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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3일 연중 8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집회 17,24-29
복 음 : 마르 10,17-27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가 예수님을 “선하신 스승님”(마르 10,17)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분을 특별한 분으로 생각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유다인들은 ‘선하다’는 낱말을 모든 선의 절대 근원이신 하느님께만 붙였습니다.
부자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그 답은 선하신 예수님께 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나 봅니다.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부자에게 십계명 가운데
‘하느님 사랑’에 해당하는 계명들을 잘 지키고 있는지를 불으십니다.
그가 이 계명들을 충실히 지켜왔다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부자에게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부자는 “울상이 되어”(10,22)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울상이 되어’는 ‘충격을 받고’ 또는 ‘소스라쳐 놀라’ 등으로 의역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에게 놀랍고도 충격적인 도전이 되고,
부자는 이 도전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포기합니다.
부자가 자신이 가진 것을 팔아야 하듯이,
우리도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도전을 받고는 합니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하여 사과해야 할 때도 있고,
자존심이 상해도 상대의 말을 일단 들어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
그 도전이 너무 충격적이고 감당할 수 없을 때, 이웃 사랑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선하신 하느님께서 어떠한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으로
그 도전 앞에서 용기를 낼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10,27)라고 말씀하십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02년 뉴욕에서 시작해서 매년 전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특이한 행사가 있습니다.
바로 ‘바지 안 입고 지하철 타기’입니다.
참가자들은 바지를 제외한 모든 옷을 똑바로 입고 평소와 똑같이 행동해야 합니다.
이 기사를 보고서는 별 희한한 행사도 있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이 행사에 함께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자그마치 60개 도시가 이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초반에는 풍기 문란 행위로 체포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이 행사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사를 왜 할까요?
이 행사의 목적은 예상치 못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루를 채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매일 매일의 삶이 똑같은 삶의 반복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기 힘듭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많은 이가 똑같은 생각과 행동으로 행복과 먼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물질적인 것에 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채우고 채워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채우고 채워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물질적인 재화가 아닐까요?
계속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을 반복하고 이를 위한 이기심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먼저 십계명의 준수를 이야기하시지요.
그는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것 하나를 발견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이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아마 부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계속 채우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부족한 ‘나눔’을 이야기하십니다.
지금과 다른 나눔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하십니다.
단순히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더 채우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나눔의 삶, 사랑의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라고 말씀하시지요.
하느님과 함께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면서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어떤 부자 청년은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이 질문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고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이 질문은 “선하신 스승님”이 아니라, “주님”으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가 아닌,
‘당신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실현(응답)할 수 있습니까?”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부자 청년의 이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이라고 여기는 데서 나오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본질적으로 당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은 타인과는 무관한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질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이 대답은 그를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그의 실상이 드러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영생을 위해, 율법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비록 율법을 지켰으나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안 했던 것입니다.
곧 사랑을 행하지는, 안 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기 자신의 결백을 넘어서,
자기를 나누고 선을 실행하라 하십니다.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라 하십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 바로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르 10,26)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이는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입니다.
결코 ‘자신의 행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결코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으로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 ‘선사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 떠나왔느냐?”보다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느냐?”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떠나온 이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집과 고향을 떠나온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그렇습니다. 이제는 이미 떠나온 자기마저 버려야 할 일입니다.
사실, 수도자인 우리는 이미 집과 부모를 떠나왔지만,
떠나온 자신을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떠나왔다면,
오늘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느라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변 안전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넘기고
주님께 속한 주님의 소유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마르 10,21)
주님!
약하지 않으려 함이, 제게는 부족함입니다.
부족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부족함입니다.
약할 줄을 알고, 부족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하고 부족한지라,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부자 청년의 이야기
조욱현 토마 신부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생명으로 나아가고 싶거든 계명들을 지켜라.
고약한 악의와 사악함을 버려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그리하여 ‘마른 땅’(느헤 9,11; 시편 66,6)이 드러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19절 참조)이 싹트게 하라고 하신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20절).
