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에 소재하고 있는 대원사는 창건연대는 확실치는 않지만 김제와 완주지역에 무수한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자리니 산은 베개로다. 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이니 바다를 술통으로 삼는도다. 거나하게 취해 일어나 춤추려하니 곤륜산에 소맷자락이 걸리누나" 석가여래의 후신이라 일컬어지던 진묵(震默) 대사가 대원사에 머무를 때 읊었다는 이 시는, 호방하고 걸림 없는 대자유인의 기개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진묵대사는 조선중기의 스님으로 많은 이적(異蹟)을 남긴 기승(奇僧)으로 유명하다.
모악산 대원사(大院寺)는 초의스님이 지은 `진묵조사유적고` 에 나와 있듯이 대자유인 진묵대사가 20여 년간 머무르며 수행했던 사찰로, 곳곳에 스님의 자취가 서려있는 곳이다. 대원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진묵대사의 부도나 대웅전에 모셔진 진영에서 스님의 법향을(法香)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대원사는 증산교(甑山敎)의 상제(上帝)인 강일순이 이곳에서 수행을 하다가 1901년 도를 이루었다고 하여 증산교의 성지로도 추앙되고 있다. 대원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모악산 등산로 안내판...]
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자리니 산은 베개로다. 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이니 바다를 술통으로 삼는도다. 거나하게 취해 일어나 춤추려하니 곤륜산에 소맷자락이 걸리누나 석가여래의 후신이라 일컬어지던 진묵(震묵) 대사가 대원사에 머무를 때 읊었다는 이 시는, 호방하고 걸림 없는 대자유인의 기개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진묵대사는 조선중기의 스님으로 많은 이적(異蹟)을 남긴 기승(奇僧)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스님의 행적은 그가 태어나고 자라서 출가한 김제와 완주지역에 무수한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모악산 대원사는 초의스님이 지은 『진묵조사유적고』에 나와 있듯이 대자유인 진묵대사가 20여 년간 머무르며 수행했던 사찰로, 곳곳에 스님의 자취가 서려있는 곳이다. 대원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진묵대사의 부도나 대웅전에 모셔진 진영에서 스님의 법향을(法香)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대원사는 증산교(甑山敎)의 상제(上帝)인 강일순이 이곳에서 수행을 하다가 1901년 도를 이루었다[成道]고 하여 증산교의 성지로도 추앙되고 있다.
[시인 고은의 모악산 시비...]
[입구 개울을 건너려면 멋진 목교를...]
[대원사 오르는 길목에 작은 폭포가 눈길을...]
[쉬고 싶은 넓은 바위들로 보이고...]
[시원한 계곡을 오르고 나면...]
[걷고싶어질 정도로 조용한 등산로 같은...]
[넓고 커다란 다리를 건너면...]
[나무로된 일심교를 건너면 바로 대원사가 보이기 시작하고...]
일심교를 건너 대나무와 고목이 터널을 이룬 계단을 오르면 동남향으로 자리한 대원사에 들어서게 된다. 너른 마당을 중심으로 바로 오른쪽에는 근래까지 사찰의 기와불사를 위한 접수처로 사용된 소화당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로 요사인 심검당과 향적당이 위치해 있다. 마당의 왼쪽으로는 4사자삼층석탑, 그 뒤로 범종각이 눈에 들어온다. 자 모양으로 정비된 축대 위에는 정면에 대웅전과 요사가, 그리고 왼쪽으로는 명부전이 심검당 쪽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의 뒤쪽으로 나 있는 계단을 오르면 작은 요사와 곧 허물어질 듯한 삼층석탑이 경내를 내려다보고 있고, 그 왼쪽으로 조금 비껴선 곳에 삼성각이 자리한다. 심검당 뒤편 요사구역으로 나 있는 좁은 길을 올라가면 탑신에 용이 새겨진 대원사 용각부도와 3기의 부도를 볼 수 있다. 그곳에서 다시 조금 더 올라가면 대원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진묵스님의 부도가 자리한다.
[대원사와 모악산 등산로 안내판...]
[대원사 심검당...]
[요사(향적당)인데 여름 산사체험 학습장으로 쓰이고 있어...]
[심검당 건물에 걸려있는 대원사 현판...]
[심검당에 전시되고 있는 어린이 사행대회 그림들중 도지사상...]
[대원사 경내의 고즈넉한 모습...]
