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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장 1409년 7월 1일 오전
양주성.
양주성의 아침은 안개 속에서 시작된다.
꿈처럼 피어오르는 새벽 안개 가득한 수로(水路)에 미끄러지
는 작은 배 한 척. 수로 바닥에 삿대 찔러 넣는 소리가 물을 치
고, 운하의 둑은 안개 속을 기는 검은 뱀처럼 배 옆으로 달렸다.
강가의 버드나무는 보이지 않지만, 가지 흔들리는 소리는 들
릴 것 같은 성하(盛夏)의 양주성. 그는 뱃머리에 고요히 좌정하
고 앉아 양주를 느끼려고 애쓰고 있다.
물 소리 고요히 들리고, 비릿한 물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배
를 띄운 황색의 물이 뿌옇게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
도 느낄 수 있었다.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이어지고, 이어졌다가
는 다시 갈라지는 양주의 운하였다.
수양제(隋煬帝)는 이 운하를 만들고, 동쪽의 고구려(高句麗)
를 정벌하려 했다가 실패한 것이 원인이 되어 나라를 잃었다.
그가 여기 양주에서 살해되어 묻혔다는 것은 역사가 그의 인과
응보를 대신 집행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양주는 그를 죽이고,
대신 그의 안식처를 내준 것이다.
운하의 덕으로 양주는 당대(唐代)에 이미 국내 최대의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후주(後周) 현덕 5년(顯德 5년;985년)에는
성이 너무 커 수비하기 어려워서 따로 소성(小城)을 건축하였다
고도 한다.
송(宋) 이종(理宗) 보우 3년(寶佑 3년;1255년)에는 금(金) 나
라 군사의 남하를 방어하기 위해 구성(舊城)의 서북쪽 모퉁이에
새로 보우성(寶佑城)을 축조하고, 또 그 남쪽에 별도로 큰 성을
건축하였다. 두 성의 연결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수서호( 西
湖) 일대에 따로 내성(內城)을 쌓았는데, 송과 금의 전란으로
도시 전체가 크게 파괴되었다가 원대(元代)에 대성(大城)의 일
부분을 중점적으로 복구시켜 명대(明代)의 양주성을 이루었다.
동쪽에 해령(海寧), 서쪽에 통사(通泗), 남쪽에 안강(安江),
북쪽에 진회(鎭淮)의 대문이 있었고, 따로 소동문(少東門)이 있
어 일천칠백칠십오 장(1775丈) 오 척(5尺) 둘레의 성곽에 다섯
개의 성문이 있는 셈이었다. 또한 그것과는 따로 남, 북에 각각
두 개씩의 수문이 있어 운하로 통하는 배가 왕래했다.
양주는 강남의 식량과 비단의 집중지로서 양주를 거쳐 대운하
를 경과해 북방으로 공급되는 것들의 통치 중심지였다. 명대에
들어서는 또 강회(江淮) 지방에서 생산되는 소금의 집중지가 되
어 염운사(鹽運使)가 설치되는 등 중요도가 더해 가고 있었다.
명대에는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했고, 운하가 성의 동쪽으로
흘러 이 일대는 이미 상업의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각종 수공업은 그 직종에 따라 집중되어 단자가(緞子街)의 양
편에는 단자포(緞子鋪;포목점)가 많았고, 취화가(翠花街)에는
구슬, 비취 및 장식품 가게들이 집중해 있었다.
운하가 성의 동쪽과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
는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소동문, 초관( 關), 동관가(東
關街), 하하가(河下街) 일대는 가장 번영해서 부두, 창고, 객
점, 주루 등이 집중해 있었다. 대상인들과 유지들도 이곳에 주
로 거주했기 때문에 호화로운 저택과 정원이 많았다.
배는 지금 고운하(古運河)를 따라 통양교(通揚橋)를 통과하
고 고강교( 江橋)아래로 해서 양주성에 진입한 뒤, 유항경자
가(柳巷梗子街)를 따라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 유항경자가를 중심으로 왼쪽을 구성(舊城), 오른쪽을 신성
(新城) 이라고 부르는데, 신성 지역에는 상업이 발달해 상가와
객점, 부두, 창고, 대저택이 밀집해 있었다. 구성 지역에는 이
와 달라서 수공업을 하는 공방(工房)이 주로 이곳에 있었다.
말하자면 신성 지역에는 부자들이, 구성 지역에는 빈민들이
주로 살았다는 것인데, 이 두 지역을 나누는 거리가 유항경자의
거리, 즉 매춘을 전문으로 하는 창기(娼妓)들의 거리라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었다.
식(食)과 색(色)에는 빈부귀천이 없다는 뜻일까?
아니면 거기서부터 빈부귀천은 이미 나뉜다는 것일까?
배는 말없이 안개 속을 흘러 여의교(如意橋)를 지나고, 보이
지는 않지만 저만치에 소홍교(小虹橋)를 앞두고 있었다. 거기서
왼쪽 물굽이로 꺾어 들어가면 양주성 지부공관(知府公館)이 나
오는 것이다. 배는 그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삿대를 잡고 있던 늙은 사공, 당노구(唐老狗)는 뱃머리에 앉
아 있는 사내를 힐끗 훔쳐보았다.
