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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6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제1독서 : 신명 30,15-20
복 음 : 루카 9,22-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담긴 뜻을 깊이 이해하려면
당시 십자가형이 뜻하는 바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 군정은 노예 폭동과 같은
반란을 꾀한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형에 처하였습니다.
이는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형벌로, 반란을 꾀하다가 잡혀가면
같은 방식으로 처형된다는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같은 죄를 지으면 같은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 십자가형의 첫 번째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심으로써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분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신의 삶’이라는 골고타 언덕에
제 십자가를 지고 오르도록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삶의 예수님처럼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 과정이 죽을 만큼 힘들어서 피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당신 뒤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 하느님께 향하도록 이끕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은 필수입니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원한다면 그물이나 낚싯대로 잡아야 합니다.
공부를 잘하고 싶으면 공부해야 하고, 성공하고 싶다면 그에 걸맞게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노력이 고되고 힘들기만 할까요?
그 과정에서 얻는 행복의 크기는 절대로 작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두고 강의 잘하는 신부라고, 강론 잘하는 신부라고 치켜세우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미완성입니다. 미완성이라는 생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게 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을 소홀히 하지 않게 되고, 매일 책을 읽고 또 매일 글을 쓰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행복합니다.
조금씩 나아지는 저 자신을 보면서,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경험도
행복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원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십니까?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저절로 되기를 바라는 도둑놈 심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 노력 역시 행복의 일부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노력하는 사람이 행복에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는데, 3년 묵힌 쑥을 먹으면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3년 묵힌 쑥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찾은 시간이 7년 뒤였습니다.
애초에 쑥을 묵혀놨다면 3년이면 원하는 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 없이 목적하는 바만 쫓다 보니 7년을 소비한 것입니다.
어리석음을 쫓는 우리가 아닌 지혜로움을 쫓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당연하게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의 노력에, 고통과 시련도 분명히 따라옵니다.
이를 무조건 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과정 역시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지요.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고통과 시련이라는 과정을 겪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사흘 만에 되살아나는 부활의 영광이 따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 모습이 참으로 지혜로운 신앙인이 갖춰야 할 덕목입니다.
우리가 얻어야 할 영원한 생명이 확실히 보장되는 길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재의 수요일’ 후 첫 번째 날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일어날 일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반드시'(<이백주년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배척을 받아 죽는' 일이요,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 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당신을 따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곧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과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과
이를 '날마다' 지속적으로 지는 일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의 ‘제 십자가 지고’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곧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떠올리는 ‘신약의 십자가’ 이전에 있었던
‘십자가’, 곧 ‘구약의 십자가’란 대체 무엇을 말할까요?
구약에서 ‘십자가’(타브)는 ‘계약의 표’로서 소유,
선택을 나타내는 동시에, ‘구원의 표’로 주어졌으며(에제 9,4.6.),
주님을 따르는 ‘하느님의 종’과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에게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레위기>(25,55)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종들’이라 칭하며,
<탈출기>(19,6)에서는 그들을 ‘제사장의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또 하느님의 제사장으로서,
‘계약’을 ‘구원의 표시’로 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계약'을 지키는 것이며,
하느님의 소유로 선택되어 거룩한 백성의 삶을 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당신을 따르는 이’는 ‘계약’을 짊어지고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이 됩니다.
곧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이러한 결단은 제1독서에서 생명의 길로 이렇게 제시됩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그분께 매달려 있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당신을 닮는 것만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 있을 때만이 진정으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만 자유롭다.
이 행복과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닮는다.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모습은 매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이룰 수 있다.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닮아가면서 이룰 수 있다.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이 가장 큰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는 다른 누구도 대신 져줄 수가 없는
나만이 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십자가도 꼭 나만이 질 수 있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생명을 우리가 마음대로 취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과 능력을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생명을 영원히 살릴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주님께서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마 우리가 그분을 외면하여 바라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사순시기가 이제 진정으로 우리에게 은총의 때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시기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영광의 부활에 우리도 기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죄와 벌’이라는 주제로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이 주제는 성경에서도 깊이 다루고 있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먼저, 죄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는 죄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
그리고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행위라고 가르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순간, 두려움과 수치심 속에 숨어버립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우리를 하느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 안에 불안을 심어 놓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도 죄의 본질과 그 결과가 잘 드러납니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가난한 노파를 살해합니다.
