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는 내가 묵은 호텔에서 전철로 한정거장 거리에 있었다. 비록 나는 한국하고도 안양 촌구석에 엎드려사는 백면 서생 이지만 MIT에 대해서는 유별난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본 셈 이다. 우선 해체주의(Deconstructivism)건축학의 거장,Frank Gehry가 설계했다는 괴상한 건물 Stata center가 어떻게 생 겼나 궁금했고, 엄연히 MIT는 공과대학인데도 Koch Insti- tute란 세계굴지 암연구소를 갖고 있는것도 좁은 내소견으로 이해가 안되었고 또 세계적으로 그 유명한 꿈의 연구소 ‘미 디어 랩(Media Lab)소장에 그 흔한 학사학위 한 장도 없고 연구논문 한편 쓴적도 없는 귀때기 새파란 일본 사람을 소장 으로 기용한 파격도 왜? 하며 관심을 갖지 않을수가 없었다.
멀리서 먼저 첫눈에 들어온것은 역시 Gehry의 Stata center 였다. 나보다 열 살이나 연장인 이 유대인 건축가는 우선 네모 반듯하고 경직된 현대건축물에 반기를 들며 명성을 얻었다. 나는 이미 LA에 갈때마다 그의 작품인 다운타운에 서있는 월터 디즈니 콘서트 홀의 파격을 보아온터라 경악을 한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뻔한것은 건축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그의 주장이 신선한것만은 틀림없다.
USC를 나온 그는 68살에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을 설계 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건축학계의 노벨상이 라고 일컷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그의 철학은 역시 그리스 조각이나 베토벤, 모차르트같은 인문학적 소양에서 시작한다. 온세계 도시들을 뒤덮은 건축물을 그는 Feeling, passion, love같은 요소가 빠져있어 따분(banal)하다고 일갈 해버린다.
2008년 딸을 암으로 잃고 미생물학이나 암세포연구에도 빠 져 들었다. 특히 내 마음에 드는것은 한국의 종묘를 인간이 지 은 건축물의 극치로 상찬한다. 15년전에 삼성과 미술관을 설계 하는걸 상의하러 한국에 왔다가 부지를 못 구해 그의 작품을 이 땅에 남기지는 못했지만 우리선조들이 남긴 건축, 예술품에 광 팬이 되어 올해는 가족을 다 데리고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종묘의 정전(正殿)을 무한 우주를 담은 장엄한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가 MIT에 남긴 이 건물은 벽돌과 콘크리트를 멀리하고 쇠사 슬과 합판, 스테인리스 스틸,티타늄 같은 독특한 소재로 지어 그의 표현에 의하면 ‘술취한 로벗들이 함께모여 축제를 벌이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 건물 안에는 컴퓨터 인공지능 정보과학 분야의 연구실과 강의실이 들어 있는데 복도 곳곳에 칠판도 배 치되어있고 칸막이를 바꾸면 언제라도 실내를 변형할수있는 살 아있는 건물이다. 여러형태를 혼란스럽게 꼴라쥬한듯한 이건물 은 모든 격식을 배제, 다양한 곡선이 뜻밖의 방식으로 변용을 하게끔 설계 되었다.또 바닥구멍에서 사람 키만큼 올라오는 냉 난방 바람은 에너지를 20-30% 절약하게 설계 되어있고 빗물 을 모아 화장실에 쓰게끔 되어 있다. 그래서 LEED(Leadership in energy and environmental design)인증을 받은 건물이다.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란 명패를 달아 놓은곳 이 분명 정문 같은데 바로밑에 엄연히 Koch Institute For Integrative Cancer Research란 명찰을 달고 섰다. 그러니까 공과대학에 의과대학에나 있을법한 암연구소가 병설되어 있는 것이다. 5년전 David Koch가 1억 달러를 기증, MIT에 세워놓 은 시설인데 우리시대가 학제간의 통섭을 강조하는 세월에 들 어 서 있음을 웅변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소아암이나 심지어 주사바늘로 찌르지 않고 약물을 피부로 투여 하는기술등 여러 가지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MIT의 미디어 랩도 1985년 미디어학의 대가 니콜라스 네그로 폰테가 주도해서 세운 이후 컴퓨터 전자 바이오 기술을 디자인 건축 예술등과 융합해 최첨단 미래의 기술을 창조하는 세계적 본산이다. 전자책(e-Book)을 탄생시킨 전자잉크를 개발했고 표 정짓는 로벗, 동작에 반응하는 유저인터페이스(UI)같은 신기술 이 이곳서 만들어졌다. 그 외에도 미디어 랩이 개발한 혁신적 기술은 수도 없다. 전자 의족, 접는 자동차,입체 프린터등등...
