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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궁 학습반에서 사부님 설법을 듣던 날들
2022년 12월 27일
장춘대법제자 춘련(春蓮)
【정견망】
나는 올해 79세 조선족 할머니로 중국어를 잘하지 못한다. 사부님께서 일찍이 집착이 아주 심한 나 같은 사람도 빼놓지 않으셨기에 나는 1993년부터 인연이 있어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부님을 따라 온갖 고생을 겪었지만 매 차례 법을 듣는 것은 정말 너무나 큰 행운이었다. 그 경험은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법을 얻은 그해 내 나이 예순도 되기 전에 남편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나는 나이도 많고 또 여러 가지 병도 있어서 아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데 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신체를 단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마침 기공열풍이 불었다. 가장 똑똑히 기억나는 건 1993년 7월 22일, 아침 5시에 어린이 공원에 가서 보니 기공을 연습(練習)하는 이들이 깡충깡충 뛰고 울며불며 소란을 피워대는데 이런 건 차마 연습할 수 없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한 무리 사람들이 눈을 감은 채 서서는 두 손을 머리 앞에 들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나무가 있었는데, 나뭇가지에는 깃발이 달려 있었고, 깃발 가운데 둥근 그림이 있었다. 나는 이건 그래도 괜찮겠구나 하고 여겼다. 그냥 눈을 감고 두 팔을 들어올리기만 하면 된다. 이때 바로 눈앞에 깃발 위에 있던 그림이 나타나 회전했는데 나도 모르게 따라서 돌았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내 오른쪽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당신이 왜 따라서 돕니까? (따라서 돌면 )안됩니다!”
내가 말했다.
“내가 도는 게 아니라, 그 바퀴가 돌면 나도 따라서 돌아요.”
그제야 나는 이 기공이 파룬궁(法輪功)임을 알았는데 내가 보았던 그 그림이 바로 파룬(法輪)이었다. 즉 파룬이 돌아간 것이다. 나는 《파룬궁(法輪功)》 책을 한 권 사서 배우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연공해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파룬궁이 좋은 것을 알았다. 아이고! 사부님께서 장춘에서 여신 학습반만 해도 벌써 6번이나 하셨지만 나는 전혀 몰랐구나. 연분(緣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송료위(松遼委) 강당에서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이 보도원들에게 설법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나도 갔다. 가보니 이미 문은 닫혀 있었고 사부님께서 이미 설법을 끝내셨다. 문 앞에는 몇 사람이 의자를 놓고 올라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도 앞으로 비집고 나와 탁자에 올라가 다른 사람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문 앞에 있던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나만 남아 있었는데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 문이 덜컹하고 열리는 소리가 나자 문을 지키고 있던 수련생이 “들어오세요”라고 말했다.
내가 들어가니 사부님께서 막 말씀을 마치셨다. 모두들 사부님을 둘러싸고 사부님께서 서명해주시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때 사부님을 처음 뵈었는데, 크고 건장한 체격에 늘 미소를 짓는 표정이셨다. 당시 다른 사람들이 사부님께 건넨 것은 모두 좋은 노트였다. 하지만 나는 준비한 노트가 없었고 단지 아주 작은 수첩만 하나 있었다. 너무 작아서 손바닥보다 더 작았다. 늘 윗주머니에 넣어두고, 한 장씩 떼어서 메모하는데 사용하던 것이다. 내가 이 수첩을 사부님께 내밀자 사부님께서는 꺼리지 않으셨고 받아서는 ‘李洪志’라고 세 글자를 사인해주셨다.
며칠 후 나는 사부님께서 북경에서 설법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곧 북경에 갔다. 법을 구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다 있었다. 북경 총보도소 진행요원이 우리에게 며칠 있으면 안휘(安徽)에서 학습반을 연다고 알려주었다.
