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란 있습니다. 주님은 천국과 지옥을 다스리시며 주님의 생명으로 지옥에 있는 존재들도 영존하게 됩니다. 지옥은 주님이 아니고 마귀가 아닌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자유의지를 남용하므로서 말 입니다.
주님이 지옥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자들은 성경을 표면적으로 읽고 믿은 자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와같이 영원전에 천국갈자와 지옥갈자를 예정하였다고 말하는 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에게서는 오직 선만 나오고,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기 때문 입니다.
지옥의 불이란 물리적 불을 말하지 않습니다. 심리적 불로서 불은 사랑을 상징 합니다. 악한 사랑과 욕망이 그들 자신들에게 고통으로 다가오게 된 것 입니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을 말 합니다. 산상수훈의 말씀들 음욕을 품지 말라 욕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는 것들이 이와같은 이유들 때문 입니다.
이를 간다는 것은 증오의 표징 입니다. 그것이 고통을 지옥에 있는 자들에게 가져다 주는 것 입니다. 그들은 미워하고 욕망하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성령의 열매에 속한 성품들을 받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주님을 시인하지 않으면 성령은 없고 성령이 없으면 자기안의 악한 사랑과 욕망들을 정화하고 이겨낼수가 없기 때문에 악 가운데서 고통을 자초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 입니다.
스베덴 보리의 지옥관
영계탐구 사후세계는 어떤 곳인가<30> 지옥과 자기 사랑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옥을 이루는 두 지배적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진은 프랑스 판화작가 구스타브 도레의 단테 신곡 중 지옥편 삽화.
영계가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져 있음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영계에서 지옥은 이 세상에서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 가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누구나 이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죄인들을 그곳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가게 된다는 것을 스베덴보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고 있는 영들의 특색은 괴물같은 형상, 즉 남을 경멸하고 자기를 받들지 않고 존경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위협하며,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에 가득찬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천국을 이루는 지배적인 두 사랑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옥을 이루는 두 지배적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지옥의 두 사랑과 천국의 두 사랑이 서로 완전히 정반대가 된다는 것을 나는 천국에서 들었고 또 많은 경험을 통해 확증했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의 실상을 너무나 자세하게 들려줍니다. 지옥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남을 해치고 자기 이익에 혈안이 됐던 사람이 그 모습 그대로 찾아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개인적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웃과 그리고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공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영계생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문제가 어디에 있고 거기에 빠져있던 사람이 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이 이웃 사랑에 반대되는 것은 두 사랑의 본질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자기사랑 안에 있는 사람이 베푸는 이웃 사랑은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한다. 그가 다른 사람은 모두 자기를 위한 이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웃 사랑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자기와 결탁하는 사람 모두에게 이르며, 자기와 사랑으로 결탁된 정도에 반비례하여 줄어든다. 또 그는 자기 집단 외의 사람은 전혀 중요시 하지 않고, 그 집단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리 지혜롭고 공정하고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해도 원수로 여긴다. 그렇다면 분명 자기에게서 출발한 이웃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웃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다. 전자는 악에서 나온다. 그것은 인간적 욕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반대로 후자는 선에서 나온다. 선 자체이신 하나님으로 부터 오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 즉 자기 중심적 욕망에서 나오는 이웃사랑은 육신적이고,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는 이웃 사랑은 천국적이다. 한마디로 자기 사랑이 우세한 사람에게는 자기 사랑이 머리가 되고 천국적 사랑은 발이 된다. 그는 천국적 사랑 위에 올라 서있고 만일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짓밟아 버린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머리를 아래로 하여 지옥을 향하고 발은 위로 천국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자기 사랑은 고삐가 풀리면 법과 형벌, 명예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고, 나중에는 온세상뿐만 아니라 천국과 하나님까지 자기가 지배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영토를 무한히 확장하고 한없는 권력과 영광을 탐하는 군왕을 그 예로 들고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악에 사로잡혀 있고, 그래서 신성이 그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의 악은 일반적으로 남을 업신여기고 질투하며,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적대시하며 증오와 복수심, 교활, 속임, 무자비함, 잔인함이 가득차 있다고 말합니다.
