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풍무(49)
상단전으로 운기행공을 하다(4)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녀석들이 광혈지옥비를 두고 간 이유를 모르진 않는다. 광혈지옥비
는 아무나 찰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오직 피의 맹약에 의해서만 주인을 선택할 뿐이다. 광혈지옥비가 거
절하면 별수 없이 폐인이 되어 죽어가야 한다.
녀석들은 그 시험을 하기를 원하고 있다. 완전한 백산으로 살아 난
건지, 아니면 여전히 소령이 몸인지를.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도 바로 이것이다.
몸이 치료되지 않았다면 어차피 죽게 될 터이니, 광혈지옥비를 통해
확인을 하라는 말인 게다.
"알았다, 너희들이 시키는 대로 하마."
희미한 빛을 뿌리는 폐허를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던 백산은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났다.
얼마쯤 동굴을 향해 걷다가 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주하연의 모습을
발견하고 백산은 우뚝 멈췄다.
"추운데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나 배고파!"
"쿡! 먹보 같으니."
"그래 난 먹보다 왜? 무슨 남자가 여자 생각하는 맘은 손톱만큼도
없담? 주구장창 혼자 그렇게 있고 싶어?"
"알았어 임마, 들어가서 밥 먹자. 나도 배고프다."
"다리가 저려 못 일어나겠단 말야."
일어나려다가 다시 주저앉아 버린 주하연은 볼멘소리를 했다.
"읏차!"
백산은 주하연을 안아들고 저벅저벅 동굴을 향해 걸었다.
"오빠, 저거 말이야."
뜯어온 지극화정균을 내밀며 주하연은 다른 한 손으로 광혈지옥비를
가리켰다. 소살우 일기장에 적혔던 '광혈지옥비를 착용하고도 살아남
는다면'하였던 구절이 마음에 걸렸던 탓이었다.
"광혈지옥비?"
"응, 어떤 무기야?"
"글쎄 뭐라고 해야할까, 수천 철가인들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무기
라 해야 되나?"
"철가(鐵家)?"
"피곤해 보이는데 들을 수 있겠어?"
따듯한 동굴 안으로 들어온 때문인지 주하연은 눈동자는 나른히 풀
려 있었다.
"졸려도 이 악물고 들어야지, 내 걱정은 말고. 참. 사 오일은 지났
을 텐데 먼저 씻고 시작하자구요."
백산이 뭐라 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주하연은 옷을 훌훌 벗어 던
지더니 양천(陽泉)으로 몸을 던졌다.
쫓기듯 몸을 씻은 그녀는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을 휘휘 털어
내기 무섭게 그대로 뛰어오르며 허공섭물을 이용하여 옷을 걸쳐버렸
다.
백산의 눈앞에 알몸을 드러낸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나 등 돌리고 있을 테니까 오빠도 씻어."
"하여간 사람 곤란하게 하는 건 타고 난 거 같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양천 앞으로 다가간 백산은 잽싸게 아래를
가렸던 옷을 벗어 던지고는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래도 귀엽지?"
"그래 귀엽다. 귀여워서 미쳐버릴 것 같아 욘석아."
말라붙었던 땀을 씻어내고 밖으로 나와 옷을 걸치려는 순간 주하연
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백산은 허둥지둥 몸을 가리며 툴
툴거렸다.
"그럼 됐어. 한가지라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으면 된 거야. 자 이
제 준비는 끝났으니까 이쪽으로 누워. 여기에 원앙금침만 깔렸으면 금
상첨환데 쩝."
"누가 말려."
손으로 맨 바닥을 쓱쓱 쓸며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백산은 어이
없다는 듯이 웃고 말았다.
"시작해보세요, 오라버니."
"아까 철가 얘기하다 말았지? 반신육천역 중 뇌극철지의 주인인 철
가는 대단한 자들이 아니었어."
