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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스를 출발한 시간이 네 시 반으로 오늘의 숙소인 아이볼릭까지는 세 시간을 더 가야 한다.
아이볼릭으로 가는 길은 고대문명인 크레타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크레타 섬과 그리스 반도를 포함한 많은 섬이 있는 에게 해를 왼쪽으로 바라보면서 간다.
창밖으로 보이는 셀죽(에패스)의 아야슬룩 성채
이즈미르라는 간판이 보인다....이런 간판들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핸드폰에 있는 구글지도를 보면서 주변의 경치를 보게 되면 지금 보고 있는 동네나 산의 이름이 구글지도에 나타난다. 여기가 어딘가 가이드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참으로 좋은 세상이다.
한 시간 반쯤 지나자 터키의 3대도시인 이즈미르항을 지나간다.
이즈미르 항을 지나가며...대형화물선과 에게 해
이즈미르는 예전에는 스미르나라고 불렀다고 하며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로 BC 627년 리디아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가 BC 3세기에 재건되어 로마시대까지 번영하였으며, 중세 때는 비잔틴·십자군·아랍·투르크 간에 쟁탈이 거듭되었으며 현재는 터키의 무역의 중심지라고 한다. 역사가 깊은 도시인 만큼 고대의 아고라에서 대리석의 열주(列柱), 포세이돈과 데메테르의 상(像) 등이 발굴되었고, 파구스의 언덕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장(武將)이 축조한 성채가 있으며 오딧세이와 일리어드를 쓴 호메로스의 출생지라고 한다.
느긋한 배낭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러서 구경을 하고 가야 할 곳이다.
이즈미르 항(인터넷에서)
이즈미르 아고라라고(인터넷에서)
아이발릭으로 가는 도중에 휴게소에 들르게 되는데 아이발릭토스트가 맛이 있으니 맛을 보라고 한다.
두툼한 빵을 달구어진 기계로 납작하게 둘러서 그 안에 야채 등을 넣어주는 토스트인데 터키에서도 알려진 토스트라고 한다.
점심을 신통치 않게 먹어서 모두들 토스트를 사서 먹는데 한 개를 혼자 먹기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서 둘이 나누어 먹으면 알맞다.
아이발릭 토스트를 파는 휴게소..여기서만 맛볼 수 있다고
둘그런 식빵을 구으면서 납작하게 압착을 해서 속에다 야채를 넣어 준다.
휴게실 천정에 있는 제비집들...수 십채가 넘을 듯
터키의 에게 해 해안선을 따라서 한 시간을 더 달려서 아이발릭이라는 항구에 도착했는데 그리스 영토인 레스보스(Lesbos) 섬과 불과 20km 떨어져 안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한다. 고운 모래로 덮인 해안과 인근의 섬들이 해양 스포츠에 적합하고, 주변의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 최근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고 하며 주민들은 주로 어업과 관광업에 종사하며 주요 산물은 올리브 제품이라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7시 반으로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해변에는 사람들이 없고 비치파라솔만 길게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비치파라솔들이 칡으로 만든 삿갓 같이 생겼다.
생각 같아서는 에게 해에 발을 한 번 담구고 싶었지만 석양이 에게 해의 바닷가를 걸어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옆에 보이는 바다가 에게 해다....멀리 보이는 산들은 그리스의 산인 듯
이이발릭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좌측의 에게 해..나이가 든 사람은 '에게 해의 진주'라는 노래를 흥얼러기게 만들 수도 있을 것
아이발릭으로 가는 길....
비옥한 농토도 보이고...
아이발릭 바닷가...숙소가 바로 바닷가이다.
숙소
시원하게 생긴 바닷가의 파라솔...시간이 늦어서인지 사람들이 없다.
이곳은 에페소를 보고 트로이를 보기 위해서 거쳐가는 곳이기 때문에 별도로 관광은 할 수 있는 곳이 없다.
저녁에 맥주라도 마실 곳이 있는가 하고 일행들과 찾아보았으나 그런 곳이 없다.
다음날은 트로이를 거쳐서 이스탄불로 들어가는 날이기 때문에 새벽같이 일어나야 한다.
아이발릭의 아침 바닷가
우리를 환송하기 위해서 출동한 견공들....이곳도 임자없는 개들이 많다.