◇지옥은 스스로 찾아가는 곳= 스베덴보리는 결국 자신이 행하는 악은 그 자신에게 고착된다고 말합니다. 즉 “그 자신이 악의 원인이므로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이끌려 지옥에 들어간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은 끊임없이 악에서 떼어 놓으시고 선한 사람은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형벌도 주님이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악과 벌은 결합돼 있고, 벌은 악 자체이기 때문에 악한 영들이 그 행악자를 공격하고 징벌할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은 결코 아무도 지옥에 던지시지 않고 누구에게도 화를 내시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선함 자체이신 분이 누구에게도 악하게 하실 수 없고 사랑과 자비 자체이신 분이 사람을 당신으로 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위정자들은 군림하거나 명령하지 않고 섬기거나 봉사합니다. 그들은 사회와 이웃의 유익을 첫째로 생각하고 자신의 유익을 가장 나중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지옥에도 다스림이 있다. 다스림이 없으면 지옥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에서의 다스림은 천국과 정반대되는, 자기 사랑에서 나온 지배다. 거기서는 모두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명령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을 증오하고 복수와 분노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이 자기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더 악한 이들이 지배자가 되고 나머지는 이들이 두려워서 복종한다.”
인간은 수명이 다하면 육신은 땅에 남겨두지만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삶이 그대로 옮겨진다는 것을 스베덴보리는 증언합니다. 영계가 지상과 다른 점은 시공을 초월하고 모든 것이 투명해서 스스로 지상에서 살아온 기준을 중심으로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영원히 살 곳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다 선하게 산 사람은 선한 곳으로 가고, 악하게 산 사람은 악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자명한 논리인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란 개념이 여기서도 도출되는 것입니다.
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수 있어야 주님의 가슴과 눈을 가지고 사람과 교파와 종파의 교리를 그의 걸맞게 판단하고 대우해주어 자기 자리를 찾아서 아름다운 신부의 형상으로 주님의 모습으로 교리의 조각을 맞추게 될 것 입니다. 교리는 선과 악 참과 거짓을 제시해주어 주님으로부터 입류해 들어오는 생명의 대
하여 마음문을 열게 준비를 시켜 놓습니다. 부분적인 것이나 적은수의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부분적으로 적은 것들만 받게 되어 그 성장이 크지 않게 될 것 입니다. 역사를 돌아보아 우리 조상들의 순진함과 부족함과 어느때는 유치하기까지 하는 그들의 이해와 믿음에 대하여 생각하여 관용할수 있
덕을 소유하는 것이 좋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이바지 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 합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가 흐르게 되면 머지 않아 마음이 주님을 향해서 탁 트인 사람들이 점점 많이 나오지 않을까 저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시대가 오리라 확신 합니다. 주안에서 행복하세요.........
왕도님.. 말씀하신 교리라는 것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봅시다. 교리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성경이 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저주와 재앙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해방되는 길인 구원의 복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되신 예수님의 진리가 선포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부터 일관됩니다. 다시 말씀드려 인간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진리가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이 진리가 바로 교리인 것입니다. 구원의 길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를 수는 있겠지만 즉 교리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성경에 교리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이해인 것입니다.
왕도님은 이러 이러한 방법으로 구원받는다 말씀하시고 저는 또한 이러 이러한 방법으로 구원받는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모두 다 성경에 근거하여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길이 상대적일 수 있어서 성경을 통해 다양하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인가요?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아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시는 것도 나름대로
성경에 근거하셨을테고 그것 역시 구원받는 길, 즉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교리인 것입니다. 교리는 이렇게 각자 인식하는 것이 다를 수 있는 것이지 교리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성경의 진리와 교리를 다른 것으로 정의하신 결과입니다. 교리가 나뉘어져 수많은 주장과 이단과 교파를 야기시킨 것은
성경 즉 복음의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떠하든지 성경은 변함없는 한가지 진리만을 영원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님과의 토론이 필요한 것도 이렇게 구원의 길에 관해 사람의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성경적 논리로 다가가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인품을 본받는 것에 대해 감히 누가
틀렸다 하겠습니까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성경이 밝혀주는 바인 것입니다. 님께서 여전히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의로 구원에 다가가고자 하신다면 아직 복음의 진리에 완전히 마음을 여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 구원에 한걸음도 다가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오직 대속하신 주님께서
세우신 의에 기대어 구원받습니다. 이 믿음의 구원이 아버지의 언약대로 행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보내신자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새생명을 얻어 거듭난 백성이 된 이후에 예수님을 닮아 갈 수 있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 무엇인가로 우리의 존재의 본질 자체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 갔다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중생하는 것은 우리의 무언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 오시는 것입니다. 이 것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죄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며 그 이상의 영생을 소유한 상태로 우리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님께서 다른 종교인들처럼 신앙의 대상을 두시고 열심으로 정진하실지라도 인생의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그 공력이 헛된 것으로 불타 없어져 버립니다. 영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 깨끗게 된 예복이며 이 예복을 입은 자만이 구원받는 것이 바로 진정한