우리 팀은 11명이었는데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복건성 출신으로 81세였고 가장 어린 친구는 11세였다. 나이 순서대로 따지면 내가 셋째라 다들 나를 셋째 언니라 불렀다. 그래서 우리 일행 11명은 기차를 타고 안휘성 합비(合肥 허페이)로 갔다.
학습반이 열리려면 아직 7일이나 남았지만 우리는 그냥 그곳에서 기다렸다. 당시에는 상당히 고생스러웠는데 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형편이 좋은 편이었다. 우리는 모두 전기포트를 가지고 다녔고 건면을 사서 컵에 건면을 넣고 익힌 후 소금을 친 후 한 끼 식사로 삼았다. 이 모든 것은 다 법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고생을 좀 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사부님께서 기차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곧 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마침 이날 비가 많이 왔는데 우리는 우비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 이에 비닐을 몸에 감싸고 끈을 찾아 허리를 묶은 다음 다른 비닐 주머니를 구해 머리에 뒤집어 썼다. 그러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플랫폼에 서서 기다렸는데, 객차가 너무 많아서 사부님께서 어느 문으로 내리실지 몰랐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상의한 후 각기 문을 하나씩 맡아 서 있다가 사부님을 뵈면 소리를 질러 서로 알려주기로 했다.
기차가 도착했고 정차한 후 문이 열렸는데 사부님께서는 마침 내가 기다리고 있던 문으로 내리셨다. 나는 사부님을 전에 한 번밖에 뵙지 못해 혹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닌가 했다. 사부님이신가? 큰 키에 늘 미소를 지으시는 것을 보니 사부님이 맞으셨다.
나는 앞으로 나서며 사부님께 환영 인사를 했다.
“리 선생님!”
그러자 사부님께서 내 손을 잡으셨다.
내가 “저는 장춘 수련생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사부님께서 “압니다.”라고 하셨다.
‘어? 사부님께서 나를 아신다고?’
나는 사부님께 다시 “저는 장춘에서 온 할머니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사부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압니다.”
나는 내 중국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서 혹시라도 사부님께서 정확히 알아듣지 못하셨을까봐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장춘에서 선생님 설법을 들으러 왔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또 “압니다”라고 하셨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부르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제야 생각이 나서 머리에 있는 비닐봉지를 벗고는 힘차게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께서 오셨습니다! 이곳에 계세요!”
모두들 달려오자 사부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악수를 하셨다. 나이가 가장 많은 복건 수강생만은 사부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이때 북경 총보도소의 진행요원들도 왔고 우리는 사부님을 모시고 강당 뜰로 갔다. 당시 사부님께서 안휘성 합비에서 학습반을 여신 시기는 1993년 11월 21일부터 12월 1일까지였다.
설법 중에 사존께서는 수련생들의 신체를 청리해주셨다. 한 남자 수련생은 강단에 오를 때 몸이 90도로 굽어 있었지만 내려올 때는 곧바로 펴졌다. 사부님께서 강단에서 등이 굽은 수련생의 등을 똑바로 펴주시는 것을 현장에 있던 수련생들이 모두 목격했다. 회의장에서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고 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 짧은 순간에 대체 어떻게 다스리신 걸까? 당시 사부님은 무대 위에 계셨기 때문에 우리도 똑똑히 볼 수 없었는데 정말 불가사의했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수련생들에게 두 손을 내밀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신 후 사부님께서 파룬(法輪)을 내려 보내 모두들 느껴보게 하셨다. 당시 어떤 사람은 손안에 파룬이 있는 것을 보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이 뜨거운 것을 느꼈으며, 어떤 사람은 손바닥이 차가운 것을 느꼈는데,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은 냉기가 나오는 것을 느꼈다.
또 한 수련생이 전수반에 참여하기 전부터 몸에 부체(附體)가 있어서 껑충거리며 무대에 올라가서는 자신이 부체 되어 있으니 사부님께서 제거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부님께서 한손으로 움켜잡자마자 그의 부체를 제거해버리셨다.
