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전서 2, 시문집 11권
* 전론(田論)1부터 전론7까지가 시문집 11권에 실려 있다. 토지겸병과 높은 소작료 등 심각한 농민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고민의 과정 내지는 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쓸 당시는 38세로 완전한 형태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델을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선생이 직접 언급했듯, 만년에는 달라져서, 이 여전론(閭田論)이 평소의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당시 선생의 지향 등을 알 수 있다. 선생의 만년의 전론(田論)에 대해서는 찾아봐야 할 일이다.
전론1의 문제의식에서 시작하여 전론2부터는 그 내용을 하나씩 채워간다.
특히나 전론1의 문제의식은 지금의 부동산 문제를 그대로 대입해보면 더 실감난다.
전론2에서는 기왕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거론되었던 정전제 뿐 아니라 균전제, 한전제(限田制)도 현실적이지는 않다고 한다. 똑 같이 토지를 나누어준다는 자체가 불가능하고, 한전제 역시 다른 사람의 명의를 쓰면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농사를 짓는 자는 농지를 얻게 하고, 농사를 짓지 앉는 자는 농지를 얻지 못하게 하는’ 원칙만이 최선이라고 한다.
전론3에서는 전론2에서의 원칙을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산이나 하천 등 자연적인 지세로 마을(그 마을을 여(閭)라 한다)의 경계를 정하고, 그 경계안의 토지는 마을, 여의 토지가 되게 한다. 마을 사람들은 여장(閭長)의 지휘에 따라 노동력을 제공하고, 여장은 매일매일 노동력 제공 일지를 기록하여, 가을 추수가 끝난 뒤 그 노동력에 따라 농산물을 분배한다.
전론4에서는 그 마을, 閭들 사이에서 차별이 생기고, 사람들이 옮기고 싶어 할 경우에는 받아주는데, 이런 일도 8-9년이 지나면 거의 고르게 되어 안정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다.
전론5에서는 농자(農者)는 땅을 얻어 농사짓고, 공인(工人)은 자기 생산물로, 상인(商人)은 자기 재화로 교역하면 되는데 사(士, 선비)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그들 역시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농사로 전업할 것이다. 다만 농업관련 수리(水利), 농법 개발 등 노동력을 절감시키면 그에 걸맞게 곡식을 분배한다.
전론6에서는 여(閭)에 대한 부세 역시 1/10세를 주장하고 있다. 흉년에는 부세를 감해줄 수 있지만, 감해준 부세는 풍년에 반드시 갚도록 한다.
전론7에서는 농민의 여(閭) 단위의 편제는 병역 문제해결에도 기여한다고 한다.
전론(田論) 1
이는 1799년 즈음에 지었으니[38세 때이다] 만년에 와서 논한 것과는 같지 않으나, 지금 이것도 수록한다. 《서경》 〈홍범〉에 “임금이 정치의 표준을 세워, 이 오복을 거두어 모아,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준다.”라고 하였으니, 즉 그 대의(大義)이다.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전지(田地)는 10경(頃 *1)이었고, 그의 아들은 10명이다. 그의 아들 1명은 전지 3경을 얻고, 2명은 2경씩을 얻고, 3인은 1경씩을 얻고 나니 나머지 4명은 전지를 얻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부르짖고 울며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길바닥에서 굶어 죽는다면, 이 사람은 부모 노릇을 잘 한 것일까?
하늘이 이 백성을 내고, 그 전에 먼저 이들을 위해 전지(田地)를 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먹고 살게 하였다. 또 그들을 위해 군주(君主)를 세우고 목민관(牧民官)을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백성의 부모가 되게 하여, 그 산업(産業)을 골고루 마련해서 다 함께 살도록 하였다. 그런데도 군주와 목민관이 된 사람은 팔짱만 끼고 앉아 그 여러 자식들이 서로 치고 빼앗아 혼자 다 차지하는 것을, 쳐다만 보고 이를 금하지 못하여, 강한 자는 더 차지하고 약한 자는 떠밀려서 땅에 넘어져 죽게 한다면, 그 군주와 목민관 된 사람은 과연 군주와 목민관 노릇을 잘 한 것일까?
그러므로 그 산업(産業)을 골고루 마련하여 다 살게 한 사람은 참다운 군주와 목민관이고, 그 산업을 골고루 마련하여 다 잘 살도록 하지 못한 사람은 군주와 목민관의 책임을 저버린 사람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전지(田地)는 대략 80만 결(結) [영조임금 기축(1769년)에 팔도(八道)의 현재 경작된 논은 34만 3천 결이고, 밭은 45만 7천 8백 결 남짓인데, 간악(奸惡)한 관리가 빠뜨린 전결(田結) 및 산전(山田)ㆍ화전(火田)은 이 안에 들어 있지 않다.] 이고, 인구가 대략 8백만[영종(英宗) 계유(1753년)에 서울과 지방의 총인구가 7백 30만이 조금 부족하였는데, 그 당시 숫자에 빠진 인구 및 그 사이에 나서 불어난 인구가 의당 70만을 넘지 않을 것이다.] 인데, 10명을 1호(戶)로 치면 매 1호마다 전지 1결(結)씩을 얻은 다음에야 그 재산이 고르게 된다.
지금 문관, 무관의 높은 신하들과 민간의 부자들 중에는 1호당 곡식이 수천 석(石)을 거두는 자가 매우 많은데, 그 전지를 계산해 보면 1백 결(結) 이하는 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바로 9백 90명의 생명을 해쳐서 1호를 살찌게 하는 것이다. 나라의 부자로 영남의 최씨(崔氏)와 호남의 왕씨(王氏) 같은 경우는 곡식을 1만 석(石) 씩 거두는 자도 있는데, 그 전지를 계산해 보면 4백 결 이하는 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바로 3천 9백 90명의 생명을 해쳐서 1호만을 살찌게 한 것이다.
그런데도 조정(朝廷)에서 부지런히 서둘러서 오직 부자의 것을 덜어내어 가난한 사람에게 보태주어서 그 재산을 골고루 하기를 힘쓰지 않는 자들은, 그들은 군주와 목민관의 도리로써 자신들의 임금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다.
*1 경(頃): 1백 이랑, 즉 백묘(百畝)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