자기 속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드는 가운데 타인의 대한 형성한 이미지로서 객관적으로 실존하고 있는 타인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 단정하는 어투와 뉘앙스로 인해서 객관적인 자리에서 주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상대방의 존엄성에 훼손을 주는
것은 악한 일이라 생각 합니다. 복음의 대한 주님의 대한 말씀에 대한 이해는 사람의 얼굴이 다르듯이 성격이 다르듯이 제 각각인 것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교리로서는 서로가 다름에 대해서 으르렁 거리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서 교리의 보좌에 앉아 있게 되면 나만 옳다던가 우리 교파의 교리만 옳다고 하는 독선을 나
타내게 된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사랑와 이웃사랑이라는 교리의 우두머리의 마음과 정신을 모아서 성도의 가슴을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 입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남의 티에 대해서가 아닌 그 사람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해주어 칭찬과 긍정적 판단과 따뜻한 시선으로서 정이 오가게 만든다
는 것 입니다. 죄인에 대해서는 정죄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이 필요 합니다. 교리는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쌓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로 주님과 교회와 세상의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고 체계적으로 관념을 형성하여 사회에서 어떻게 주님을 섬기며 이웃을 위할수 있는지 그 지혜를 배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생각할수 있어야 합
교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한분이다. 주님은 구속주이시다. 주님의 대한 믿음이 속량을 가져온다. 주님의 뜻은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이다. 두 주인을 섬길수 없다. 자기냐 주님이냐 자기냐 이웃이냐 그러므로 십자가에 자기의 정과 욕심을 못박아 죽여라 왜!! 주님과 이웃을 위하기 위해서라는 것 입니다. 또 주님은
절대 선이다. 어둠이 조금도 없다. 인간은 악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안에 있는 선한 것들은 주님의 것이고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공로를 내세워서는 아니 된다. 주님은 생명자체이시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세상이 있는 모든 이들은 주님이 주신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수 없다. 주님이 일순간이라도 생명의 입류를 멈추게 된다면 그 어느 피조물도 생명을 영위하며 한순간이라도 존재할수 없다는 것이니 인간은 악과 거짓과 죽음과 지옥 가운데서 살수 있는 길은 오로지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와 주님을 우러르고 앙망하는 믿음이 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리이며 기독
교리가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시고서 결국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교리라고 말씀을 하시네요. 이러한 님의 주장하시는 바의 교리 역시 상대적인 것이라 말씀하실 수 있으시다면 복음의 가르치는 바 구원의 진리, 구원의 길은 제각기 그 인식하는 바가 서로 다를 수 있다 주장하시렵니까? 아니면 님의 교리가 절대
진리라고 하시며 상대성에 대한 주장마저도 뒤집는 주장을 하시겠습니까? 결국은 저나 님이나 자신의 교리가 절대적임을 주장하는 것에서 동일하므로 서로가 상대에 대한 예의와는 이미 관련없는 일임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가치를 이야기 하면 그 누구도 틀렸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님과의 대화는 진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님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에게서 비롯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에 의지하지 않는 가치지향은 옳은 듯하나 구원없는 다른 세상의 종교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이며 그 끝은 불타 없어질
영적으로 해방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애를 부르짖으시건 자비를 부르짖으시건 우선 구원받고 나서 성령충만해지면 되어질 문제인 것입니다. 님께서 몸부림치셔서 좀 되어지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인간의 구원을 기준삼으시려 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과 전혀 다른 복음인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피를 불완전한 것으로 우리에게서 비롯되는 무언가를 더 보태어야 하는 것으로 헛되게 여기는 것이며 아무리 예수 구원을 강조하여 이야기할지라도 결국은 자신의 행위에 따른 구원을 주장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구원의 믿음이 복음의 중심일진데 이 믿음없이 다른 부분이 온전하리라 여기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것과 자신의 무언가로 몸부림쳐서 구원에 도달하려고 하는 종교는 같은 결과를 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님처럼 자신의 비약적 논리에 지배되어 잘못된 신학을 깊이 파시다 보면 감당키 어려운 영적문제 가운데 처해 참된 복음에서 비롯되는 너무나 쉬운 답을 찾지 못해 헤매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진리를 떠나면 영적인 문제가 찾아 오기 마련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그러한 상태를 전혀 인식치 못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누군가 질병을 발견하여 정확한 병명을 말해 주어 치료토록 도와줄려치면 타인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한다 하여 예의가 없다고 말하십니다. 누가 진정으로 님의 영혼을
위하고 사랑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몇몇분들을 통해 참된 복음의 진리를 일깨워 주시건만 왕도님은 마주보지 않은 이 공간에서조차 자신의 논리와 신학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십니다. 무엇을 위해서 이리도 자신을 거듭 설득하는 논리들로 이 공간을 채우십니까? 복음의 촛점을 놓치셔서 유리 방황치 마시고
참된 구원의 진리를 깨닫으시기를 바랍니다. 언제까지 인애가 구원이라고 자신과 타인들을 기만하시렵니까? 인애라는 가치가 틀려서 무가치해서 님께서 교리라고 얘기하시는 구원의 진리를 제가 이렇게 거듭 강조하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기초적 반석이 없이 깊이 추구하면 할수록 문제가 오고 무너지게 됩니다.