사부님께서는 또 수련생들에게 자신의 몸에서 아픈 곳을 생각하게 하신 후 발을 구르게 하셨는데 그러자 병이 사라졌다. 사부님께서는 각종 방법으로 우리 신체를 다스려 주셨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내가 직접 목격한 것들이다. 우리 사부님은 정말 무량하게 자비(慈悲)하시며 불가능이란 없으셨다.
하지만 나는 전에 기공을 접촉해 본 적이 없었고 또 반응이 느려서 겨우 사부님께서 강연을 잘하시고 대법이 좋다는 것만 알았다.
1994년 4월, 나는 학습반을 따라 요녕성 금주(錦州)에 갔다. 그곳은 바다와 접한 도시라 시장 곳곳에서 새우 등을 팔았다. 나는 처음 보고 무서워서 만지지도 못했다. 판매 상인이 맛있다고 하면서 나더러 어떻게 먹으라고 방법을 알려주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담이 커져서 5근을 샀다. 그러자 상인이 새우를 삶아줬다. 숙소에 가져와서 모두들 같이 나눠 먹으니 확실히 맛이 있었다.
나는 당시 살생 문제에 대해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자신은 이 한평생에 좋은 사람이라 남을 해치거나 생명을 죽여 업을 짓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나더러 꿈에서 나를 점화해주셨다. 꿈속에 새우가 한 줄 한 줄 서 있었는데 대열이 아주 빽빽했고 나더러 지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중간에 또 수탉 세 마리가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똑똑히 알았다. 줄지어 대열을 이룬 것은 방금 내가 사서 삶아 먹은 새우 다섯 근이었고 큰 수탉 3마리는 아들 결혼식 때 죽인 것이다. 당시 남편이 세상에 없었고 나는 비록 수련을 하고 있었지만, 혼례를 치르기 위해 수탉을 죽인 일이 있었다. 그것들이 모두 내가 가는 길을 막고는, 나더러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살생으로 지은 업력이 나의 수련의 길을 가로막는 것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살생 문제가 이렇게 엄중한 것임을 알았다. 업(業)이 구르고 굴러서 왔으니 갚아야 한다. 그러니 신체 이쪽이 아프고 저쪽이 아팠던 것이다
이어서 4월 29일 장춘 제7기 파룬궁 전수반(傳授班)이 개강했다. 나는 고향에 돌아와 ‘외지 수련생 접대조’에 가입해 장춘역에서 피켓을 들고 교대로 안내를 했다. 당시 봄바람이 매섭게 불어 온몸이 재였는데 얼굴이 온통 검은 재였다. 그저 깜빡이는 눈만 보였지만, 모두들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한 무리 한 무리 수련생들을 맞이했다.
이때 사부님께서 오시더니 친근하게 말씀하셨다.
“고생이 많습니다.”
“여러분 식사는 하셨나요?”
“뭐 어려운 점은 없나요?”
“날씨가 좋지 않으니 조심하세요!”
사부님의 관심어린 인사로 우리는 모두 마음이 따뜻해졌다. 날씨도 춥고 바람도 찼지만 모두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7기반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수련생이 너무 많았다. 멀리는 신강(新疆)에서 흑룡강성 최북단부터 해안 지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도 있었고 일부는 짐을 지고 오기도 했다. 대법을 찾기 위해 만 리를 마다하지 않고 온 것이다! 우리 소조가 역에서 수련생들을 안내하면, 그 다음 소조가 전용차량으로 이들을 태워 숙소를 배치했다. 길림대학 명방궁(鳴放宮) 강당에서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주간반과 야간반으로 나눴는데 총 3000여 명이었다. 중간에 신기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학습반에 참가한 많은 동수들이 당시 회억을 써냈다.
6월 하순, 사부님께서 제남(濟南) 제2기 반을 여셨는데 그 중 몇 가지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는 한여름이었는데 수천 명의 학생들이 황정(皇亭)체육관 위아래로 꽉 찼다. 너무 더워서 다들 사부님 설법을 들으면서 계속 부채질을 했다.