[연잎과 줄기를 소재로 만든 샘물터...]
[대원사 감로수...]
[앞에는 명부전이 우측엔 대웅전이...]
[소화당 안에는 기와에 그린 멋진 그림들이 가득...]
[기와에 그려있는 그림의 섬세함이...]
[소화당옆엔 나옹선사의 글이...]
[주지실로 보이는 건물이...]
[대원사 사사자 오층석탑...]
[대원사 명부전...]
대원사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881년(고종 24)에 금곡(錦谷) 스님과 수산거사(水山居士)가 처음 세웠으며, 건물이 너무 낡고 퇴락하여 2003년에 석문스님이 새로 지었다. 내부에는 조선후기에 조성된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ㆍ판관ㆍ사자ㆍ장군ㆍ동자 등의 권속 및 일제시대에 조성한 지장시왕탱 등을 봉안하였다. 2004년 현재 내부의 존상은 봉안하지 않고 대웅전 측면과 심검당(尋劍堂)ㆍ소화당(笑話堂) 등에 분산하여 임시로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 내부에 모셔진...]
[명부전 금강역사...]
[대원사 범종각...]
[등산로와 연결된 대원사 쪽문...]
[아직 단청도 않은 요사채가 정감을 주고...]
[대원사 대웅전...]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1886년(고종 23)에 건봉사(乾鳳寺)에 머물고 있던 금곡인오(錦谷仁旿), 함수산(咸水山) 스님이 이곳으로 와 중창불사를 할 때 중건된 것이다. 그 이후 1949년 덕운재묵(德橒在묵 스님이 다시 중수하였고, 20세기 후반에 한 번 더 중수와 단청을 하였다. 건물의 외부에는 돌아가면서 12지신상 가운데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과 금강역사상을 그려 장엄하였다. 내부에는 주존으로 석가, 약사, 아미타불 등의 삼세불을 봉안하고 뒤로는 삼세불탱을 모셨으며, 그 외에 신중탱과 칠성탱, 진묵조사진영, 범종 등을 봉안하였다. 불화 가운데 칠성탱은 1908년에 조성된 것이며, 신중탱은 1918년 서울 화계사에서 조성하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1906년에 조성된 진묵조사 진영은 금어 진월천호(振月天浩) 스님이 그린 것이다.
[대원사 대웅전...]
[대원사 대웅전 삼존불 약사와 아미타불...]
[목각으로 된 탱화가 특이하게...]
[미소가 아름다운...]
[진목대사의 진영...]
조선중기의 고승(高僧) : 1562 - 1633(명종 17-인조 11년). 호는 진묵(震默). 전라도 萬頃懸 佛居村 출신. 태어난 뒤 3년 동안 초목이 말라 시들었고, 비린내가 나는 음식과 마늘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지혜롭고 자비로워서 사람들이 "불거촌에 부처님 났다." 고 하였다. 7세에 출가하여 전주 봉서사(鳳棲寺)에서 불경을 읽었는데, 한 번 읽으면 곧 암송하고 내용을 통달하였으므로 따로 스승을 두지 않았다. 또한 봉서사 주지는 어린 진묵에게 아침저녁으로 신중단(神衆檀)에 소향예배(燒香禮拜)하는 소임을 맡겼다. 그런데 어느 날 신중(神衆)들이 그 주지 승에게 현몽하여 이르기를 "우리 소신(小神)들이 어찌 감히 불(佛)의 예를 받겠는가 ! 원컨대, 다시는 아침저녁으로 소향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신중(神衆)들이 그 주지 승에게 현몽하여 이르기를 "우리 소신(小神)들이 어찌 감히 불(佛)의 예를 받겠는가 ! 원컨대, 다시는 아침저녁으로 소향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일생을 통하여 수많은 신이(神異)를 남겼지만, 그 생애는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의 고승 초의(草衣)가 지은 <진묵조사유적고 震默祖師遺蹟攷>에는 18가지 이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사미 시절 창원의 마상포(馬上浦)를 지나갈 때 한 동녀(童女)가 사랑을 느꼈으나 따를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죽어서 남자가 된 뒤 다시 전주 대원사(大元寺)에서 만나 기춘(奇春)이라는 시동이 되었다. 대사가 그를 각별히 사랑하였는데 이것을 대중들이 비난하였다.