다섯 시에 기상하여 여섯시 반에 트로이로 출발하였는데 우리의 상상 속에 트로이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신의 아들들이 어울려 전쟁이 벌어진 곳으로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호머의 일리아드를 읽어본 사람이나 브레드 피트가 아킬레우스, 에릭 바나가 핵토르로 나온 2004년도의 트로이라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 역사의 현장이었던 트로이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트로이로 가는 표지판이 보이는데...이런 표지판들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트로이로 들어가는 트로이 성벽의 배후...전에는 이곳이 사람이 살던 곳이었을 것이나 세월이 지나면서 흙에 뭍혀 밭이 되지 않았을까
삼국지나 수호지를 가슴 뛰며 읽었던 사람이라면 삼국지나 수호지에 거론되는 대표적인 지명의 광경들을 상상 속에서 그려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여행을 가서 정작 지명의 현장을 보았을 때는 상상 속에서의 광경과 너무 다른 모습에 실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처럼 이곳도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다.
트로이 영화를 본 사람이나 일리아스를 읽었던 사람들이라면 영화의 장면을 떠 올리거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신들과 신의 아들들 그리고 영웅들을 떠올리면서 트로이를 생각하였을 것이나 이곳에는 파묵칼레의 히에라폴리스나 에페소에서처럼 지상에 남아 있는 유적이 없다..
일리아스의 열렬한 독자였던 독일의 슐레이만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로 트로이를 발굴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이 1870년도에 발굴을 하여서 이곳이 트로이가 실제로 존재했었던 곳이라는 밝히기 전까지는 흙 속에 묻혀 있던 유적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르메스(호머)의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한 일리아스는 역사적 사실이라기 보다는 중국의 수호지와 같은 소설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올림포스의 신이 등장하는 그런 전쟁을 실재로 역사상에서 있었던 것으로 믿고 싶어한다
입구에 들어가면 카다란 목마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관광객들에게 빌려주는 무기와 방패와 복장들이 있다.
뒤에 박물관이 있다고 하는데 들어가 볼 시간이 없기 때문에 발굴된 성만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는 것이 고작이다.
사실 역사학자가 아니라면 땅속에 있었던 성곽이나 성곽의 쌓여진 시기나 그 곳에서 있었던 문명들의 흔적들은 그리 관심이 있는 부분들이 아니다.
발굴된 부분을 한 바퀴 돌고는 목마 앞에서, 또는 목마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트로이에 들렀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트로이관광에 의의(意義)을 두게 된다.
매표소를 지나면 지상에 보이는 유일하게 트로이를 상징하는 목마
눈에 보이는 것은 발굴해 놓은 돌무더기(?)들로 문양을 보고 어느 시대의 것인지 짐작을 한다.
트로이 방문 기념사진부터 찍는다...
관광객들에게 빌려주는 방패와 무기 그리고 옷...사진도 직접 뽑아 주는 모양
발굴된 트로이 성벽들...
설명을 들으면서 가지만 귀에 제대로 들어올리가 없다.
건너편에 보이는 것이 바다인데 트로이성벽이 있었을 때는 성벽 바로 아래까지 바다가 있었지만 토사가 밀려와서 바다가 멀어졌다고 한다.
관광객들을 위한 길....
대리석에 새겨진 나뭇잎 조각...한때는 화려했던 건물의 일부였을 것이다.
트로이 성벽 안이나 성 밖 주변에는 이렇게 큰 상수리나무(열매가 길쭉한 것을 보아서) 많이 있다...저 뿌리는 옛날의 유물에 닿아 있을 것이 아닌가?
몇 기 몇 기의 성벽이라고 팻말이 붙여져 있는데 비전문가들에게는 그리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
돌픔새에 핀 꽃양귀비 한 송이가 눈길을 끌 뿐....
이곳이 성루라고...전에는 높았지만 토사에 묻히는 바람에 땅과 같아져 버렸다.
여기서 찍는 기념사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ㅎㅎㅎㅎ
우물 같이 생긴 것이 우물이 아니고 망루라고....
관광(?)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 여기서 인증 샷을 한다...이런 목마라도 없었더라면 이곳을 보기 위해 하루를 투자했는데 얼마나 허무했을까
정면에서도 보고
속으로 올라가서 구멍으로 내려다 본다.
목마 위에서 바라본 바다...지금은 들판이지만 모래사장이었던 저곳에서 아킬레우스와 핵토르가 싸웠던 곳일 것이다.
인증샷을 찍으면서 트로이를 떠난다.