이때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분 부채를 내려놓아도 됩니다. 시원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에 현장에 있던 이들이 모두 부채를 내려놓았다.
사부님께서 물어보셨다.
“여러분 느낄 수 있습니까?”
수련생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느낄 수 있습니다!”
흥분해서 박수를 쳤는데 박수 소리로 귀가 울릴 정도였다!
학습반이 끝나던 날, 사부님께서 마지막에 반복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당부하셨다.
“내일 또 대련(大連)에 수업을 들으러 가는 수련생들은 절대 비행기를 타지 말아야 합니다. 꼭 기억하세요! 기차나 배를 타고 가는 것은 모두 됩니다. 오늘 저녁 기차표와 버스표를 이미 구매한 사람들은 기사(진행요원)에게 내려달라고 하세요.”
그 후 사부님은 줄곧 문 앞에 서서 기사를 바꿔가며 그날 밤 대련으로 갈 수련생들을 역까지 태워다주게 했다. 이날 비가 아주 많이 와서 무릎까지 찼다. 우리 7명 수련생도 즉시 30일 비행기 표를 취소하고 차량이나 선박, 보트로 갈아타고 대련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예약했던 비행기가 폭우를 만났는데, 사부님께서 사악이 배치한 이번 마난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게 하셨고 신변안전을 보호해주셨던 것이다. 당시 일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눈물도 끊임없이 흘러내리곤 한다.
7월 1일, 대련 제2기 반이 개강했다. 그때, 대련 총보도소장이 내게 사부님께서 그들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을 주었다. 사람들 뒤로 하늘에 두 마리 용이 붙어 있었는데 머리며 코와 눈의 윤곽이 뚜렷했다. 그리고 두 자루 보검(寶劍)이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불가능이란 없으셨지만 수련인들에게 늘 “공능은 본디 작은 재간이요 대법만이 근본이로다”[1]라고 당부하셨다. 이 글은 사부님께서 대련 해변 모래사장에 쓰신 것인데 나중에 《홍음》)에 발표되었다.
7월 7일 대련 학습반이 끝나기 직전 사부님께서 한 수의 시를 쓰셨다.
“진정으로 대법을 수련하나니
오로지 이것만이 큰 일이로세
대법에 동화하나니
언젠가는 기필코 성취하리라”[2]
이 작품도 나중에 사부님의 《홍음》에 발표되었다.
한 달이 지난, 8월 5일부터 12일까지 나는 또 사부님의 하얼빈 설법에 참가했다. 당시 학습반은 각종 방면에서 교란이 아주 컸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실 때 기침을 하셨다.
당시 나는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는 것이 너무나 고생스럽구나! 날마다 이렇게 강연하시니 목이 버티지 못하신 것이로구나.’
나는 마음이 너무 쓰리고 아파왔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건 옳지 않았다. 우리 사부님은 신(神)이신데 신이 무슨 병이 있는가?! 나는 당시 사람마음을 바로잡았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업력을 감당하신 것이다. 나는 오성이 너무 차해서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마음속으로 반드시 법을 잘 배워 자신의 흑색 물질을 백색 물질로 전화시켜 사부님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감소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대법의 전파가 너무 빨라서 연변(延邊)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법을 얻었다. 수련생들이 조직해서 사부님을 청해 학습반을 열려고 했다. 나도 이 준비에 힘을 보탰고 전에 다녔던 직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 이렇게 좋은 대법과 이렇게 좋은 기회는 정말 얻기 어렵다고 했다.
1994년 8월 20일부터 27일까지 사부님께서 연길(延吉)시에서 파룬궁 전수반을 여셨다. 연변은 소수민족 거주지역으로 조선족이 전 인구의 절반이 넘는다. 이들 조선족 수련생들은 모두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날을 민족의 명절로 여기고, 꽃처럼 화려한 다양한 전통 한복을 입었는데 정말 보기 좋았다. 모두들 가장 성대한 예절로 사존의 설법을 맞이했다.
