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인쇄문화와 목판 목판은 서적 또는 문서의 간행이나 게시를 목적으로 글 또는 그림을 나무에 판각한 널빤지 형태의 판목류를 총칭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책을 출간하기 위한 용도로 쓰였던 책판(冊板)을 비롯하여 서원이나 누각과 같은 건물의 이름을 게시하거나 또 그런 건물의 역사와 관계된 글들을 판각하여 내부에 게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여러 유형의 현판들 그리고 인출을 목적으로 각종 문양을 새겨 넣은 능화판(菱華板)과 지도를 그린 지도판 등이 포괄된다. 그러나 이는 넓은 의미에서 말할 때이고, 보통은 먹을 묻혀 판각된 내용을 찍어낼 수 있는 인출용 판목, 즉 앞의 예에서 현판류를 제외한 판목들만을 목판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처럼 목판은 기본적으로 거기에 새겨진 내용을 인출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인쇄매체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그 역사는 우리의 전통 인쇄문화의 그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나 ‘고려대장경’, ‘직지심경’ 등의 이름을 통해서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세계 어느 문화권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우수한 인쇄문화를 일찍부터 발전시켜 왔다. 우리의 그런 우수한 인쇄문화는 기법 면에서 통상 활자인쇄와 목판인쇄 두 부분으로 크게 나뉘는데, 이 가운데 주류를 이룬 것은 목판인쇄이다. 목판이 활자를 제치고 우리 인쇄문화의 주류로 자리 잡은 데에는 제작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장점 외에도 표의문자인 한문의 특성상 조판을 해야 하는 활자보다 글자를 통째로 새긴 후 두고두고 쓸 수 있는 목판이 책을 찍어내는 데 더 효용성이 높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8세기 중엽)의 경우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에서 목판 인쇄술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멀리 통일신라시대부터이다. 하지만 그것이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룬 것은 두 번에 걸친 대장경 제조 경험이 목판인쇄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이다. 그러다가 조선으로 넘어오면 학문을 숭상하던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유학자들의 문집출간이 일반화됨으로써 목판의 수요가 한층 눈에 띄게 증가한다. 이런 흐름은 성리학이 완전히 뿌리를 내리는 조선후기로 갈수록 뚜렷해지는데, 그 결과 조선시대는 가히 목판의 황금시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목판을 이용한 인쇄문화가 보편화된다.
책판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목판인쇄가 활발하였던 조선시대의 경우 목판의 가장 큰 용도는 개인용 문집을 찍어내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양반사회에서 문집의 간행은 생전에 보여주었던 저자 개인의 학덕을 선양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가문의 명예를 유지하는 일과 직결되는 것이기도 했다. 양반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실질적인 기준은 글동냥의 여부에 있다는 말도 있듯이, 학문을 숭상하던 유교사회에서 ‘글’은 곧 개인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집안의 학문적 수준을 드러내주는 바로미터였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조상이 죽으면 그의 글들을 모아 문집을 출간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이 일을 2~3백년이 걸려서라도 완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사실은 조선이라는 유교사회에서 문집이 차지하는 상징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점에서 조선시대의 목판문화는 책판이 그 중심을 이룬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은 아니다. 