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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8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제1독서 : 이사 58,9ㄷ-14
복 음 : 루카 5,27ㄴ-3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27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세리가 잔치에 참석하였습니다.
다른 세리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레위가
예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매우 상징적이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리들은 무시와 멸시를 받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에게 세리들은 압제자인 로마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면서
같은 민족들을 이용하고 착취할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지 않거나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아
정결하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실제로 세금을 부풀려 걷거나,
중간에서 자기 몫을 부정하게 챙기는 세리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로서는 예수님께서 잔치에 참여하시는 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해석하는 기준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리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식탁의 친교에 많은 세리가 참석한 것은,
세리들이 더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도 세리들이 의사가 필요한 병든 이며,
회개해야 하는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세리들을 멀리하고
자신들을 거룩한 상태로 지키려고 하였다면,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함께하시며
그들도 거룩하게 하시고자 하셨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모르는 것이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디서 정보를 얻습니까?
아마 요즘 사람들은 거의 스마트폰을 열고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정보를 얻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 역시도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 인터넷에서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그런데 그 정보가 무조건 맞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질문하면 전문적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
심지어 초등학생도 답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가 넘쳐나는 공간이 바로 인터넷이었습니다.
이곳에는 현기증이 날 만큼 야단스러운 소음과 수만 가지의 관심사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 조그만 스마트폰 하나에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리도 많은 소리가 있는데 과연 주님의 말씀을 침묵 속에서 듣고
또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 쉬울 수 있을까요?
너무나 많은 소리 속에서 주님께 대한 친미와 사랑 가득한 대화만
쏙 빼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동창 신부가 어느 순간 아침마다 일어나 인터넷으로 뉴스를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만 나면 습관적으로 뉴스를 계속 검색해서 보는데,
아침이나 저녁이나 새로운 뉴스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루 종일 똑같은 뉴스를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말을 하고 있음에 큰 반성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말을 들어야 할까요? 당연히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나 침묵 속에서만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며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레위의 집에서 예수님과 함께 큰 잔치를 벌이지요.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제자들에게 투덜거립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요?”(루카 5,30)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세리를 커다란 죄인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동포들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에 갖다 바치는 매국노이고,
또한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로마 화폐를 만지는 우상 숭배자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면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스스로 아무런 죄가 없다고, 영적으로 건강하다면서
자기들의 판단이 무조건 옳다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사랑이 전혀 보이지 않는 많은 말들. 영적 교만으로 가득한 생각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과 전혀 다름을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라는 말씀으로 드러내십니다.
세상 안의 기준을 따르면서 세상의 말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 할 말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고,
이 말씀은 자기를 낮추는 깊은 침묵 속에서만 들을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먼저’ 죽으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로마 3,9.23 참조).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되었습니다.”(로마 3,24)
그러니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신다.
그는 돈 욕심이 사납고,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자기 것이 아니라도
그것을 소유할 욕심에 정의 따위는 관심도 없는 자였다. 세리는 본디 그런 사람들이었다.
돈 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던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27절) 하셨다. 레위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고 있다.
그는 한때 어부들이 위험한 일터에서 땀 흘려 번 것을 강제로 빼앗던 사람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의 재산을 착취하던 직업을 버렸다.
수치스러운 자리를 떠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이 가시는 길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러고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누구든지 주님을 자기 안의 집에 맞아들이는 사람은
가장 맛난 음식인 가장 큰 기쁨을 맛보게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주님을 바리사이들이 비난한다.
그들은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림으로 율법을 어긴다고 비난했지만,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는 것에 대해 시샘하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32절)
그분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하는 자들(로마 10,3 참조)을 부르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그분은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자기가
많은 잘못을 저질렀음을 고백하는(야고 3,2 참조) 사람들을 부르신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은 그들 바리사이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분은 교만한 자들이 아니라 겸손한 자들을 부르신다.
그들은 끝까지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참으로 자신의 덕행으로 즐거움을 맛볼 사람,
그리스도를 자기 집안에 모셔 들인 사람은 큰 잔치를 마련한다.
그 잔치는 선행들로 차린 영적인 잔치로, 교만한 사람들은 맨입으로 돌아가고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은 배부르게 먹는 그런 잔치이다.
레위는 잔치를 통해 자신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세리의 일을 하던 레위를 선택하시어
얼마나 의롭게 피어나도록 하셨는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일원이 된 사도단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인간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고 오신 분이시다.
마땅히 우리의 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본당에서는 사순과 대림이 시작되면 ‘성경 쓰기’를 권장합니다.
