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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4일 연중 8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집회 35,1-15
복 음 : 마르 10,28-31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을 어제 복음 말씀과 함께 바라봅니다.
어제 복음에서 부자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답을 얻기를 기대하였지만,
가진 것을 팔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그렇게 한다면 하늘나라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부자는 하늘이 아니라, 지상에서 보물을 차지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이미 모든 것(집, 가족, 토지 등)을 버렸으니
부자와 달리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는 대신에,
현세에서는 박해를 받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쩌면 제자들 또한 현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싶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자와 제자들은 저마다 예수님께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충격적인 답변을 듣습니다. 기대한 것과 정반대의 답변이었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마태 19,30)이라는
말씀의 뜻이 담겨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으려 노력하고 희생하면서 때로는 엄청난 것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자와 제자들을 보면 그 무엇을 우리가 바라는 때에,
바라는 방식으로 얻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며 우리 신앙의 자세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마음의 평화와 관계의 회복을 지금 당장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안 되면 쉽게 실망하고 신앙의 의미를 되묻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본당 수녀님께서 본원 행사로 인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자리를 비워도 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당연히 괜찮다고 했습니다.
아마 수녀님께서는 본당 일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봉사자들이 잘하실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기가 자리를 비우면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여기저기 구멍이 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곳이라면,
그 조직은 문제가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없어지는 위험을 피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조직이라면
정상적인 조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없어도 잘 되는 곳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적절한 권한 위임과 책임 분산입니다.
이는 겸손한 삶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자기 없으면 안 되는 곳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권한 위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책임 분산이 정착되지 않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모습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람들과의 모임 안에서 리더의 역할이란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나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독재로 나아가게 해서 공동체의 발전에 큰 해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혼자서 충분히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단을 만드시고 제자들에게 많은 은총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주님 안에서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단의 역할은 남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교만을 버리고 진정한 겸손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박해를 받더라도
당신을 따라야 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아마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니 인정해달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것뿐 아니라,
박해를 받아야 하늘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겸손의 삶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나 없으면 된다는 교만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면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겸손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첫째가 최고고, 많은 것이 제일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꼴찌라 할지라도
자기를 낮추고 함께하는 사람을 첫째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부자 청년 이야기’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부자 청년은 재산 때문에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예수님께서는 ‘버린다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예수님 또는 복음 때문에’ 버리는 것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이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복음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암시합니다.
곧 ‘예수님과 복음’이 그 모든 것들을 버릴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과 예수님을 더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 갑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을 넘어,
‘진정한 예수님, 진정한 복음’을 알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차차 예수님과 복음을 깨달아 가면서,
우리는 예수님 이외의 것들을 조금씩 버려가게 됩니다.
아무리 값지고 좋은 것들도,
그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또한 나에게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내려놓아야 할 것들임도 알아갑니다.
사실,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에 대한 사랑이 작아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진정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릴 수 있게 합니다.
진정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도 성녀 아빌라 데레사처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고 아무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갈 뿐,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부족함이 없으니(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예수님과 복음을 사랑한다면,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대변혁이 생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구하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것을 구하는 데는 꼴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예수님’과 ‘복음’과 ‘사랑’이 늘 첫째가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주님!
모든 것을 버리되,
버리고 온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되,
당신을 따르고 있는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온전히 당신의 것이오니,
오로지 당신만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말씀은 어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신다.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예수님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무엇을 버리는 것일까? 그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 나의 재물 이 모든 것을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 자신만의 안위와 쾌락을 위하여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나의 인간적인 모습을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나를 버리는 것이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이에 대한 보상은 세상에서도 갚아주시고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현세의 보상을 많이 체험하였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재물이란 사용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지,
주인이 된다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재물이란 자기의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보다는
그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 재산이 그를 불행하게 한다고 하셨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며,
나의 재능과 내가 지금 잠깐 관리하는 것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나에게 세상에 사는 동안 맡겨주신 것임을 알고
그것들을 맡겨주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나의 관념이나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기도 한다.