숙소에서 바라본 아리볼릭 바닷가
발굴되고 있는 트로이
*트로이와 관련해서 알아 두면 좋은 인류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던 사과에 대한 이야기
아담을 타락시켰던 에덴동산의 사과
트로이 전쟁을 일으켰던 파리스의 사과
만유인력을 발견하게 했던 뉴턴의 사과
아래는 트로이에 관해서 사전에서 설명한 내용이다.
관심이 있는 젊은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도록...
트로이는 트로야·트로이아라고도 한다.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서는 ‘일리오스’라고 불렸다.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흐르는 평야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근대에 와서는 히살리크라고 불렀다)에 있다. 바다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어 바다로부터의 습격을 받을 위험은 적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에게해(海)와 흑해(黑海)를 잇는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의 입구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에 있어, 예로부터 번영을 누려왔다.
독일 고고학자 슐리만이 1870년부터 이곳을 발굴하면서 유적이 밝혀졌다. 유적은 9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최하층은 BC 4000년 말기의 것으로,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제2층에는 메가론식의 왕궁으로 짐작되는 건물이 있고, 이 층에서 많은 금·은 제품을 발견하였으며, 이 층을 호메로스 시대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슐리만은 이때 발굴한 유물들을 독일로 밀반출, 1881년 베를린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함으로써 찬란했던 트로이문화가 세상에 알려졌다. 1945년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은 이를 탈취, 금·은 보물은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에, 도자기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에 소장하다가 1995년 4월 푸시킨미술관에서 다시 전시되었다.
그러나 그후 슐리만을 도운 독일의 고고학자 되르프펠트는 아래에서 제6층에 해당하는 곳이 호메로스 시대의 것이라고 하였다(BC 15∼BC 12). 1930년대에 와서 미국의 블레겐이 다시 조직적으로 발굴하여 한 층 위인 제7층 A를 호메로스 시대의 것이라고 수정하였다. 제7층 B는 철기시대 초기, 제8층은 그리스인이 이민(移民)한 아르카이크시대의 것이며, 맨 위층인 제9층은 헬레니즘시대 및 로마시대의 유적으로 이 무렵 도시는 ‘일리움’이라고 불리었다. 이 시대에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원정 도중에 일부러 이곳을 들렀다.
일리아스
1만 5,693행, 24권. 각권마다 그리스 문자의 24 알파벳순(順)으로 이름이 붙어 있다. 옛날에는 각권마다 그 내용에 부합되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알파벳순으로 이름을 붙이는 방법은 BC 3세기에 처음으로 쓰인 권별법(卷別法)이었다. 《일리아스》는 도시 트로이의 별명 일리오스(Ilios)에서 유래한 것이며, ‘일리오스 이야기’라는 뜻이다. 10년간에 걸친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스파르타왕 메넬라오스의 왕비로 절세의 미인인 헬레네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유혹해 간다. 이에, 그리스인들은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지휘로 1,000척의 배를 거느리고 트로이를 공격하지만 트로이 성(城)은 함락되지 않는다. 자신을 섬기는 사제 크라이세스의 딸 크라이세이스가 아가멤논에게 잡혀가자 격노한 아폴론 신(神)이 벌로 액병(厄病)을 내린다. 이 수습책 때문에 벌어진 말다툼에서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한 그리스 최고 영웅 아킬레우스가 노하여 싸움에서 손을 뗀다. 이 아킬레우스의 이탈이 바로 《일리아스》의 주제이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간청으로 주신(主神) 제우스는 신(神)들에게 양군을 원조하지 말도록 명하여 그리스군을 패배케 한다. 패배한 그리스군의 참상을 좌시할 수 없어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와 전차를 빌려 그의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적을 패주(敗走)시켰으나 그는 트로이의 장수 헥토르에게 살해된다. 이 소식에 접한 아킬레우스는 복수하기 위하여 헤파이스토스가 특별히 만들어준 갑주를 입고 출전하여 헥토르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욕보인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왕은 신들의 비호(庇護)로 야음(夜陰)을 틈타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찾아가 헥토르의 시체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것으로 끝맺는다. 