책판의 주 용도가 이처럼 개인용 문집의 제작이었기 때문에 그것의 제작과정을 살펴보려면 문집의 만들어지는 과정과 연계시켜 보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이다. 학덕을 갖춘 유학자가 죽은 뒤에 문중이나 지역유림에서 그의 문집을 발간하기로 공론이 모아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가 남긴 글을 모아 정리하는 일이다. 한 사람이 생전에 남긴 글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을 것이므로 이것을 하나의 책으로 엮어 내기 위해서는 원고의 수합과 정리작업이 필수적이다. 이렇게 하여 문집 간행용 원고의 정리작업이 끝나면 그 내용을 담을 책판을 제작하기 위하여 간역소(刊役所)라는 일종의 간행본부가 설치되고, 이어 그 간역소를 운영할 임원조직이 구성된다. 문집발간을 위한 원고가 정리되고 간역소가 설치되어 가동되면 책판을 제작하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논의되는 것은 판각을 총지휘할 책임자인 도각수(都刻手)를 위촉하고 책판 제작에 들어갈 비용 산정과 그 조달방법 등이다. 이 일이 끝나면 도각수는 논의 내용을 토대로 제작비를 계산하여 계약을 맺는데, 제작비에는 책판을 직접 새기는 데 드는 노무비인 원공가(元工價)를 비롯하여 판목을 만드는 데 드는 제반 비용이 포함되었다. 계약이 이루어지면 도각수는 각수들을 소집하여 일을 분담해 맡기고 책판을 제작할 원판인 판목을 조달한다. 판목에 쓰이는 목재는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교목들이 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 부분에 대한 전통적인 기록들을 종합하면, 단풍나무를 비롯하여 박달나무, 돌배나무, 산벚나무, 감나무 등이 주로 많이 쓰인 듯하다. 판목을 만들기 위한 목재가 구해지면 나무의 숨을 죽이기 위해 1년 정도 묵혔다가 알맞은 크기로 재단하여 사용하였다. 원래는 나뭇결을 삭히기 위해 바닷물에 담그는 것이 원칙인데, 해인사의 대장경판은 3년을 담가두었다고도 전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상적인 경우이고 일반적으로는 대안으로 소금물에 쪄서 점액류를 빼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점액류를 빼고 결을 삭힌 목재는 최종적으로 그늘에서 충분히 건조시켜 뒤틀림이나 갈라짐을 방지하였다. 이렇게 하여 판목용 목재가 마련되면 판면을 고르게 다듬고 이어서 손잡이에 해당하는 마구리 를 붙였다. 책판의 머리부분을 꾸미는 나무라고 해서 장두목(粧頭木)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책판을 여러 장 겹쳐 보관할 때 판면들이 직접 부딪쳐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고, 또 통풍도 원활하게 함으로써 책판의 보관에도 유용한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옆면에 제목이나 책수와 같은 정보를 써넣음으로써 책판을 세워서 보관할 때 뽑지 않고도 해당 책판의 내용을 알 수 있게 하는 색인 기능도 하였다. 판목이 갖추어지면 본격적인 판각에 들어간다. 글씨를 새기기 위해서는 당연히 판각할 내용을 정서한 원고가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 원고용지는 외곽 테두리선과 줄 사이의 경계선 등이 그려진 용지재단용 판목인 투식판(套式板)을 사용하여 인출하였다. 용지가 만들어지면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먼저 정리된 문집 원고를 토대로 그 내용을 정서하여 판각용 원고를 만드는데, 이것을 보통 판하본(板下本)이라고 한다. 판하본이 만들어지면 이를 판면에 뒤집어 붙인 후 각수(刻手)가 판각에 들어갔다. 여러 관련 기록들을 종합할 때, 한 명의 각수가 책판 한 장을 새기는 데 소요된 시간은 약 3일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실제 일에 들어가면 비용조달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연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내용이 모두 판각되면 판면의 중심에 해당하는 판심(版心) 부분에 책의 제목이나 권수, 쪽수 그리고 그 판심 부분을 꾸미는 장식인 어미(魚尾) 등을 새겨 마무리하였다.
