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의 기사는 유명한 혼인 잔치의 비유이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청하였으나 아무도 그의 청을 수락하지 않자
드디어 종들에게 사거리 길로 나가서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아무든지 데려오라고 분부한다.
그래서 종들이 그 주인의 분부대로 이행하자 임금은
참석자들의 자격을 심사하는데 그 심사기준은 참석자들의
'선악 여부'가 아니라 그들의 예복 착용 유무였다.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주인과 함께 즐거움을 누린다는 이 사실이
우리의 구원과 영생의 삶을 의미한다면 결국 우리 구원의 열쇠는
우리가 선한 자냐 악한 자냐가 아니라 주인의 생각에 부합되는
예복을 입었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의 죄인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적용하기를 좋아한다.
옳다. 분명히 우리는 선한 사람이 못된다. 간혹 스스로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
선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악한 사람인데, 악한 사람이면
악한 일을 할 터이고, 악한 일을 했다면 우리는 요한복음 5장의
기록대로 생명의 부활아닌 심판의 부활에 해당되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
다시 말해서 마태복음의 구원 기준과 요한 복음의 그것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마태복음의 기준은 선악이 아니라
예복인데 요한복음의 기준은 선한 일을 했느냐 악한 일을
했느냐는 선악이다.
마태복음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절대적 조건은
우리 몸의 깨끗하고 더러운 정도가 아니라 그 몸을 덧씌우고 있는
예복임을 간단히 알 수 있다.
그래야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엡 2:8-9) 사도 바울의 지적과 일치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분명한 어조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예수를 믿은 자가 아니라)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지만 그러지 아니하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오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의 분위기와는 물론 다르고 사도바울이 지적했듯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말씀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가치가 있으려면 적어도 모순은 없어야한다.
어디서는 선악이 문제가 아니었다가 또 어디서는 선악을 문제삼는
성경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의미는 이러한 성경 저자들의 갈등구조를
몸으로 느끼고 그 속에서 갈등하는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거짓말을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없이 잘 했는데
이제는 거짓말을 하게되면 하나님이 생각나고 지옥갈까 걱정되는 그런
갈등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줄 알았는데 예수 믿고 교회 나가며
성경을 보다 보니까 갑자기 성경이 하나님 말씀같지 않더라는
갈등이 제대로 된 갈등이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고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과도
맞지 않는 성경의 지적 앞에 고개를 곧추 세우고 반항하며
갈등하는 삶이야말로 예수를 믿음에 있어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이러한 갈등의 삶 없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생각의 구조 속으로
성경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성경은 우리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일견 들어간 듯이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착각이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어느 곳이 불거져 나와 있거나 아니면
우리의 눈이 애써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선악과 요한복음의 선악 사이에서 갈등해야 한다.
왜냐하면 말은 동일한 선악이지만 그 내용,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적 선악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섬에 있어
아무런 조건이나 원인이 될 수 없지만 요한복음적 선악은
우리를 생명과 심판으로 갈라놓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이 선행에 대한 일종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요한복음의 말씀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 을
마태복음적 선으로 해석하는데 기인한다.
마태복음적 선은 '인간적인 선'이요 '상대적인 선'이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적이며 상대적인 선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악의 개념은 모두 이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슨 사건이나 사물을 막론하고 이런 선악의 개념으로
대상을 파악하고 조명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이런 버릇 때문에
사람들은 죄에 빠진다. 아니, 오히려 죄에 빠져 살아온 그동안의 삶이
그러한 버릇을 형성해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들어 보자.
여기 '사랑'이라는 마음과 '미움'이라는 마음이 있다.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이 악인가. 이렇게 묻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랑은 좋은 것 곧 선이고 미움은 나쁜 것 곧 악이라는 등식으로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사랑은 간직하고 발전시켜야할
우리 마음의 심성으로 생각하고 미움은 빼어 버려야할
나쁜 요소로 간주한다.
이런 기초 위에 도덕이 있고 윤리가 있으며 모든 세상적인 학문과
세상적인 종교가 있다. 세상에 종교라 이름하는 수많은 믿음이 있지만
알고보면 대부분 이 범주에 속한다.
즉 인간 속에 있는 선한 요소를 계발하고 악한 요소는 빼어버려
미움보다는 사랑이, 전쟁보다는 평화가, 죽음보다는 영원이 지배하는
세상을 향한 동경이 모든 종교와 윤리의 지향점이다.