강조점이 어디에 두는가? 말하지 않았는지요? 믿음에 두는가 행위에 두는가? 죄사함에 두는가?성화에 두는가? 누가 믿음과 죄사함을 부정하였습니까? 인생을 길게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현교회의 문제점이 무엇때문에 발생했는지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니노님과 같은 값싼 은혜를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서 욕을 먹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 입니다. 적어도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주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진정인가 좋아서인가로 그 진실성과 주님으로부터인가가 될 것 입니다만 이는 사람이 판단할 문제는 아니며 각자가 묵상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항상 의식적으로 교류하는 끈을 잡고 있어야 할 것이나 한번 구원은 영원
한 구원이고 한번 성령받은 사람은 거의 끊어지기가 불가능하므로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행위가 될터인데 그의 겉사람의 정화가 부족하여 더러움이 좀 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사로 주께서 사용하실 것이고 점진적으로 성품을 정화하여 나가게 될 것이니 이 얼마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섭리라
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진정한 뜻은 값싼 죄사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형상과 모양으로 빚는 재창조에 있습니다. 외모만 사람의 탈을 쓰고 있으면 무엇할 것이고 속으로만 주님에게 인침받으면 무엇하겠는지요? 주님을 닮은 존재로 나아가게 되는데 누가 주는 힘으로 그렇게 될수 있는가 하면 주의 성령이 아
니겠는지요? 주의 복음의 힘이나 성령의 능력은 단순히 믿는 것에 있지 않은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죄가 끊어질수가 없고 죄가 겉사람안에서 없어지지 아니하면 성령이 그를 통하여 밖으로 발출될수가 없기 때문에 주의 일이신 마귀의 나라를 멸하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할수가 없게 되는 것 입니다.
복음이란 주님을 믿어 죄사함받아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요 성령의 능력이란 사람안에서 주님과 같은 심법 곧 회개토록 감동과 감화와 교화를 주시는 것이요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와 은사들을 맺게 하는데 있다는 것인데 회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수가 없다는 것 입니다. 회개가 곧 십자가 도의 능력 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는 이상 성령을 받을수가 없고 성령이 없는 이상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적예배인 산제사를 드릴수가 없습니다. 회개는 주님의 대한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며 그에 따라 성령을 받게 되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회개는 영원히 지속되어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인도를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와 은사들은 거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선물이나 성령의 열매와 은사는 아닙니다. 믿음도 회개도 성령도 모두 주님의 것이고 열매와 은사도 그렇습니다만 열매는 회개의 비례해서 주어지고 은사는 주님의 뜻에 따라서 주어질수가 있습니다만 성령의 열매가 지속적이면 은사는 저절로 따라오게 됩니다. 성품의 성화없이 은사가 주
어지게 되면 독선이나 교만이나 탐욕이나 정욕이라는 함정과 올무에 빠질수가 있습니다. 이를 경계하사 주님은 성도가 주의 마음을 닮아서 주님과 같은 목적과 뜻을 같기를 원하시며 그렇게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을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그런 감정이 영혼으로부터 솟구치기를 바라십니다. 이러할때 그리고 그렇게 진정으로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볼때. 주님의 예지로서 항상적으로 그 마음을 잃지 않고 지속시킬 것이라는 것을 보셨을때 주님은 성령의 은사들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복음과 주의 나라와 그 개인 성도를 위해서 주실수 있다는 것 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영생의 괜찮으면 은사와 세상에 속한 복들을 주실수가 있습니다만 성품의