그는 관리(官吏)였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 칼처럼 날카롭게
뻗어 내려온 콧날이 인상적인 미남자였다.
위아래가 하나로 이어진 청색의 보복(補服)을 입고, 하얗게
라나는 은대(銀帶)를 허리에 느슨하게 둘렀다. 머리에는 오사모
(烏絲帽)를 썼고, 가슴과 배를 덮은 보자(補子)에는 원앙(鴛鴦)
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의 신분을 짐작하게 하는 표지(!E%t) 였
다. 육품(六品) 벼슬의 문관(文官)이라는 표지인 것이다.
이 시간에 지부공관에 가는 것은 등청(登廳;출근)하는 것일까?
그럼 왜 새벽같이 배를 빌려서 양주성을 한바퀴 돈 뒤에야 그
곳을 향하는 것인가?
당노구는 얼마 전 양주부의 사법을 담당하는 주관(ftt't) 이 대
흥교 혈사(血事)로부터 시작된 양주부의 일련의 혈사들, 속칭
'공포의 밤' 사건을 밝혀 내지 못한 죄로 좌천된 것을 기억해
내었다.
그 자리는 육품의 자리가 아니었던가!
그처럼 밑바닥 인생들이 관부가 돌아가는 것을 알아서 뭐하겠
을까만 사실 또 그들만큼 그런 것에 정통한 사람들도 없는 법이
었다. 오가는 관리들이 뱃전에 흘린 이야기만으로도 세상 돌아
가는 이야기는 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당노구는 그의 배를 탄 이 젊은 사내가 효으로 그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게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지……!
주관이라면 한 부현(府顯)의 형방사법(刑房司法)을 맡은 관
리, 양주부의 포두(捕頭), 포쾌(捕快), 순쾌(巡快), 마쾌(馬快)
들이 모두 그의 휘하에 있게 되는 서슬 퍼런 자리였다. 그들 같
은 서민에게는 지부보다는 그가 더 현실적인 힘에 가까운 인물
로 느껴지는 것이다.
당노구, 늙은 개[老狗] 당가(唐家)는 주름살투성이의 손에 잡
은 삿대를 운하 바닥에 깊이 찔러 넣었다. 양주에서 산 팔십 평
생 밥 먹는 동작만큼이나 익숙해진 동작이었다.
관복의 사내, 신임 추관이 문득 손을 들어 운하 저편 기슭을
가리켰다.
"사공, 저쪽으로 돌려라!"
당노구가 그 말에 피곤한 눈을 들어 저편 기슭, 정확하게 말
해 기슭을 따라 홀러오는 물체를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재수없이!"
칙!
그는 그 방향을 향해 액땜하듯 세 번 침을 뱉고는 관리를 향
해 머리를 조아렸다.
"저런 걸 아침부터 보시면 재수가 없으니 그냥 가시는 것이
어떨지……?"
"돌려라!"
당노구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버렸다. 관리의 눈에서 빛나는 정광(精光)이 그의 눈을 찔
러 왔던 것이다.
금빛에 찌든, 뇌물에 혼탁해진 관리들과는 무언가 다른 빛이
었다. 거절할 수 없는 힘이 깃든 눈빛.
'너도 여기 오랜 못 있겠구나!'
그는 말없이 삿대를 들었다가 운하 바닥에 깊이 찔러 넣었다.
다섯 간 길이의 삿대가 운하의 바닥에 두텁게 깔린 진흙을 뚫고
단단한 바닥에 닿았다.
배 고물이 물을 부수며 왼쪽으로 밀렸다. 뱃머리는 고개를 돌
려 관리가 손짓한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것은 처음엔 물에 떠내려 오는 나무둥치처럼 보였다. 검게
부패된 그 모습이 나무의 암갈색을 연상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제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절대 나무
둥치는 아니었다. 나무둥치가 이렇게 굵어서야 제대로 뜨기나
했을 것인가?
관리는 뱃전으로 고개를 내밀고 그 물체를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남녀를 알아볼 수 없는 부패한 시체, 부어 올라 이목구비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아마 평소의 두 배는 커졌으리라. 정말 거대한 몸집이었다.
체격이 커서가 아니라 부어 올라 커진 모습. 뱃속에 부패한 공
기가 차지 않았3.면, 그래서 이렇게 커지지 않았으면 운하 바닥
에서 그냥 뒹굴고만 있었을 시체.
관리는 그 부어 오른 정도에서 대충 죽은 지 사흘에서 육 일
정도 된 시체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건져라!"
당노구는 이제는 정말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
"안되겠는뎁쇼!"
관리의 시선이 다시 당노구를 찔렀다.
그러나 당노구도 이번에는 호락호락 그의 말을 따르지는 않았다.
"저건 이미 게게 풀려 버렸다굽쇼. 겉으로 보기엔 그냥 부은
것 같지만 건들면 부스러진다굽쇼."
그는 건드리기만 해도 완전히 분해되어 버릴 듯 손을 이리저
리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건져!"
