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요한일서 말씀을 주일예배 때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한일서는 요한복음과 함께 예수님의 제자 사도요한이 쓴 책입니다. 사도요한은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별명은 예수님이 지어주신 별명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모두 별명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별명을 가진 이들은 세 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막3:16-17...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별명이 왜 우레의 아들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잠시 쉬어 가겠다 요한에게 말했더니 심부름한 요한이 사마리아지역에 가서 쉬실 방을 알아보았지만 허락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저들이 참 괘심하니 하늘에서 불이라도 내려서 저들을 쓸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천둥의 소리를 지르니까 예수님은 핏대 올린 요한에게 지어준 별명이 “우레의 아들”입니다. 그만큼 요한은 젊은 혈기가 있어서 좀 과격하고 격렬한 성품을 가진 목소리가 큰 사람이었습니다. (눅 9:51~56 )
그런 요한이 완전히180도 바꿔졌습니다. 변화된 정점이 언제일까요? 십자가에 예수님 못 박히실 때 다른 제자들은 다 흩어져버렸지만 가장 마지막 까지 십자가 밑에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을 들었는데 그유언은 어머니 보소서 아들입니다. 그리고 제자요한을 바라보며 보라! 네 어머니다 이후부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죽을때 까지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데 오직 십자가 사랑에 녹아졌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꿔 졌습니다.
이 같은 사랑의 사도 요한이 오늘 읽은 본문 시작을 보면 영원한 생명과 사귐을 통한 기쁨을 서두에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영원한 생명입니다.
1:1-2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사도요한 생명을 아주 강조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있는 생명을 요한은 말씀과 생명을 연결하여 "생명의 말씀" 이라고 했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이 영원한 생명으로 누구에게든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모두가 받을 수 있는 귀한 선물입니다.
요한일서가 쓰여질 당시 거짓교리 영리주의 이단이 교회에 조용히 침투하여 영적인 것만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고 성도들을 미혹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육체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정했습니다.(가현설) 그래서 생활속에서 영적인 것만 추구하고 육적인 것은 부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육신을 포기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이런 신앙문제를 사도요한은 단호하게 자르며 오직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아버지와 함께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1-2절 말씀을 통해 “우리”라는 단어를 4번이나 강조합니다. 사도요한이 기록할 당시 “우리” 에게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나타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명이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미물이라도 숨쉬고 움직이고 열매 맺으면 살아있는생명체입니다. 지난주 텃밭에 하나 남은 무화과나무가 점점 죽어가는 것을 보고 목사수련회 참석차 며칠간 교회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임중에 더위이야기를 하는데 한목사님이 그런거예요 여수는 곳곳마다 무화과가 다 죽었다 그런 말을 하도라구요 교회돌아와 무화과를 봤더니 파릇파릇한 잎은 이젠 힘없는 마른잎으로 바람에 휘날려 떨어져 그동안 우리에게 몇 개의 열매만 제공하고 점점 무화과 생명이 죽어 갑니다.
흔한 식물의 생명체도 그렇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이 얼마나 귀합니까?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 없이 무감각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왜요 지금 건강하니까 별로 신경을 안쓰지요 그러나 건강에 대해 뭔가 자극을 받으면 그렇지 않죠
얼마전 노회안에 저와 나이가 비슷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얼굴만 뵙지 서로 대화한 적이 없는 목사님인데 사회봉사부에서 이미지 한 장 사진이 올라와 있습니다. 봤더니 코에 호수를 꼽고 의자에 의지하며 앉아 있는데 사모님이 겉에서 간호하시는 사진이 올라온거예요 그 사진을 보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더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생명을 단순한 숨쉬고 호흡하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안에 있는 생명에 초점을 두고 피조물인 우리에게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곧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그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가 그 영원한 생명을 보았고 들었고 주목했고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세전부터 시작된 영원한 생명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실체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 예수님을 내안에 모시고 살고 있음을 믿습니다.
다음 사귐입니다.