사부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셨고, 수련생들도 신이 나서 모두들 한복을 입고 사부님과 단체사진을 찍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중국 대륙에서 소수민족 지역에 가서 설법하신 유일한 한 차례였다. 나중에 또 유일하게 한글로 된 《전법륜》이 나왔으니 조선족 수련생들은 정말로 너무나 행복했다!
나 역시 조선족이고 연길은 내가 오랫동안 근무했던 곳이다. 다년간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와 사부님 설법을 들으니,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마치 사부님이 친 가족처럼 느껴졌다! 사부님께서 마치 우리 집에 오신 것 같았다.
사부님께서 설법을 끝내기 전에 아주 짧은 행사가 있었다. 사부님께서 연길 학습반에서 받으신 입장료 7천 위안 전액을 연길 적십자사에 기부하신 것이다. 연길 시를 떠날 때 몇몇 보도소장들이 택시를 잡아 사부님을 기차역까지 모셔다드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좀 원망했다. 우리 스스로 차량을 배치해 사부님을 모셔다 드릴 수는 없는가? 그런데 사부님께 택시를 불러드린다고?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차비는 내가 내겠습니다. 수련생들의 돈은 한 푼도 필요 없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직접 택시비를 내셨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연변 수련생들은 모두들 감동해서 이렇게 말했다.
“사존(師尊)께서 어떻게 하셨으면, 도제(徒弟)는 곧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하나의 일이 사람마음을 감동시켰다! 이것은 연변 수련생들에게 영원한 추억이 되었다.
나는 이렇게 1993년 연말 안휘 합비부터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다. 어느 곳이든 늘 사부님을 따라다녔는데 추구한 것은 대법이었다. 매번 법을 들을 때마다 늘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고, 매번 사부님과 함께 있을 때면 늘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고 아름다웠다.
1995년 《전법륜》이 정식으로 발표된 후, 사부님께서는 곧 해외로 설법하러 가셨다.
1995년 겨울 사부님께서 귀국하셨다. 나는 외지 동수 두 명과 함께 사부님 댁을 찾아갔다. 그것은 건설광장 인근의 낡은 건물이었다. 사부님 댁은 크지 않았고, 방도 작았는데 극히 간단했고 또 아주 깨끗했다. 벽에는 사부님께서 직접 손으로 그리신 불상(佛像)이 걸려 있었다. 내 기억에 도(道)가 있었고, 여불(女佛)이 있었고, 손오공이 있었는데, 아주 섬세해서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사부님께서 우리 세 사람에게 황금색 귤을 하나씩 주셨다. 두 동수는 어느새 귤을 다 먹었다.나는 이 귤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집에 가져와 사진을 찍어 불감(佛龕)에 모시고 영원한 기념으로 남겼다. 이 부드러운 황금빛 귤 속에는 사부님의 자비와 제자에 대한 격려가 담겨 있다.
내 기억에 우리는 그날 아주 기쁘게 사부님 댁을 나왔는데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막 눈이 내렸고 땅이 아주 깨끗했다. 우리 셋은 서로 밀고, 당기며 얼마나 즐거운지 몰랐다. 바로 사부님 댁 아래 눈밭에서 우리는 이리저리 뒹굴고, 웃으면서 서로 밀었는데 너무나도 즐거웠다. 그때, 우리는 모두 50~60대였는데 그 기쁨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고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부님께서 창문을 통해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때 이후 몇 년간 나는 사부님을 뵙지 못했고 사부님이 너무 뵙고 싶었다!
1998년 7월 26일, 사부님께서 장춘에 돌아오셨고 샹그릴라 호텔에서 보도원들에게 설법하셨다. 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당시 총보도소장을 찾아가 나도 법회에 참석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총보도소장의 동의를 받은 후 나는 다른 보도원들을 따라 로비로 들어가 주변 자리에 앉았다. 사부님께서 오시자 모두들 힘차게 박수를 쳤다! 뜻밖에도 사부님께서 내가 앉은 좌석 복도로 걸어오셨다.