관리가 차갑게 말했다.
당노구는 심통이라도 난 것처럼 시체를 밑으로 확 밀었다.
시체는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며 뒤집혀졌다. 눈이
없어지고 살점이 반쯤 떨어져 나간 초록색의 얼굴이 그들을 멍하
니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살려 달라는 마지막 외침 같았다.
삿대에 걸렸던 옆구리 살이 뭉텅 묻어 나왔다. 그리고 그 자
리에서 살이 풀어져 뜯어진 틈으로 허연 창자가 물을 따라 홀러
나왔다. 고약한 냄새가 안개를 타고 퍼졌다.
당노구는 삿대를 물에 넣고 휘저어 거기 묻은 살을 씻어 내며
엷은 미소를 홀렸다. 논어 맹자나 읊조리던 책상물림이 이런 흉
악한 광경을 어디서 봤을 것인가?
'작년에 먹은 월병(月餠)까지 토해 내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나 관리는 토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시체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흘러가지 않도록 잡고나 있어라!"
물에 불은 시체는 그냥 썩은 시체보다도 몇 배로 냄새가 지독
했다. 그렇게 창자가 뒤집어질 정도로 역겨운 냄새를 풍기고 있
는 시체의 바로 위로 몸을 내밀고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관리를
당노구는 놀랍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물에 불은, 아니 당노구의 말대로 게게 풀려 버린 시체에서
사인(死因)을 짐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눈만이 아니라 코와 손가락조차도 물고기에게 뜯어 먹힌 시체는
남녀를 구별할 수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리는 그 중에도 몇 가지를 알아내었다. 썩어서 흐물
거리긴 하지만 위에는 맨살이요, 아래에는 대충 옷의 흔적이 있
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반바지, 단고(短 )를 입었던 흔
적이었다.
그것으로 관리는 죽은 자가 사내요, 강남에서 흔히 볼 수 있
는 하층 천민의 하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의 평상복장이
이것, 윗통은 벗고 그저 무릎을 겨우 가리는 반바지나 입고 돌
아다니는 것이다.
관리는 다시 품속에서 은젓가락을 꺼내었다. 그는 그것으로
시체의 배를 찔러 보았다. 젓가락은 마치 두부에 찔러 넣듯이
아무런 저항감 없이 들어갔다.
다시 뺀 젓가락에는 썩은 살점만이 묻어 나왔을 뿐 아무런 변
화가 없었다.
관리는 실망한 기색이었다. 독에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
실해졌지만 그것으로는 단서가 되지 않는다. 시체가 된 이 사내
는 맞아 죽었을 수도 있고, 칼에 찔려 죽었을 수도, 심지어는
자연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손가락, 발가락이 없어진 것도 사람에 의해 당한 것인지, 아
니면 물고기 밥이 된 것인지 확증이 없다.
그래도 아쉬운 기색으로 시체의 여기저기를 찔러 보던 관리는
한숨을 쉬고 물러앉았다. 지금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대신 사공을 향해 물었다.
"이런 시체를 자주 보나 보군."
당노구는 그의 조사가 끝났다는 것을 알고 시체와 반대펀으로
배를 밀었다.
"이런 일을 하며 몇 십 년을 살면 놀랄 일이란 별로 없습죠.
그의 심드렁한 말을 듣던 관리의 눈이 문득 번뜩였다. 배가
물러서며 일으킨 물살에 시체가 뒤집혀졌던 것이다. 그리
고…….
"잠깐, 멈춰!"
그것은 분명 손자국이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손 모양으로 새
긴 작은 문신이었다. 뒤집히면서 언뜻 보인 시체의 허벅지에는
검은 손자국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문신은 여러 부류의 사람이 여러 가지 이유로 새기지만 남들
에게 잘 보이지 않는 허벅지에 새기는 경우는 단 두 가지밖에
없다.
사랑의 맹세로 연인들끼리 새기는 문신, 연비(煙臂)거나 비밀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표지였다. 검은 손자국을 사랑의 징표
로 삼는 연인이란 없을 것이다.
'검은 손자국으로 표시되는 비밀단체라……!'
관리는 이제는 정말 물러나 앉았다.
"가자!"
당노구가 삿대를 찔러 넣고, 배는 다시 물살을 갈랐다. 관리
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허벅지에 검은 손자국이 있는 시체를 또 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요!"
당노구가 대답했다. 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오늘 말고는 없습죠……."
* * *
유항경자가(柳巷梗子街), 경연루(輕煙樓).
언제나처럼 아침은 나른한 숙취와 그에 따르는 두통으로 다가
왔다. 그리고 갈증…….
혈문룡은 눈을 감은 채 팔을 올려 머리맡을 더듬었다. 거기
여덟 모 난 탁자가 있고. 그 위에는 주전자, 그 안에는 갈증을
해결할 찻물이 있다.
그는 손끝에 걸리는 찻잔은 밀어서 떨어뜨려 버리고 주전자
주둥이를 잡았다. 그것을 입에 가져다 대고 기울이는데 눈은 필
요 없었다.