《일리아스》는 비극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에 집중하여, 트로이 공방 50일 동안의 이야기 속에 10년의 전망을 담았으며, 과거를 뒤돌아보고 미래를 암시함으로써 비극성을 강조하였고, 여러 가지 비유로 자연계와 인간계의 관계를 특색 있게 묘사하였다. 무용(武勇)을 노래하고 그리스 기사도를 찬양한 이 시는 방랑 시인 호메로스에 의해 BC 900년경 쓰여진 작품이다. 그리스인들에겐 오디세이아(Odysseia)와 함께 그리스 민족의 단일성과 영웅적 자질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유럽인의 정신과 사상을 낳은 원류가 되고 있다. 이 시는 사고하는 방식에 있어 신의 눈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함으로써 인간주의적 접근을 시도한 최초의 작품이며, 냉혹한 사실주의적 표현으로 인해 플라톤은 일찍이 아이들에게는 금서로 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유럽 서사시의 모범으로서 라틴 문학을 거쳐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라틴어로는 아킬레스라고 한다.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한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중심인물이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펠레우스왕의 아들로,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이 그를 불사신(不死身)으로 만들려고 황천(黃泉)의 스틱스 강물에 몸을 담갔는데, 이때 어머니가 손으로 잡고 있던 발뒤꿈치만은 물에 젖지 않아 치명적인 급소가 되고 말았다. 아킬레스힘줄[腱]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하였는데, 이 전설은 비교적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친은 그를 트로이전쟁에 나가지 않도록 하려고 그를 여장(女裝)시켜 스키로스의 왕 리코메데스의 딸들 틈에 숨겼는데, 그가 없이는 트로이를 함락시킬 수 없다는 예언을 듣고 찾아온 오디세우스에게 발견되었다. 이때 오디세우스가 여자 아이들이 좋아할 물건들 속에 무기를 섞어 놓았는데, 아킬레우스만은 사내라서 무기를 집음으로써 정체가 드러났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훗날 여러 미술작품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리스군은 10년 동안에 걸쳐 트로이를 공략하였으며, 아가멤논은 아폴론 신전의 신관인 크류세스의 딸을 잡아 자신의 애인으로 삼았다. 하지만 아폴론 신의 저주를 받아 그리스군영에 역병이 돌기시작했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게 그 여자를 돌려주라고 하자 아가멤논은 대신 아킬레우스의 애인을 자신의 여자로 바치라고 한다. 아킬레우스는 리르네소스의 왕 에티온을 죽이고 미녀 브리세이스를 손에 넣었으나 아가멤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격분한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을 죽이려고 했지만 아테나 여신의 만류로 단념하고 대신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 두번다시 전쟁터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가 없는 그리스군은 계속 패배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를 갖추고 출진하였는데, 적장 헥토르의 손에 죽자 이에 격분한 아킬레우스는 다시 전쟁터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그가 몸에 걸친 무구는 어머니가 공신(工神)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특별히 만든 것으로 유명한 ‘아이기스’이다. 그는 적장 헥토르를 죽여 원수를 갚고 그의 시체를 전차에 매어 끌고 돌아왔는데, 헥토르의 부왕(父王) 프리아모스가 몸소 진중으로 찾아와 몸을 굽히면서 자식의 유해를 돌려달라고 애원하자 헥토르의 인도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도 마침내는 파리스의 화살에 급소를 맞고 죽었다. 그는 격정적인 성격이었으나 정이 많고 트로이전쟁에서 가장 고결한 영웅으로 알려졌으며, 발이 빨라 준족(駿足)의 대표자로도 알려졌다.
백과사전의 일리아스
《일리아스》(고대 그리스어:Ίλιάς)는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다. 이름은 트로이인들의 왕성인 ‘일리온’에서 유래하였다. '일리아스'란 이름은 '일리온의 노래' 란 뜻이다. [1]오디세이아(Odysseia)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와 후대 서양의 문학예술과 문화의 전범(典範)으로 여겨지고 있다. 저자는 호메로스라고 알려져 있다.
