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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5일 재의 수요일
제1독서 : 요엘 2,12-18
제2독서 : 2코린 5,20─6,2
복 음 : 마태 6,1-6.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 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복음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실천하며 이 시기를 잘 계획하도록 초대합니다.
특히 자선과 기도와 단식, 이 세 가지를 실천하려면
무엇보다도 숨은 일도 보시는 분께서 갚아주실 것(마태 6,6 참조)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자선을 베풀 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야 하며,
단식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야 합니다.
자신이 자선, 기도, 단식을 하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데 방해되는 요소들을 피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 집중하려는 노력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인격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과 친밀해지도록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주시고자 하셨다.”(35항)
이 같은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사순시기에 우리는,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믿고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애쓰는 신앙의 여정을 걸어야 합니다.
이 과정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면,
예수님께서 자주 산 위에 혼자 올라가셨던 것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은 그 자체로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전쟁은 수천 년 전부터 끊임없이 계속됐고,
지금도 지구상에서는 여기저기서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전쟁의 원인에는 사람의 탐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탐욕이 커지고 커져서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탐욕에 당당히 맞서 희생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평안(평화)을 누립니다.
국가 간의 문제에서만 이 원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도 탐욕이 점점 커지면서 크고 작은 다툼이 계속됩니다.
이 다툼에서 이겨야 나의 욕심을 채우면서 평화를 얻겠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이 없다면 어떤 다툼도 끝낼 수가 없습니다.
누구는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돈’이라 하지만,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전쟁을 멈추고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이 있을 때,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은혜이며 감사할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만을 강조하셨던 이유를 묵상하게 됩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 세상의 탐욕 속에서 멈추지 않는 전쟁을
당장 멈출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재의 수요일인 오늘입니다.
참회의 상징인 재를 축복해서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사순시기를 시작인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는
자선과 기도와 참회에 대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해야 할 자선과 기도와 참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즉,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또 칭찬받으려는 마음을 갖고
이 중요한 덕목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이려는 자선, 기도, 참회이기에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서 “열심히 산다.”라고 칭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안에 사랑이 없기에
하느님에게서 그 어떤 상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창세기의 말씀인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창세 3,19 참조)라는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즉, 인간의 생명은 오로지 하느님께 달렸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연결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면서
하느님 뜻인 사랑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삶이 아닌, 하느님께 잘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에 집중하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제1독서>에서는 ‘회개’를 <제2독서>에서는 ‘화해’를,
<복음>에서는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요엘은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단식하고, 울면서,
마음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요엘 2,13)라고 말하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날을 맞이하라.’고 말하며,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지 말고,
숨어계신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몸과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뉘우침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돌아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신앙의 빛>에서,
‘회개’를 “주님을 향해 거듭 되돌아가는”(13항) 것으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듭해서 기꺼이 변모되려”(13항)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회개’가 첫째는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결국, ‘지속적인 회개’는 부르심에 대한 끊임없는 응답으로 지속됩니다.
이를 수도승들은 ‘제2서원’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적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이라는 외적 실행을 요청합니다.
곧 마음만 찢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의 요청이요,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삶을 불러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받고자 했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우리도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뼈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희는 어둠이 아니지만 어둠과 놀면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저희는 빛이 아니지만 빛 앞에 머무르면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저희는 천사는 아니지만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가 와 같이 될 수 있고,
마귀는 아니지만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하지도 않은 선을 행한 것처럼 과시하지도,
저지른 악을 가리고 숨기며 거짓으로 치장하지도 말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늘 빛이신 당신 앞에 머무르고,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리키는 숫자이다.
하느님께서는 노아 홍수 때 40주야 동안 폭우가 내리게 하여 심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400년을 종살이하였으며,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40주야를 단식과 기도로 지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40년이나 걸렸다.
예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40주야를 광야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준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시작되는 사순절도 오늘부터 시작하여 부활 때까지 주일을 제하고 세어보면 40일이 된다.
교회가 이렇게 사순절을 제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순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차지하신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그분의 영광에 우리도 참여하기 위하여 그분의 수난에 우리가 참여하는 시기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회개와 보속의 시기이다.