찻물은 미지근했지만 그의 목구멍에는 달고 시원하게 느껴졌
다. 혀끝에 남은 쓴맛마저도 새벽까지 마신 술의 역한 향기를
씻어 주는 것 같아 좋았다.
"크아!"
혈문룡은 만족스런 소리를 내며 주전자를 입에서 떼고 손으로
입을 문질렀다. 바짝 말랐던 입술이 이제야 조금 나아졌다.
"으음……."
가슴에 올려 두었던 주전자가 굴러떨어진 모양이었다. 옆에
누운 여인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혈문룡은 눈을 비비며 소리가
난 그의 옆자리를 보았다.
베개 위로 가득 퍼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여인의 얼굴이 보
였다. 그때에서야 코끝을 스치는 지분(脂粉) 내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여인의 얼굴은 낯설다. 혈문룡은 눈
을 가늘게 뜨고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긴 다음 그녀, 아마도 지난
밤을 같이 보냈을 그 여인을 자세히 보았다.
종이창문을 뚫고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이 침상 가에 드리운
휘장에 넘실거리다가 한두 줄기 여인의 얼굴에도 비추었다.
십육칠 세밖에 안되었을 어린 여인의 얼굴, 그러나 감은 두
눈가에 드리운 희미한 그늘은 세파에 시달린 흔적을 말해 주고
있었다.
혈문룡은 그녀를 기억해 내었다. 벌써 연사흘째 그는 이 여
인, 경연루 일급창기(一級娼妓) 려화(麗花)의 침상에 기어들지
않았던가!
그러나 볼 때마다 그녀는 새롭다. 멀리서 본 얼굴과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본 얼굴, 붉은 촛불 불빛 아래에서 본
얼굴과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본 얼굴이 달랐다.
짙게 분칠한 얼굴에 검게 그린 눈썹의 그녀는 백합처럼 화사
했지만 이렇게 화장을 지운 얼굴의 그녀는 들꽃처럼 풋풋하다.
바람을 탄 들꽃이긴 하지만.
방금 뒤척인 탓일까, 여인의 가슴은 얇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어린 나이를 말해 주듯 그저 작은 접시만하게 봉긋 솟
아오른 젖가슴, 그 중심 아래쪽에 파묻힌 젖꼭지.
혈문룡은 손을 내밀어 젖꼭지를 살짝 눌렀다, 그것은 힘없이
누른 만큼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 다시 눌렀다가, 또다시. 럿
꼭지가 아까 전보다는 단단해지고 솟아오른 것 같다.
혈문룡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손가락 둘을 내밀어
그 젖꼭지를 간질였다. 햇라에 비쳐 분홍색으로 밝은 첨단과 점차
짙어지는 붉은색의 젖꼭지, 그 주변으로 둥글게 그려진 작은 원.
"으음……!"
려화는 어슴푸레 잠에서 깬 모양어었다. 얕은 신음 소리를 내
며 돌아누웠다.
혈문룡의 눈에 둥글고 횐 어깨와 희미한 굴곡을 그린 등이 들
어왔다. 그 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약간 휘어진 허리와 급
격하게 솟아오른 엉덩이의 곡선. 그 곡선은 이불에 가려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 곡선을 따라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아무
런 반응이 없었지만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자 가느다란 떨림
이 손끝에 전달되었다. 그녀는 분명 깨어 있었다.
혈문룡의 손이 엉덩이의 곡선을 따라 이불을 걷어 내었다.
그를 향해 도발적으로 튀어 나온 엉덩이, 그 사이의 깊은 금,
어느 곳에서도 직선은 찾아볼 수 없는 완만한 곡선의 덩어리.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손을 내밀어 여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아!"
여인이 약간은 놀란 신음성을 토하며 바로 누웠다. 그는 상체
를 들어 그녀의 위로 덮치듯 올라갔다.
"살살……!"
억인의 건먹은 눈동자가 그의 눈에 마주쳤지만 그는 신경 쓰
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 목소리는 귓가로 스치고, 그는 그런
것을 비웃듯이 더욱 거칠게 행동했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젖가
슴이 삐져 나올 듯했다. 다른 한 손은 이미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고 있었다.
"제발……!"
애원하는 듯 애처로운 여인의 목소리. 혈문룡의 손은 이미 그
녀의 비경(秘境)으로 침투해 문을 열고, 힘껏 엉덩이를 찍어 내
렸다.
"아악!:
여인은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며 혈문룡의 등에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힘껏 껴안았다. 그는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버둥거리는 그녀의 다리가 이불을 완전히 걷어 버렸다. 지금
시간이면 방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아주 없지도 않으련만 그
녀의 비명은 억제되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 살 부딪치는 소리가 여인의 비명에 혀여 홀렀
다. 혈문룡은 전력질주를 하는 수말처럼 거칠게 그녀를 공격했
*. 이윽고 절정의 순간에 다다르자 그는 그녀를 공중으로 집어
올겼다가 다시 받아 안는 듯이 움직였다.
거칠게, 더욱 거칠게, 그리고 한 순간 모든 동작이 멎고. 혈
문룡은 그녀에게서 몸을 세고 옆에 드러누워 버렸다.