예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율법의 계명들을 잘 지킨 것처럼 보이던 청년은 슬퍼하며 떠나갔고 그분을 따라가지 않았다.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그는 자기 욕심에 묶인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
자기 탐욕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진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은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짓눌리는 일이 없이
높이 솟아오르는 가벼운 날개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절)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져서 말한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부자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을 의미한다.
진정한 부자는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맡겨주신 분의 뜻에 따라 잘 사용하는 사람이다.
재물이라는 말 자체가 소유한다는 데서 나오지 않고
사용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유일한 선(善)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다른 이차적인 선(善)의 유혹이나 매력을 극복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나를 돌아보아야겠다.
그리고는,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채워 나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다시 말한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비단 예수님의 제자들만의 걱정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신앙인에게도 해당하는 걱정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는 건 나쁜 걸까?’, ‘그럼 우리는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서,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 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을 보면,
한 부유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선생님, 저는 계명을 잘 지켜왔는데,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왜일까요?
그의 마음이 재물에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늘귀’는 실제로 아주 작은 바늘구멍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당시 예루살렘 성벽에 있던 작은 문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문은 매우 좁아서, 낙타가 짐을 모두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야만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모습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겸손’과 ‘내려놓음’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보면,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떠오릅니다.
동굴 안에 갇힌 사람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현실은 동굴 밖에 있습니다. 우리의 재물과 소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지만, 사실 진정한 삶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문학적으로 보면, 톨스토이의 ‘사람은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도 떠오릅니다.
한 농부가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하다가 결국 죽고,
그가 차지한 땅은 겨우 자신의 무덤 크기뿐이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욕심을 부리며 사는 동안 놓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돈이 많아진다고 해서 행복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면 더 불안해지고 걱정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이 ‘소유’에 집착할 때 불안해지고, ‘존재’에 집중할 때 자유로워진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바로 이런 삶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참된 기쁨과 자유를 찾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부유함 그 자체는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재물에 얽매여 하느님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유한 인물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나 욥은
큰 부를 가졌지만, 하느님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부유했던 리디아는 바오로 사도를 집으로 모셨고,
가진 것을, 교회를 위해서 내어놓았습니다.
반면, 오늘 복음 속의 부유한 청년은 재물에 얽매여
결국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차이는 바로 ‘어디에 마음을 두었느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내 삶에서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내가 가진 것을 움켜쥐고 있는가, 아니면 이웃과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며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눌 때, 우리는 더 큰 자유와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듯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려면 불필요한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재물뿐만이 아닙니다. ‘교만, 욕심, 미움, 나만을 위한 삶의 태도’와 같은 것들을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신뢰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하느님의 뜻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재물은 선행과 공덕을 쌓아 올릴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재물과 관련해서 참으로 특별한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재물 운도 좋았겠지만, 백방으로 노력하고 노력해서 막대한 부를 축척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눈만 뜨면 돈돈! 입니다. 입만 열면 돈돈!입니다.
돈 외에도 더 크고 의미 있는 가치들이 부지기수인데 완전, 무시합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엄청난 재물을 탑을 쌓아 올립니다.
그렇게 발버둥 치던 어느 순간, 그는 깨닫게 됩니다.
“이제 나는 곧 떠나가게 되는데, 그토록 애써 쌓아올린 저 재물들은 어떡하지?
재물이라는 것,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었는데, 별것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목숨 걸었을까? 왜 좀 더 나누지 못했을까?”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흘러 이제 나이가 80, 90, 100입니다.
나이를 먹으니 돈이 있어도 즐길 방법도 없습니다.
어느 순간 정신도 흐려지고 기력도 흐려집니다.
이제는 그에게 통장 잔고에 찍혀있는 막대한 재산도
하나의 숫자일 뿐,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후손들은 어서 빨리 그의 목숨이 끊어지기만을 간절히 학수고대합니다.
참으로 가련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생 돈이 최고라고 외치고 다녔기에,
자녀들이나 주변 사람들도 돈을 최우선 가치로 여길 것입니다.
다들 유산 가운데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몫을 챙길까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떠나가는 자신은 거들떠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쇠락해 가며 흐려져만 가는 자신을 내팽개쳐놓고 다들 떠나갈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요?
