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밑 러시아군 장병들이 우크라이나군의 포격에 집단
몰사당한 사건을 놓고 때아닌 ‘휴대폰 책임’ 공방이 불붙었다.
우크라이나군 장병이 4일(현지시각) 러시아와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에 배치되어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제공: 한겨레 러시아 국방부는 4일(현지시각) 성명을 내어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 미키우카에서 우크라이나군의 포격으로 러시아군 장병이 대거 전사한 사건과 관련해 “장병들이 휴대전화 사용 금지 명령을 어기고 적 화력의 사정거리 안에서 휴대전화를 대량으로 켜고 사용한 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군이 장병들의 휴대전화에서 발신되는 신호로 위치를 포착해 포격했다는 것이다.앞서 러시아 국방부는 지난달 31일 밤 마키이우카에서 병사들 숙소로 사용하던 학교 건물이 우크라이나군의 하이마스(HIMARS·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 공격을 받아 병사 63명이 숨졌다고 밝힌 바 있다. 러시아 국방부는 이날 사망 병사 숫자를 89명으로 고쳐 발표했다.
그러나 러시아 내부에서는 “책임 떠넘기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러시아 국방부가 병사들 스스로 잘못해 우크라이나군의 포격을 불렀다는 식으로 비난 여론을 피해가려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유명 블로거 세묜 페고프는 국방부의 발표에 대해 “설득력이 없다”며 “(장병들을) 모략하려는 뻔뻔한 시도”라고 비판했다. 그는 국방부가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장병들의 숙소를 드론 정찰이나 지역민의 정보 제공 등에 의해 알아낸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우크라이나군도 러시아 국방부의 발표를 비꼬며 내분을 부추겼다. 우크라이나 동부군 대변인 세르히 체레바티는 “러시아 병사가 지리정보가 있는 전화를 사용한 것은 잘못이지만 주요 원인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며 “주요 원인은 장병들을 은밀히 배치하지 못한 것이고 우리가 이를 이용해 그들을 찾아내고 공격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책임 공방과는 별개로 전쟁터에서 휴대전화 사용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가 전했다. 전쟁터에서 휴대전화 사용이 문제가 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미군은 과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적군이 아군의 위치를 손쉽게 파악해 공격해 오는 사례가 많아 곤욕을 치렀다. 2018년엔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미군 장병들이 사용한 앱이 장병들의 위치와 습관을 고스란히 적군에 전달해준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우크라이나전에서 러시아군은 개인 휴대전화를 무절제하게 사용하면서 위치 정보를 노출해 여러차례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러시아군 장성 등 지휘관이 초반에 여럿 전사한 것은 이들이 가족에게 개인 안부 전화 등을 거리낌 없이 하는 바람에 미군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군에 위치 정보가 노출되어 공격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진 뒤 러시아군 지휘관들은 개인 휴대폰 사용을 자제하고 군용 전화를 사용하면서 피해를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군은 병사들에게 전선 근처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에 붙잡힌 러시아군 포로들은 러시아군 지휘관들이 병사들의 휴대전화를 압수하는 등 전선에서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실은 종종 최전선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등 여전히 휴대전화가 사용되고 있다. 병사들이 우크라이나인의 휴대전화를 빼앗거나 아니면 숨진 사람의 소지품을 뒤져 휴대전화를 찾아내 사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지휘관의 눈을 피하고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이 이들 병사들의 휴대전화 통화를 도청해 분석한 내용을 보면, 러시아 병사들은 가족 등 친한 이들에게 전화하면서 자신들의 처우에 불평을 터뜨리거나 지휘관들을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군이 도청할 가능성을 우려해 자신의 부대 이름이나 주둔 위치 등 민감한 군사정보에 대해선 나름 조심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통화를 하는 것 자체만으로 위치 정보가 노출된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정은 우크라이나군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휴대전화를 옆에 끼고 살아온 젊은 세대에게 휴대전화 없는 생활을 강요하는 것은 러시아나 우크라이나나 마찬가지로 쉽지 않다는 것이다. 미군 해병대의 한 지휘관은 “그들은 아무 생각없이 버튼을 누른다. 하루 종일 그렇게 하며 살아왔다. 이제 그렇게 20년 가까이 해온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