거친 숨소리가 그의 벌린 입으로 새어 나왔다. 잠시 그렇게
숨을 고르고 그는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여인의 낮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칠월 초하루예요."
차가운 여롬 2!1
가볍게 떨리는 목소리. 혈문룡은 그것이 쾌락에 젖어 그런 것
인지, 아니면 고통에 시달려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
고 관심도 없었다.
그에게 여인은 그런 것이다. 필요한 만큼만 잘해 주면 그것으
로 그만, 나머지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면 매이게 된다.
혈문룡은 의도적으로 그녀의 기색에서 신경을 끊으며 눈을 감
아 버렸다.
'초하루……, 당주가 돌아올 때가 됐군!'
졸음이 다시 밀려왔다. 당주가 돌아오기로 예정된 날이 내일
로 다가왔다.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밤에나 나타날 것이다.
그때까진 하루 반나절의 시간이 통째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는
곧 낮게 코를 골았다.
나른한 아침, 분홍빛 향기 조용히 흔들리는 기루의 아침이었다.
* * *
지부공관(知府公館).
"이곳은 골치 아픈 곳이지!"
지부(知府)는 벌써 세 번이나 골치 아프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침 조례를 마치고 그가 지부대인의 집무실에 들어와 부임 인
사를 한 이 짧은 시간 동안의 일이었다.
지부가 계속 말했다.
"허리에 십만 금의 전대를 두르고 양주성문에 들어서면 학을
타고 속세에 내리는 신선의 기분이 든다……. 운운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
사내, 양주부 신임 추관 모충국(毛忠國)은 가볍게 고개를 끄
덕이며 대답했다.
"예!"
명(名)은 결(潔), 자(字)는 충국(忠國), 올해 나이 서른둘.
원래 북경 태생으로 지금은 이웃 남경(南京)으로 거처를 옮긴
전직 대관(大官) 모의기(毛義基)의 독자(獨子)였다.
어려서는 남경에서 자랐으니 이곳 강남의 사정에도 밝았다.
아마도 그것이 이번 양주부 추관으로 임용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놀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겠지. 사실 나도 그럴 사정이 되면
양주가 좋다고 할지 모르겠네. 그러나 우리 같은 관직의 사람들
에겐 양주는 지옥이야. 정말 지윽이 따로 없다는 걸 여기 와서
야 알았네!"
양주지부 왕백곡(王伯穀)은 생각만 해도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까지 내쉬었다.
실제 그들 같은 관리에겐 놀기 좋은 양주라는 것은 그림의 떡
일지도 모른다.
양주가 왜 놀기 좋은가?
맛있는 음식과 향기로운 술은 다른 곳에도 있고, 경치는 이웃
고을에 비해 오히려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그런데도 놀기 좋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창기(娼妓)들 때문
이었다.
성안 이곳저곳 가로지른 운하, 그 위로 놓인 이십사 개소의
다리와 사통팔달(四通八達), 바둑판처럼 뚫린 거리마다에 보이
는 것이 객잔, 주점이고 다루(茶樓)에 주루(酒樓)였다. 그리고
그곳마다에 지분을 짙게 바르고 날아갈 듯 가볍게 옷을 입은 여
인들이 나긋한 몸매를 자랑하듯 흔들며 다녔다.
양주는 난봉꾼들의 천국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향락 도시인 것
이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위로는 지부대인으로부터 아래로는 아문
(衙門)의 말단까지, 관리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관리가 창기
를 끼고 노닥거리는 것은 나라에 의해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공창(公娼), 사창(私娼)팀에 최하급 창사(娼舍)인 요자(搖子)까
지도 보호해 줘야 하면서 손도 대보지 못하는 것이 관리의 일이
었다.
"체다가 이 좁은 곳에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아나? 물경 백만
에 육박하네. 경사(京師;북경과 남경)를 제외하고는 성도(省都;
각 성의 수도)라도 이만큼 사람이 많은 곳이 드물지."
상업이 그렇고, 수운업(水運業)이 그렇고, 특히 수공업이 그
랬다. 어느것도 '사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것도
대량의 사람이…….
"사람이 많으면 사건도 많은 것이지. 성상의 은총을 입어 여
기 부임한 지 이제 겨우 이 년인데 단 하루라도 크고 작은 사건
이 그친 적이 쇱었네. 난 요 이 년 동안 거의 이십 년이나 늙어
버린 것 같네."
왕백곡은 오사모 사이로 삐져 나온 잿빛 머리카락을 과시하기
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모중국은 아무런 말도 않고 꼿꼿이 서서 지부의 말을 듣고 있
2!다.
지부는 그가 어디까지 믿어 주리라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하
는 것일까? 그가 갓 관직에 나온 솜털이 뽀송뽀송한 병아리인
줄 아는 것일까?