나는 두 손을 허스 하며 “사존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드렸다. 사부님께서는 활짝 웃으시며 내 손을 잡고는 왼손으로 어깨를 두드려주시며 기쁘게 말씀하셨다.
“왔군요.”
나는 너무 기쁘고, 몹시 격동했는데 아주 행복했다! 당시 나는 머릿속이 텅 비었고 이건 꿈이 아닌가? 싶었다. 만약 꿈이라면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사부님께서는 5시간을 강연하셨는데 이 강의는 또한 박해 전 대륙에서 수련생들에게 하신 마지막 설법이었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다음 날,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는 10여 명의 수련생들이 있었는데, 나는 사부님 오른쪽에 앉았다.
사부님께서 미소를 지으시며 “고기는 안 드세요?”라고 하시면서 내게 고기 한 점을 집어 주셨다. 내가 먹으니 사부님께서 웃으셨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더러 최대한 속인 사회에 부합해 수련하라고 하셨으니 고기를 먹지 않는 마음도 다 버려야 하는 게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우주대법을 우리에게 전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신의 작풍(作風)도 남겨주셨다. 사부님과 함께 한 시간이 많아지면서 나는 사부님 생활의 일부 세세한 내용들을 알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식사하실 때면 마지막에 모든 접시를 다 비우셨고 음식을 남기지 않으셨다. 나는 정말 큰 감동을 받았고 나도 사부님을 본받아 밥을 먹을 때면 음식을 남기지 않는다. 나는 또 사부님의 작풍을 아이들에게 전해 절대 음식을 낭비하지 못하게 했고 만약 다 먹을 수 없으면 포장해서 집에 가져가서 먹도록 했다.
이 식사 자리에서 나는 사부님께서 싱가포르에 가서 설법하신다는 말씀을 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조선족 할머니고 또 중국어도 잘하지 못하니, 남들은 사부님 설법을 들으면 잘 이해할 수 있지만, 나는 매번 조금씩만 이해할 뿐이다. 비록 이렇게 많은 학습반에 참가했지만, 여전히 오성이 차(差)하다.’
그래서 나는 싱가포르에 가서 1998년 8월 22일과 23일에 이틀 동안 설법을 들었다.
그날 이후 사부님을 못 뵌 지 어느 덧 이미 16, 7년이 지나갔다. 나는 지금 80이 가까워 많은 일들은 잊어버렸지만, 학습반에 참가했던 그 단락의 경험은 아주 조심스럽게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다.
“내 생각에, 내가 공을 전하고 설법하는 것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장래에 당신은 알게 될 텐데, 당신은 이 시간이 매우 보람찼다고 여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연분(緣份)을 말하는데, 여러분이 여기에 앉아 있는 것도 모두 연분이다.”[3]
지난 몇 년간 박해받고 힘들 때면 나는 사부님과 함께했던 그 날들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빨리 진선인(真善忍)에 동화해야 한다고 격려하는데 아마도 이렇게 하면 사존께 수고를 조금 덜 끼치고 우리 천우(天宇)의 생명들이 보다 많이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또 늘 사부님 법상(法像) 앞에서 사부님께 말씀드린다.
“사부님, 저는 그 어떤 환경에서도 늘 ‘안으로 찾아’ 사부님께서 《싱가포르법회설법》에서 말씀하신 것을 명심하겠습니다. ‘만약 누가 할 수 있다면 나는 이 길에서, 수련하는 이 길에서,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서, 당신을 가로막을 어떠한 것도 없다고 말한다. 정말 이러하다.’[4]”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홍음》〈정법문을 구하다〉
[2] 리훙쯔 사부님 시사:《홍음》〈법을 얻다〉
[3] 리훙쯔 사부님 저서: 《전법륜》
[4] 리훙쯔 사부님 저서: 《싱가포르법회설법》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5/10/31/3181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