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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6;1-19. 또 다시 광야의 길목에서 붙여 주시는 관계 2024. 4. 21.
지난주에 다윗이 또 다시 광야의 생활을 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었는데 본인과 관계된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광야에 다시 서게 되고, 어려움을 겪고 고난을 겪는 이유입니다. 그 이유는 4가지 정도인데,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불러들였으면 잘 살피고 가르쳐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상징적인 장소 헤브론으로 가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모사가요 정략적인 지혜의 사람,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눈물의 광야에 다시 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광야는 어떤 곳이었는가요? 다윗은 광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광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삶의 기적을 만들었던 곳입니다. 나름의 즐거움과 함께 소망을 꿈꾸던 곳입니다. 하지만 10년 이상을 도망 다녔던 곳입니다. 온갖 고생을 했지만 영광을 얻은 곳입니다. 이 것이 광야의 인생이 되기 이전까지의 광야에서의 다윗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갑자기 눈물의 골짜기가 되었습니다. 압살롬에 의해서 강제로 다시 광야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다윗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가리 우고, 맨발로, 울면서 세 번째 광야로 나왔습니다. 참담한 광야 생활이지만 다윗은 여기서 또다시 참된 광야의 의미를 깨닫고 다시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남은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눈물의 골짜기인 광야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삶인지를 배우는, 진정한 자기 발견을 합니다. 그러니까? 세 번째로 광야에 선 인생이 어떻게 다시 회복이 되고, 어떻게 다시 환궁하게 되고, 어떻게 다시 은혜와 은총을 받게 되는가? 다윗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있었는데 다윗을 위하여 사람들을 예비하셨고, 그 사람들에 대한 다윗의 생각과 마음과 자세입니다.
1.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남겨 놓고 예비하신 사람입니다.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롬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것, 저것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광야의 길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분명히 그의 인생에 가장 슬프고 비참한 상황입니다. 눈물과 설음과 한숨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에게 믿음에 상응한 일을 만드십니다. 오늘 광야에 선 다윗에게 하나님이 돕는 사람을 붙여 주십니다. 세 번째로 광야의 길을 걷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다시 전개되는 광야는 눈물의 골짜기이며 비참한 인생의 고난입니다. 그러나 다거기서 광야의 정신을 회복하며 의지하는 믿음을 갖습니다. 그럴 때 다윗을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등장을 합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다윗의 동료와 친구가 되어 준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느 때에 다가올까요? 힘과 능력이 있을 때에 사람들이 모여 듭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압살롬이 왕권을 쥐었다고 생각을 하고, 그의 편에 선 상황에서 다윗 편에 선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만이 아닙니다. 광야에서의 버팀의 문제가 있습니다. 광야로 들어갈 때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먹는 문제입니다. 갑자기 도망을 쳤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기 때문에 음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든지 먹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면 슬프고, 비참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광야에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고 다윗의 필요에 대한 공급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 편에 서겠다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모든 정보와 사람과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할 사람들이 다윗 편에 섭니다.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1-1. 가드사람, 잇대 입니다. 15;19-21. 그는 가드에서 온 600명 중에 한 사람입니다. 가드는 골리앗의 고향 입니다. 그 때 다윗이 19절. 너는 쫓겨난 나그네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고 합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잇대가 블레셋 가드에서 쫓겨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정처 없이 유랑을 하다가 아둘람 동굴에서 다윗을 만났습니다. 그 때부터 다윗과 함께 모든 고난을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네가 날 따라오면 또 다시 나그네가 되니 압살롬 편에 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잇대가 21절.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우리 주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충성 맹세를 합니다. 여러분, 가장 어렵고 고통스럽고 치욕적일 때 함께 하겠다고 하는 사람만으로도 가슴이 벅찹니다. 그래서 잇대의 고백에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을지 짐작이 됩니다. 고난을 함께 한 사람만이 진정한 동료이고, 고난을 함께 해 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하나님은 잇대를 남겨놓으셨습니다. 다윗을 위해서 용사로서 잇대와 그의 사람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1-2. 사독과 아비아달과 레위 사람들입니다. 15;24절. 사독의 아들 아히마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제사장들이고 제사장 가문입니다. 비록 군사적 힘은 없지만, 종교적 힘을 가지고 있고, 백성에게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도망 중에 있는 다윗을 보면서 누가 그르고 옳은지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법궤를 가지고 다윗 편에 섰습니다. 비록 다윗이 어려움 중에 처했지만, 하나님이 다윗 편에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아주 중요한 의미입니다. 정통성의 문제이고 신앙의 문제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위기의 상황이 오면 대부분이 자기 눈에 보기에 이득이 되는 쪽으로 가고, 힘이 있는 쪽에 붙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가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고 사는 것보다, 옳고 그름을 목숨보다 더 중요시 여기고 다윗 편에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윗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압살롬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끝까지 정의의 편에 섰습니다. 여러분, 그런 면에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제사장 그룹을 남겨놓았고 도와주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위해서 사독과 아비아달과 제사장 그룹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정통성을 인정받게 했고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힘이 되었습니다.
