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준비
찬바람이 따뜻한 곳을 찾게 하는
초겨울이 되면
습관처럼 월동준비를 한다.
옛날엔 김장 가득 해놓고
연탄 몇 백 장 들여 놓으면 보기만 해도
행복하고 배부르던 시절이었지만,
지금도 김장준비는 여전히
추운겨울 나기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어릴 적 엄마 옆에 쪼그려 앉아
막 버무린 김치를
날름 받아먹곤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엄동설한으로 밖으로 나가기도 어려워
꼼짝없이 집에 있을 때
다른 반찬 없어도
김치는 찌개로 찜으로 해먹을 수 있기에
추운 겨울을 근심 없이 이겨내게
하는 일등공신이었다.
물론 80년대 들어서
핵가족화가 되면서 점차 김장 담그는 집이
줄어들고 공장김치를
사먹는 집이 늘게 되었지만,
여전히 가족들이
겨울 내내 먹을 김치를 장만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갖은 양념과 함께 버무리는 김장은
우리 먹거리 문화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김치를 워낙 좋아해서
네 식구가 먹는데도
매년마다 40포기는 족히 담기에
배추 가격이 신경 쓰인다.
최근의 오름세 움직임은
한파에 따른 지엽적인 수확작업 중단에서
배추 값이 급등하면서
다른 물가까지 치솟고 있다.
아무리 비싸도
올해도 연례행사처럼 김장김치는
준비해야 하기에
아내와 함께 새벽시장에 가서
배추를 차에 싣고 오는 내내 나는 이미
겨울을 다 준비한 것처럼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이렇게 추위가 오기 전
겨울을 대비하여 여러 가지를 준비 한다.
하지만 사람들만
이렇게
월동 대비 하는 것이 아니다.
동물들도 미리
충분한 지방을 저장하고,
식물들은 낙엽을 통해 영양분을
뿌리나 줄기에 저장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겨울을 잘 준비해야만
새 봄이 올 때
짐승들은 다시 활동할 수 있고
식물들은 줄기와 가지에 수분을 다시
공급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세상 만물들이
본능적으로
추운 겨울을 준비하듯이,
사람도 단 한 번밖에 안 오는
인생겨울을 철저히
대비해야 하는 것은 그 겨울은 아무에게도
예고해 주지 않고
순식간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고향이 어딥니까>책에서는
80년 인생을 하루 24시간으로 비교했는데
그런 식으로 계산하니
25세만 되어도 아침7시가 되고
60세가 되면 벌써
퇴근시간인 오후 6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벌써
오후 4시 반이 되었으니 슬슬
퇴근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아니던가.
김장도 소설을 기준으로 준비해야
제 맛을 낼 수가 있듯이,
인생 겨울도 최소한 오후 4시가
넘어야만 제대로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인생 겨울 준비도
일상적인 겨울 대비용으로 준비하는 김장과
동일한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이번
김장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김장은 크게
세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가장 먼저 소금에 절이는 작업이다.
배추는 속이 꽉 차고
보기에 좋아도
소금에 절여 순을 죽이지 않고는
제 맛을 낼 수가 없다.
먼저 배추의 반을 뚝 잘라 칼질한 후에
소금물에 담그고 그 배추를
다시 사이사이에
굵은 소금을 뿌려 놓고
몇 시간 뒤에
또 한 번 뒤집어 주어야
속까지 제대로 간이 들어 양념을 넣어도
잘 배여 들게 된다.
사람도 젊어서는 부피만 많이 차지하는
배추처럼 자신의 야망에
부풀려 폼 잡고 날 뛰다가,
인생 오후가 되면
문득문득 소금 간이 들어간 배추처럼
겸손한 모습이 보인다.
그 때야 비로써
소금 간이 들어간 배추모양
맛이 들어 사람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절여진 배추를 뒤집지 않으면
한쪽 간만 들어 역시나 양념을 넣어도
맛을 낼 수가 없듯이,
나이가 들어도
뒤집지 못하고 한 쪽은 여전히
자기지상주의에 빠져 이웃을 배척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인생의 겨울을
기쁨으로 맞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신은 교만한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아시고
나에게 꼭 맞는 가시와 같은
소금을 주신다.