기독교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벗어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의 자유일지 몰라도
미움이나 전쟁, 죽음, 고통 등을 악적인 요소로, 사랑이나 평화,
영원 등을 선적인 요소로 생각하여 악에서 선으로의 이행(移行)을
강조하는 모습은 타 종교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의 핵심은 사랑은 곧 '선'이요
미움은 곧 '악'이라는 등식에 있다.
사랑은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니며 그냥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미움도 선이나 악의 문제로 조명해서는 안된다.
미움 역시 그냥 '미움'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사랑은 우리가
가져야할 덕목으로, 미움은 버려야할 가치로 가르친다면 곤란하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어야하는 것과 똑같은 분량으로 미움도 있어야한다.
문제는 그 사랑과 미움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미움은 우리 속에서 몽땅 없어질 수도 없는 것이어니와
또한 없어져서도 안된다. 하나님이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듯이
미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타락이란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타락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주신 사랑으로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이것이 타락이요 아울러 돈을
미워하고 자기를 미워하라고 주신 미움으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와 함께 동거하지 않는 이것이 '죄'이다.
사랑과 미움은 선과 악의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요소'이다.
죽은 자는 사랑할 수도 없거니와 미워할 수도 없다.
죽은 자들만 모여 있는 공동묘지의 적막을 평화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요는 될지언정 평화는 아니다. 그러므로 전쟁 역시 우리가
버려야할 악적 요소, 악한 행위가 아니라 살아있음의 증거로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싸움(엡 6:12)이다.
생명에는 선악이 없다. 생명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자.
기저귀를 차고 기어다닌다고 그것이 그들의 악인가.
그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다만 생명 있음에 대한 자랑스러움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러한 생명의 자람을 곧잘 선악의 눈으로 바라본다.
특히 자연세계를 향한 인간의 편견은 참으로 놀랄만하다.
인간들은 자연을 자연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느냐로 판단하기를 좋아한다.
예를 들어 송이버섯이나 느타리버섯같은, 자기들이 먹을 수 있는
버섯은 좋은 것(善)인 반면 그렇지 않은 독버섯 종류는
나쁜 것(惡)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모든 버섯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아름다운 피조물이다.
그들 나름대로 모두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기의 모습에 감사한다. 이렇게 그들 스스로는 선악의 개념이 없는데
왜 하필 인간들은 그들을 향하여 선악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가.
인간들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이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알았다는 사실'이
하나님 앞에서의 죄이지 악한 일을 하고 안하고는 별 문제가 아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일이 악한 일인가.
물론 하나님의 명을 어겼으므로 그것을 악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을 어긴 결과로 주어진 것은 인간들이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밖에 달라진 것이 없었다.
왜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이것이 그토록 심각한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인 생명의 눈으로 삼라만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좋으냐 나쁘냐가 기준이 된 선악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 가운데는 '왜 그토록 자상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가운데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는가'를
묻는 사람이 있다. 그 물음 자체가 선악과의 결과 즉 생명과는
선으로 보고 선악과는 악으로 보는 슬픈 현상이다.
그 물음은 '하나님은 왜 인간들이 먹으면 죽는 독버섯도
만들어 놓으셨는가'라는 질문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독버섯은 인간들로 하여금 먹으라고 창조해 놓은 것이 아니다.
생태계를 유지하고 자연이 자정력(自淨力)을 가지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복안이 그 속에 숨어 있다. 우리는 그 복안을 알 때까지
기다려야한다.
내가 알고 있는 선악의 기준으로 정리하고 판단할 일이 아니다.
마태복음 본문이 얘기하는 '선한 자나 악한 자'는 이러한 선악과의
결과로 사람들이 스스로 선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악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선악의 기준에서 본 선한 자와 악한 자이다.
그러므로 엘리후가 욥을 향하여 일갈하는 말씀.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욥 35:6-8)
우리는 이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적인 선행과 악행, 의와 죄는 하나님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 말은 우리가 선행을 행했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고
또는 우리가 나쁜짓만 골라가며 했기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킨다는 뜻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 안하고는 하등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심판 받는 원인은 우리가 사물을 선악적인 기준으로
바라보았다는데 있음을 알아야한다.
그러면 요한복음이 말하는 '선한 일'은 무엇인가.
분명히 선한 일을 행한 자에게 생명의 부활이 주어진다.
바꾸어 말하면 생명의 부활을 받기 위하여서는
선한 일을 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란 대체 어떤 일인가.