1-3. 아렉사람, 후새 입니다. 15;32-37절의 후새 입니다. 후새는 다윗의 친구이었습니다. 대상27;37절. 아히도벨은 왕의 모사가 되었고 아렉 사람 후새는 왕의 벗이 되었고. 이 말씀은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기 전의 상황입니다. 후새는 평소에 왕의 가장 친한 벗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려운 상황에 처한 다윗을 배신하지 않고, 신실함으로 다윗과 함께 해 주었습니다. 다윗의 슬픔에 함께 참여하여 스스로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뿌렸습니다. 진실한 친구가 어떤 사람입니까?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욥의 친구들처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어주고 함께 슬퍼했습니다. 여러분, 위로의 말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함께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후새가 다윗과 함께 있었습니다. 함께 할 뿐만 아니라, 압살롬의 진영으로 들어가서 아히도벨의 모략을 무력화 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 결정적인 일로 다시 다윗이 예루살렘 궁으로 환궁하게 되고 광야의 생활을 매듭짓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진리를 발견하는데 하나님의 역사를 들어 낼 때에 사용하는 것 중에 하나가 사람입니다. 존재의 근원과 삶의 원리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나타내 주실 때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들에 대하여 열린 자세가 중요합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쫒아 다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으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로 돕는 사람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이 교회로 부임 해 온 과정을 간혹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부임 전에 일본에 히메지라는 도시를 몰랐고, 히메지에 교회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목사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줄도 몰랐습니다. 기도만 하고 맡겨진 사역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히메지에 계셨던 한 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 분과 아는 사람을 통해서 히메지를 연결해 주셨습니다. 그 때 그 분과 알고 지냈던 사이도 아니었고, 전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저희교회의 여전도사님이셨던 한 분에 의해서 히메지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가는 과정으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리는 신호가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상황에서 반전시킬 수 있는 사람, 후새를 다윗을 위하여 남겨 놓으셨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을 한 순간에 무너트릴 후새를 남겨 놓았습니다.
1-4.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입니다. 1-3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엄청난 음식과 나귀를 가지고 다윗을 찾아 왔습니다. 시바의 말처럼 도망 중에 지치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었겠습니까? 먹는 문제 앞에 선뜻 베푸는 손길을 봅니다. 기쁨이고 만족이지요. 그런데 사실 시바가 이것들을 가지고 다윗을 찾아 온 것은 다윗을 속이고 므비보셋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함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절친 이었던 요나단의 아들이었고, 사울 왕의 손자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과 요나단의 모든 것을 므비보셋에게 주었고, 시바를 그의 종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 므비보셋은 절뚝발이 몸으로 다윗을 따라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시바가 다윗에게 므비보셋이 반역을 꾀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므비보셋의 재산을 시바에게 주었습니다. 물론 다윗이 이후에 이 모든 것이 시바의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고 바로 잡습니다만 다윗이 또 다시 실수를 했습니다. 사람을 꽤 뚫어 보는 통찰력이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여러분,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평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의도가 있는지 주의를 해야 합니다. 어찌 되었든지 하나님은 때로 악한 사람을 통해서도 뜻을 성취시키십니다. 잠16;4절.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씌움에 적당하게 하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시바가 불의한 동기를 가지고 음식을 가지고 나왔지만, 그것을 통하여 광야에 있는 다윗의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악한 사람이 악한 뜻을 가지고 있어도 현재의 다윗의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살이가 참으로 복잡 합니다. 광야에서 다시 복 받은 인생이 되는 것이 이런 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필요를 채우는 것 때문에 만족해서 판단력이 흐려지는 실수를 하면 아니 됩니다.