이럼으로써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어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재의 예절”을 거행한다.
이 재의 의미는 회개와 보속, 죽음과 겸손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머리에 재를 받는 것은
우리 죄로 인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및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보속 하겠다는 약속의 표시이다.
이 재의 예절은 우리가 우리의 죽음을 미리 묵상하게 한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이것은 우리의 현세적인 삶의 종착점인 죽음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이기적인 생활과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멀리 떠난 삶에서
회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돌아서게 하는 데 있다.
죽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알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이 재는 한 줌의 흙이다. 우리가 죽어 땅에 묻히면 한 줌의 흙이 된다.
그 자리에는 아무런 형체도, 권세도 명예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재를 교만과 명예의 자리인 머리에 얹음으로써
인생무상과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겸손하라고, 자신의 본 모습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겸손하지 못하면 회개와 보속의 실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을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자선과 기도, 단식에 관한 세 가지 본보기를 알려주신다.
자신의 덕을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넘치게 기도하면서 자기의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2절). 내가 하는 일을 떠벌이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의 찬사를 얻으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신앙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친절한 행동은 자체가 나팔이다.
숨겨야 할 것은 그런 행동이나 장소보다도 베풀려는 뜻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3절).
이 말씀 역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인데,
할 수 있으면 우리가 선을 베풀 때, 베푸는 손조차도 그 사실을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른손은 의인과 의로운 행위를 뜻하고
왼손은 죄인과 죄가 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어떤 일이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루어지려면,
의인인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몰라야 한다.
우리가 충실하고 신심 깊게 행하기 위해서는 죄인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6절).
우리의 기도는 인간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들으시고
마음의 비밀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께 기도하면 우리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6절).
사람들에게서 상을 받으려 하는 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또 다른 상을 받을 수는 없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16절).
교회도 또한 이 시기에 극기와 절제를 통하여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 그리스도를 닮고,
어느 때보다 기도를 많이 하여 은총을 받고자 마음을 모으는 때이며,
예수님의 부활 영광을 우리도 누리기 위해 속죄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 사순시기를 통하여 우리가 더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잇몸 치료를 받았습니다. 작년 2월부터 했으니 1년이 되었습니다.
치료받으면서 늘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취’입니다.
만약에 마취가 없었다면 잇몸 치료 과정이 엄청난 ‘고통’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저는 마취의 도움을 몇 번 받았습니다.
2012년 다리에 골절이 있었을 때도 척추 마취를 받고 수술받았습니다.
의학 분야에서 마취가 있을 때와 마취를 할 수 없을 때는
인류의 삶의 질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취의 고마움을 생각하며 예전에 읽었던 책이 떠오릅니다.
인류의 건강과 생명에 도움을 준 10가지 발명품입니다.
여러분도 ‘아!’ 하면서 수긍할 것입니다.
의학과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현대인들은 많은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삶의 질이 높아졌고, 수명도 늘었습니다.
‘마취제 (Anesthesia)’가 있습니다.
19세기 중반 에테르와 클로로포름 등의 마취제가 도입되면서
외과 수술이 혁신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극심한 통증을 동반하던 수술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항생제 (Antibiotics)’가 있습니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면서 감염성 질환 치료의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이후 다양한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세균 감염으로 인한 사망률이 크게 줄었습니다.
‘백신 (Vaccines)’이 있습니다.
천연두, 홍역, 소아마비 등 치명적인 질병을 예방하는 백신의 개발은
인류의 건강을 지키는 데 필수적이었습니다.
에드워드 제너의 천연두 백신(1796년)이 그 시작이었고, 이후 다양한 백신이 개발되었습니다.
지난번 코로나 팬데믹도 백신이 개발되면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X선 (X-ray)’이 있습니다.
1895년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면서
내부 장기를 비침습적으로 볼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이 생겼습니다.
이는 질병 진단과 치료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인슐린 (Insulin)’이 있습니다.
1921년 프레더릭 밴팅과 찰스 베스트가 인슐린을 발견하면서
당뇨병 환자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치약과 칫솔 (Toothpaste & Toothbrush)’이 있습니다.