일이 많으면 생기는 것도 많은 것이 관직이었다. 아직 국초
(國初)의 기강이 해이해지지 않았을 때라서 그런 일은 없지만,
원나라 때만 해도 이곳 양주성에 부임해 오기 위해서 백만금을
뿌려 가며 청탁을 하고 다니는 일이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천만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백만금을 뿌릴 이유가 없는 것이
관의 생리요, 인간의 생리. 양주성은 관리에게는 다른 의미에서
신선이 학을 탁고 내려오는 기분올 주는 곳이었다.
그는 문득 남경에서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제형안찰사사는 강소성의 사법을 담당하는 총책임자.
--왕백곡이가 어떤 인물이냐고? 그저 그런 인물일세. 그렇게
극악한 인물은 아니지만 또 그렇게 청렴하지도 않은……, 그저
자리나 지키며 생기는 것들을 주워 먹는 걸로 만족하는 인물이
지. 호락호락하지는 않정지만 자네가 강하게 나오면 막지는 않
을 인물일세.
사람을 평하는 말치고는 애매한 말이었다. 그때 그는 그렇게
물에 물 탄 둣한 인물이 이 년이나 양주지부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하고 의아해 했던 것이다. 지금 만나본 인상 역시
그렇게 애매해서 쉽게 부류를 나눌 수 없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경계해야 할 인물인지도……!'
그의 표정이 무덤덤하자 지부는 계속 엄살을 부릴 홍미를 잃
은 모양이었다. 김샌 듯한 표정을 언뜻 보이더니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래도 전임 추관의 밑에서 여러 포두와 포쾌들이 수고를 해
준 덕분에 큰 일은 없었던 이 년이었는데 ……. 요즘 들어 심상
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네."
이제 겨우 본론에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지부의 목소리가 낮
아지고 있었다.
"양주부 내의 무림세력이 하나로 합쳐졌다는 정보가 있네."
모충국의 눈이 가늘게 감겨졌다. 생각하기 어려운 일을 지금
듣고 있는 것이다.
"기존에 있던 군소 문파들과 비밀조직들이 혹은 사라지고 혹
은 흡수되어 버렸다는 것일세."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한 세력이 이전까지의 세력들을 꺾고
가장 강한 세력으로 새로이 등장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고 이
상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여타 세력들을 전부 제거하거나 흡수한다는 것이 가능
할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
모충국이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 세력의 명칭이 뭡니까?"
"모르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지부를 보았다. 그러나 지부는 멀뚱멀뚱
그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성내의 무림세력 이름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자기 말대로
라면 성내에 유일한 무림세력인데?'
"언제 그 움직임을 포착하셨습니까?"
지부는 질문을 받기 시작하자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손을
흔들어 나가라는 뜻을 표하며 짧게 대답했다. 그 대답이 모충국
에게 충격을 주었다.
"처음 드러난 것은 보름 전이지만 한 달 전부터 활동을 시작
한 것 같다고 하더군. 자세한 것은 형방에 가서 물어 보게."
한 달. 단 한 달만에 인구 백만의 대도시 양주의 무림세력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이름도 드러내지 않고서…….
모충국은 뭔가 심상찮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 * *
하하가(河下街), 부두.
진운은 연락을 받자마자 자리에서 떠나 일 각이 채 지나기 전
에 부두에 도착했다. 요즘 그는 날이 밝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
어나 전날 밤에 생긴 일들을 챙기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새벽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빨리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앞장선 사내, 황구(黃九)의 뒤를 쫓아 들어선 부둣가 작은 창
고에는 고약한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역한 냄새였다.
진운은 한 순간, 되돌아 나갈까 망설이다가 애써 태연한 기색
으로 냄새를 픗기는 물건에 다가갔다. 창고 안에는 한 명만이
코를 잡고 서 있었다.
그것은 거친 베로 짠 천에 담겨 있었다. 최대한 원형을 보존하려
고 애를 썼지만 어쩔 수 없이 상당 부분 파손된 상태의 시체였다.
진운은 다시 한번 구역질을 삼키고 물었다.
"그가……?"
코를 잡고 있던 사내가 대답했다.
"열홀 전 실종되었던 홍십육(洪十六)입니다. 형제들이 확인해
주었습니다."
"형제들……?"
"예, 당(堂)의……."
"그들은? 그리고 최초 발견자는?"
"칠단계(七段階)와 꽐단계(八段階) 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자리
를 비키도록 했습니다. 최초 발견자는 사공 황칠(荒七)로 유항경
자가의 수로를 따라 홀러오는 것을 발견해서 건져 올렸습니다.
"음……!"
역한 냄새 가운데에서도 진운은 만족한 빛을 보였다. 처음에
는 조금 무리가 있을 것 같았던 그들 체계가 생각보다 훨씬 잘
먹혀 들고 있는 것이다,
당주가 유일한 천(天)자 항렬을 쓰고, 진운을 비롯한 사람들
은 지(地)자에서 시작해 천자문(千字文)의 항렬대로 암호명을
쓰는 것이 그들 흑수당의 체계였다.
타 방파처럼 타주(舵主)도 향주(香主)도 없고, 하부 조직도
없다. 모두 형제로 호칭하고, 원칙적으로 그들은 모두 평등하
다. 단지 아래 항렬의 형제들은 위 항렬의 명령에 따르면 되는
것이다.