성화가 없는 가운데 그것이 혹 나타나거나 받게 된다면 이는 의심을 해 보아야 합니다. 미혹의 영들이 준 것일수가 있기 때문 입니다. 성품의 성화 없는 하늘에 속한 능력들이나 땅에 속한 촉복들은 근시안적으로는 그 성도를 주님이 위한 것으로 판단할수가 있으나 영원의 관점에서는 아닌게 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에
참된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믿음에 구원이 있슴을 말씀드리는 제 글 가운데 부디 값싼 믿음에 해당하는 부분을 말하여 주십시오. 님의 성화 구원은 의미 자체가 모순입니다. 성화란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하셔야 언급될 수 있는 것인데 중생치 못한 이는 성화가 아닌 그저 자기 의에서 출발하는 종교생활인 것입니다
거듭해서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니노님에게 말합니다. 성령없는 성화를 말한적이 없습니다. 글이 많고 다수가 반대한다고 하여서 두루 뭉실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덮어 씌우는 짓은 삼가해 주십시요. 그래도 저는 니노님을 신사적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의 대한 믿음마저 잃게 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 주십시요.
어떤 이의 현재 영적 상태에서 성화의 과정인가 중생치 못한 단계에서의 종교생활인가를 놓치고 행위만으로 판단하면 살아 있는 성도도 죽은 것으로 여기게 되고 죽어 있는 이에게 성화를 강조하게 됨으로 율법주의적 종교생활로 무너지게 만들지요. 교회가 님과 같이 혼돈스런 복음을 전하게 되면서 오히려 그 안에서
중생치 못한 종교인들이 엉뚱하게 나타나는 모습들을 보여주게 되고 또한 중생한 성도마저도 복음의 뿌리를 내리지못해 자기 의에서 출발하여 율법주의에 다가가려 몸부림치며 종교적 신앙생활을 하다 결국 다 무너지고 참된 생명을 누리기 어려워 집니다. 이렇게 복음의 기초 메시지가 무너지면 교회가 온전히 서지
못하게 되고 영적문제 아래 시달림으로 세상에 빛으로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되는데 이러한 결과를 가지고 님과 같은 분들이 오히려 참된 복음으로 돌아 가지 않고 성화기준 구원판단으로 더욱 행위주의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악순환의 고리이지요.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수 있어야 주님의 가슴과 눈을 가지고 사람과 교파와 종파의 교리를 그의 걸맞게 판단하고 대우해주어 자기 자리를 찾아서 아름다운 신부의 형상으로 주님의 모습으로 교리의 조각을 맞추게 될 것 입니다. 교리는 선과 악 참과 거짓을 제시해주어 주님으로부터 입류해 들어오는 생명의 대
하여 마음문을 열게 준비를 시켜 놓습니다. 부분적인 것이나 적은수의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부분적으로 적은 것들만 받게 되어 그 성장이 크지 않게 될 것 입니다. 역사를 돌아보아 우리 조상들의 순진함과 부족함과 어느때는 유치하기까지 하는 그들의 이해와 믿음에 대하여 생각하여 관용할수 있
덕을 소유하는 것이 좋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이바지 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 합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가 흐르게 되면 머지 않아 마음이 주님을 향해서 탁 트인 사람들이 점점 많이 나오지 않을까 저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시대가 오리라 확신 합니다. 주안에서 행복하세요.........
왕도님.. 말씀하신 교리라는 것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봅시다. 교리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성경이 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저주와 재앙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해방되는 길인 구원의 복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되신 예수님의 진리가 선포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부터 일관됩니다. 다시 말씀드려 인간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진리가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이 진리가 바로 교리인 것입니다. 구원의 길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를 수는 있겠지만 즉 교리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성경에 교리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이해인 것입니다.