1-5. 17;27―29절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로데발 사람, 로글림 길르앗 사람들입니다. 이 땅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변방이고 이방 땅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평소에 다윗과 친밀한 관계 속에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선한 동기를 가지고 다윗을 찾아 올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 근거는 그들이 찾아 온 마하나임 이라는 장소입니다. 야곱을 도우셨던 그 하나님이 섭리하셔서 변방의 사람들을 통하여 다윗의 필요를 공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광야로 들어가게 하셨지만, 섭리의 역사를 통하여 다윗의 필요를 채우셨고 피할 길과 살 길을 주셨습니다. 고전10;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 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주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의 백성들을 광야로 밀어 넣으실 때는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연약 때문에 감당치 못할 때는 피할 길을 주십니다. 이 사람들은 다윗이 구하지 않은 음식까지 주셨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엡3;20절.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여러분, 원초적인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삶의 필요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을 통해서라도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이방과 변방의 사람들까지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러 각도로, 다방면으로, 모든 방법들을 동원해서 다윗을 다시 왕궁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길을 여시고 만드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도 이런 은혜와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이에 대한 다윗의 생각과 마음과 자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과 생각과 자세와 태도가 중요합니다만 특별히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받는 현장에서는 더욱 마음과 생각이 중요합니다. 사19장에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는 3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애굽 사람들의 자랑하는 인간의 지혜입니다. 사19;14절.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사특한 마음을 섞으셨으므로 그들이 애굽으로 매사에 잘못 가게 함이 취한 자가 토하면서 비틀거림 같게 하였으니. 지혜를 자랑하는 애굽의 지도자들 속에 사특한 마음, 즉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것을 넣어서 그들의 모든 통찰과 결정이 잘못된 길로 가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취한 자가 토하면서 비틀거림 같게.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만물을 움직이시고, 그 속에서 기도하는 자기 백성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날카롭고, 정교하고, 장엄한 섭리의 손을 펴서 자기 백성들을 돕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 보다 더 큰 세계를 움직일 수 있고, 기도하는 사람이 삶의 현장에서 주도권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 시도해보지 않으면 얻을 것이 없습니다. 공기의 저항을 통하여 거대한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게 하듯이, 삶의 고통과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영적으로 비상하게 하십니다. 삶의 저항이 클수록 영적으로 육적으로 거기에 대응만 잘하고 에너지를 축적하면 그리고 활용하면 더욱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받게 됩니다. 다윗은 광야라는 저항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삶의 새로운 변화의 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광야정신으로 되돌아간 반응입니다. 연약하고 유한한 피조물인 것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인식했고, 이 인식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주인 되신 주권과 통치권을 인정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셔야, 하나님이 은혜 주셔야 됨을 알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취한 태도와 자세와 마음이 어떤 것입니까? 아주 중요합니다.