오늘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향해 강력한 경고 말씀을 건네십니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 24-25)
부자라고 해서 다 똑같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부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나눌 줄 모르는 부자들입니다.
재물 좀 있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뻐기지만, 어려운 사람들과 단 한 푼 나눌 줄 모르는
수전노 같은 부자들을 향해 오늘 예수님께서 옐로우 카드를 내미신 것입니다.
재물이라는 것,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서 축적한 부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축복하시고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유분에 대한 적극적이고 관대한 나눔을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부자들을 향한 주님의 상급이 클 것입니다.
그들은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참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재물과 관련된 예수님의 경고 말씀 앞에 걱정을 넘어 기분이 나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내가 모은 이 재산, 거저 얻은 줄 알아?
평생 등뼈 휘어지게, 정직하게 일해 온 난데.
남들보다 곱절로 일하고, 남들 먹을 때 안 먹고, 남들 놀러 다닐 때 더 일하고,
아끼고 아껴서 모아 겨우 이제 부자 소리 듣는데,
정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화내실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잘 새겨들어보시면 정답이 즉시 나옵니다.
이 텍스트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부자는 바로 이런 부자입니다.
‘재물을 하느님보다 상위에 두는 부자’,
‘돈에 눈이 먼 나머지 세상에 다른 의미 있는 가치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부자’,
‘돈이면 다라고 생각하는 부자’, ‘오로지 돈에 목숨을 거는 부자’,
‘죽으라고 모을 줄만 알았지, 조금도 나누지 않는 부자’...
손에 쥐었다 하면 어느새 빠져나가는 것이 돈입니다.
잔뜩 있다가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 돈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임종의 순간이 오면 다 내려둬야 할 것이 돈입니다.
물론 인간다운 생활, 품위 있는 생활을 위해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재물에 최상위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물론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가고 싶은 곳 가게 만들고, 먹고 싶은 것 먹게 하고,
분위기 잡고, 사람 노릇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돈으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이 모든 행복의 근원은 아닙니다. 돈이 최종적인 해결사는 아닙니다.
돈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재산이 악인의 손에 들어있으면
그것은 함정과 죽음으로 향하는 근원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재산이 선인의 손에 들어있으면
그것은 선행과 공덕을 쌓아 올리는 수단이 됩니다.
재물과 보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오늘 주님께서 재물과 보물을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재물과 보물의 차이를 묵상해봤는데
제 생각에 재물은 필요한 것이고 그 이상이 아닙니다.
돈을 똥 보듯 하라고 하지만 우리의 실제 삶에서는 돈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 삶에서는 돈이나 재물 없이 살아가기가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보물로 여길 것까지는 없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칼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내 보물 1호로 정하고 애지중지할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그런데 임금이 신임의 표시로 장수에게 장검을 선물하였다면
그것은 필요 때문이 아니라 임금의 사랑과 신임의 표시이기에
그 장수는 그것을 보검으로, 자기 보물 1호로 여길 수는 있겠지요.
이렇듯 보물이란 필요한 것을 넘어 애지중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지중지(愛之重之)란 말이 어떤 뜻입니까?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까?
거듭 말하지만, 재물은 필요한 것이지 사랑할 것이 아니고,
소중히 여긴다 해도 보물처럼 소중히 여길 것은 아닙니다.
오늘 부자의 문제는 재물을 생명보다 소중히 여긴 것입니다.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받는 법을 알려달라고 왔던 그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재물을 버리라고 하니 포기치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재물을 생명 그것도 영원한 생명보다 보물로 여긴 셈입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우리는 압니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고 생명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처음부터 그것을 안 것은 아닙니다.
젊었을 때는 건강이 그렇게 소중한지 몰랐기에 몸을 상해가며 돈을 벌었는데
그렇게 자신하던 건강을 잃고 나서야 건강이 재물보다 소중함을 알게 됐지요.