구강 위생은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19세기 이후 치약과 칫솔이 대중화되면서
충치와 잇몸병 예방에 이바지했습니다.
‘페니실린 외 기타 항균 소독제 (Antiseptics & Disinfectants)’가 있습니다.
조지프 리스터가 1860년대에 소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외과 수술에서 감염률이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이는 병원 위생과 수술 성공률을 크게 향상했습니다.
‘심장 박동기(Pacemaker)’가 있습니다.
1950년대에 개발된 심장 박동기는
부정맥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심장이 정상적으로 박동하도록 전기 신호를 보내는 기기입니다.
‘MRI (Magnetic Resonance Imaging, 자기공명영상)’가 있습니다.
1970년대에 개발된 MRI는 인체 내부를 정밀하게 스캔할 수 있는 기술로,
뇌졸중, 암, 신경계 질환 등의 진단과 치료에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습니다.
‘정수기 및 상하수도 시스템 (Water Purification & Sanitation Systems)’이 있습니다.
깨끗한 물의 공급은 건강 유지에 필수적입니다.
정수기, 하수 처리 시스템, 염소 소독 기술 등의 발전으로
수인성 질병(콜레라, 장티푸스 등)의 발생이 크게 줄었습니다.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 위로를 주는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성사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성체성사는 신앙생활의 정점입니다.
그 밖에도 묵주, 십자가, 성경, 성가, 성수, 성모상,
초, 성지순례, 구유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신앙을 풍요롭게 합니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부터 교회는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사순시기는 신앙인이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끼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4가지를 실천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희생입니다.
희생의 방식은 다양할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도 희생입니다.
먼저 손을 내미는 것도 희생입니다. 양보하는 것도 희생입니다.
신앙은 희생이라는 밭에서 피는 꽃입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길’을 할 것을 권고합니다.
본당에서도 사순시기 금요일에는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마련한 사순 특강에 참여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셋째는 단식입니다.
단식하는 의미는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단식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자선입니다.
본당에서는 사순 저금통을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선을 베풀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2025년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나의 허물과 잘못을 정화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희생, 기도, 단식, 자선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에 함께 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언젠가 반드시 우리 모두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기원전 5세기경, 남유다는 휘황찬란한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하고,
높고 든든한 성벽도 쌓아 올리며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런 것 같습니다.
잘 나갈 때 더 겸손하고, 더 노력해야 하는데, 매사가 안정적이다 보면
즉시 나태해지고 안주하려는 경향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런 순간에 등장한 예언자가 있었으니, 요엘이었습니다.
그는 경신례에도 밝고 언어 구사가 탁월한 문학가였습니다.
그는 옛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을 힘차게 선포했습니다.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데, 요엘 예언자가 불쑥 등장해서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를 남발하니, 군중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가야 할 길을 걸어가며,
외쳐야 할 말을 가감 없이 외쳤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은 늘 외롭고 고달프고 황량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서 달콤한 하느님 위로의 말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격려나 칭찬, 해방의 기쁜 소식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섬뜩하기 그지없는 메시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강력한 경고, 공포로 가득한 멸망의 예고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울부짖으라고 외쳤습니다.
“사제들아, 자루 옷을 두르고 슬피 울어라. 제단의 봉사자들아, 울부짖어라.
내 하느님의 봉사자들아, 와서 자루옷을 두르고 밤을 새워라.
너희 하느님의 집에 곡식 제물과 제주가 떨어졌다.”(요엘 1,13)
그러나 요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해서 코너로 몰아넣지만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 있는 회개와 참된 단식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가 베풀어질 것임을 선포합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요엘 2,12-13)
요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닥친 대재앙, 그로 인한 시련의 원인이
바로 자신의 죄와 부족함이라는 것을 인식하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옷만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고 강조합니다.
형식적이고 외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내적 회개를 촉구합니다.
또한 그는 특정한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의 회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범국민적, 범국가적 회개를 요청했습니다.
또 다시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를 머리에 얹으며 생각해 보니, 우리 모두는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너나 할 것 없이 손톱만한 도토리들입니다.