주제는 그리스의 전설적인 전쟁인 트로이아 전쟁을 배경으로 51일간의 사건을 노래한 것으로 그리스의 장군인 아킬레우스가 중심이 되어 원한과 복수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비극을 다뤘다. 9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상황과 전쟁에 관여하는 올륌포스의 신들, 장수들의 이야기 등을 위주로 한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서 시는 24편으로 나뉘며, 그리스의 대표적 시운중의 하나인 6각운(Hexametre)으로 작곡되었다. 각 권마다 그리스 문자의 24 알파벳 순서로 이름이 붙어있다. 그리스 문학의 대부분이 운명론에 따른 체념이나 절망을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정해진 운명에 굴하지 않고 영광된 죽음을 택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으로 호메로스(기원전 8세기)가 작자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연구는 구전되어 내려오던 이야기를 호메로스가 후대에 전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밀먼 페리는 "호메로스가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처음 제시했다. 그는 그의 서사시의 구조를 보면 구전이 되기 좋도록 되어 있다고 보고, 호메로스가 혼자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를 문자화 했다고 본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아가멤논이 아폴론 사제의 딸, 크뤼세이스를 모욕한 죄과로 아카이 진영(고대 그리스 동맹군)에 전염병이 번진다. 총지휘관 아가멤논은 공개 회의에서 아킬레우스와 격한 말다툼 끝에 그의 애첩 브리세이스를 강제로 빼앗음로써 또한 아킬레우스를 모욕하게 된다. 분노에 사로잡힌 아킬레우스는 앞으로 트로이군과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의 부탁에 따라 제우스를 은밀히 찾아가 아카이아군이 패배하도록 요청하여 그의 허락을 받아낸다.
아가멤논은 제우스가 보낸 꿈에서 트로이아가 함락되는 것을 본다. 이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가멤논은 장군들과 토론 끝에, 전체 군사회의를 소집한다. 네스토르와 오디세우스는 열띤 논쟁을 벌이며, 아카이아군은 트로이 정복을 포기하고 귀향하자는 의견에 마음이 솔깃해지지만, 신들의 영향하에 있는 오뒷세우스의 강한 반대와 건의에 따라 트로이군과 빨리 결전을 치르자는 데에 합의를 본다. 시의 후반(484-877 이른바 전함 카탈로그)은 전쟁에 참가한 아카이아군과 트로이아군의 지방, 도시 그리고 지휘관들을 노래하고 있다.
트로이아군과 아카이아군은 들판으로 나가 전투를 위해 진을 친다. 그러나 트로이아의 장군 파리스는 홀로 양 진영 사이에 나서서 자신과 단판을 할 아카이아 용사는 앞으로 나오라고 소리친다. 아카이아군 진영에서 마땅한 도전자를 찾고 있을 때를 같이하여 트로이아의 왕 프리아모스는 헬레나를 망루에 불러내어 아카이아의 장군들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다. 마침내 파리스는 헬레나의 (전)남편 메넬라오스와 일대일 결투을 벌인 끝에 패배하며, 아프로디테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헬레나는 여신의 강요로 파리스가 쉬고 있는 침소로 가 그를 약간은 핀잔을 주면서 위로한다.
제우스를 중심으로 올림포스의 신들은 트로이전쟁의 앞날에 관한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한다. 아카이아군의 편을 드는 헤라의 요구로 아테나는 판다로스를 꾀어 메넬라오스에게 활을 쏘아 부상을 입힘으로서 이 전에 맺은 협약을 깨친다. 트로이아군의 간계에 분격한 아가멤논은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아카이아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장군들이 이끄는 부대의 열병식을 끝마친 후 아카이아군은 드디어 트로이아 진영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디오메데스의 무공과 아테나의 도움으로 아카이아군은 트로이아군을 궁지에 몰아 넣는다. 디오메데스는 선두에 서서 만나는 졸개들을 모조리 물리친 후 메넬라오스를 부상시킨 판다로스와 그를 지원하는 아이네아스와 대결한다. 먼저 창을 던져 판다로스를 단숨에 꺼꾸러뜨린 다음 아이네아스에게는 바윗돌을 집어던져 기절을 시킨다. 죽을 지경에 놓인 아들을 구출하기 위해 아프로디테가 끼어들지만 성난 황소 같은 디오메데스에게 손에 부상을 입고 도망친다. 아이네아스는 결국 아폴론에 의해 구출되며, 아폴론은 아테나가 잠시 전장을 비운 틈을 타 트로이아군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또한 아레스가 트로이군의 편을 듦으로써 아카이아군이 궁지에 몰린다. 이를 지켜본 헤라는 다시 아테나를 시켜 아카이아군을 돕도록 한다. 다시 디오메데스는 아테나의 힘을 등에 업고 아레스와 맞붙어 싸운다
트로이아군과 아카이아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틈에 헥토르는 동생 헬레노스의 간청에 따라 성으로 돌아가 아낙네들로 하여금 아테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도록 권유한다. 이 사이에 전장에서는 트로이아 장군 글라우코스와 아카이아 장군 디오메데스는 서로 족보를 묻고는 서로의 조상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기뻐하며 싸움을 그만두고 가지고 있던 무기를 우정의 표시로 교환한다. 헥토르는 트로이아 성에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동생 파리스를 만나 핀잔을 준 뒤, 남편을 찾아 어린 아들 아스튀르낙스를 품에 안고 이리저리 헤메는 아내 안드로마케를 성문 근처에서 만나 눈물어린 이별의 대화를 나눈다. 이는 일리아스에서 묘사된 가장 유명한 이별 장면이다.
