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호 성(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링컨은 “투표는 총알보다 강하다”고 외쳤다.
민주주의 제도에서는 유권자 한 사람의 무지가 모든 사람의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다. 부패한 정치인을 선출하기 때문에 부패한 정치가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민 스스로가 부패한 탓에 부패한 정치인을 선출하는 것은 아닐까 ….
우리는 과연 부패한 국민이 될 것인가?
플라톤은 그의 <국가론>에서,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이라 역설했다. 이를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형편없는 사람에게 지배당하는 모욕을 감수하지 않으려면 훌륭한 지도자를 선택하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모욕당하지 않으려면 훌륭한 지도자를 선택해야
그런데 지금 우리 정치 현실은 과연 어떠한가? 이명박 대통령을 줄여 부를 때 당연히 <이> 대통령이라 한다. 하지만 꼴사납게 독재의 원흉, 이승만이 불현듯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친박 연대> 운운하면, 졸지에 <친 박정희>가 연상되어 무척 곤혹스럽다. 이러한 ‘황당무계함’이 하필 나에게만 나타나는 고질적인 병리 현상이 아닌가 싶어, 무척 참담해지기까지 한다.
뿐만 아니라 온통 분열, 분열뿐이다. 이른바 보수파나 진보 진영이든지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분열 대행진밖에 없다. 한나라 당은 ‘친박 연대’, ‘자유 선진당’ 등으로 쪼개지고, 통합 민주당은 한나라 당 출신의 당대표 계와 구 열린당, 구 민주당 파로 나뉘고, 민노당은 진보신당이 딴살림을 차려나갔다. 여기저기서 ‘2 중대’ 빈정거림이 들끓는다. 다들 쪽박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당의 수명은 사실상 강아지 평균수명보다 짧을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은 파벌 만들기에 신들린 사람들 같다. 둘만 모이면 파가 셋 생겨난다고 한다. 하나는 내 파, 둘 째 것은 당신 파, 셋째는 우리 파 하는 식으로. 특히 선거철만 되면 정치적 야합과 이합집산이 밥먹듯 되풀이된다. 정치 철학도 없고, 노선도 없다.
선거란 국민적 합의와 국민적 통합을 이루어내기 위해 시행되는 거족적인 민주 잔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선거가 국민적 결속이 아니라 분열만 부추기는 해괴한 행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러한 현실에서 국민 복지 증진이라든가 안정된 사회질서 구축을 도모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힘든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국민은 지쳐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믿지 않으려 한다.
정치인들은 목욕탕에 가서도 제일 늦게 나오고, 교회나 성당에 가서도 기도를 제일 오래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만큼 몸에 때가 많고 죄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악마와 목사가 대형 공사를 따기 위해 수주 경합을 벌인다면 대체 누가 이길까? 그에 대한 가장 명쾌한 해답은, “그야 말할 것도 없이 악마가 이긴다. 왜냐하면 악마는 뇌물을 써서 정치인들을 모조리 자기편으로 만들고 있으니까”다. 사실 국민들은 지금 우리 정치인을 이런 식으로 야유하고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의제도가 지니고 있는 선천적인 문제점 역시 외면할 수 없다.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저 먼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를 우선 떠올린다. 아테네를 폴리스, 요컨대 도시국가라 부르지만, 실은 요즘 우리나라의 읍, 면, 동 정도의 수준 아니었을까 한다. 이 도시국가들은 고작 수천에서 수만 정도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중에서 노예, 외국인, 부녀자들을 제외하고 나면 고작 전체 인구의 20% 정도만이 온전한 시민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소수들이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를 꾸려나간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는, 아테네의 경우에서 보듯이, 국민의 의사를 국민 스스로의 직접적인 참여로 결집하고 관철시킬 수 있다는 뛰어난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소규모의 구성원과 영역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반면에 오늘날의 민족국가는 영토나 인구 면에서 그 크기가 엄청나기 때문에, 이러한 직접민주주의를 활용하기가 대단히 힘들다. 따라서 간접 민주주의, 또는 대의제도를 채택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 역시 적잖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입맛과 상관없는 음식을 강요당하는 셈, 그래도 선택기준을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로 이해되는 “국민에 의한 국민의 통치”는 실질적으로는 “국민으로부터 나온 엘리트에 의한 국민의 통치”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국민의 정치참여라는 것이 - 직접 민주주의에서와는 달리 - 단지 간접적인 선거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요컨대 국민은 자신을 지배할 엘리트의 선택권만을 소유할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은 오직 선거 기간에만 최고 주권자 대접을 받을 뿐, 그 후에는 다시 무기력한 피지배자, 정확히 말해 노예의 신분으로 빠져 들어간다. 말하자면 “국민은 그의 어휘가 ‘예’ 또는 ‘아니오’, 이 두 마디에 한정되어 있는 주권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엘리트, 즉 국민의 대표는 입법활동 등에서 단지 간접적으로만 유권자, 즉 국민의 통제를 받는다. 그러나 국민 자신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져 있는, 그리고 그것도 선택의 범위가 대단히 비좁은 몇 개의 정당들이 이러한 국민의 대표자들을 미리 선정하고 이들의 활동을 통제한다. 말하자면 국민들은 정당들 스스로가 제멋대로 이미 다 차려놓은 잔칫상에서 - 자신들의 구미와는 전혀 상관없이 - 선거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음식을 골라먹도록 강요당하는 셈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수많은 후보들이 이 선거전선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 선거에서 어떤 인물을 뽑을 것인가? 여기에는 몇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다.