티격태격, 아옹다옹하면서 ‘내가 더 높네. 내가 더 크네. 내가 더 대단하네.’ 외치지만,
하느님 눈에는 모두가 그놈이 그놈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잠시 떠다니다가
하느님 자비의 품을 향해 사라질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광대무변하시고 영원하신 주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신 주님 앞에
우리는, 너무나 작고 미약한 존재라는 진리를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우리 공동체의 삶이 한결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내가 선배인데, 내가 연장자인데, 내가 원장인데, 내가 회장인데, 하며
어깨에 힘줄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인간 존재의 영원한 결핍성과 티끌보다 작음을 잊지 않는다면,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도 조금은 부드러워 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이웃을 향한 측은지심이요, 진한 동지의식일 것입니다.
재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타고 남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 무가치한 것, 허무한 것,
보잘것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를 머리에 얹을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쳐야겠습니다.
“본래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먼지요, 티끌, 무(無)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토록 보잘것없는 제게 큰 은총을 베푸셔서 생명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지금 저는 여기 서 있지만, 주님의 흘러넘치는 자비가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과거에도 저는 흙이었지만, 지금도 흙과 다름없는 존재요,
언젠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누구든지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4)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5)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1) ‘재의 예식’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먼지처럼 사라질 존재라는 것을 묵상하라는 예식이고,
동시에 먼지처럼 사라지지 않으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식입니다.
구약성경의 시편 작가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3.5-6)
여기서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이라는 말은,
인간이 먼지로 돌아가거나 돌아가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창조주 하느님은, 우리를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게 하실 수도 있고,
반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영원히 살게 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으로는, 또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고,
‘온 삶으로’ 믿음을 실천하는 생활을 해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 실천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믿음의 방향과 신앙생활의 방향을 올바르게 바로잡는 일이고,
하느님께 자비를 간청하는 일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서 자신의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는 일이고,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입니다.
사실 믿음과 회개는 하나입니다.
믿는다면 당연히 회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믿는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혹시, 회개는 하지만 믿지 않는 경우가 있을까? 없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회개 자체를 아예 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재의 수요일’에 듣는 복음 말씀은,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라.”(위선자가 되지 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자선, 기도, 단식뿐만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간에
‘위선’은 하느님을 속이려고 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죄입니다.
사순시기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극기 고행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은혜로운 때인데, 동시에 위선자들이 가장 많이 생기는 때입니다.
진심으로 행하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극기 고행으로만 멈추면, 그것은 모두 위선입니다.
<외국의 일부 국가나 지역에서 벌이는 카니발,
즉 ‘사육제’는, 지금은 하나의 문화로, 또 전통으로 자리 잡은 모습이지만,
원래는 사순절의 극기 고행을 앞두고
미리 실컷 먹고 마시려는 ‘불순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사순절의 극기 고행은 위선이 되어버립니다.
금요일에 금육재를 지켜야 하니까 목요일에 미리 고기를 먹거나 토요일에 고기를 먹는 것,
단식재를 지키기 전에 미리 배불리 먹거나 지키고 나서 배불리 먹는 것,
그런 경우에도 그 금육재와 단식재는 모두 위선입니다.
금육재를 지키려고 고기를 안 먹지만,
그 대신에 고기보다 더 비싼 횟집에 가서 회를 먹는 것도 위선입니다.>
4)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들 모르게 하여라.”인데, “너 자신도 모르게 하여라.”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자선을 베풀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말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루카 17,10)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자선을 베풀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없고,
잊어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실천한 선행을 잊어버려도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신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인데,
거꾸로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시니까 너 자신은 잊어버려라.”입니다.
재만 남기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를 머리에 얹으며 우리가 재와 먼지에 불과한 존재이고,
재와 먼지로 돌아가게 될 것을 기억하라고 권고받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따가 재를 얹는 예식을 하며 오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대신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라고 권고하겠습니다.
그런데 재란 무엇이고 재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재란 불에 타고 남은 것이지요.
그러니 이런 권고를 받는 우리는 오늘 자신을 불태우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자신을 불태운다는 것이 구체적으로는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크게 두 가지이겠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이겠습니다.