그런데 특이하게도 지난 4월 4대소장으로 일본인 이토 조이치 (45, 伊藤穰一)를 발탁했다. 앞에 이야기한것처럼 그는 학자가 아니다. 디스크 자키, 스쿠버다이빙, 인터넷 게임등에 미쳐 사 느라 대학을 두번이나 중퇴하고 논문 한편 쓴적도 없지만 자신 의 블로그를 통해 혁신은 공유와 소통을 통해 나온다고 외친 인 터넷 자유론자이다. 그는 자신있게 28명의 교수와 140여명의 석 박사 연구원들을 이끌고 현재 26개의 테마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걸어서 전철로 두정거장 거리에 하버드가 나온다.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야드’라고 부르는 하버드 본캠퍼스의 메 모리얼교회와 와이드너 도서관 사이 뜰에는 하버드대깃발이 온 통 수를 놓고 꽃밭과 잔디들도 아름답게 다듬어 놓았다.
하버드 캠퍼스의 중심은 역시 이‘야드’다. 여기에 책 400여권과 토지 일부를 기증하고 은인이 되어 이학교 이름에 자기 이름을 단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출신 존 하버드목사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의 발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여기는 바보들 때문에 발끝 은 노랗게 반짝 반짝 빛이 나고있다. 동상에는 ‘존 하버드, 설립 자, 1638‘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거다 미국식 구라다. 하버드목 사는 설립자가 아니며 학교가 어려울때 도움을 준 사람에 불과 하며 하버드가 개교한 년도도 1636년이다. 또 동상의 모습이 하 버드목사의 얼굴이 아니다. 하버드 목사의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 개교 250주년을 기념하여 하버드목사의 동상을 세우기로 했는 데 초상화 한 장도 안남았으니 당시 조각을 맡은 대니얼 체스터 프렌치가 셔먼 호어라는 학생을 모델로 삼아 만든 동상이다. 그러니까 이 동상은 126년전 하버드를 다녔던 한 학생의 얼굴 이다. 원래 신화나 전설은 거짓말이 보태져야 제맛이 난다.그러 나 하버드대학의 모토가 Veritas(진실)이니 얼마나 웃기는 이바구 인가. 이 동상은 하버드대의 모토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창 먼 우화가 아닌가!
하버드 하면 다른 무엇보다 우리들이 부러움을 느끼게 하는것는 도서관이다. 장서가 물경 1,550만여권. 세계에서 미의회도서관 다음으로 많은 책을 갖고 있음을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우리들의 마음을 짠하게 하는 도서관은 하버드내에서도 가장 큰 와이드너 도서관에 얽힌 비화다. 장서만 500만여권, 일년에 사 들이는 책만 10만권이 넘는다.
도서관 이름 와이드너는 하버드 졸업생으로 스물일곱살에 타이 타닉호 침물과 함께 생을 마감한 고서수집가 해리 엘킨스 와이 드너를 기리기 위해 엄마가 지은 것이다. 1912년4월14일 타이 태닉호가 침몰하는 순간 어머니는 구명보트에 태웠으나 그는 영국서 어렵게 구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희귀본 ‘수상록’을 선실 에 남겨두고 온걸 알고 그 책을 가지러 갔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어머니는 책을 사랑했던 아들을 못잊어 그 당시로는 거 금인 200만달러를 도서관 지으라고 하버드에 기부했다. 하버드대학은 도서관 신축부지가 마땅치 않으니까 기존 고어홀 도서관을 헐고 그 자리에 와이드너 도서관을 짓기로 했다. 이를 본 와이드너 어머니는 마음이 착잡했다. 먼 훗날 더 많은 돈을 기부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와이드너 도서관도 헐어버리것 아닌가. 그래서 3가지 조건을 달아 돈을 기부했다. 첫째 와이드너 도서관을 완공 한뒤 벽돌한장, 돌 한 개라도 움 직이면 안된다. 둘째 아들 해리가 수집한 책을 전시 하기위한 별도의 전시실을 만들것. 그리고 하버드생은 무조건 수영을 할 줄 알아야 졸업 시킬것. 아들 해리가 수영을 할줄 알았다면 죽 지 않았다는게 엄마의 마음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버드에는 졸업 임박해서 수영 테스트에 대비한 긴줄이 수영장에 늘어 섰다고 전한다. 먼 훗날 장애아를 차별하는 부작 용이 있다는 구실을 들어 이 조항 실행을 중단했다
올해도 U S World Report지는 대학 순위를 발표했는데 어김 없이 프린스턴과 함께 하버드를 공동 1위에 놓았다. 지난 5월 학기말 시험에서 125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cheatting을 저질러 신문에 대문짝만한 기사도 났지만 역시 하버드는 미국대학중 여 러면서 앞서며 미국 대학사회를 선도해 나가는 대학중의 대학임 에는 틀림 없다.