3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도요한은 영원한 생명과 사귀며 이젠 누리면서 성도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지 죄 용서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살아계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타락이전 인간이 누렸던 가장 큰 특권은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에 거니셨고 마치 친구와 이야기 하듯이 인간은 하나님과 대화하고 사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던 얼굴을 돌이켰습니다. 첫인간 아담은 죄를 짖고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할수 없어 두려워 나무뒤에 숨었던 것은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또한 우리에게서 돌이키게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체 장기중 연약해져서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의 장기를 이식받아 회복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장기가 다 망가졌을 때는 이식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생명을 이식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인간의 힘으로 생명 이식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생명이식 수술 방법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는 수술대 위에 믿음으로 오르면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망가진 옛 사람은 십자가위에서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이식 수술입니다.
3절에서 말씀에서 사귐은 당시 초대교회 사도나 성도들 만이 경험하는 사귐이 아닙니디.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체험입니다.
그러므로 사귐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라는 질문에 예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두번째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과 얼마나 친밀히 사귐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지속적인 사귐을 가지고 있다면 그 증거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소원이 닮고..... 비전이 닮고..... 아낌 없는 사랑이 닮아 갑니다. 그러므로 사귐의 증거는 예수님의 사랑이 사귐을 통해 더욱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새 찬송가 221장 주 믿는 형제들 영문 원곡은 “Blest Be the Tie That Binds”(1772년, John Fawcett 목사 작사, Hans G. Nägeli 곡) 존파우셋 목사님이 쓴 가사가 있습니다. ♪♮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
이 곡은 존 파우셋목사가 작사한 곡으로 그는 영국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회심한 후 침례교 목사가 되어 요크셔 지역 시골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고 성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과 깊은 사귐이 은혜로웠습니다.
이 교회소문이 런던 큰 교회에 알려져 그를 청빙하기로 결정되어 더 나은 생활이 보장됐습니다. 그래서 이사할 준비를 다 하고 짐을 마차에 실었을 때, 시골교회 교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붙잡았다. 파우셋 목사와 아내는 성도들과의 깊은 사랑의 교제를 떠올리며 차마 떠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청빙을 거절하고, 교인들과 함께 남기로 결정할 때 영감이 떠 올라 시로 표현된 것이 “주 믿는 형제들” 찬송가 221장입니다.
그렇습니다.......개인이나 믿음의 공동체 안에 영원한 생명 예수님과의 사귐이 더욱 깊어져서 하나님나라가 완성되는 그날까지 서로를 격려하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영적 삶이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기쁨입니다.
4절......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사귐이 이루어지면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생명의 말씀을 주님과 사귐을 통하여 공급받기 때문에 매일 매일 기쁨 충만 한마디로 영적에너지의 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요15: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여 함이라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 기쁨이 충만한 것은 체험한 자에게만 얻을 수 있는 자신만이 갖는 영적 자산이라는 것입니다.
요4장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다섯남자와 결혼한 상처가 큰 여인으로 외롭습니다. 사람들을 피해 야곱의 우물터에 낮12시에 찾아온 이유도 그렇습니다. 괴롭고 힘들어도 육신의 목마름은 늘 채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내일 또 와야 합니다. 괴로움은 더욱 과중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야곱우물터에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수가성 여인은 육신의 목마름이 아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소개 받고 그 즉시 육신의 물동이를 버렸습니다. 이젠 더 이상 비참하지 않습니다. 고개숙이지 않습니다.
오직 내면에 영원한 생명 목마르지 않는 예수님과의 사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내면에 솟아난 기쁨으로 사는 마을도 들어가 외칩니다. 이젠 와보라! 그리스도를 보라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요4:29)
사귐은 곧 만남을 통한 접촉이기에 이사야56:6....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할 때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찾고 또 찾고 찾으면 사귐을 통해 이 세상에서는 누릴수 없는 기쁨충만으로 채워 질 것입니다.
지금 예배자로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머물러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나와 너 우리 모두가 감격적인 사귐을 이루십시요...그리고 기쁨이 충만 하십시요 그리고 이런 기쁨으로 다른 사람과 사귀며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만족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