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원 金道源 (1895 ~ 1923) 】 " 대한 독립 보합단 특파 대장, 人生有愛,事業唯忍”
1895년 10월 20일경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심천면(深川面) 월곡동(月谷洞)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김인우(優)도 사용하였으나, 김인준(金仁俊)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13세에 선천 일신(日新) 사립소학교에 입학해 16세에 졸업하였다. 서울의 사립 오성학교(五星學校)에 들어가 19세에 졸업하였다. 22세에 남만주로 갔다가 돌아와 고향에서 1년간 가산육영학교(佳山育英學校)에서 수학했으며, 다시 2년 동안 철령(鐵岺)의 육영학교에서 중국어를 공부하였다. 조부의 성명은 김봉하(金鳳夏)였다. 부인은 그가 붙잡힌 1920년에 사망했으며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1919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의 분파로 이규(李圭)를 총재로 한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가 조직되자, 출판과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김현원(金賢元)으로부터 보합단(普合團)에 관한 얘기를 듣고 평북 의주군(義州郡) 동암산(東岩山)에 위치한 보합단 본부를 찾아가 입단하였다. 보합단에 가입한 시점은 대조선청년결사대(大朝鮮靑年決死隊)가 보합단으로 단명을 개칭하고 단장 김중량(金仲亮)과 총무 김동식(金東植, 이명 金攸信, 金天浩)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였다. 가입 직후 의주·선천·용천(龍川)·철산(鐵山) 등 평북 도내 각지를 돌며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의 재정 원조를 위한 군자금 모금, 보합단원 모집, 친일·부일배 응징·일제 군경과의 교전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20년 10월 보합단의 근거지가 발각되어 일제 경찰과의 교전 끝에 백운기(白雲起)·박세정(朴世正)이 붙잡혔다. 한우종(韓禹種)·이동원(李東元)·김응초(金應焦) 등 단원 3인이 순국하자 보합단은 본거지를 만주 콴뎬현(寬甸縣)으로 옮겼다. 일부 대원들과 함께 국내에 남아 콴뎬현의 본부 대원들과 연계하며 군자금 모금 활동을 지속하였다. 동지 박덕유(朴德裕)와 함께 철산군 서림면의 부호인 김도혁(金道赫)·김도회(金道曾)·김도채(金道采)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또한 박초식(朴初植)·이광세(李光世) 등과 함께 정혜면(丁惠面)에 사는 외척 정창학(鄭昌鶴)을 찾아가 군자금 1,000원을 확보했으며, 11월에는 선천군의 전석원(田錫元)·전윤영(田允永)으로부터 군자금으로 어음을 받았다.
이 무렵 서울에서 활동하던 무장계획단(武裝計劃團)의 조상백(曺相伯)이 차련관(車輦館)으로 장정용(張廷鏞)을 찾아와 무기를 요청하였다. 이종영(李鍾滎)·조상백 등이 조직한 무장계획단은 상하이의 임시정부로 자금을 송금하고 있었으나, 무기가 없어 자금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보합단의 활동을 삼남지역으로 확대하고자 경상도 지부 설치의 뜻을 평소부터 품고 있었는데, 고향 친구인 장정용을 통해 조상백을 소개받게 되었다. 대화 결과 무장계획단에 무기를 알선해주는 대신 연합하여 서울에서의 군자금 모집 활동은 물론 한반도 남부지방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다. 무기 알선을 위해 자신의 권총 이외에 김동식으로부터 권총 3정, 탄환 200발을 추가로 지원받았다.
11월 14일 보합단 명의로 서울의 부호 변석연(邊錫淵)에게 군자금 3만원 청구서를 발송하고, 11월 15일 이광세·장정용과 함께 서울에 왔다. 두 단체 대원들은 이종영의 숙소인 관철동(貫鐵洞) 조선여관(朝鮮旅館)에 머물면서 군자금 모금에 관해 논의했으며, 친일파 처단은 물론 서울 지역의 은행 폭파를 계획하고 폭탄과 화약 등도 준비해 두었다. 이는 한성은행(漢城銀行)·한일은행(韓一銀行) 등을 습격해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11월 28일 무장계획단원 이종영·조상백·장석두(張錫斗)·이성규(李成珪) 등과 함께 운니동(雲泥洞)에 있는 변석연(邊錫淵)의 집을 찾아가 장남 변덕영(邊德永)을 협박해 군자금 지원을 약속받았다. 12월 4일 동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신으로 군자금 수령을 위해 재차 변덕영을 찾아갔다. 집 대문에 “자금이 준비되어 있다”라는 뜻의 분필 표시가 있는 것을 보고 들어가 잠복하고 있던 종로경찰서 형사 3명과 교전을 벌여 형사 이정선(李廷善)과 곤도 시게도시(近藤茂禮)를 사살하고 현장을 빠져나왔으나 12월 7일 붙잡히고 말았다.
1922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주거침입·강도·공무집행방해 및 강도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어서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했으나 12월 27일 기각되었고, 1923년 2월 26일 고등법원의 상고 역시 기각되었다. 4월 6일 서대문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옥중에 있는 동안 불교 서적에 심취했고 사망 전에는 “사람이 사는 데에는 사랑이 있어야 하고人生有愛,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는 참을 줄 알아야 한다事業唯忍”라는 유언을 남겼다. 1976년 무후선열로 서울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