아테나와 아폴론은 헥토르에게 아카이아의 가장 용맹한 장수와 일대 일로 싸우게 부추긴다. 텔라몬의 아들, 큰 아이아스와 헥토르는 일대 일로 결투를 벌인다. 밤이 되어 양쪽 군대가 갈라지고 네스토르가 전사자들을 화장할 수 있도록 휴전을 맺고 아카이아 인들의 선단 주위에 방벽을 쌓도록 권유한다.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장군들을 깨워 파수병들을 돌아보게 한다. 디오메데스와 오디세우스는 트로이군의 정탐군인 돌론을 죽이고 트로이군의 진영에 몰래들어가 트로이군을 정탐한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우스는 정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트라키아인들의 진영을 급습하고 말들을 빼앗아 돌아온다.
아카이아군은 트로이군에 쫓겨 방벽안으로 밀려들어가고 헥토르는 방벽을 공격한다. 두 명의 아이아스가 이에 맞서서 항전을 독려한다. 리키아의 두 장군 글라우코스와 사르페돈이 방벽을 맹렬히 공격하다가 글라우코스는 부상을 당해 물러가고 사르페돈이 격국 방벽을 허물고 만다. 헥토르가 돌로 쳐서 방벽의 문을 부수자 트로이군은 방벽을 넘어 문을 지나 물밀듯이 아카이아 진영으로 쳐들어 간다.
네스토르가 마카온을 대접한 다음 다시 싸움터로 돌아가다가 부상당한 아가멤논, 디오메데스, 오디세우스와 마주친다. 아가멤논은 철군을 주장하는데 오디세우스가 반대한다.
제우스는 잠에서 깨어나자 헤라에게 크게 화를 낸다. 이리스를 포세이돈에게 보내 싸움에 개입하지 말라고 종용하고 아폴론을 헥토르에게 보내어 그를 회복시키게 한다. 헥토르가 회복하고 다시 전장으로 나가 아폴론의 도움을 받아 아카이아 인들을 맹렬히 공격하자 아카이안인들은 결국 맨 앞쪽의 선단으로 부터 후퇴하기 시작한다. 큰 아이아스는 해전(海戰)에 쓰는 긴 창을 들고 홀로 분전하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트로이 군은 맨 앞쪽에 있던 프로테실라오스의 배애 불을 지른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분노한다.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위해 새로운 갑옷과 방패를 만들어주도록 헤파이스토스에게 부탁하겠다고 약속한다. 헥토르가 다시 파트로클로스의 시체를 다시 탈취하려고 공격하는 순간 아킬레우스가 무장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나와 크게 고함을 지르자 트로이 군이 놀라서 도망친다. 밤이 되자 풀리다마스는 헥토르에게 아킬레우스가 출전하기 전에 트로이아 군을 성 안으로 철수 시켜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헥토르는 이에 따르지 않는다. 아카이아 군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도하고 헤파이스토스는 테티스가 부탁한 아킬레우스의 새 무장을 만들어준다.
날이 밝자 테티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새로운 무장을 가져다 주고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는 모든 아카이아 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해한다. 오디세우스의 권고에 따라 모든 아카이아 인들은 아침을 먹고 아킬레우스를 따라 전쟁터로 향한다. 출정하기 전에 아킬레우스의 준마 크산토스가 헤라의 힘을 입어 인간의 음성으로 아킬레우스가 오늘은 승리하지만 결국 전사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무시하고 전쟁터로 나간다.
첫댓글 밑에 일리어드에 관한 글도 읽어 보세여
자세히도 안내하네요,...
국토회복운동을 벌이던 터키의 국부 아타튀르크. 육지의 대부분을 회복하고 저기 차나칼레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그러나 그 외의 지역의 회복은 실패.
터키 본토 바로 앞의 섬들은 아직도 그리스의 섬으로 남아있지요.
지도를 보면 두 나라의 경계가 특이하고 좀 우스꽝스럽습니다.
패전국의 비애 입니다. ~~
헬레네 를 꼬시는. 파리스 입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