주하연에게 한 팔을 빼앗긴 백산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철가. 그들은 춘추전국시대 때, 반신오천역을 기반으로 성장했던 오
신가와 천가에 병기를 만들어주는 대장장이를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
다.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병기였고, 그 병기를 만들어주는
철가인들은 노예 신분으로 부림을 당했다.
나라가 바뀌고 새로운 자들이 들어와도 철가인의 운명은 변하지 않
았다. 아니, 갈수록 그들의 운명은 처참하게 변했다.
반신오천역의 힘을 병기에 주입하는 방법을 알아낸 신가인들은 철가
인들에게 그 비법을 전수하여 무기를 만들게 하고는, 그 비법이 흘러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차없이 살인을 저질렀다.
"결국 수백 년 동안 당하고 살아왔던 철가인들은 복수를 꿈꾸게 되
었고, 그 당시 각 철가를 이끌어가던 11곳의 가문에서 하나씩 무기를
만들어내게 되지. 신가와 천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작게 만들 수밖에
없었어. 해서 만들어진 무기가 광혈지옥비야.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
실은 광혈지옥비를 만들기 위해 노(爐)를 달궜던 재료야. 원재료인 석
탄과 함께 인간을 태워 비도를 만들어 낸 거야. 신가에 의해 살해당한
아버지와 삼촌의 시체를 태우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를 산채
로 태워 무기를 만들었대. 그때 철가인들이 불렀던 노래가 광풍가였
다."
"광풍가(狂風歌)?"
"그래, 광풍가."
백산의 입에서 노랫가락 같은 흥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스스로 불 속
으로 뛰어들던 철가인의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누나들이 불렀던 그
노래가.
-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천대받던 수많은 민초(民草)들의 한이
하늘에 올라 천살(天殺)이 되었고, 수백 년의 학대와 죽음이 땅에
닿아 광혈(狂血)이 되었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천살과 광혈을 하나로 만드니 그
때가 바로 세상의 종말이라.
권좌에 있는 모든 지배자들이여, 기억하라!
세상을 지배하는 자는 힘을 가진 그대들이 아니고 그대들에게 억
압받고 살아가는 민초(民草)들임을….
그들을 분노하게 하지 마라. 그들이 분노하게 하지 마라. 그들이
분노하면 세상의….
"광풍가에서 말하는 광혈은 광혈지옥비를 말하고, 천살은 바로 천살
성을 말하는 거야."
"그럼 오빠가?"
"맞아, 내가 바로 천살성을 타고났어. 광혈지옥비와 하나 될 수 있
는 조건이 바로 천살성이거든. 광혈과 천살이 만나면 파멸안이 탄생
해. 파멸안의 최초 상태를 백색의 불이라 불러. 일명 백색지안이지.
저번에 네가 보았던 그 눈 말이야."
중원에 산재해 있던 모든 철가의 수장이었던 혈가의 후예. 즉 1대
파멸안이 남겼던 기록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최초의 상태는 백색의
불이고 숙명의 불이라 하였다.
신가인들에게 죽임을 당할 줄 알면서도 숙명처럼 불을 피워야 했던
철가인들의 운명을 나타내는 불로, 백색지안(白色之眼)이라 하였다.
"두 번째는 흑색의 눈이야. 아버지의 죽음에, 형제들의 죽음에 귀
를 막고 눈을 감고 살아야 했던 그들, 침묵의 눈이고 체념의 눈이라
하더구나. 흑색의 눈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질 않지. 오직 심장이
뛰는 소리만 귓가에 들려오고, 그 심장 소리가 멈춰야만 살기가 사라
져, 그 상태를 흑색지안(黑色之眼)이라고 해."
세 번째 상태는 분노의 눈이며 광기의 눈인 광혈지안(狂血之眼)이
다. 어머니가 타서 죽는 모습을, 딸이 불꽃이 되는 광경을, 누나가 재
가 되어버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망치질을 해야했던 분노의 눈이고, 미
쳐버린 철가인들의 눈이라 하였다.