이 선(善)은 마태복음의 인간적이고 상대적인 선에 대칭되는
신적(神的)이고 '절대적인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선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악이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홀로 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마 19:17).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善)이 원인이 되어 생겨난
결과일진대(요1:3) 그 결과에 악이 섞여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우리가 얘기하는 악이라는 것도 하나님 안에서는
선이며 생명이며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선악과도 하나님께는 나쁜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요, 생명의 다양함이며, 차고 넘치는 하나님에의 찬양이다.
다만 생명을 모르는 인간이 손대면 아니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이 먹었더니 죽더라는 한가지 사실을 기준으로,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곧 선악의 세상이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부족함이 없는 '생명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곧 생명의 세상, 선의 세상이다.
죽음이라는 대칭적 개념이 있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며
역시 악이라는 상대적 개념이 있는 선은 선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선에는 대칭이나 상대적 개념은 없다.
오직 아름다움과 다양함과 풍부함과 충만함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에겐 악이라는 것도 선의 한 존재 양식이며 죽음이라는 것도
생명의 한 표현 양식이다. 우리가 무생물이라고 하는 작은 돌멩이
하나도 생명 없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그들의 생명이다.
밤하늘에 총총한 이름없는 별들, 오뉴월의 따사로운 햇빛으로
한껏 싱그러움을 자랑하는 수많은 신록들, 바다에서 강에서 들에서
산에서 숨쉬고 뛰고 먹고 먹히며 살아가는 모든 생물들,
그들은 전기(前記)했듯이 선악이 아닌 생명이다.
이 생명을 이름하여 '절대선', '하나님적 선'이라고 한다.
요한복음 5장이 얘기하고 있는 선행은 이러한 선악 유기체가 아닌
'생명 유기체'로서 행하는 모든 행동을 일컫는 표현이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솟아오르는 태양의 솟아오름이야말로
태양의 선행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태양의 선행 때문인 줄 알아야한다.
우리가 쇠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소의 선행이 있었기 때문이요,
옷을 입고 집을 지을 수 있는 모든 원인은 순전히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러한 자연의 선행 때문임을 알아야한다.
요한복음이 생명의 부활에 대한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는 선행이란
바로 이것이다. 결국 선행이란 자기의 선적 요소를 제공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 전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자기 포기'이며 '자기의 죽음'이다.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이 선이라고 인정하시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우리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움켜쥐고 있으면서 돈 몇 푼,
옷 몇 벌로 선행을 행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우리는 선악의 세계를 떠나 생명의 세계로 가야한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란 '선악의 세계'를 일컫는
동의어이다. 생명의 세계에는 선악적인 기준이 없다.
다만 생명의 원리만 있을 뿐이다.
악에 대립되고 대칭적인 선이 아니라 생명의 다른 표현 양식으로
존재하는 선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할 하나님이다.
선행은 생명의 발산이다.
발산하라고 준 생명을 꼬깃꼬깃 접어서 품속에 집어넣고
혹시 없어질세라 혹시 빼앗길세라 안절부절 못하고 사는 인생이
오늘의 우리 아닌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눅 6:38)
무엇을 줄 것인가.
생명을 주면 생명이 돌아올 것이요(생명의 부활)
쓰레기를 주면 쓰레기가 돌아올 것이다(심판의 부활).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돈을 주라.
그리하면 돈이 넘치도록 안겨 오리라.
글: 이호식
랑으로 심는자는 사랑의 결실만을 보게 될 것 입니다. 그 과정중에서 주님과 같이 고난과 죽음을 맛볼수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권세와 권능과 영광과 나라라는 것 입니다. 물론 이는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천국적인 것을 말 합니다.
오늘아침!..거룩한 아침입니다!...니노님!..글에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아무리 익명성의 사이버 공간이라도 `합력하여 선(구원)을 이루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저에게는 이명신님이 지장(知將)이라면..니노님은 저에게 덕장(德將) 의 모습으로 다가오네요.이제 한분이 남았네요 저에게 용장(勇將)으로 오실분은 누구신지?
주님! 바라옵기는,...인권의왕도님(세상냄새 풍기는 이 이름을 버리고,)이 그야말로 변화받아 예수냄새 물씬 풍기는,이름을 가지고,저에게 아니 예수믿는 우리모두에게 용장(勇將)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그가 베드로와 같은 믿음의 사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주님,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해 순종의 영을 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정결에 영으로 하나되는 거룩한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도록 .... 우리 모두를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축복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