왕도님은 이러 이러한 방법으로 구원받는다 말씀하시고 저는 또한 이러 이러한 방법으로 구원받는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모두 다 성경에 근거하여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길이 상대적일 수 있어서 성경을 통해 다양하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인가요?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아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시는 것도 나름대로
성경에 근거하셨을테고 그것 역시 구원받는 길, 즉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교리인 것입니다. 교리는 이렇게 각자 인식하는 것이 다를 수 있는 것이지 교리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성경의 진리와 교리를 다른 것으로 정의하신 결과입니다. 교리가 나뉘어져 수많은 주장과 이단과 교파를 야기시킨 것은
성경 즉 복음의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떠하든지 성경은 변함없는 한가지 진리만을 영원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님과의 토론이 필요한 것도 이렇게 구원의 길에 관해 사람의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성경적 논리로 다가가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인품을 본받는 것에 대해 감히 누가
틀렸다 하겠습니까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성경이 밝혀주는 바인 것입니다. 님께서 여전히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의로 구원에 다가가고자 하신다면 아직 복음의 진리에 완전히 마음을 여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 구원에 한걸음도 다가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오직 대속하신 주님께서
세우신 의에 기대어 구원받습니다. 이 믿음의 구원이 아버지의 언약대로 행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보내신자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새생명을 얻어 거듭난 백성이 된 이후에 예수님을 닮아 갈 수 있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 무엇인가로 우리의 존재의 본질 자체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 갔다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중생하는 것은 우리의 무언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 오시는 것입니다. 이 것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죄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며 그 이상의 영생을 소유한 상태로 우리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님께서 다른 종교인들처럼 신앙의 대상을 두시고 열심으로 정진하실지라도 인생의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그 공력이 헛된 것으로 불타 없어져 버립니다. 영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 깨끗게 된 예복이며 이 예복을 입은 자만이 구원받는 것이 바로 진정한
기독교의 교리이며 진리인 것입니다.
자기 속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드는 가운데 타인의 대한 형성한 이미지로서 객관적으로 실존하고 있는 타인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 단정하는 어투와 뉘앙스로 인해서 객관적인 자리에서 주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상대방의 존엄성에 훼손을 주는
것은 악한 일이라 생각 합니다. 복음의 대한 주님의 대한 말씀에 대한 이해는 사람의 얼굴이 다르듯이 성격이 다르듯이 제 각각인 것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교리로서는 서로가 다름에 대해서 으르렁 거리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서 교리의 보좌에 앉아 있게 되면 나만 옳다던가 우리 교파의 교리만 옳다고 하는 독선을 나
타내게 된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사랑와 이웃사랑이라는 교리의 우두머리의 마음과 정신을 모아서 성도의 가슴을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 입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남의 티에 대해서가 아닌 그 사람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해주어 칭찬과 긍정적 판단과 따뜻한 시선으로서 정이 오가게 만든다
는 것 입니다. 죄인에 대해서는 정죄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이 필요 합니다. 교리는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쌓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로 주님과 교회와 세상의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고 체계적으로 관념을 형성하여 사회에서 어떻게 주님을 섬기며 이웃을 위할수 있는지 그 지혜를 배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생각할수 있어야 합
교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한분이다. 주님은 구속주이시다. 주님의 대한 믿음이 속량을 가져온다. 주님의 뜻은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이다. 두 주인을 섬길수 없다. 자기냐 주님이냐 자기냐 이웃이냐 그러므로 십자가에 자기의 정과 욕심을 못박아 죽여라 왜!! 주님과 이웃을 위하기 위해서라는 것 입니다. 또 주님은
절대 선이다. 어둠이 조금도 없다. 인간은 악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안에 있는 선한 것들은 주님의 것이고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공로를 내세워서는 아니 된다. 주님은 생명자체이시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세상이 있는 모든 이들은 주님이 주신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수 없다. 주님이 일순간이라도 생명의 입류를 멈추게 된다면 그 어느 피조물도 생명을 영위하며 한순간이라도 존재할수 없다는 것이니 인간은 악과 거짓과 죽음과 지옥 가운데서 살수 있는 길은 오로지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와 주님을 우러르고 앙망하는 믿음이 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리이며 기독
인이 시인하는 믿음의 진리들 입니다.
