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군제 변천
명사(明史)에는 병지(兵志) 4편이 있는데, 이것을 읽고 군제와 관련된 부분만 나름대로 정리한 겁니다.
위소제(衛所制)
명의 기본적인 군제로 1개 군(郡)을 소(所), 여러 군을 합쳐 1개 위(衛)로 편성합니다.
위의 병력 규모는 5천 6백 명, 천호소가 1천 1백 2십 명, 백호소가 1백 2십명입니다.
이들을 모두 합쳐 5개의 군(軍)으로 나누고, 5군도독부가 이를 통제합니다.
이 5개의 군은 각각의 군마다 이른바 지금의 수도권 부대에 해당하는 위와 각 지방의 위로 크게 구분합니다.
지방의 위는 다시 각 성(省)의 도사(都司)에게 예속됩니다.
이 5군과 달리 황제의 친위대인 상12위(上十二衛)가 따로 있으며, 유명한 금의위(錦衣衛)도 이 12개의 위에 속합니다.
홍무제 때 통계에 의하면 전국의 도사가 17개, 유수사(留守司) 1개, 위가 329개, 수어(守禦)천호소가 65개라고 합니다.
삼대영(三大營)
이름 그대로 5군(五軍), 삼천(三千), 신기(神機)라는 3개의 주요부대를 말하는 것인데, 이들이 중앙상비군의 핵심입니다.
(5군은 앞의 5군도독부와는 다른 것입니다.)
원래 홍무제때 48개의 위가 남경에 있었고, 이를 영락제가 다시 72개로 늘렸으며, 이것을 보병과 기병에 따라 중군(中軍), 좌액(掖), 우액, 좌초(硝), 우초의 다섯으로 나눈 것이 5군입니다.
중도(中都), 산동(山東), 하남(河南), 대령(大寧) 지역의 병사들이 해마다 번을 나눠서 담당합니다.
삼천영은 변방지역에서 항복한 장정 삼천명을 가지고 기병부대를 만든데서 유래합니다.
신기영은 남쪽의 교지(交?)지역을 정벌하면서 얻은 화기운용법을 가지고 만든 화기부대입니다.
또한 5군은 진법, 삼천은 순찰, 신기는 화기를 훈련하는데 각자 다른 영의 훈련을 감독하기도 합니다.
단영제(團營制)
이것은 정통제가 지휘하던 50만 대군이 토목보의 변으로 전멸하자 병부상서 어겸(명사에는 어겸(於謙), 다른 책에는 우겸(于謙))이 북경의 방어를 위해 도입한 제도입니다,
어겸은 북경에 남아있던 삼대영의 병사를 시험해서 10만 명을 선발해 10개의 영으로 편성합니다.
즉, 보병, 기병, 화기의 세가지 병과를 10개의 영에 분산 배치 시킨겁니다.
각 영에는 도독 1명, 호두관 1명, 도지휘 2명, 파총 10명, 영대 1백 명, 관대 2백 명을 두었습니다.
또한 삼대영의 도독중 1명을 총병관으로 임명하고, 내신(內臣 환관)이 감독하며, 병부상서나 도어사 1명이 제독을 맡도록 합니다.
또한 선발하고 남은 병사들을 원래 소속된 삼대영으로 돌려보내자 사람들은 그 영들을 '노인들의 집'(老家)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즉 기존 삼대영은 쓸모없는 병사들만 남았다는 뜻이죠.
이들을 북경의 아홉 성문에 배치하고 어겸도 덕승문(德勝門)의 병력을 직접 지휘해서 결국 북경의 수비는 성공합니다.
그러나 잡혀갔다가 돌아와 상황으로 물러난 정통제가 경태제가 죽고 나서 다시 복위하면서 어겸을 죽이고 단영제도 폐지됩니다.
(나중에 정통제는 어겸을 죽인 것을 후회합니다.)
다음에 성화제가 즉위해서 재건과 폐지를 반복하는데, 또다시 4무(武), 4용(勇), 4위(威)의 12영을 만들어 12명의 후(侯)가 지휘하고 각각 도지휘가 보좌하며, 역시 환관이 감독, 훈신(勳臣)이 제독을 맡습니다.
선발하고 남은 병력은 각종 공역(供役)을 시킵니다.
병력의 규모는 7만 5천여 명.