첫째, 해당 선거 지역에서 큰 사업을 한다던가 또는 엄청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이른바 토호세력들은 지금까지 권력과 밀착해서 많은 비리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들이 주민의 대변자로 뽑힐 경우, 주민의 복리나 권리보다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에 집착할 가능성이 더욱 짙다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둘째, 독재정권에 봉사했거나 또는 민주주의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경력이 있는 사람은 특히 민주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각종 선거의 출마자로 적합하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분들이 일차적인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셋째, 눈앞의 이해관계 때문에 자주 정당이나 정치적 입장을 바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국민의 진득한 신뢰를 받기 힘들다. 이들은 언제 다시 주민을 속일지 모른다. 따라서 어느 편이든 항상 담담히 외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이 오히려 국민들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넷째, 우리나라 정치의 고질병은 무엇보다도 ‘패거리 정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연줄이나 인간관계, 학벌 등의 객관적 연고주의 대신에, 합리적 정책이나 이념적 노선을 추구하는 인물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이다. 특히 지역을 잡으려는 사람은 나라를 잡을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국민적 단합을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노동자, 농민, 빈민 등을 비롯한 사회적 소외세력을 적극 배려하는 ‘서민의 정치’가 절실히 요구된다. 무엇보다 이 서민은 인구의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광범위한 국민 집단이면서 동시에, 우리 국민의 물질적 생존을 떠맡고 있는 생산적 대중으로 형성되어 있지 아니한가. 따라서 현재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대내외적인 위기를 합심해서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굳건한 지지와 결속이 무엇보다 절실한 것이다.
그를 위해 무엇보다 공무원은 공무원으로서, 노동자는 노동자로서, 사무직원은 사무직원으로서, 당원은 당원으로서, 그리고 시민은 시민으로서, 각자가 몸담고 있는 공장, 기업체, 정당이나 기관, 지역 등지에서 사소한 생활주변의 문제로부터 크게는 그 조직의 진로, 조건, 경영, 장(長)의 선출 등에 이르기까지를 더불어 결정할 수 있는 사회구성원의 직접적인 동참권을 확대해나가야 한다. 요컨대 ‘아랫것’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져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서민 위주의 정치개혁을 통하여 국민복지 확대와 민족통일을 지향해나갈 진취적인 정치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따라서 사회적 소외세력의 아픔을 대변할 수 있는 후보를 뽑아야 한다. 이를테면 “하늘이 두 쪽 나도”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 사람보다는, ‘하늘이 두 쪽 나도’ 서민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후보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고생을 덜어주려는 정치인을 위해서는 국민은 어떠한 고생도 마다 않는다. 그리고 생활을 풍족히 해주려는 정치인을 위해서는 어떠한 가난도 참고 넘길 것이다. 그리고 안전을 도모해주는 정치인을 위해서는 국민은 어떠한 재난이라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한마디로 이 시대 우리의 최고의 역사적 목표는 바로 정치개혁이다.
눈앞 먹이에만 정신 팔려 매를 깨닫지 못하는 참새는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이번 4.9 총선은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어느 후보가 수구를 대변하고, 또 어떤 후보가 개혁을 추구하는가? 그러나 유권자들은 누가 어느 정당 후보로 선거에 나서는지조차 아리송한 상태다.
‘공천혁명’이니 ‘물갈이’니 하며 출발신호는 우렁찼으나, 결국엔 ‘공천파동’으로 마감한 듯하다. 결과적으로 정당들은 ‘계파공천’, ‘밀실공천’, ‘나눠먹기 공천’, ‘특정계파 죽이기’, ‘이삭줍기’, ‘보물찾기’ 등의 해괴한 어법을 동원해가며 서로를 헐뜯기에 바쁘다. 무슨 국운을 건 전쟁에나 나서는 듯,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비장한 전투구호까지 출현한다.
예컨대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은 흔히 작은 새처럼 행동한다. 눈앞의 먹이에만 정신이 팔려 머리 위에서 매나 독수리가 내리 덮치려 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참새처럼 말이다”라고.
지금 우리 국민은 혹시 마키아벨리가 묘사하는 “참새” 같은 존재는 아닐까? ‘경제 살리기’니, 물가 안정이니, 대운하니 하는 달콤한 먹이에 정신이 팔려 있는 참새는 아닐까.
우리는 힘을 사랑하는 후보가 아니라 사랑의 힘을 가진 후보, 그리하여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어 나감으로써 국민적 자신감 회복과 결속력 증진을 성사시킬 개혁적 후보를 우리의 대표로 뽑아야 한다.
투표함을 향하여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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