교리가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시고서 결국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교리라고 말씀을 하시네요. 이러한 님의 주장하시는 바의 교리 역시 상대적인 것이라 말씀하실 수 있으시다면 복음의 가르치는 바 구원의 진리, 구원의 길은 제각기 그 인식하는 바가 서로 다를 수 있다 주장하시렵니까? 아니면 님의 교리가 절대
진리라고 하시며 상대성에 대한 주장마저도 뒤집는 주장을 하시겠습니까? 결국은 저나 님이나 자신의 교리가 절대적임을 주장하는 것에서 동일하므로 서로가 상대에 대한 예의와는 이미 관련없는 일임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가치를 이야기 하면 그 누구도 틀렸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님과의 대화는 진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님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에게서 비롯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에 의지하지 않는 가치지향은 옳은 듯하나 구원없는 다른 세상의 종교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이며 그 끝은 불타 없어질
헛된 공력일 뿐인 것입니다. 님의 교리대로 구원을 적용하자면 모든 인간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원죄 가운데 하나님을 떠났고 본질적으로 자기자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구원자로 이땅에 보내시지 않으셨다면 대속하시고 부활의 첫열매가 되시지 않으셨다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지 않으셨다면
영적으로 해방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애를 부르짖으시건 자비를 부르짖으시건 우선 구원받고 나서 성령충만해지면 되어질 문제인 것입니다. 님께서 몸부림치셔서 좀 되어지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인간의 구원을 기준삼으시려 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과 전혀 다른 복음인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피를 불완전한 것으로 우리에게서 비롯되는 무언가를 더 보태어야 하는 것으로 헛되게 여기는 것이며 아무리 예수 구원을 강조하여 이야기할지라도 결국은 자신의 행위에 따른 구원을 주장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구원의 믿음이 복음의 중심일진데 이 믿음없이 다른 부분이 온전하리라 여기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것과 자신의 무언가로 몸부림쳐서 구원에 도달하려고 하는 종교는 같은 결과를 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님처럼 자신의 비약적 논리에 지배되어 잘못된 신학을 깊이 파시다 보면 감당키 어려운 영적문제 가운데 처해 참된 복음에서 비롯되는 너무나 쉬운 답을 찾지 못해 헤매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진리를 떠나면 영적인 문제가 찾아 오기 마련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그러한 상태를 전혀 인식치 못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누군가 질병을 발견하여 정확한 병명을 말해 주어 치료토록 도와줄려치면 타인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한다 하여 예의가 없다고 말하십니다. 누가 진정으로 님의 영혼을
위하고 사랑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몇몇분들을 통해 참된 복음의 진리를 일깨워 주시건만 왕도님은 마주보지 않은 이 공간에서조차 자신의 논리와 신학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십니다. 무엇을 위해서 이리도 자신을 거듭 설득하는 논리들로 이 공간을 채우십니까? 복음의 촛점을 놓치셔서 유리 방황치 마시고
참된 구원의 진리를 깨닫으시기를 바랍니다. 언제까지 인애가 구원이라고 자신과 타인들을 기만하시렵니까? 인애라는 가치가 틀려서 무가치해서 님께서 교리라고 얘기하시는 구원의 진리를 제가 이렇게 거듭 강조하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기초적 반석이 없이 깊이 추구하면 할수록 문제가 오고 무너지게 됩니다.
강조점이 어디에 두는가? 말하지 않았는지요? 믿음에 두는가 행위에 두는가? 죄사함에 두는가?성화에 두는가? 누가 믿음과 죄사함을 부정하였습니까? 인생을 길게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현교회의 문제점이 무엇때문에 발생했는지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니노님과 같은 값싼 은혜를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서 욕을 먹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 입니다. 적어도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주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진정인가 좋아서인가로 그 진실성과 주님으로부터인가가 될 것 입니다만 이는 사람이 판단할 문제는 아니며 각자가 묵상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항상 의식적으로 교류하는 끈을 잡고 있어야 할 것이나 한번 구원은 영원
한 구원이고 한번 성령받은 사람은 거의 끊어지기가 불가능하므로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행위가 될터인데 그의 겉사람의 정화가 부족하여 더러움이 좀 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사로 주께서 사용하실 것이고 점진적으로 성품을 정화하여 나가게 될 것이니 이 얼마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섭리라
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진정한 뜻은 값싼 죄사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형상과 모양으로 빚는 재창조에 있습니다. 외모만 사람의 탈을 쓰고 있으면 무엇할 것이고 속으로만 주님에게 인침받으면 무엇하겠는지요? 주님을 닮은 존재로 나아가게 되는데 누가 주는 힘으로 그렇게 될수 있는가 하면 주의 성령이 아
니겠는지요? 주의 복음의 힘이나 성령의 능력은 단순히 믿는 것에 있지 않은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죄가 끊어질수가 없고 죄가 겉사람안에서 없어지지 아니하면 성령이 그를 통하여 밖으로 발출될수가 없기 때문에 주의 일이신 마귀의 나라를 멸하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할수가 없게 되는 것 입니다.