그러나 이때 실질적으로는 환관인 왕직(汪直)이 제독이 되어 군대를 모두 장악합니다.
일찌기 영락제가 자신이 신임하던 환관에게 군대를 감독하도록 한 것이 드디어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는 폐단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홍치제가 즉위하자 도어사 마문승이 제독에 임명됩니다.
그는 성화제 말기부터 군대가 공사에 동원된 것을 그만두게 청하지만 허락되지 않습니다.
또한 각 영마다 보, 기병 2천명을 선발해 돌발사태에 대비하고, 5일간 훈련하는 옛 제도를 복구시키자는 그의 건의는 채택됩니다.
양관청제(兩官廳制)
자잘한 것을 건너뛰어서 드디어 무종(武宗)의 묘호를 받은 정덕제가 즉위합니다.
당시 통계로는 12영의 쓸만한 군사가 6만 5백여 명, 노약자가 2만 5천여 명이었습니다.
당시에 환관 장영(張永)이 경군(京軍)을 지휘해서 반란사건을 처리하면서 다시 환관들이 군대를 장악합니다.
그때 마침 도적떼가 생기자 변방지휘관인 강빈(江彬)등이 기회로 여기고 변방의 기병으로 4위(衛)의 부대를 편성해 북경에 두게 합니다.
이들의 이름을 외4가(外四家)라고 부릅니다.
이때 기존의 12위와 새로 창설한 4위의 선발한 병력을 서관청(西官廳)에서, 정덕 원년에 소(所)에서 선발한 관군(官軍)을 동관청(東官廳)에서 훈련시키는 이른바 양관청(兩官廳) 제를 도입합니다.
이때부터 과거 삼대영처럼 12영이 다시 '늙은이의 집'으로 불립니다.
이때에도 병사를 각종 공사에 동원하는 폐단이 심해서 경영(京營)의 기반이 계속 무너집니다.
당시 급사중(給事中) 왕양좌(王良佐)가 명령을 받고 군적(軍籍)을 조사하니 장부상의 기록은 38만 명이지만, 실제는 14만여 명, 그 중에 쓸만한 병력은 2만여 명에 불과합니다.
다시 건너뛰어 세종 가정제가 즉위합니다.
이때 병력의 정원은 10만 7천 여명이지만, 실제로는 그 절반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자 병부상서 이승훈(李承勳)의 건의로 병부와 상의해서 노약자를 제외시키고 장정으로 대체해서 12만 명을 다 채우게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공사는 점점 많아지는데다가,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 소위 빽 있는 사람 대신에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대신 채워넣습니다.
갑자기 변방에서 경고가 전해지자 각 영을 점검하니 겨우 기병 3만을 뽑아 이를 다시 동,서관청으로 부릅니다.
가정 29년에 알탄(명사에는 엄답(俺答))이 침공하자 병부상서가 각 영을 점검하니 불과 5,6만 명에 불과하고, 이들을 이끌고 가는 도중에 전부 도망가 버려서 결국 병부상서가 처형당합니다.
결국 여러 신하들의 건의로 12영, 양관청제 모두 폐지하고 다시 삼대영 체제로 바꾸고, 다만 삼천영은 신추(神樞)영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병력은 5군이 6만여명, 신추와 신기영이 각각 4만 명인데 이 4만명은 북경 인근의 여러 성(省)에서 추가로 모집한 병력을 합한 것입니다.
오군은 대장 한 사람 부장 2명, 좌,우,전,후의 참장(參將) 4명, 유격(游擊) 4명으로 구성되고, 신추, 신기 2영은 각각 부장 2명, 좌격(佐擊) 6명이 지휘합니다.
그 외에도 북경주변의 각 위를 삼대영에 배속시킵니다.
그 후에도 숭정제까지 여러 잡다한 것들이 바뀌지만 별로 중요한 것은 없어서 이만 줄일까 합니다.
......
명사(明史)를 시간이 있을때마다 부족한 한문 실력으로 대충 훝었는데, 해석이 틀린 것도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열전 중에 장거정이나 척계광 등은 대충 보았는데, 장거정은 환관인 풍보와 결탁한 것으로 나오더군요.
그의 사후에 만력제가 벼슬을 깎아내린 것도 바로 이 풍보와 연관된 것이 문제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