인간은 재물이나 사상이나 관념의 노예가 되면
자신의 주변을 올바로 보지도 못하고,
이웃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게 된다.
주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주님 안에 복된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고하지 않고는 열매 맺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고, 자선을 베풀지 않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 신앙이 열매 맺기는 어렵습니다.
교우들과 ‘인공지능(AI) 시대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자매님이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류에게 해로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인공지능의 개발을 막거나, 규제를 강화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서 사라지는 것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우마차’는 사라졌습니다.
스마트 폰이 등장하면서 거리에 있던 공중전화가 사라졌습니다.
카세트테이프의 자리는 ‘CD’가 차지했습니다.
‘CD’의 자리는 ‘MP3’가 차지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유튜브’를 통해서 음악을 듣습니다.
검색의 시대가 열리면서 두꺼운 사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등장하면서 지도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독점하던 인공지능의 시대를 중국의 ‘딥 시크(Deep Seek)’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대한민국도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혁신을 받아들이고,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삶과 신앙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세상에서는 첫째가 되기 위해 경쟁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 애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과 섬김을 강조하시며,
세상의 기준과 정반대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 속 이야기들을 떠올려 봅니다.
다윗은 형들보다 작고 힘없는 목동이었지만,
하느님께서 골리앗을 물리칠 용사로 선택하셨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찬가에서
“권세 있는 자를 내치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 올리셨다.”라고 노래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논리와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절정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던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 주변의 작은 이들에게 눈을 돌려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나 사회에서 ‘꼴찌’처럼 보이는 사람들,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나요?
그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태도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의 성공과 인정만을 좇으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은 섬김과 겸손의 길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높아지는 길은 다른 이들을 섬길 때 열립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과학과 자연의 원리에서도 발견됩니다.
물리학에서는 작은 미립자들이 거대한 물질의 근원이 되고,
생물학에서는 힘센 동물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 살아남습니다.
경제에서도 전통적인 대기업이 아니라,
작은 스타트업들이 혁신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도 결국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원리 안에서 ‘역전의 법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은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과 다릅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를 탐하기보다 낮아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사랑과 정의를 실천할 때,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를 첫째로 세우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길을 따르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과 연약함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비록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순례 여정이지만,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길을 떠난 수도자이지만,
오늘 복음 묵상할 때마다 부끄럽기도 하고 송구스럽기도 합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는 수시로 예수님께 이런 고백을 되풀이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비록 그 장엄한 고백이 며칠 가지 않는 선언이라 할지라도,
그의 순수한 마음과 타오르는 열정이 부럽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언약과 서원을 당신께 드리지만,
인간적 나약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우리의 그 열정과 순수성을 크게 평가하시고,
우리의 결핍과 헛된 맹세조차 기쁘게 받아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묵상하며 제 개인적으로 참 부끄러웠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흔들리는 갈대 같은 우리들이기에 나중에 지키지는 못할망정,
일단 그리도 열렬히 그리고 용기 있게 선언하는 베드로 사도의 고백이 부럽기도 합니다.
돌아보니 저도 목청 높여 외치기는 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당신께서는 세례 때에 저를 당신께 봉헌하도록 하셨으니,
당신을 보다 가까이 따르도록 저를 부르시는
당신의 아들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빛과 힘이신 성령의 인도 아래, 저는 온전한 자유로 당신께 저를 바치나이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주님 외에 모든 것을 버리겠노라고,
그리고 남아있는 삶과 젊음과 에너지 모두를 그분께 남김없이 바치겠노라고
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각오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니 버리고 바치기는커녕 끝도 없이 쌓아 올리느라 정신없었습니다.
교만과 허영의 탑이 이미 높이 쌓아 올려졌습니다.
쓸모없는 가지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그렇게 피곤한 인생을 허덕이며 살아왔습니다.