그는 자신이 ‘위대한 인간’이라면 법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살인을 저지른 후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이 법적 처벌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과 내면의 고통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우리를 절망에 빠뜨린다는 사실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끝내 자신의 죄를 숨기고 싶어 하지만,
신앙심이 깊은 소냐를 만나면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소냐는 그에게 십자가를 건네며 이렇게 말합니다.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회개하세요. 그러면 구원받을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돌로 치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시죠.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절대로 쉽지는 않습니다.
라스콜니코프 역시 쉽게 자백하지 못했고,
계속해서 자기 합리화를 하며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법적 처벌을 받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도 때때로 라스콜니코프처럼 죄를 짓고,
후회하고, 숨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정한 회개와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며,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이 있지는 않은가요?
혹시 하느님 앞에서 숨고 싶었던 순간이 있지는 않으신지요?
그렇다면 이제는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십니다.
죄는 우리를 짓누르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가 다시금 하느님께로 돌아갈 때,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회개의 길로 나아가고,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죽기 전에 이미 죽으셨던 예수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이토록 어렵고 총체적 난국인 시기,
힘겹게 하루하루를 지탱해나가고 있는 분들,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서 빨리 이 혹독한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날, 꿈결 같은 봄날을 맞이 하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이 매서운 한파가 지나가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넉넉한 순간이 오기를,
어서 빨리 이 무덤 속처럼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가
환한 광명의 땅으로 들어서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기도합니다.
간절히 꿈꾼다면, 끝까지 희망한다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끝까지 유지한다면,
많은 경우 꿈은 현실화됩니다.
춥다고, 힘들다고, 우울한 얼굴로 앉아 있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머지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 혹독한 추위가 지나가고
화창한 봄볕이 온통 우리 인생의 창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을 미리 그려보면 좋겠습니다.
자신은 수난과 처절한 십자가 죽음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메시아임을
명명백백하게 밝히신 예수님께서는 마무리 말씀으로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4)
보다, 적극적인 예수님 추종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
우리가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기꺼이 내 등에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우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절대로 버리고 싶지 않은 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과도한 소유욕, 독점욕, 자리나 사람에 대한 지나친 욕심...
반대로 기꺼이 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절대로 지고 싶지 않은 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지고 갈 십자가입니다.
희생, 용서, 화해, 오해, 고독, 이웃의 짐, 남들이 싫어하는 궂은 일들...
이왕이면 져야 할 십자가라면 기꺼이, 관대하게 지고 갈 때 생기는
한 가지 특별한 현상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가볍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십자가가 십자가가 아니라
기쁨이요 은총이요 축복으로 변화되는 느낌입니다.
십자가를 운명이자 숙명으로 받아들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죽기 전에 이미 죽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새워 기도하시며
담대하고 용기있게 돌아가실 준비 작업을 마치신 것입니다.
이런 사전 작업이 잘 마무리되었던 관계로
예수님께서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수난과 죽음의 고통 앞에서도
당당하고 담대하셨습니다.
협박과 매질과 끔찍한 십자가 형벌 앞에서도 태연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세사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의무와 멍에가 아니라, 은총이고 특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22-25)
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밀알 하나’를 심는 일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이 말씀에서 ‘많은 열매’는 ‘많은 사람의 구원’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당신을 하나의 씨로 심어서
‘많은 사람의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은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인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지만,
우리는 ‘내가’ 구원받으려고 십자가를 집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부활과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에 참여하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야고 5,7-8)
만일에 십자가만 바라보고 부활과 생명을 보지 않는다면,
그 신앙생활은 힘들기만 하고 아무 기쁨이 없는 생활이 될 것이고,
기쁨 없이 생활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노동을 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의사가 병자를 살리기 위해서 수술을 권할 때,
병자 쪽에서 살고 싶으면 그 권고를 받아들여서 수술을 받을 것입니다.