아무튼 부자는 마태오 복음이 젊은이라고 하듯 젊었기 때문인지
재물을 아직 보물로 여겼기에 버릴 수 없었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이라고 한 마태오복음과 달리
마르코복음이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이라고 한 점을 보게 되는데,
자기가 얻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곧 주님께 받는 것이라면
받기 위해서 비워야 한다는 것을 그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까?
양동이에 물을 받으려면 양동이에 있는 것을 비워야 받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쥐고 있으면서 또 쥐려는 어리석음이 보통 부자들의 어리석음이고,
재물도 소유하면서 영원한 생명도 소유하려는 것이 또한 부자들의 어리석음입니다.
부자의 더 어리석음은 주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 점입니다.
재물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주 부잣집 아들이 집안이 반대하는 여인을 사랑하기에
재산을 다 포기하고 여인을 선택하는 것을 볼 때
그가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주님을 재물보다 더 사랑하는지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재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갈 때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부자는 영원한 생명을 받고자 했지만
재물을 보물로 소중히 여기는 어리석음 때문에,
주님을 재물보다 더 사랑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것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도 다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부자가 아니라고요?
재물을 보물로 여기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나는 어리석지 않다고요?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나에게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요?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못함이 나의 부족함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보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
가끔 어떤 사람들은 “사랑은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아기 엄마가 아기에게 하는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어떤 엄마들은 개나 고양이들도 조건 없이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생명을 사랑하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정말 아무것도 보답받지 못하는 데 끝까지 무조건적 사랑이 가능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메데이아와 이아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메데이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콜키스의 공주이자 강력한 마법의 재능을 지닌 인물로,
황금 양피지를 찾으려는 이아손에게 첫눈에 반하여
자신의 가문과 고향까지 등지면서까지 그를 도왔습니다.
이아손이 위험을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온갖 마법과 책략을 제공하였고,
심지어 이아손이 양피지를 가지고 도망칠 수 있도록
본인의 오빠까지 해치며 뒤쫓는 이들을 따돌리기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라면 무엇이든 감수하겠다는 메데이아의 마음이
그만큼 절대적이었던 것입니다.
둘은 함께 도망쳐 코린토스에 정착하였고,
결혼하여 자녀도 낳으며 한때 평온한 삶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이아손은 정치적 이익과 권력을 위해
코린토스 왕의 딸과 새 혼인을 계획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메데이아가 받았던 상처는 매우 깊었습니다.
그동안 본인이 요구받았던 일들은 죄책감까지 감수하며 전부 들어주었지만,
막상 자신은 이아손에게서 약속에 걸맞은 보답이나
책임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힌 메데이아는 이아손이 새로 맞으려던 신부와
그 아버지인 코린토스 왕에게 치명적인 독을 써서 죽게 만들고,
나아가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마저 해치는 극단적인 복수로 치달았습니다.
이처럼 한쪽이 모든 요구에 응하기만 하고
정작 상대는 거기에 걸맞은 보답을 하지 않을 때,
사랑은 커다란 비극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메데이아 이야기가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이 아기와 반려동물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할까요?
아무리 반려동물이 사랑스러워도 그것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 아기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개나 고양이는 생존본능 우선이기 때문에
주인이 위험에 처했을 때 결국 주인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러나 자기 반려동물이 은근히 자기를 구해줄 것이란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느낄 때는 큰 실망을 합니다.
주면서 받으려 하지 않는 그런 조건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기는 동물과는 다르게 자기가 받은 것을 반드시 되갚을 것이란 믿음을 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사랑도 하나의 투자입니다.
절대 자신은 해 주는 게 없는데 상대는 자신을 더 사랑해 줄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계약입니다. 내가 주면, 상대도 주어야 하고 사랑을 받으면 나도 주어야 합니다.
제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에게 돈이 필요할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사랑하면 다 주어야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체를 통해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저하다가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때 이렇게 느꼈습니다.
‘아! 내가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건 아니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따를 제자들을 뽑을 때 배추를 거꾸로 심고 오라고 시켰다고 합니다.
자기를 버렸는지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계약입니다. 계약은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는 얼마만큼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다 주시는 예수님께 나는 무엇을 드리며 그분께 은총을 청하는지도 살펴봅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