근사한 새집을 짓기 위해서는 낡고 오래된 집은 허물어야 마땅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 성전을 건설하기 위해 높이 높이 쌓아 올린
거짓과 위선의 탑을 과감하게 허물어버려야겠습니다.
참 주님의 제자로 거듭나기 위해 아쉽지만, 또다시 버리고 또 버려야겠습니다.
거짓말처럼 또다시 봄이 찾아왔습니다.
성령의 봄바람이 불어오길 기대합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기 위해서 몸집을 줄여야겠습니다. 홀씨처럼 가벼워져야겠습니다.
그래야 성령의 바람이 부는 대로,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홀연히 날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버렸다고 하지만 아직도 멀었습니다. 좀 더 버려야겠습니다.
주님의 따뜻한 품에 온전히 안기기 위해 좀 더 과감히 버려야겠습니다.
쓸데없는 자존심도 버리고,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교만함도 버려야겠습니다.
오랜 세월 쓰고 있던 위선과 거짓의 가면도 벗어 버려야겠습니다.
부단히 버리고 버림을 반복하던 어느 날 가벼워진 우리는
그토록 고대해 왔던 강렬한 주님 현존을 체험할 것입니다.
버리고 또 버린 우리,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그저 주님 당신밖에 없게 된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활짝 미소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 29-30)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버림과 따름을 실천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28-31)
1)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 생활”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말은, ‘구원의 길’에 걸림돌이 되는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을 모두 버린다는 뜻입니다.
재물이든지 권력이든지 명예든지 간에 믿음 없는 사람들이
가지려고 애를 쓰는 그런 것들은
구원의 길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고,
구원받는 데에 도움도 되지 않는 것들,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얻는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영원한 행복과 기쁨과 평화와 안식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면 다른 것을 더 얻을 필요도 없고,
다른 것을 얻으려고 애쓸 이유도 없습니다.
2)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다.”는 말은,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것을 얻는다.”가 아닙니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모두 나에게 가져와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0,21).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많이 바치는 길이 아니라,
사도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빈손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루카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전에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 주셨습니다(루카 5,6).
그런데 그 어부들은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예수님께서 잡게 해 주신 그 많은 물고기들도 버려두고 따라나섰습니다.
<무엇인가를 많이 바치면 바칠수록 복을 더 많이 받는다고 강조하는 종교라면,
그 종교는 백퍼센트 사이비 종교입니다.
사무엘 예언자가 사울 왕을 꾸짖을 때 한 말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
3)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라는 말씀은,
모든 것을 버리는 이유와 목적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신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와 목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또 다른 종교에서는
‘무소유’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무소유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부자에게 하신,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라는 말씀에도
그런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을 ‘그냥’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 실천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뜻인데,
‘버림’ 자체가 아니라, ‘사랑 실천’을 위해서
‘버림’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 사랑에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두 포함됩니다.
또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은 시작 단계일 뿐이고,
그 ‘버림’은 ‘따름’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기만 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그 경우에도 버리는 일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고,
그렇게 해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4) “박해도 받겠지만”은, “박해를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이고, “박해를 받더라도 참고 견뎌야 한다.”입니다.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자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내세에서 큰 은총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은, ‘박해도 받겠지만’의 뒤로 옮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세의 복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현세에서의 처지와 내세에서의 처지가, 부자와 라자로 처럼(루카 16,25)
정반대로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런데’는 ‘그러므로’로 바꿔야 합니다.>
“많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정반대로 역전되는 일이
무조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로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버림’과 ‘따름’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 말은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 말씀을 부자가 거부하고 떠난 뒤에 한 말이고,
부자는 재물을 버리지도 주님을 따르지도 못했는데 자기와 동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다는 우월감이 배어있는 말입니다.
우월감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면 적어도 자부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진정 모든 것을 베드로와 동료들이 버렸을까요?