또 의사가 어떤 약을 처방할 때, 병자는 살고 싶으면
그 약이 아무리 쓴 약이라도 먹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수술과 약이 십자가라는 뜻이 아니라,
힘들어도 수술을 받아들이고 약을 먹는 일이 십자가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어쩔 수 없이 실천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은총이고,
신앙인들을 부활과 생명으로 연결해 주는 특권과 같은 것입니다.
2)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1,6ㄴ-9)
이 말은, 십자가로 생각되는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말이기도 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말은,
‘힘들어 할 수밖에 없다.’로 생각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받아들여야 할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괴롭고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게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서 지고 가는 것은,
‘내 신앙’의 단련과 정화를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영혼의 구원’을 얻기 때문이고,
‘그날’이 되면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에서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만 집착하면서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그런 사람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 자신이 얻으려고 하지 않아서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현세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는 사람”입니다.
<‘잃는’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버리는’입니다.>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허무하게 사라질 이 세상 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입니다.
선택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저희 식당의 식단은 아주 간단합니다.
콩나물국밥, 콩나물비빔밥, 된장찌개, 비지찌개, 떡 만두국, 잔치국수 여섯 가집니다.
그런데 몇 가지 아닌데도 선택의 고민을 매일 같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시는 손님 가운데 한 십여 분은 매일 오시고
매일 똑같은 것 곧 콩나물비빔밥을 드십니다.
그것은 저희 콩나물이 직접 키운 것이라 워낙 맛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뭘 먹을까 선택을 고민하는 것이 귀찮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은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이기에, 불만이지만
어떤 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곧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이 오히려 편합니다.
저도 뭘 먹을까? 이런 것 때문에 고민하고 싶지는 않은 부류인데,
하찮고 귀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먹는 것에 아주 진심입니다.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것이 전혀 귀찮지 않고 꽤 시간을 들여 숙고한 다음
원하는 맛집을 찾아가는데, 거기 가면 줄 서서 오래 기다려야 하는데도
짜증 나지 않고 그것이 즐거움이며 원하는 것을 먹고 나면 만족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선택에 대해 성찰코자 합니다.
슬기롭고 성숙한 선택을 어리석고 미성숙한 선택과 비교하면서.
계속해서 먹는 것을 가지고 얘기를 이어가면
어렸을 때는 뭘 먹을지의 기준이 달콤함,
곧, 맛이고 맛이 있느냐 없느냐이며 내 입맛에 맞느냐 안 맞느냐입니다.
그러나 나이 먹어 어른이 되면 그 기준이 건강입니다.
통풍이나 당뇨가 있는 사람은 건강을 생각하며
어렸을 때 즐겨 먹던 것 그러나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을 끊습니다.
그런데 더 나이를 먹고 더 슬기로운 사람은 기준이 또 달라집니다.
더 영적이고 더 고상하고 더 중요한 것이 기준인데 곧 생명입니다.
건강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생명입니다.
그게 그거 같지만, 영원한 생명에 이르면 건강과 생명은 다른 거지요.
