 종사자가 수련장입니다.
정기적으로 수련자들을 집합시켜 놓고 불러 모아 놓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도 많이 했습니다.
“수도자 될 사람이 이래도 되냐? 저래도 되냐?
기도 시간 적어도 10분 전에는 딱 나타나 있어야된다.
묵상 시간에 졸면 어떡하냐?
나중에 사목자요 공인이 될 사람이 밥 먹을 때 그렇게 소리를 내냐?”
그래 놓고 나중에는 제가 자충수에 빠지곤 했습니다.
어떤 때 수련자들은 다들 기도시간에 일찌감치 나와 있는데 제가 제일 늦기도 했습니다.
다들 진지하게 묵상에 전념하고 있는데, 저만 묵상 시간에 쿨쿨 잘 때도 많았습니다.
예리한 수련자들은 그런 순간을 또 놓치지 않습니다.
딱 기억해 놓았다가 자기들끼리 두고두고 수군거립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기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돌아보니 제일 미안했던 부분입니다.
내가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을 형제들에게 강하게 요구한 것입니다.
사실 내 흠결이 가장 큰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형제들의 작은 흠결에 연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름 스승이라고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던 사람들의
그런 이중적인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가 봅니다.
특별히 속에 든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잔뜩 폼만 있는 대로 잡고 다니던 스승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스승들을 향해 날리는 예수님의 직격탄은 속이 다 시원할 정도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들보라는 표현을 통해 꽤 센 과장법을 사용하십니다.
들보란 건물의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건너지른 나무(crossbeam)를 의미합니다.
꽤 무겁고 큰 나무토막이겠지요. 아무리 우리 눈이 왕방울만큼 크다 하여도
길이가 몇 미터나 되는 들보가 우리 눈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들보입니다.
몇 미터뿐만 아니라 수십 미터나 되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허물들, 결점들, 잘못들, 죄악들, 오류들, 언행의 불일치,
그릇된 지향, 하늘을 찌르는 위선, 극도의 이기심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웃을 현미경으로 바라보기에 앞서 내 발밑을 먼저 자세히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나란 모순덩어리의 존재를 알아가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상대방 입장에 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늘 겸손한 태도로 이웃들의 의견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참 인간이요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노력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현실과 상황을 세밀히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특히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부터 회개해야 하고, 형제를 타이르는 일도 해야 하고
송영진 모세 신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39-45)
1) ‘티’와 ‘들보’에 관한 말씀은,
“하느님 행세를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단죄’와 ‘심판’은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단죄하고 심판할 권한이 없습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마태오복음 18장에 있는 말씀과 모순된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내 눈에 있는 들보’부터 빼내려면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낼 겨를이 없을 텐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짓는 형제를 타이르라는 예수님 말씀을,
“너, 회개하여라.”라고 명령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라고 권고하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형제를 타이르는 일은, ‘죄인이 아닌’ 사람이 죄인을 꾸짖는 일이 아니라,
‘같은 죄인’으로서 함께 회개해서 함께 구원받자고 권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즉 “너부터 회개하여라.”는,
모든 신앙인을 가르치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형제를 타이르거나 꾸짖는 일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부터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자기부터 먼저 회개하는 것은 당연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형제를 회개시키는 일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부터 먼저 회개하고, 그다음에는 형제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여라.”입니다.
자기 자신부터 회개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서 형제의 회개와 구원을 외면한다면,
즉 형제의 죄를 모른 척 한다면, 그것은 ‘사랑 없는’ 일이고, 잘못하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타이르는 말과 꾸짖는 말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부터 잘해라.”, 또는 “너나 잘해라.”라는 말을 하면 안 되고,
함께 회개하자는 ‘형제의 권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에 형제가 와서 나의 죄를 꾸짖고 타이를 때,
반성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너부터 잘해라.”, 또는 “너나 잘해라.”라는 반응을 보이고 화를 낸다면,
사랑을 거부하는 ‘더 큰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3)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좋은 나무일 수가 없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나쁜 나무일 수가 없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처음에는 좋은 나무였지만
마지막에는 나쁜 나무로 변질되었고, 그냥 그렇게 끝나버렸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박해자 시절에는 나쁜 나무였지만,
회심한 다음에는 좋은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처음과 중간 과정에서는
남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최종적으로)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따라서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4) 야고보서에 있는 다음 말을,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같은 샘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솟아날 수 있습니까?”(야고 3,9-10)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온다면, 그 찬미는 거짓 찬미이고, 위선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는 건전한 가르침에 부합하는 말을 하십시오.