버렸다면 오늘 주님 말씀대로 주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버렸을까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은 맞지만 나중에 드러났듯
주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모든 것을 버렸던 그들이 나중에는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잖습니까?
그러니까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의도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의도가 순수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건 것은 맞는데 그것이 이 세상에서 백 배를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집을 담보로 도박한 것과 같고,
돈을 탈탈 털어 주식을 산 것과 같습니다.
곧 단박에 대박 나려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의 의도가 담긴 말에 주님께서 맞장구치십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백 배의 보상을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단 주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그러할 경우지요.
그리고 현세에서 백배 보상을 받는 것도 다른 뜻이지요.
집과 토지를 백배로 받는다는 것이 그것들을 백 배 주신다는 뜻이라고 쳐도,
형제와 자매와 아내와 자식을 백 배 주신다는 것은 어떤 뜻이겠습니까?
아내 하나를 버리면 백 명의 아내가 생긴다는 뜻이겠습니까?
형제와 자매와 자식도 그런 뜻이겠습니까?
제가 자주 진담 반, 농담 반 얘기하듯 제가 결혼하지 않으니
수많은 주님의 여인들이 제 애인이 되는 것과 같고,
수많은 주님의 자녀들이 제 자녀가 되는 것과 같고,
제가 저의 집을 버리니 비록 전세지만 집이 몇 채 생긴 것과 같은 뜻이겠지요.
사실 저는 그런 기적들을 수없이 체험합니다.
전에 세 살던 집에서 쫓겨났을 때 복음 때문에 소송 거는 것을 포기하니
주님께서 더 좋은 주인을 만나게 해 주시어 더 좋은 전셋집이 생기고,
복음 정신으로 선교 협동조합을 하니
매년 40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주는 장학금이 생기고,
식당 봉사자들과 한글학교 봉사자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과 복음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그것이 내 일이고 내 배 채우기 위한 거라면 누가 도와주고,
주님께서 누구를 보내주시겠습니까? 하나도 보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적인 순수성이 없는 일은 망할 것이고 망해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라는 말이 그래서 더 마음에 와닿는 오늘입니다.
왜 가톨릭 신자는 부자가 되는 데 죄책감을 느낄까?
전삼용 요셉 신부
최근에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살 곳이 있는데도 그냥 넣어서 감사하게도
10억 초반에 아파트를 분양받았고 그 아파트는 지금 30억이 넘습니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는 너무 돈에 집착해서는 안 되니 너무 욕심내지 않으려
그냥 1억 정도의 웃돈만 받고 분양권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아파트를 보며 후회합니다.
가톨릭 신자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부자가 되는 데
죄책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가난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어제 복음은 자기 재산을 다 팔 수 없었던 한 부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자였기에 우울했습니다. 그가 부자였기에 우울하였을까요?
그의 재산을 사랑을 위해 투자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돈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많은 돈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부자는 돈의 액수이지 돈에 집착하는 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라자로와
그 가족은 수천만 원짜리 향수를 쓰는 매우 큰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재산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도움을 받으십니다.
그들은 그러나 그 재산 모두를 예수님을 위해
언제라도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가난해지려는 마음으로 게으름을 합리화하지 말고, 100배의 축복을 얻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형제, 자매의 관계는 물론이요,
집과 토지 등의 축복도 100배를 약속하십니다.
당신을 위해 포기한다면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부자가 되고
그것이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오늘 복음을 따르면 집과 토지와 인맥까지도 백 배를 받는 방법을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수많은 가톨릭 신앙으로 100배의 축복을 얻은 이들이 있지만, 두 현대인만을 소개합니다.
