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ㄱ)
교회는 오늘 동정 순교자 체칠리아 성녀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체칠리아 성녀는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태어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60년 무렵 초기 교회 박해의 시기 순교한 성인입니다. ‘성녀의 수난기’라고 알려진 전승에 따르면 동정을 유지하고 신앙을 지킨 성녀의 삶은 초기 교회 많은 이들의 공경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천상의 백합’이라는 성녀의 이름이 뜻하는바 그대로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으로 순교함으로서 ‘천상의 백합’이 되신 성녀는 흔히 비올라나 풍금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음악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습니다.
이 같은 체칠리아 성녀를 기억하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거룩한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상전들로 난전을 이룬 모습을 보고 격하게 분노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그렇게 격노하시는 이유를 다음의 말로 설명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하느님의 집인 성전이 기도의 집이 되어야한다는 너무도 지당한 사실을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도대체 그 곳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그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또 그렇게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 사람은 누구이며 그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저질렀던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선 첫 번째 질문으로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오늘 복음의 말씀과 오늘 루카 복음과 병행구절인 다른 공관 복음의 말씀을 살펴보면 그들은 다름아닌 성전에서 제물이 되는 비둘기와 양들을 판매하여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이었으며, 환전을 통해 성전에서만 유통되는 화폐를 교환해 주는 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은 성전에서 물건을 판매함으로써 자신의 생계를 꾸려나간 이들, 다시 말해 성전에서 판매를 하며 근근히 생을 이어나가는 가난한 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전에까지 와서 장사를 하는 어렵게 사는 이들을 왜 예수님은 강도라고 몰아세우며 그들의 생계의 유일한 수단인 그 모든 것들을 뒤엎어 버리셨을까? 이 점에서만 보면 예수님의 이 같은 언행은 조금 과도하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왜 성실히 일하는 이들을 강도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의 이면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 당시 성전에서는 성전에서만 유통되는 화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바쳐지는 제물은 모두 성전에서 판매하는 것만 유효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상식적으로 제물이라는 것이 결국 동물의 피를 위해 필요한 것들인데 그 제물이 성전에서 판매되는 것과 그 외의 것들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 숨겨진 실상은 당시 성전의 제사장들이 바로 이 제물을 통해서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성전에서 판매되는 제물을 구입하기 위해 많은 이들은 돈을 챙겨와야만 했으며 그 돈은 또 성전에서만 유통되는 화폐로 환전해야만 그 제물을 살 수 있다는 불합리한 이중구조를 통해 성전에 기도하러온 이들은 이중으로 돈을 지불하며 제물을 사야만 했고 이를 통해 성전 제사장과 상인들을 자신의 이익을 챙겨왔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강도라 지칭하며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강하게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거룩한 성전의 제사장들을 강도들로 만들어버린 것일까요? 그들은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런 일들일 벌이고 말았던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실제로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아니 목자의 목소리만 반응하며,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는 결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의 목자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알아듣고 그 목소리에 바로 반응하는 양떼들의 무리.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목자가 이끄시는 양떼들이라면 실제 양떼가 그러한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목자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들은 목자가 이끄는 대로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풀과 샘물로 인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제사장들은 어느 순간, 목자인 주님의 목소리가 아닌 자기 마음속의 탐욕의 소리, 교만의 소리에 정신이 팔려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나만의 소리에 취해 하느님과 멀리 떨어지게 된 결과, 그들은 결국 기도하는 집인 하느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면에서 오늘 독서의 요한 묵시록의 말씀 역시 자신에게 들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말씀에 따라 말씀의 두루마리를 받아 삼킴으로서 예언의 직무를 부여 받는 요한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 가운데 말씀의 두루마리를 삼킨 순간 요한이 말하는 다음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라렸습니다.”(묵시 10,9-10)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도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우리를 푸른 풀밭으로 이끌어 주시고 샘터로 인도하는 그 음성을 우리가 들을 때, 우리는 하느님 그 분과 영원한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고 나의 마음 깊은 곳의 탐욕과 교만의 소리에 귀가 멀어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 역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사장들과 다를 것이 하나 없는 하느님을 팔아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이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오늘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착한 양 떼가 되시기를, 그래서 마침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낙원에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