그대 자신을 모든 면에서 선행의 본보기로 보여 주십시오.
가르칠 때에는 고결하고 품위 있게 하고 트집 잡을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여,
적대자가 우리를 걸고 나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십시오.”(티토 2,1.7-8)
눈먼 인도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운명
전삼용 요셉 신부
어느 나라건, 어느 회사건 눈먼 인도자를 가진 시민이나 직원들의 운명은
그 인도자의 운명과 같게 됩니다.
아무리 잘 나가더라도 잘못된 인도자를 뽑아 망하고 마는 나라의 예는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라고 하십니다.
부모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도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눈먼 인도자를 알아보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우리가 인도자를 정할 때 그러면 말에서 어떤 내용이 나오는 것에 유념하면 될까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잘못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타인에게 돌리며 타인의, 눈의 티에만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잘한 것은 자기 덕, 못 한 건 다른 사람 탓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분명 좋은 인도자일 수 없습니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이런 인물이 많지만,
오늘은 미국에서 아직도 잘못된 인도자였다고
비판받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소개합니다.
리처드 닉슨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큰 정치적 스캔들인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하버드에 합격하였지만,
집이 가난한 이유로 지방대를 나온 열등감의 소유자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맞붙은 사람은 존 F. 케네디입니다.
케네디가는 미국에서도 재력과 정치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 가문입니다.
1960년 미국 역사상 첫 TV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
잘 준비된 케네디에 비해 닉슨은 마치 병 걸린 사람처럼 비쳤습니다.
이 TV 토론에서 케네디는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비방하기보다는,
닉슨의 정책을 비판하며 자신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닉슨은 경험 부족을 비판하면서 케네디를 공격했지만,
그의 공격은 관객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남겼습니다.
사람을 공격하는 이유는 열등감 때문입니다.
케네디는 오히려 자신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며,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비방하는 대신
정책의 차이를 부각시킨 점이 중요한 사항입니다.
몇 년 뒤 1968년 인기가 없는 민주당 허버트 험프리와 붙었음에도
간신히 극미한 차이로 승리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처음부터 재선을 준비하였습니다.
돈을 모으기 위해 많은 로비자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재선을 위해 민주당 선거캠프에 도청 장치를 설치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큰 위기에 몰립니다.
이때 그는 자신을 도왔던 법률 고문 존 딘(John Dean)에게
이런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려 했습니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존 딘이 법정에서 닉슨의 모든 악한 면을 폭로함으로써
닉슨은 재선이 되었음에도 스스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닉슨은 끝까지 대통령이 하는 모든 행위는 위법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며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함은 말을 들어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반대의 경우입니다.
무일푼에서 자수성가한 3조 재산을 가진 억만장자 글렌 스턴스가
90일 동안 100불로 100만 달러를 버는 도전이 TV에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차를 사고팔고 집을 수리해서 팔며 1억이라는 종잣돈을 모아
그것으로 바비큐 대회에 나가 1위를 함으로써 자기 브랜드를 만들고
90일 만에 75만 달러의 가치를 받았습니다. 도전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도전에 너무 감사하며 특히 자신과 함께
이 도전을 한 이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했습니다.
실패한 것은 자기 탓이고 이만큼 한 것은
핑계 대지 않고 일해준 직원들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보며
상대의 눈의 티를 보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기 자신의 죄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될 자격도 없다고 여겨 부제품까지만 받았습니다.
자기가 수도회의 장상이 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얼마나 많은 프란치스코의 제자들이 있습니까?
그저 자기 들보만 보려고 해도 이렇게 훌륭한 리더가 됩니다.
하물며 우리가 장차 우리나라를 맡길 인도자를 뽑는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고도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인도자가 될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면
우리 자신들이 눈먼 이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