광혈지안은 이미 인간으로 불릴 수 없다. 오직 살인만을 갈구하는
마물로 변하고 만다.
살아있는 인간의 뜨거운 핏속에 천비(天匕)를 적셔야만 살아갈 수
있는 마물. 천비가 피를 마셔야만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바로 광혈지
안인 것이다.
"그건 누가 내린 저주가 아니었다. 철가인들 스스로 만든 저주였지,
아버지의 시체를 태우고, 살아 있는 어미와 누나와 그리고 딸을 태우
며 만들어냈던 그들의 저주였다. 그 저주를 물려받은 사람이 나였고.
그런데 그 저주를 푸는 방법이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심장에 흐르
는 피를 천비에 먹이면 저주가 멈춘다. 지금 나처럼."
"그럼 소운이란 분이……."
"그래, 식물인간이 되었던 난 깨어날 수가 없었다. 깨어나는 순간
난 형제는 물론이고 부인조차 몰라보는 마물이 되니까. 죽기를 바라고
머릿속 깊은 심연 속으로 숨어버렸어. 그랬던 날 소운이 깨웠다. 자신
의 죽음으로……. 내 가슴에 안겨 홀로 죽어 있더구나, 식물인간이 되
어있던 내 가슴 위에서……. 그런데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럼 아직도?"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주하연은 백산의 얼굴을 가만 쳐다보았다.
"이제는 그녀들을 놔줘야지. 네 말마따나 내가 망가지는 걸 그녀들
은 바라진 않을 테니까."
"어라? 그런 대견한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오빠도 철이 들었나봐. 그
런 의미에서 하연이 상을 내리겠다, 받아랏!"
위에서 내려다보던 주하연은 훔치듯 백산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안……. 우읍!"
주하연을 제지하려고 입을 벌렸던 백산은 오히려 그녀의 입맞춤을
도와주는 꼴이 되어버렸다.
벌어진 입안으로 주하연의 혀가 쏙 들어왔다.
기가 막힌 일을 당하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했던가. 지금 백산의
상황이 그랬다. 구구절절 과거를 들려준 이유는 야릇한 시선을 보내곤
하는 주하연 때문이었다.
여든이 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했던 말인데 그녀는 전
혀 개의치 않고 있다. 더구나 입술마저 빼앗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
했다.
'미치겠네, 이거.'
주하연을 밀쳐내는 손을 멈추고 말았다. 귓불까지 벌겋게 물든 그녀
역시나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거였다.
그저 시체처럼 가만있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부인이 셋이나 있다고 했던 말 전부 거짓이지? 어떻게 나처럼 예쁜
여자가 입을 맞추는데 반응 하나 없냐?"
입을 맞췄을 때와 다름없이 재빨리 입술을 떼어낸 주하연은 백산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용기를 내어 그의 입술을 훔쳤으나 벌렁거리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
았다. 백산 앞에서 태연하게 옷을 벗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에 온 몸이 불에 덴 듯 달아올랐다.
"화났다면 미안해요. 화 풀어요, 오빠. 계속 그러고 있으면 하연인
……. 우앙!"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잇던 주하연은 급기야 고개를 쳐
들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곁눈에 들어온 그는 잔뜩 굳은 얼굴로
꼼짝없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화 안 났어. 그러니까 울지마, 뚝!"
"정말?"
"그래, 잠시 놀랐을 뿐이야."
"나 졸립다!"
언제 울었냐는 듯 배시시 웃은 주하연은 백산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
었다.
"제길, 빨리 데려다주던지 해야지. 이러다 군주 농락 죄로 참수당하
지."
백산은 쓰게 웃으면서도 주하연을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이제는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주하연이 고른 숨을 내쉬자 백
산은 눈을 감았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즐독 ㄳ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즐독입니다
즐~~~~감!
즐감
감사합니다
즐독 입니다
즐독합니다
백산도 이제 잠을잔다~~~
잘읽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