하나의 책판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이렇듯 많은 공정이 필요하였다. 특히 국가적 차원이 아니라 민간에서 문집용으로 제작한 책판의 경우 판각에서부터 제본까지 상당한 시간과 경비가 들었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활동한 안동의 선비 이주정李周禎(1750~1813)이라는 인물의 문집이 간행되기까지의 경위를 기록한 [대계집간역시일기大溪集刊役時日記]를 예로 들어 살펴보면 그 상황을 개략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대계집]은 모두 3책인데, 이를 위해 판각된 책판의 수는 140장이다. 이 일에는 판하본의 제작과 교정을 맡은 전문가 2명과 각수 3명이 동원되었다. 기간은 처음 3년을 예상했으나 2년 반 만에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소요경비는 책판 1장당 2냥 8전이 들었는데, 판값 1전을 비롯하여 운반비 및 소금물에 삶은 비용 5푼, 판목 다듬기 및 마구리 작업 2전, 판각 비용 2냥 3전, 인부의 밥값 1전, 교정비 5푼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판의 수가 140장이었으므로 총 392냥이 든 셈이다. [대계집]이 간행된 1884년 안동 인근 예천 지역의 쌀 한 섬 값이 10냥 가량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약 39섬의 쌀을 살 수 있는 거액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판각된 책판을 인출하는 데 드는 종이값과 그것을 책으로 엮는 비용은 빠져 있으므로, 문집을 발간하는 데에는 당연히 이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었다. 조선시대에 민간에서 문집용 책판을 제작하는 일이 얼마나 큰일이었는가는 또 다른 자료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18세기 영남의 거유(巨儒) 가운데 하나였던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1705~1786)의 문집인 [백불암집]을 제작할 때의 자료인 [사문문집간역기사師門文集刊役記事](1815)에도 관련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를 보면, [백불암집]을 간행하기 위하여 모두 250장의 책판을 판각하는 데 총 806냥 8전 7푼이 든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비용은 [백불암집]이 간행되던 19세기 전반 조선의 쌀 1섬의 값이 1.5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어머어마한 금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술적인 단순비교의 위험을 염두에 두더라도, 쌀 두 가마를 1섬으로 칠 때 이 비용은 지금의 쌀값으로 환산하면 아무리 작게 잡더라도 1억 5천만 원을 상회하는 금액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책 발간 비용으로는 가히 천문학적이 금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책판의 제작은 이처럼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비용조달은 개인이 아니라 주로 후손과 문중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워낙 비용의 규모가 컸던 관계로 재원 염출이 늘 만만치는 않았다. [대계집]의 경우도 증손자 대에 가서야 출간되었는데, 자신의 아버지(이주정의 손자)가 할아버지(이주정)의 유고가 아직 궤짝 속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애통해하다가 집안 종형을 찾아가 자기 아버지(이주정의 아들)도 이 일로 고심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니 도와달라고 읍소했다는 내용이 간역 일기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과정의 어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대계집]의 발간은 결국 삼대에 걸친 숙원사업이었던 셈이다.
책판은 아직도 부활을 꿈꾼다 이상에서 보듯이, 조선시대에 민간에서 문집을 출간하기 위해 책판을 판각한다는 것은 대단한 정성과 비용이 투입되는 대사였다. 현재까지 전하는 우리나라 문집의 총량은 대략 3,500~4,000종으로 추산되는데, 이 가운데 99%가 조선시대의 문집이다. 따라서 1종당 평균 3책으로만 잡아도 조선시대에 출간된 문집의 수는 얼추 10,000여 책이 넘는다. 또 1책 당 소요된 책판의 수를 40장으로 계산하면 문집 출간용으로 제작된 것에만 국한시키더라도 최소 40여만 장의 책판이 판각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현재까지 전하는 문집의 경우만 가지고 계산한 것이 이 정도이니, 조선시대에 실제로 판각된 책판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조선’이라는 시대가 일구어낸 문화의 폭과 깊이는 지식에 대한 선조들의 이러한 열정들이 집약된 결과이다. 이 점만 보더라도 조선은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닌 것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책판은 과거에 축적된 지식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점 외에도 그 자체로도 다양한 활용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컴퓨터의 글씨체 가운데 하나인 목판체의 경우에서 보듯이, 책판의 다양한 글씨체는 디지털 시대에도 그대로 응용될 수 있는 다양한 서체 개발의 풍부한 보고이다. 뿐만 아니라 책판에 새겨져 있는 다양한 도판들은 판화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판각 예술에 중요한 창작적 모티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책판에 대한 우리의 고정된 관심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제 몸을 먹물로 더럽혀 가며 한 때 이 땅에서 출간되던 책의 대부분을 찍어내던, 그러나 이제는 그 쓸모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박제화된 골동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의 깨어 있는 관심을 기다리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인 것이다. 시골집 헛간에 그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두꺼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뒹굴고 있는 책판을 볼 때마다, 또는 도회지 교외의 으슥한 카페 벽에 뜬금없이 장식용으로 유배되어 있는 책판을 볼 때마다 우리가 곰곰이 되새겨보아야 하는 부분들이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