작년에는 ‘로마서’를 필사했습니다.
많은 분이 성경 필사를 하였고, 저는 작은 선물을 드렸습니다.
선물 선정은 수녀님이 하였습니다.
사순 때는 믹서기를 마련했고, 대림 때는 멸치와 김을 마련했습니다.
이번 사순에는 구약성서 중에
‘코헬렛,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를 필사하도록 했습니다.
코헬렛은 인간의 삶은 허무하지만,
최선의 삶은 하느님을 믿는 마음 안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토빗기는 ‘좋은 또는 착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주인공 토빗의 이름을 딴 것으로
삶과 죽음, 건강과 고통, 기쁨과 슬픔 같은 대립된 현실 모두가
결국 하느님께 달려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딧기는 아시리아 대군의 침략을 받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이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과부 유딧의 활약에 힘입어
그들에게 맞서 승리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구원을 희망하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그에 합당한 삶의 실천뿐임을 강조합니다.
에스테르기는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제국에서
학살될 위기에서 구원받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언급 없이도 섭리와 구원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며,
신앙과 용기를 통해 고난을 극복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오늘날에도 많은 신앙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말씀입니다.
이번 사순시기에도 많은 분이 성경 필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선물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사순 특강에는 콜롬비아에서 선교사로 사목하고 있는 신부님이 오십니다.
신부님은 중남미 과테말라에서 10년 동안 선교사로 사목하였습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현지인들과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저는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신부님이 사목하는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신부님은 신학생들이 현장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기꺼이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신학생들은 과테말라 현지에서 지내면서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사제가 되면 선교사가 되겠다는 신학생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편하게 지낼 수도 있지만 굳이 먼 타국에서
선교사로 지내는 후배 신부님을 보면 자랑스럽습니다.
기름진 밭에서 100배의 열매를 거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시밭길에서도, 돌밭에서도 땀 흘려 1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아이티에서 10년 넘게 선교사로 지내는 신부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 보내 주는 글을 읽으면 하루하루가 북새통입니다.
납치의 위험도 겪어야 했고, 총을 든 강도도 만났었고,
온몸이 썩어가는 환자를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지내고 있는 신부님이 진정한 사목자라는 생각입니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제도와 화려한 성당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의로운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벗이 되어주었던 사목자와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5년 사순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어두운 밤을 비추는 밝은 빛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사람들이 나도 종교를 가지면
천주교를 선택하겠다는 말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얘야,만만치 않은 세상 살아가느라 많이 힘들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복음서를 펼칠 때마다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한명 한명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수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대목만 소개를 해드릴까요?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루카 5,27-28)
저는 여기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에 대해서 묵상을 좀 해봤습니다.
예수님의 시선 과연 어떤 시선이었을까요?
당시 유다인들의 세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 마디로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저런 매국노, 로마 앞잡이, 인간 말종, 쳐 죽일 놈”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분위기상 말단 세리가 아니라
일정 지역을 책임지는 중간 관리자급 간부 세리였습니다.
동족으로부터 수모를 당했지만, 주머니 사정은 넉넉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도 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맨날 하는 일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동족들을 후려쳐서 세금을 뜯어내는 일이었습니다.
맨날 동족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다 보니, 삶의 피폐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속마음을 환히 꿰 뚫어보시는 예수님께서
레위를 바라보시고 그의 갈등하는 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다른 사람과는 백팔십도 달랐습니다.
그 시선은 측은지심의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
부드러운 시선, 안타까운 시선, 짠한 시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선을 레위에게 보내면서 그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때로 대화는 말로만이 아니라 시선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시선으로 레위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애야, 그동안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느냐?
내가 네 마음 다 알고 있다. 네가 지금까지 겪어온 수모와 비참을 다 보고 있다.
길을 걷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이란다.
지난 세월은 이제 뒤로 하고 나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자.”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는 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그런 따뜻한 시선에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갑자기 레위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는 회심과 감사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을 것입니다.
오늘도 갖은 고통과 상처 속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도 똑같습니다.
“애야, 만만치 않은 세상 살아가느라 많이 힘들지? 속이 많이 상하지?
내가 네 고통, 네 눈물 다 보고 있고 알고 있다.
힘들 때 내가 바로 옆에 있음을 잊지 말거라.
내밀고 있는 내 손을 잡거라. 일어서거라.”
회심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레위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인 말씀 한 말씀을 또 던지십니다.
“나를 따라라!”
레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섭니다.