복음이란 주님을 믿어 죄사함받아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요 성령의 능력이란 사람안에서 주님과 같은 심법 곧 회개토록 감동과 감화와 교화를 주시는 것이요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와 은사들을 맺게 하는데 있다는 것인데 회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수가 없다는 것 입니다. 회개가 곧 십자가 도의 능력 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는 이상 성령을 받을수가 없고 성령이 없는 이상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적예배인 산제사를 드릴수가 없습니다. 회개는 주님의 대한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며 그에 따라 성령을 받게 되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회개는 영원히 지속되어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인도를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와 은사들은 거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선물이나 성령의 열매와 은사는 아닙니다. 믿음도 회개도 성령도 모두 주님의 것이고 열매와 은사도 그렇습니다만 열매는 회개의 비례해서 주어지고 은사는 주님의 뜻에 따라서 주어질수가 있습니다만 성령의 열매가 지속적이면 은사는 저절로 따라오게 됩니다. 성품의 성화없이 은사가 주
어지게 되면 독선이나 교만이나 탐욕이나 정욕이라는 함정과 올무에 빠질수가 있습니다. 이를 경계하사 주님은 성도가 주의 마음을 닮아서 주님과 같은 목적과 뜻을 같기를 원하시며 그렇게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을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그런 감정이 영혼으로부터 솟구치기를 바라십니다. 이러할때 그리고 그렇게 진정으로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볼때. 주님의 예지로서 항상적으로 그 마음을 잃지 않고 지속시킬 것이라는 것을 보셨을때 주님은 성령의 은사들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복음과 주의 나라와 그 개인 성도를 위해서 주실수 있다는 것 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영생의 괜찮으면 은사와 세상에 속한 복들을 주실수가 있습니다만 성품의
성화가 없는 가운데 그것이 혹 나타나거나 받게 된다면 이는 의심을 해 보아야 합니다. 미혹의 영들이 준 것일수가 있기 때문 입니다. 성품의 성화 없는 하늘에 속한 능력들이나 땅에 속한 촉복들은 근시안적으로는 그 성도를 주님이 위한 것으로 판단할수가 있으나 영원의 관점에서는 아닌게 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에
속한 것들 중에 가장 피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집중하므로서 미혹될수가 있기 때문 입니다. 고로 주의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주어진다면 겸허해지고 경계를 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참된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믿음에 구원이 있슴을 말씀드리는 제 글 가운데 부디 값싼 믿음에 해당하는 부분을 말하여 주십시오. 님의 성화 구원은 의미 자체가 모순입니다. 성화란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하셔야 언급될 수 있는 것인데 중생치 못한 이는 성화가 아닌 그저 자기 의에서 출발하는 종교생활인 것입니다
거듭해서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니노님에게 말합니다. 성령없는 성화를 말한적이 없습니다. 글이 많고 다수가 반대한다고 하여서 두루 뭉실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덮어 씌우는 짓은 삼가해 주십시요. 그래도 저는 니노님을 신사적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의 대한 믿음마저 잃게 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 주십시요.
어떤 이의 현재 영적 상태에서 성화의 과정인가 중생치 못한 단계에서의 종교생활인가를 놓치고 행위만으로 판단하면 살아 있는 성도도 죽은 것으로 여기게 되고 죽어 있는 이에게 성화를 강조하게 됨으로 율법주의적 종교생활로 무너지게 만들지요. 교회가 님과 같이 혼돈스런 복음을 전하게 되면서 오히려 그 안에서
중생치 못한 종교인들이 엉뚱하게 나타나는 모습들을 보여주게 되고 또한 중생한 성도마저도 복음의 뿌리를 내리지못해 자기 의에서 출발하여 율법주의에 다가가려 몸부림치며 종교적 신앙생활을 하다 결국 다 무너지고 참된 생명을 누리기 어려워 집니다. 이렇게 복음의 기초 메시지가 무너지면 교회가 온전히 서지
못하게 되고 영적문제 아래 시달림으로 세상에 빛으로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되는데 이러한 결과를 가지고 님과 같은 분들이 오히려 참된 복음으로 돌아 가지 않고 성화기준 구원판단으로 더욱 행위주의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악순환의 고리이지요.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