그래서 오늘 독서 신명기는 생명과 행복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을 고민한다면 뭘 먹을까 고민할 것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놓고 고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생명과 행복과 같이, 더 중요한 것에 관해 고민하지 않고
먹는 것 같은 덜 중요한 것에 진심이고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목숨에 대해 말씀하시며
자기 목숨을 잃어야 목숨을 얻는다고,
목숨을 얻는 방법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정녕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러므로 더 슬기롭고 더 성숙한 사람은 선택을 잘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얻는 법까지 잘 알아야 하고,
얻는 법을 잘 알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얻고 마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목숨을 얻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동아줄을 위에서 내려주시는데
우리는 그 동아줄을 잡기 위해 내가 잡은 그 줄은 놔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잡고 있는 동아줄은 낡고 썩어 곧 끊어질 텐데
그걸 놓으면 죽는다고 꽉 잡고 놓지 못하는 나는 아닌지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동아줄을 놓치지는 않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순교는 십자가의 크기가 아닌 꾸준함에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
하퍼 리(Harper Lee)는 젊은 나이에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라는
위대한 작품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작품은 1960년에 출판되어, 그해 퓰리처상을 받으며 문학계의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약 50년 동안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하퍼 리가 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된 이유는 그녀 자신이 그 두 번째 작품에 대한 부담감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퍼 리는 그녀의 출판사와 인터뷰에서
“나는 이미 ‘앵무새 죽이기’로 인생의 목표를 이룬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마거릿 미첼(Sherman Mitchell)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라는 역사적인 소설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이 책은 1936년에 발표되어, 미국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미첼의 첫 번째 소설은 결국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그녀는 문학계에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도 역시 그 이후로는 어떤 글도 쓰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완벽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완벽주의는 열등감에서 옵니다. 더는 좌절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최고의 위치에서 또 다른 책을 썼다가
평이 좋지 않고 팔리지 않으면 자기 위치를 잃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 자존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반드시” 고난을 겪고 죽은 후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단지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
‘부활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길을 함께 따를 것을 요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저도 사제가 되라는 주님의 뜻이 있었지만, 따를 자신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결혼 안 하고 산다는 게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 마음에 드는 자매와 산 정자에 앉았을 때 오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이 말씀으로 십자가가 나에게 불가능한 무엇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무엇으로 보였습니다.
여기에는 바로 “매일”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평생 혼자 산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힘들지만, 하루하루로 생각하면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여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이 느끼는 신혼부부라도
어떤 한 사람이 여행 가서 일주일 떨어져 있는다고 상사병으로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순교 또한 내가 얼마나 큰 크기의 십자가를 지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오늘 하루만 버틸 수 있느냐로 다다를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고문과 박해를 생각하면 그것은 넘을 수 없는 산입니다.
그러나 한 발짝씩 올라간다면 언젠가는 그 산을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명작을 낸 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후속작을 쓴
대표적인 작가로는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와
『에덴의 동쪽(East of Eden)』 등으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로 1939년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큰 명성을 얻었지만,
그 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써 나갔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영감을 받았다기보다는
매일 글 쓰는 습관과 끈기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스타인벡은 글쓰기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언급하며,
글쓰기는 ‘영감’이 떠오를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글을 쓰는 습관과 일관성에서 온다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말 중 하나는
“영감은 바로 그 자리에 있다. 내가 앉아서 하루에 몇 시간씩 글을 쓸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떠오른다.”라고 했습니다.
‘분노의 포도’는 1939년 작품이고 ‘에덴의 동쪽’은 1952년 작품입니다.
이 밖에도 그의 작품은 10권이 넘습니다.
장사와 요리의 한국 대표적 전문가인 백종원 대표도 많은 브랜드를 만들었지만,
대부분의 수익은 빽다방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10개 중 1개만 성공한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자세입니다.
인도에 아내의 죽음 때문에 평생 산을 깨서 길을 낸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삶이 영화로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사순을 시작하는 지금 그분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사순 동안 술과 담배를 끊겠어?’,
‘내가 어떻게 사순 동안 단것을 먹지 않을 수 있겠어?’
그러나 오늘 하루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안 되면 한 시간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광야에서 그렇게 하루하루 사셨을 것이고
그 하루하루가 모여 40일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삶 자체도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부활’의 희망으로 합니다.
그런데 하루만이라도 십자가를 지고 나면 부활의 기쁨이 마지막 때 한 번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십자가에도 부활의 기쁨이 벌써 온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책을 한 줄 썼을 때 이미 완성된 명작의 희망이 주는 기쁨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그다음 날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평생 지어야 할 십자가는 잠시만 보고 오늘 당장 지어야 할 십자가만 생각하며 살아갑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