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당의 파벌문제는 오늘날 한국의 정치문화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친 문제로서, 그 원형을 제공한 민주당의 파벌대립은 민주당 연구에 있어 주요 중심주제가 되어왔다.
이러한 파벌대립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시각이 존재한다.
첫째는 신파와 구파가 경력과 기질, 성격면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정책이나 이념적 대립이 없었던 동일한 보수우 세력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대립은 당내 헤게모니 쟁탈전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한승주, 1983, "제2공화국과 국의 민주주의}, 종로서적, 이윤기, [한국야당의 파벌에 관한 연구], 한양대정치학 박사, 최한수, 1989, [민주당의 성립과 변천에 관한 연구], 건국대 정치학 박사, 이충근, 1993, [민주당 신.구당파에 관한 연구], 연세대 행정대학원 석사 백영철, 1996, [제2공화국의 의회정치: 갈등처리과정을 중심으로], {제2공화국과 한국님주주의}, 나남) 이 시각은 두 파벌간의 상이한 인맥과 연줄관계에 따른 정쟁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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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런 시각은 두 가지 문제점을 가진다. 하나는 양 파벌의 대립을 정책적인 수준에서 고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1 2공화국 시기를 분석의 대상으로 하면서도 두 시기의 파벌대립이 서로 다른 양상이었던 것에 주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제 2공화국 시기가 이전시기에 비해 양적인 측면에서 대립이 심화된 것으로 만 고찰할 뿐 양 파벌이 여당과 야당으로 분리되어 일정부분 정책적 대립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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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첫번째 시각은 변화된 정치상황에 따른 대립관계의 변화를 간과한 것이라고 하겠다. 또 다른 하나의 문제점은 대립의 원인을 대립의 원인을 개인적 퍼스낼러티와 양 파벌의 집단적 성격의 차이로만 이해함으로써 정치역학적인 측면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양 파벌의 갈등은 단순한 감정적 대립을 넘어선 정치적 힘의 관계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지형에 대한 고려와 민주당 내외의 정치세력의 역관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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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위의 첫째 견해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 그 대립의 이면에 보다 지주적인 성격이 강한 구파와, 친일관료와 카톨릭계를 중심으로 하여 경제개발정책을 본격화하고자 하는 신파의 대립이 깔려있다고 보는 시각이다(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1991, [민주당정권의 기반과 성격], {한국현대사2}, 풀빛 134쪽) 이 견해는 많은 연구자들이 선험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사실은 근거가 부족한 가설적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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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당의 구성원 중 지주출신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가계급 역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민당이 배타적으로 지주의 이익만을 대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한민당은 토지개혁이나 중요산업국유화에 반대하면서 지주와 자본가의 이해를 대변하였다. 그런데 더 중요한 부분은 1950년 농지개혁법령이 시행되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지주들은 몰락하여 하나의 독자적인 계급으로서 기반을 상실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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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민주당이 활동하던 1950년대 중 후반, 60년대 초의 시점에서 한민당에 뿌리를 둔 구파세력들이 지주계급의 정치적 대변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지주적 성향이 하나의 경험으로서 축적되어 정치행태에 반영되어 나타났을 수는 있지만, 이것은 지주계급을 정치적으로 대변한다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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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견해에 대해 민주당 신 구파의 대립의 원인이 비이념적인 헤게모니 쟁탈전이었다는 기본시각에는 동의하지만, 시기에 따라서는 정책적 대립도 가능했었다고 생각된다. 이같은 파벌대립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양 파벌의 정치행태상의 차이에 관한 분석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양 파벌의 정치행태에 대해 구파는 보수적 타협적이고, 신파는 진취적 투쟁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제 1공화국과 2공화국 시기가 서로 달랐다. 즉 제 1공시기 구파가 보수적이고 신파가 진취적이었다면, 2공시기에는 집권당(민주당)인 신파세력들이 더 수구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야당(신민당)이었던 구파는 보다 진일보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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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구파의 태도는 구파 내부 소장세력의 강력한 개혁 요구 때문이었다. 신파도 내부의 소장세력들이 구파 소장파와 비슷하게 개혁과 진취적인 정책들을 내세웠지만 집권세력인 신파 노장세력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구파의 경우는 새로운 야당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정책들을 받아들여야만 여당인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나타낼 수 있었기 때문에 소장세력의 견해 일부가 수용되어 외형적으로는 구파가 (상대적이지만)진보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유에는 구파가 야당이었다는 사정도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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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 2공화국 시기에 양 파벌의 정치행태가 이전시기와 비교해 바뀌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문제는 2공시기의 대립의 축이 양 당의 노장세력과 소장세력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이다. 