특히 35살에 총장에 취임하여 1909년 까지 40년간 하버드를 혁신에서 혁신으로 몰아간 찰스 윌리엄 엘리엇의 업적은 세계 대학사의 찬란한 공로로 일컬어진다. ‘하버드 이기주의’가 그로 부터 비롯되었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그가 실행한 선택과목제 (Elective system)도입은 당시로서는 가위 혁명적 발상 이었다. 1869년 고전을 숭상하던 당시의 사조에 반기를 들고 획일성 대신 다양성이 필요하다며 선택과목제를 도입했다. 엘리엇의 조치에 쌍심지를 켜고 반론을 폈던 사람이 프린스턴 대학총장 제임스 맥코시였다. 1885년 두사람은 맞장토론까지 벌였다. 맥코시는 통제없는 자유에 회의적 이었으며 선택과목 제를 Dilettanti courses라고 폄하했다. 그러나 대세는 엘리엇 의 판정승, 코넬대학도 엘리엇을 따르고 예일을 위시한 주립대 들도 선택과목제를 도입 하자 결국 프린스턴대학도 따랐다. 하버드에서 선택과목제 도입은 1872년에 시작하여 장장 16년 에 걸쳐 1897년에야 완결 지었다.
엘리엇은 독실한 크리스천 이었지만 종교적 도그마에 완강히 맞섰으며 기부금 모금제도 그의 발상이고 교수봉급을 파격적 으로 인상하여 우수 교수진을 확보하여 오늘날의 하버드 명성 의 초석을 놓았다. 경영학과를 최초로 신설한것도 그의 아이 디어 였다. 더구나 그는 하버드가 기독교학교로서 지켜온 전통 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학생들의 의무적 교회출석제를 폐지했다. 이는 예일대학보다 30년이나 앞선 조치였고 프린스턴 보다가는 반세기나 먼저 실시한 혁명 이었다. 학생입학에서도 유대인에 일정 비율을 할당하여 하버드는 유대인을 처음 받아 들였으며 아울러 유대인들의 통큰 기부금을 받아내어 오늘날의 하버드의 기초를 놓았다.
이 때문에 미국대학사회에서 하버드대학의 커리큘럼 혁신은 항 상 주목을 받는 뉴스였고 끊임없는 자기혁신의 연속 이었다. 5년전 교양교육과정을 대폭 개혁했다. 미국중심의 좁은 시각 을 버리고 다양한 가치와 문화에 대해 가르치겠다고 선언했 다. 학부생들의 교양과정에서 8개과정을 선정하고 이 8개과 정에 속한 여러과목중 한과목은 무조건 이수하게끔 조치했다. 이 8개 과정은 미학해석학 이해, 문화와 신앙, 경험적 추론, 윤리적 추론, 생명과학, 물리학, 세계의 다양한 사회, 세계 속의 미국등 이다. 하버드의 이러한 변신은 미국대학가의 교 과과목 개혁의 풍향계 역할을 하고 있다.
하버드대학은 재학생들의 커리큘럼 혁신을 넘어서서 대중교육 에도 기여하기 위해 정렬을 쏟았다. 통칭 “엘리엇박사의 5피트 책장“이란 프로젝트는 대학수업을 들을 능력은 되나 개인사정 상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사회구성원들을 돕기위해 “하버 드 클래식“이란 고전 시리즈를 51권이나 출판했다. 하루 15분 만 책을 읽으면 하버드에서 교양 강좌를 들은것과 같은 수준 으로 대중의 지적 향상을 높이려는 야심 찬 계획 이었다. “하버드 클래식”은 1910년 처음 출간한 이후 20년간 35만 세 트를 파는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다. 엘리엇 총장의 뒤를 이 은 애벗 로웰총장도 그정신을 이어갔다. 현재 하버드는 대중을 위한 저녁강의와 여름강의 이외에도 150 여개에 이르는 온라인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서도 EBS전 파를 타고 들을수 있으며 책으로도 나와 나도 열심히 현대학문 의 사조를 파악하기위해 사서 읽고 있다.
Harvardeites라는 말이 있다. 자식을 하버드에 보내고 싶어하 는 미국부모들의 병적인 열망을 말하는 ‘하버드病’이란 의미다. 그런데 하버드를 미국인들 보다 더 알아주는 나라가 바로 한 국과 중국 같다. 하버드 교정에 베이징 근교에 있는 明13陵의 無字碑 같은 비가 떡하니 서있다. 나 혼자의 생각이지만 이제 는 옛동부 Establishment들은 하버드와 예일을 외면 하고 발길 을 프린스턴 대학으로 향하는 감이든다. 그들의 눈초리가 그렇다 는 나 혼자만의 추측 이지만.
옛날과 달라 한국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는 바로 하버드로 직행 할수있는 세상이니 세월은 많이 달라진것은 틀림없다.
Sep 21 2012 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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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씨야 memorandum 원문보기 글쓴이: e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