목숨과도 같은 장부도, 수금한 돈도 다 내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의 그 따뜻한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이
철옹성 같았던 레위의 마음을 무너져 내리게 하고 녹아내리게 한 것입니다.
그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통쾌한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이런 예수님의 모습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시선으로 오늘 우리들 한명 한명을 바라보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분께서는 우리는 예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이제 내 나이가 70이고, 80인데, 예뻐할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죄란 죄는 다 짓고 살아왔는데, 이런 나를 예수님께서 예뻐하실 리가 없어! 라고
절대 말 하시면 안 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늙었다, 추하다, 하며 외면하지만,
하느님 눈에는 언제나 우리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하느님은 나를 예뻐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애지중지하십니다.
“너는 건강하냐?”라고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밖에 나가셨다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27-32)
1) ‘레위’는 ‘마태오 사도’입니다.
“나를 따라라.”는 “나의 제자가 되어라.”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제자가 되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로 해석됩니다.
이 말을, 글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부르심이 있었고,
부르심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곧바로 모든 것을 버려둔 채
따라나섰다는 것을 나타낸 말로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그랬다면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지는 못했을 텐데,
아마도 마태오 사도는 그 전부터 예수님을 믿고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고,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곧바로 응답했고,
응답한 뒤에 잔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2) 여기서 ‘큰 잔치’는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또 자기를 제자로 불러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 베푼 잔치로 생각됩니다.
그 잔치에 동료 세리들이 참석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마태오 사도의 가족들, 친구들, 친지들도 참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이기도 했으니까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참석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라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말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니 당신들도 죄인들이다.”라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 부정하게 되고, 같은 죄인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전염병자와 접촉하면 전염병에 걸린다는 생각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방인들이나 세리들과 전혀 접촉을 하지 않았을까?
만일에 실제로 그랬다면,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되는데,
사실 실제 상황에서는, 친구로 사귀거나 어울리지는 않았더라도,
그들도 이방인들이나 세리들과 접촉했습니다.
3)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병자를 고쳐 주려면 그 병자와 접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죄인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면 죄인과 만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전염병 환자라도, 그 환자를 치료하려면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그렇게 비난하고 있는 너희는 건강하냐? 너희도 ‘병자들’이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라는
말씀에(루카 6,41.42ㄴ) 연결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자신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것은 교만죄를 짓는 일이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죄인 취급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비난하는 것은,
심판관이신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는 말과 “너는 죄인이다.”라는 말은, 둘 다 죄를 짓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세리들보다 더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세리들은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위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4)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난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또 이 말씀에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위선자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 회개하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또는 병들었음을 부정하는 죄인들(병자들)이었고,
자기들이 위선자라는 것을 부정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마태 21,31-32).
먼저 회개하는 사람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회개를 끝까지 거부하면 그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병자라는 것을 부정하고,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병자는,
아무리 뛰어난 명의라도 고치지 못하는 것처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위선자들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사순시기는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위선들을 찾아내고,
반성하고,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은총의 지렛대와 마중물인 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의 주제는 죄인의 회개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그래서 내가 회개해야 할 죄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별로 죄지은 것 같지 않고 뭘 회개해야 하지 하는 생각도 들면서
느닷없이 사는 게 다 죄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내 아니지, 사는 게 다 사랑이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거의 매 순간 사랑이 지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이 맞는지 생각해 보니 둘 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죄인이고 노상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저는 늘 사랑하고 있고 죄보다 사랑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전에 어른들이 죄 고백하러 들어오셔서는
죄가 생각나지 않는다시며 사는 게 다 죄라고 하신 것도 이해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죄를 잘 못 느끼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죄보다 은총을 더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입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라는 말씀 말입니다.
저의 죄가 많고 많지만 제게 은총이 충만히 아니, 넘치게 주어지기에
은총을 보면서 저의 죄는 못 보는 것인데
이는 거지가 햇빛을 쐬면서 더러운 자기 몰골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만 보는 것보다 은총을 보는 것은 분명 좋은 것입니다.
옛날의 저는 저의 죄만 보고 하느님 은총은 못 봤습니다.
그러니 은총을 보게 된 것은 잘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총을 보게 된 것이 하느님의 은총 중의 은총입니다.
문제는 은총을 누리기만 하고 죄는 보지 못하니 그것이 문제이고,
앞으로 별로 달라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저는 죄를 은총의 지렛대 정도로 삼고 살겠습니다.
또는 저의 죄를 은총의 마중물로 삼으며 살고 싶습니다.
이런 저, 너무 뻔뻔한 죄인이 아닌지 반성하는 오늘 저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