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린아의 「숨기는 옷」 해설 / 김보경
숨기는 옷
이린아
숨기는 옷으로 성별이 생긴다. 부끄러운 옷. 숨기는 옷에서는 끝의 냄새가 난다. 아슬아슬한 말끝에 입는 옷, 단단하게 늙은 늑골이 물렁해진 끝. 버클에는 뭉개진 립스틱과 색 바랜 빨래집게, 뒤집힌 베갯잇, 올 나간 스타킹 같은 무심한 하녀들만 걸렸다. 혼자만 보기로 하고 방 안에 숨겨놓은 타인. 거울은 옥상 위 늘어진 빨랫줄의 텅 빈 미열을 비췄다. 정원에는 자갈이 많았다. 자갈은 스스로 정원을 유혹하지 못하지만, 변명을 둘러대며 굴러다녔다. 자갈을 굴리지 말아줘, 흥에 취하면 정원은 꼼짝없이 타버렸다. 수염을 기르고 오른쪽 젖가슴을 용감하게 잘랐다. 멋지게 활을 쏘려면 시끄럽게 울지 않아야 하니까. 오락가락하던 창살이 기어코 터져 나오지 않도록 숨기는 의자가 있고 종아리가 있다. 빨랫줄에 걸린 두 개의 생식기. 달팽이가 느린 건 사랑도 해야 하고 전쟁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네를 타고 여름 별장에 다녀올 거야. 매끈한 팔짱을 끼고 하얗고 검은 털을 가진 말을 타고 신문지에 둘둘 말아 숨겨놓은 옷들을 어른스럽게 꽉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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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장 밖으로
「숨기는 옷」은 “숨기는 옷”, 즉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가 부끄러워 숨겨야 하는 옷에 관한 시다. 아마도 사회적 규범에 잘 맞지 않거나 지나치게 튀어서 숨겨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을 이 “옷”에는 외부 환경으로부터 몸을 감싸 보호하는 기능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이 시에서 옷은 성별을 생기게 함으로써 몸을 특정한 방식으로 변화시키고 조형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숨기는 옷으로/ 성별이 생긴다”라는 구절은 어떤 옷을 입는지가 개인의 성별을 일러주거나 특정한 젠더를 수행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 나아가 누가 어떤 옷을 입는지에 따라 젠더에 대한 사회적 관념이 허물어지거나 재구성되기도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젠더 수행에 대한 여러 이론이 일찍이 지적해온바, 성별이란 타고난 몸에 귀속된 불변의 속성이 아니라 젠더 수해에 따라 변화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이분법적 구분은 역사적⸳사회적 기준에 의한 가름이기 때문이다. 고착화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허무는 아마조네스 여성과 같이, “수염을 기르고 오른쪽 젖가슴을 용감하게 잘랐다”나 “빨랫줄에 걸린 두 개의 생식기”와 같은 구절도 성별이 무엇을 입는지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무언가로 상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시인은 또 다른 자신을 가리키는 “방 안에 숨겨놓은 타인”이 “그네를 타고 여름 별장에 다녀올 거”라며 “숨겨놓은 옷들을 어른스럽게 꽉 쥐고” 나선다고 쓴다. 숨겨둔 옷을 꺼내 ‘벽장’* 밖을 나서는 일. 이린아는 이러한 ‘나’의 후일담을 기록한다. 한편 이 시는 “사랑도 해야 하고 전쟁도 해야 하”는 주체로서 느린 “달팽이”라는 비유적 이미지를 제시한다. 일견 다소 낯설게 조합된 이미지로 보인다. 우선 이는 앞부분의 “단단하게 늙은 늑골이 물렁해진 끝”과 같은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숨기는 옷”을 입는 일은 “끝”, 즉 어떤 경계를 넘는 것과 관련되며, 이는 단단한 것들을 “물렁”하게 풀어 헤치고 유동하게 만드는 액체 혹은 액화 이미지로 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달팽이는 점액을 분비하는 동물로서 이러한 액체 이미지가 동물화된 형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처럼 젠더에 대한 경화된 관념에 갇힌 몸을 구속에서 해방시킬 때 그 자유에 대한 상상이 유동적인 달팽이의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맥락에서 달팽이 외의 여러 시적 페르소나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 * 이러한 벽장의 비유는 이브 세지윅의 『벽장의 인식론Epistemology of the closet』(1990)에서 퀴어 존재론 및 인식론을 설명하는 개념으로서 제시된 바 있다.
―시집 『내 사랑을 시작한다』 해설 PP.167~169
김보경 (문학평론가) |
첫댓글 "버클에는 뭉개진 립스틱과 색 바랜 빨래집게, 뒤집힌 베갯잇, 올 나간 스타킹 같은 무심한 하녀들만 걸렸다. 혼자만 보기로 하고 방 안에 숨겨놓은 타인. 거울은 옥상 위 늘어진 빨랫줄의 텅 빈 미열을 비췄다. 정원에는 자갈이 많았다. 자갈은 스스로 정원을 유혹하지 못하지만, 변명을 둘러대며 굴러다녔다. 자갈을 굴리지 말아줘, 흥에 취하면 정원은 꼼짝없이 타버렸다."(이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