때론 그 명령이 아래 항렬 누군가의 지시에 따르라는 명령도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전문성을 존중한 결과였다. 들어온 순서
대로 항렬을 메기는 그들 흑수당에 그런 일은 불가피한 것이다.
한편으로 각 항렬의 인물들은 자신보다 두 단계 아래의 인물,
그것도 자신이 입당시킨 인물만 알 수 있다. 한 명이 잡히거나
했을 때 아래 선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위에서 아래를 아는 것보다 아래에서 위를 아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의도가 컸다. 지금도 그래서 칠단계, 팔단계의
형제들이 사단계의 황구는 볼 수 있어도 이단계인 진운은 만날
수 없는 것이다.
혹시라도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가 밀고한다든가 하는 일을 방
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체계의 조직은 직졉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어 일반 강호방
파처럼 일사불란한 행동은 할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다.
다른 일은 팽개치고 싸움만을 업으로 하는 타방돠와 달리 그
들 흑수당의 형제들은 모두 따로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얼
굴이 드러나서는 안되는 일이 많은 것이다.
그런 비밀 유지가 세력의 확대에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가 하
는 것은 한 달 만에 양주를 그들의 천하로 만든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었다.
언젠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큰 힘을 낼 수 있는 체계였다.
진운은 잠시 생각을 하고 눈을 번뜩였다. 결국 시체로 발견된
홍십육의 실종이 가진 의미와, 그것을 통해 그들이 얻을 수 있
는 이득이 한 순간 머릿속에 환하게 드러낫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체에서 물러서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황구와 창고에 있던 사내, 황삼십칠(黃三十七)이 그에게 다가
왔다.
* * *
양주부 형방(刑房).
--운하의 교통과 선박 통제권을 잡고있는 능파당(凌波堂),
당주(堂主)는 호연 형제(胡連兄弟)로 알려진 세 명.
현재 활동 없음.
--소금밀매 조직인 대도회(大刀會).
6월 16일 회주가 시체로 발견됨.
--주루 및 색주가(色酒街)의 이권을 잡은 장락방(長樂幇).
6월 2일 대홍교 사건, 당일 밤 유항경자가 사건, 이틀 후 2차
유항경자가 사건으로 멸문.
--상가(商街) 순찰을 해주고 보호비를 받는 순의방(巡衣幇).
최근 상인들의 자체 순찰로 바뀌어 일을 잃었음.
--무술도장(武術道場)인 무쌍파(無雙派).
6월 17일 이웃 진강(鎭江)으로 이주.
--군소 정파인 형의문(形意門).
6월 l8일 봉문(封門).
"거기까지!"
양주부 포두, 양주일섬(揚州一閃) 조남성(趙南星)은 여태 읽
어 내려가던 사건 기록에서 눈을 몌 신임 추관을 바라보았다.
"암중 세력이 정파도 건드렸다고 말하는 건가?"
조남성은 눈을 끔벅거렸다. 번개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우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곧 이은 그의 대답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저는 그렇게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저는 단지 최근 한 달
간 관내에서 있었던 무림 관련 사건들을 말쏨드리고 있을 뿐이
지요. 거기에 어떤 연관성이 보이더라도 그것은 나으리의 주즉
일 뿐 제가 보고드리려는 핵심은 아니올시다. 저는 아직 어떤
추측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모충국은 말을 잊고 그를 쳐다보았다. 조남성은 대담해서 아
무 앞에서나 할말을 하는 자인가,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일까?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조남성을 찌르둣 노려보았다. 조남성은
표정의 변화없이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사십대의 넓적한 얼굴이었다. 미세하게 파진 주름살이 얼굴에
가득하고, 오른쪽 광대뼈 옆의 하얀 자국은 칼자국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고집스러운 인상이었다.
모충국은 피식 웃었다.
"번개라는 별호처럼 빠를 것 같지는 않은데?"
조남성은 두 손을 모아 보였다.
"실제 별로 빠르지 않습니다."
모충국은 말을 돌렸다.
"그래서……, 방금 보고한 일련의 사건들에 모종의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자네도 인정하는 것이지?"
"……!"
조남성은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사이에 이런 일이 연달아 일어나면 연관성이 없을 수
가 없겠지요."
모충국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도의 무리들이 세력 다툼을 할 땐 백도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례 아닌가?"
능파당, 대도회, 장락방, 그리고 순의방까지는 양주부 밤거리
의 이권을 둘러싼 흑도의 다툼으로 보아도 무방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류라고는 하나 백도의 무쌍파와 형의문을 건
드렸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무쌍파는 소금 거래에 연관이 있었고, 형의문은 순의방과 약
간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도라고 해도 양주부의 이권에 관계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 두 문파를 쓰러뜨린 사람은 알려져 있습니다."
모충국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쭈먹으로 턱을 괴고 조남성의
말에 집중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무쌍파와 형의문은 전통적인 방법에 당했다
고 할 수 있다,
6월 17일 아침나절에 한 사내가 무쌍파의 정문을 부쉈다. 그
는 뛰쳐나온 무쌍파 제자들의 효에 도장의 현판을 던지고 장문
인을 찾았다. '한 수 배우러 왔노라.'가 그의 말이었다.