부정적인 의미를 먼저 보면 욕망을 불태워 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통 욕망을 불사른다고 할 때의 뜻과는 다릅니다.
욕망을 불사른다는 것은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뜻이지만
불태운다는 것은 욕망이 사그라들어 재가 되게 하는 겁니다.
지금의 저는 욕망이 거의 다 타버린 재처럼 사그라들었지만
젊을 때는 끓는 피와 같았기에 어떻게든 사그라들게 해야 했는데
제일 좋은 방법이 무덤에 가는 것과 양로원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술 한 병 사 들고 묘지에 가 아무 무덤이나 돌아가신 분께 한잔 올린 다음
그 무덤을 베고 무덤의 그분과 함께 한잔하면 욕망이 사위어지고
양로원에 가 어르신들과 어울리다 보면 욕망이 정화되거나 순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이미 사그라든 지금은 진정한 사랑을 불태워야 할 때입니다.
욕망이 사그라들며 사랑도 같이 사그라들게 해서는 안 되고
앞에서 봤듯이 지금이 오히려 욕망이 정화되어 참사랑을 할 때란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육신만 화장하지 않고 저의 사랑도 영혼도 화장하고 싶습니다.
남은 생애 제게 있는 사랑을 내 몸뚱이를 위해 아껴두거나 남겨두지 않고
아낌없이 남김없이 다 주고 재만 남기고 떠나고 싶습니다.
자선은 사랑을, 기도는 신뢰를, 단식은 겸손을...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미사 전례 중에는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머리에 받는 예식에서 ‘재의 수요일’이란 이름이 생겼다.
이 재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 축복하여
십자가에 끼워 두었던 나뭇가지를 태워 얻은 것이다.
오늘부터 사제는 회개와 속죄의 상징인 보라색 제의나 예절 영대를 착용한다.
복음 후 강론이 끝나면 사제는 재를 축복하여 자신도 머리에 받고,
이어, 신자들의 머리에 얹으면서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 3,19 참조)라고 말한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내가 흙에서 와서 다시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거늘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흙밖에 되지 않는 내가
이렇듯 살아있는 생명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날에 봉독 되는 복음은 산상설교의 중반부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의 첫 부분을 통하여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통용될
새로운 ‘의로움’을 조직적으로 선포하셨다.(6개의 대당명제: 5,21-48)
대당 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되었으며,
이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며,
구약의 가장 중요한 십계명의 범주 안에서 계명 자체를 사로잡는
계명 정신에 기반을 둔 새로운 ‘의로움’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요구는 하느님의 완전성을 닮아가는 것(48절)으로 요약되었다.
오늘 복음에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 무엇보다 중요한 신앙인 모두의 성덕으로 제시된다.
그렇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는 이미 유대교 안에서 널리 수행되었던 덕목들이며,
예수님 당대에는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선행을 쌓을 목적으로 사용했던 수단들이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하여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움은 무엇인가?
일단 이러한 선행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부러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1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행이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수행되거나,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그 자체가 이미 상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 선행 지침을 엄수해야 한다.
즉,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것’(3절)이며,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할 것’(6절)이고,
‘단식할 때 얼굴을 깨끗이 하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할 것’(17절)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숨을 일까지 모두 보시는 하느님께서 보답해 줄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내리시는 선행 지침을 글자 그대로 따르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모든 선행이 사람의 인정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숨을 일도 다 보시는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선과 기도와 단식 등의 선행을, 행하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이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자신의 선행을 남들이 알아줄 때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받을 상을 다 받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선을 통하여 사랑을, 기도를 통하여 신뢰심을,
단식을 통하여 겸손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향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무엇보다도 속죄의 힘을 가진다.
부디 속죄와 보속으로 은혜로운 40일이 되도록 노력하자.
사순절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단순히 연구하고 사색하는 기간이 아니다.
동감하고 이에 동정을 표하는 기간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우리의 표양으로 삼고 그것을 사는 기간이다.
나의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고 실제로 그 잘못으로부터 돌아서는 기간이다.
꾸준한 반복을 통하여 그분의 법과 정신을 따라 사는 배움의 기간인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