대사는 그것이 이락삼매행(離樂三昧行 : 일체의 즐거움에 대한 애착을 떠난 삼매행)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기춘을 시켜 국수로 대중 공양을 하겠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다. 대사는 대중에게 바루를 펴게 한 뒤 기춘으로 하여금 바늘 한 개 씩을 각자의 바루 속에 넣어 주게 하니, 대사의 바루 속 바늘은 국수로 변하여 바루를 가득 채웠으나, 다른 승려들의 바루에는 여전히 한 개의 바늘만이 있었다. 늙은 어머니를 왜막촌(倭幕村)에서 봉양하고 있을 때, 여름 날 모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보고 산신령을 불러 모기를 쫓게 한 뒤로는 이 촌락에 영영 모기가 없어졌으며 어머니가 죽자 제문을 지어 위령하였다.
[대웅전 앞에는 아직도 늦은 능소화가...]
[대원사 사사자 오층석탑...]
대원사에는 대웅전 앞과 뒤편에 각각 오층석탑이 서 있다. 대웅전 뒤의 오층석탑은 전체 높이 2.38m에 이중기단이며 3층 옥개석은 후대에 다른 돌로 끼워 넣었다. 옥개석은 5단의 층급받침이 있으나 상륜부가 없다.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이 있으면서도 균형이 잘 잡혀 있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앞에 있는 오층석탑은 전체 높이 4.20m로 4사자가 탑신을 받치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노반, 앙련, 수련이 갖추어져 있다. 이 오층석탑은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원래 대원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1981년 무렵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대원사 사사자 오층석탑...]
[뒤로 모악산이 보이고 자그마한 오층석탑이 하늘을...]
[윗쪽에 자리잡은 삼성각...]
[대원사 경내...]
[능소화가 땅바닥에...]
[대원사 경내...]
대원사에는 석가여래의 화신이라 일컬어지는 진묵 스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다. 초의의순(草依意恂) 스님이 지은 『진묵조사유적고』에 보면 당시까지 전해지던 진묵스님의 이적(異蹟) 18가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는 신통술이 아니라 불도(佛道)를 깨우치지 못한 대중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스님의 방편이었다. 다음의 두 이야기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진묵스님이 대원사에 머무를 때의 이러한 일화를 전하고 있다.
국수로 변한 바늘 - 진묵대사가 사미승이던 어느 무렵에 창원의 마상포(馬上浦)를 자주 지나가게 되었다. 이때 한 처녀가 스님을 훔쳐보며 자신도 모르게 사랑을 키워왔으나 이루어질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채 홀로 내생을 기약하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후에 이 처녀는 환생을 하여 기춘(奇春)이라는 이름의 남자로 태어나게 되었는데, 전생의 원에 따라 전주 대원사(大元寺)에서 진묵대사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대사는 기춘이라는 아이를 시동으로 삼았는데, 신심이 지극하고 하는 일마다 영특하여 애지중지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대사가 기춘을 편애한다는 말이 떠돌면서 대중들의 비난거리가 되고 말았다.
대사는 그러한 자신의 행동이 이락삼매행(離樂三昧行)임을 보여 주기 위해, 어느날 기춘을 시켜 국수로 대중공양을 하겠다는 것을 사중에 알렸다. 공양시간이 되어 사찰의 대중들이 모여들었지만, 공양간에서는 국수를 삶는 기척이 전혀 없었다. 이윽고 모든 대중들이 자리를 잡자 대사는 기춘에게 여러 개의 바늘을 주면서, 자신을 포함하여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발우에 바늘 한 개씩을 넣어 주도록 하였다. 발우 속의 바늘을 쳐다보며 영문을 몰라 하는 대중들에게 대사는 한마디 던지며 젓가락을 들었다. “자, 이제 국수공양들 하시지요.” 어느새 대사의 발우에는 바늘이 가는 국수로 변해서 가득하였으나 다른 대중들의 발우에는 여전히 한 개의 바늘만 남아 있었다.
[대원사를 알리는 목판 뒤에는...]
이른봄 진달래가 활짝피면 이곳에선 화전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글세 또 한번의 방문이 이루어 질지는 모르겠지만 진달래축제가 아닌 화전축제를 떠올리며 내년을 기약해 볼만도 한 그런 사찰이다. -<끝>-
첫댓글 지금까지 가 보지 못한 사찰입니다. 기회를 가져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