말과는 달리 그는 한 수, 아니 서너 수 가르쳐 주러 왔던 것
이 분명했다. 곤법(棍法)이 주특기인 무쌍파의 일, 이, 삼 대
제자들을 나무몽둥이 하나로 모두 때려눕히고, 급기야 팔십 근
짜리 철곤을 휘두르고 나온 무쌍파의 장문인 천기곤(天機棍) 순
우혁(淳于赫)을 세 수 만에 때려눕혔다.
그는 무쌍파의 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천기곤이 들고 나온
철곤을 둥글게 구부려 목에 걸어 주며 '소림곤(少林棍)이 이것
밖에 안되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소림곤?"
"순우혁은 소림사(少林寺)의 속가 제자입니다."
"계속해 보게!"
그날 밤 순우혁은 식솔을 챙겨서 이웃으로 이주해 버렸다, 주
인이 쓰러진 도장에 남아 있을 제자는 없다. 순우혁의 뒤를 따
른 무쌍파의 제자는 다섯이 채 안됐다고 했다.
"양주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파는 세 파입니다. 양주성에
가장 가까이 있는 모산파(茅山派), 이젠 무너진 무쌍파와 성밖
의 철불사(鐵佛寺)를 매개로 하는 소림사, 그리고 지금 말쏨드
리려 하는 형의문의 본산인 무당파(武當派) 입니다."
"무당파?"
"최근 세력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올라가는 문파입니다. 성상
께서 삼 년 전에 무당산에 도관을 지어 주고 전답을 하사하신
이야기는 유명한데…… 모르셨습니까?"
"그건 알고 있었지만 형의문과 무당파가 무슨 관계인가?"
"형의문의 문주 형의검(形意劍) 장용계(張龍溪)는 과거 납탑
도인( 道人) 장삼봉(張三峯)이 중원을 떠돌 때, 우연히 만나
한 수를 배웠다고 무당 기명 제자(記名弟子)를 자칭하고 있었습
니다. 무당파에서도 여기 근거가 있는 편이 좋으니까 그걸 인정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형의문이 봉문한 이유가 무쌍파의 그것과 묘하게 닮아서
재미있었다.
무쌍파가 이주란 명목으로 사실상의 도주를 하고 난 다음날
중심가에 자리한 형의문의 정문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낡
은 화의에 검 한 자루를 든 사내였는데, 특이한 것은 맹인이라
는 것이다.
그 맹인 검사(盲人劍士)는 무쌍파를 때려부순 사내와는 달리
예의를 차려 도전했다.
그러나 형의문은 맹인을 도전자로 받아 줄 만큼 자존심이 없
는 문파가 아니었다.
그들은 코방귀를 뀌며 맹인을 거지 내몰 듯 내몰려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무쌍파와 같아져 버렸다. 그의 일 검을 견디
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나중에야 뛰어나온 형의검 장용계도 예
외가 아니었다.
그의 말로는 결과적으로는 같다고 볼 수도 있지만 외견상으로는
순우혁보다 더 비참했다. 맹인 검사의 검에 오른팔이 잘려 이젠
검을 들 수도 없는 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당연히 봉문이었다.
"그 외에 양주와 관계 있는 무림세력 중에는 지방 토호 세력
인 천웅보(天雄堡)와 옥정산장(玉鼎山莊), 과거 무림고수였던
철권(鐵拳) 마종의(馬宗毅)가 은거한 피진장(避塵莊)이 정파에
속하는 세력입니다. 이들은 외견상 아직 별탈없이 지냅니다. 비
밀세력이 문제인데……."
효서 들었던 무림세력이 흑도든 백도든 표면적으로 보이는 세
력이라고 한다면 암중에 손을 뻗치고 있는 세력이 비밀세력, 그
런 것이 양주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앞서 말씀드린 세력 중 하나의 뒤에 배후로
버티고 있는 경우입니다. 우선 능파당의 배후에는 장강수로십팔
타(長江水路十八舵)가 있다는 것이 정설이고, 장락방은 현 무림
흑도 최강 세력 중의 하나인 통천방(通天幇)의 양주분타(揚州分
舵)였다는 분석이 유력합니다. 특이한 세력도 있습니다,"
조남성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 사람이라면 말해도 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현재 흑도의 최고 살수들인 칠화회(七花會)의 무정칠화(無情七
花)가 양주에 숨어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무림
세력으로 봐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백리교(白里敎)라는
종교집단이 천민들 사이에 신봉되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백리교는 원말 명초에 극성을 부리다가 사라진 마교(魔敎)의
잔류라는 의혹이 돌고 있는 종교집단이었다. 사실이라면 위험하
기 짝이 없는 집단.
그러나 모충국은 그보다는 무쌍파와 형의문을 무너뜨렸다는
두 사람에게 더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얼굴을 보였다니 어디 있는지도 알겠군."
"그것이……."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합니다.``````````````````
ㅈㄷㄱ~~~~~~``````````````
잘읽었습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어리어리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