매니 파퀴아오(Manny Pacquiao)는
필리핀 남부의 극심한 가난 속에서 태어나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부모님의 잦은 다툼과 별거로 인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수 없었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거리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는 필리핀에서 대중적인 스포츠인 복싱을 접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바꿔 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천부적인 재능과 강인한 투지를 발휘하여 점차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가 자신을 변화시킨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파퀴아오 선수는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나를 여기까지 이끈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큽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재능과 기회를 주셨고,
저는 그것을 잘 활용하려고 애썼을 뿐입니다”(ABS-CBN, 2013년 인터뷰)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경기 전후로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며, 대중 앞에서도
“제 모든 업적은 하느님께서 제 인생을 이끄시는 덕분입니다.
저는 그분께서 허락하신 길을 걷고 있을 뿐입니다”
(GMA News, 2019년 방송)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때 폭음과 도박, 여성 편력 등으로 인해 많은 논란을 빚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는 잘못된 삶을 살았지만, 고해성사와 미사에 참례하면서
조금씩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신앙이 없었다면 그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ABS-CBN, 2012년 인터뷰)라고 고백하며,
가톨릭 신앙이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사생활뿐만 아니라 선수로서의 자세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훈련 스케줄과 철저한 식단 관리, 팀원들과의 협력을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몸과 재능을 더 잘 돌보려는 마음가짐”(동 인터뷰)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세계 복싱 사상 최초로 8체급을 석권하며 거액의 재산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그 재산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필리핀 빈민촌과 학교 설립, 장학금 지원 등에 사용하며
“이 모든 것은 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라는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의 신앙은 정치 활동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필리핀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빈곤층 복지 정책을 최우선으로 삼았으며,
“더 나은 필리핀 사회 건설”이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가톨릭 신앙이 가르쳐 주는 형제애와 봉사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해야 할 일입니다”라고 말하며
신앙이 자신이 품은 이상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처럼 매니 파퀴아오 선수의 삶은 가톨릭 신앙이 어떻게 한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그것이 다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톰 모나건(Tom Monaghan)은 미국 미시간주의 한 고아원에서 자라며
가난과 불우한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톨릭 수녀회가 운영하는 시설과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자랐던 그는
“어릴 때는 무절제함과 반항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녀님들께서 제게 책임감과 절제를 강조하셨고,
미사와 기도를 통해 마음을 가다듬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자서전 『Pizza Tiger』, 1986)라고 회고하였습니다.
그는 사관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실패하였고,
군 복무를 마친 후에도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작은 피자 가게를 인수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저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시작했지만,
곧 이 일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기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 번 돈은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것이 매일의 동기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피자 배달 시스템을 혁신하며
도미노 피자를 미국 전역으로 확장 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1980~90년대에는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때는 호화 요트와 고급 자동차를 사들이며 사치에 빠지기도 하였는데,
그는 같은 책에서 “제가 이룬 부가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재물은 하느님께서 제게 맡기신 것이지, 제 마음대로 휘두를 것이 아니었습니다.”
(『Pizza Tiger』)라고 회고하였습니다.
이 깨달음 이후 그는 고가의 수집품을 처분하고
대학교와 수도회, 가톨릭 자선 단체에 재산을 기부하는 데 집중하였습니다.
또한 직접 ‘아베 마리아 대학교 (Ave Maria University)’를 설립하여
신앙에 기반한 교육을 확산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쓰이지 않는 돈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1986년 Forbes 인터뷰)라고 강조하면서,
“가톨릭 신앙이야말로 제가 삶의 목적을 다시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라고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결국 그의 신앙은 단순한 종교적 소속감을 넘어, 자신이 가진 재능과 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나침반과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유해지는 것보다 그 부를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를 실천하며 살아갔습니다.
이처럼 톰 모나건의 삶 역시 가톨릭 신앙이 한 사람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신앙이 단순히 내면의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로잡고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음을
그의 이야기는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으로부터 재능과 돈을 받은 세 하인 중 하나는 자기 한 탈렌트를 땅에 묻어놓았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유일한 하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재물을 투자할 능력을 키우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당신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됨으로써,
이 세상에서부터 100배의 축복이 주어지는 법칙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