그 소금은
나를 부인하게 하고,
오히려 상대를 인정하고 섬기게 한다.
그 소금은
나를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곳마다 그의 영광이
드러나게 한다.
소금은 이렇듯
내 그릇된 인격을 절이고
자기만족, 자기의지, 자기의(義) 심지어
자기연민까지 다 빼게 한다.
그런 후에
속을 넣어야 제 맛이 난다.
김장 속에는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간다.
보기도 좋고 맛을 좌우하는
고춧가루를 비롯해
파와 마늘,
생강의 톡 쏘는 맛도 필요하지만
젓갈과 굴을 통해
시원한 맛까지 어우러져야
맛있는 김치가 된다.
인생도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가야 맛이 난다.
내가 단 것을 좋아한다고
김장에 설탕만 넣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생을 달콤하게 하는 설탕 같은 일도
필요하겠지만 때론 설탕보다
소금이 더 필요할 때가 더 많다.
우리 카페 멤버 중 ‘희망으로’님은
몇 년째 의학적으론 불가능한 아내를
돌보느라 날마다 십자가보다
더 한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감사를 잊지 않고
내일에 소망을 두고 있다.
그들에게 인생이란
나무나 짠 소금 같았지만,
따뜻한 사랑으로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었기에
그 소금은 오히려 깨소금보다 더 향기롭게
느껴졌다.
아직도 들어가야 할 재료들이 있다.
매운 고춧가루, 파, 마늘, 생강과 함께
명태나 생굴 등을 넣는다.
때론 인생이 고춧가루처럼 맵기도 하고
파와 마늘 그리고 생강처럼
톡 쏠 때도 있겠지만,
새우 젖이나 굴이 들어가
조화를 이루어 시원하면서도
깊은 맛을 내는 김치가 되어
겨울이 와도 두렵지 않는 인생이 된다.
젊을 땐 단 맛에 빠지고,
기성세대가 되면서부터는
매운 맛에 빠지다가,
중년을 넘기면
짜고 맵고 신 맛을 넘어
시원한 맛을 내는 사람이 된다.
자신도 모르게 인생의 다양한 양념으로
잘 버무려져 맛깔스러운 인생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것도 감사하지만
맵고 짠 것도, 신 것까지도 감사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절여지고
속을 잘 넣었다면 자연스럽게
김장은 숙성될 것이다.
소금에 절인 채소에 소금물을 붓거나
소금을 뿌리면
국물이 많은 김치가 되고,
이것이 숙성되면서 채소 속의 수분이 빠져
채소 자체에 침지가 된다.
이 침지(沈漬)가 결국 어음변화를 걸쳐
김치가 됨을 알 수 있다.
옛 음식이
요즘 인기가 있는 것은
숙성시킨 음식이 많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거의 다
마당에 김칫독을 묻어두고
겨울이 지나갈 무렵에 꺼내 먹었다.
독 속에 있었던 김치는 천연 땅에서
절로 숙성이 되어 발효 식품이
되어 맛도 물론이지만
영양도 절로 우러나왔던 것이다.
세상만사 기다려야 일이 된다.
인생도 사랑도 죽음도
김장을 담가 놓고 기다리듯,
어떤 일이든
잊고 기다려야만 맛이 든다.
때론 내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너무 많다.
밀폐된 어두운 김치 독에
갇혀놓듯 나를
침묵하게 하시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 때,
당시에는 몰랐지만 분명했던 것은
그 때에도 내 사상과 내 생의
미각이 예비 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시간에 사랑이 발효되고 있었다.
사랑 안에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그리고
충성, 온유, 절제의 맛이
나도록 그렇게 그와 이웃이 기다려 주었음을
알기에 인생은 외롭고 힘들지만
살맛이 난다.
주여,
김장처럼
저도 인생 겨울을 위해
가시 같은 소금으로 절이게 하소서.
제 자랑과 경험까지
완전히 절여져,
어두워진 눈이 열리고
당신의 속성이 나타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에게도 아라비안 3년을
기쁨으로 기다리게
하시어,
김장 겉 조리를
쭉쭉 찢어 더운밥에 얹어먹는
그 맛처럼 모두에게
맛있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2012년 11월 27일 한억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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