2-1. 아히도벨에 대한 마음과 자세입니다. 그 사람이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인가를 아는 시금석 중에 하나는 기도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삼하15;31절,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아주 짧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광야 길에서 짧은 단발성 기도만 했다고 판단하면 다윗에 대한 오해입니다. 다윗은 광야라는 저항을 만났을 때 그것을 깊은 기도의 골방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도만 중에 하나님만 의지하며 기도로 쓴 몇 편의 시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시3편입니다. 표제에서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라고 붙여 놓았습니다. 그 시작이 1-2.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다윗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가 나옵니다. 많은 원수들이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압살롬을 선택하고, 다윗을 버렸다는 조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4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리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 도다. 다윗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분명한 인식과 함께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확신을 하는데, 5-6.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 치려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싸고 치려해도. 대단하지요. 다윗이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신 기도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 중에 가장 구체적 응답이 후새입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 달라는 기도에 대한 구체적 응답으로 후새를 세우셨습니다. 이 후새가 위장을 하고 압살롬 진영으로 들어가 압살롬의 움직임을 제사장의 두 아들에게 알려주었고, 그들이 다윗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후새가 한 가장 큰 일은 17장에 나오는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만든 것입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군사 1만 2천을 주면 다윗을 뒤따라가 공격을 해 다윗을 따르는 자들을 두렵게 하여 다 도망가게 하고, 다윗만 죽이겠다는 모략을 냈습니다. 그 모략을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옳게 여겼습니다. 만일 압살롬이 그 모략을 허락 했더라면 다윗은 죽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다윗을 건지시겠지만, 그런데 갑자기 압살롬이 후새를 부르라고 합니다. 후새의 의견을 듣습니다. 그 때 아히도벨의 모략의 위험을 안 후새가 그 방법은 안 좋다고 간청합니다. 만일 아히도벨의 방법대로 다윗을 공격하면 다윗은 새끼를 빼앗긴 암콤과 같고, 다윗은 병법에 뛰어나기 때문에 그 방법으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단부터 브엘세바까지에 살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총동원하고 이스라엘의 군사를 동원하는 동안 다윗은 안전하게 도망을 가든지, 아니면 반격할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후새의 방법으로 결정을 합니다. 왜 그렇게 선택했을까요? 이유는 17;14절.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였음이더라. 누가 봐도 아히도벨의 모략이 더욱 진가를 발휘하고 좋은데 채택이 안 됩니다. 이 때 아히도벨은 자신이 낸 모략이 압살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17;23절.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목을 매 죽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입니다. 아히도벨을 원망하지 않았고 문제해결에 집중을 했습니다.
2-2. 비방에 대한 마음과 자세입니다. 시므이입니다. 5절이하에 나오는 시므이의 혹독한 저주입니다. 사울의 친족 중 한 사람인 시므이는 다윗 왕과 그의 신하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먼지를 날리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의 저주의 요지는 다윗이 피를 흘린 사악한 사람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사울 족속의 모든 피를 그에게 돌렸고, 자기 아들에게 모반을 당하게 되었다고 저주를 합니다. 물론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에 많은 피가 흘렀고, 또 지금 아들에게 쫓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사울의 집안의 무리한 피 값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존재이기에 시므이는 자기 확신을 가지고 서슴없이 독설과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너무나도 억울했습니다. 비참한 상황에 더 몰아넣는 시므이입니다. 그런데 이런 저주를 대하는 다윗의 태도가 있습니다. 아비새는 다윗에게 당장 가서 왕을 저주하는 시므이의 머리를 베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이겠느냐? 아비새를 만류합니다. 그리고 자기 몸에서 난 아들도 자기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사울의 친족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그가 계속 저주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들으면서, 그의 말 중에 억울한 부분에 집중하고 분노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징계와 자기의 실패에 집중합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왕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에 집중합니다. 12절에 다윗은 하나님께서도 자기의 원통함을 알고 계시니, 부당한 저주를 받고 참은 것으로 인하여 어쩌면 여호와께서 은총으로 갚아주실지 모른다는 소망을 피력합니다. 다윗의 이 같은 고백은 오랜 경험에서 체득한 영적인 진리이었습니다. 여러분, 정죄와 비난 대신, 사랑과 격려의 말을 해보십시오. 공동체의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교회에서 너도 나도 물고 뜯는다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것을 두려워하고 가르쳤습니다. 고후12:20절, 첫째는 다툼이고 둘째는 시기이고 다음은 분냄 입니다.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궤계입니다. 그렇다면, 비난을 당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비난을 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하는 비난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에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너 오늘 죽었다. 한번 붙어 보자 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시므이의 저주를 우연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신하와 부하들이 다 듣는 가운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므이의 저주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과거에 저질렀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고백이고, 성숙한 모습입니다. 사람에게 당한 억울함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합니다. 다시 받을 은혜를 생각합니다. 이렇게 할 때, 저주가 더 이상 저주가 아니고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 되도록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복이 되고 왕궁으로 환궁하게 되는 이러한 은혜와 복이 여러분에게 있게 되는 참 신앙인의 마음과 자세와 태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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