외형적으로는 여전히 구파와 신파가 야당과 여당으로 나뉘어 대립했지만, 대립의 내용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나갔던 것은 소장세력과 노장세력이었던 것이다. 각 당의 노장세력과 소장세력은 사소한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대체로 당시 주요 현안이었던 혁명의 과제처리나 통일문제, 그리고 반공법 제정 등에 대한 견해가 일치하였다. 다만 신파 소장세력의 견해는 집권 노장세력에 밀려 묻혀버렸던 것이고, 구파 소장파의 주장은 야당이라는 존재조건 속에서 그 주장의 일부나마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여당인 신파는 수구적이고, 야당인 구파는 진취적으로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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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하에서 제1 2공화국 시기 민주당 신 구파의 정치행태상의 차이에 대해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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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제1공화국 시기 신 구파의 정치행태상의 차이
- 제1공화국 시기 구파가 보수적 타협적이라고 주장되는 가장 큰 근거는 자유당과의 협상때문이었다. 1958년 1월의 협상선거법 통과 사건이나, 1958년 12월의 국가보안법 파동, 그리고 1959년 1월의 내각제개헌협상 등 일련의 협상은 구파가 신파를 제치고 당내 합의없이 자유당 온건파와 내밀히 추진한 것으로서, 신파를 고립시켜 더욱 투쟁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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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구파가 자유당과 타협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 한 연구자는 1) 해방후 한민당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적극 추대했었고 또 조병옥과 이승만이 개인적 친분이 있다는 점, 2) 장면은 미국이 이승만을 대신해서 선택할 수 있는 인물이며, 2대국회 말기에는 국회내 다수가 그를 대통령으로 옹립하려 했기 때문에 이승만과 장면은 극히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다는 점, 3) 신구파는 집단적 성격이 달라서 구파는 경륜, 타협, 협상을 중시하는 반면 신파는 관료적, 진취적, 합리적이라는 점 등의 이유를 제시하였다.(서중석, 1995, [민주당·민주당정권의 이념], {한국정치의 지배이데올로기와 대항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77-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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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다른 연구자는 구파와 자유당 온건파의 협력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 각 파벌 리더들의 개인적인 친화의 문제로 접근하면서, 결과적으로 양 파벌의 협력은 '공리성' 보다는 '정책성'을 띄고 있었다고 보았다. 즉 이것을 파벌의 순기능의 하나로서 '여야의 격심한 대립을 완화시키는' 기능을 하였다고 평가하였다.(최용섭, 1996, [정당파벌 사의의 협력에 관한 연구 -1950년대 말기 자유·민주 양당 파벌간의 상호협력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편, "한국정치의 재성찰}, 한울, 2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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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협상과정에서 드러난 양 파벌의 제휴는 리더들의 개인적 친화의 문제나, 집단적 성격의 문제, 혹은 정책적 대립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것들은 하나의 배경은 될 수 있을지언정 주된 원인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의 상황에서 중요했던 것은 양 당의 내외적인 상황이었다. 그것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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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민주당 내 신 구파의 역관계에서 구파가 수세적인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연로한 대통령 밑에 승계권을 가진 장면 부통령의 존재는 구파에게 항상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구파가 창당 초기 절대적 숫적 우위를 점하였던 것과는 달리, 조직부서를 장악한 신파세력은 창당 1년만에 세력이 크게 늘었고, 장면의 부통령 당선은 이를 더욱 고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절대적인 세력 비교를 해본다면 양 파벌이 비슷한 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초기와 달리 신파세력의 부상은 구파에게 충분히 위협적인 용소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구파는 어떻게 해서든지 돌파구를 마련해 당 내 위기를 해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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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자유당 내부의 권력투쟁과도 관계깊다. 자유당에는 민심의 이반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등의 제도적 물리적 힘을 동원해 이승만의 재집권을 기도하는 강경파와 이것에 반대하고 현실적인 타협을 통해 권력을 연명해보려는 온건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당내에서 강경파의 목소리가 높자 온건파는 다수의석을차지하고 있던 상황을 고려, 타 정파와의 제휴를 모색하려 했던 것이다.이것이 정치적 성향이 비슷하고 개인적 친분관계가 있는, 그리고 상호의 이해와 처지가 비슷한 구파와 제휴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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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1950년대말 불안한 정치국면 속에서 협상과 타협을 내밀히 지지한 미대사관측의 의도도 양 파벌의 협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 기조는 동맹국과의 무조건적인 군사적 유대관계 강화라는 지난 날의 전략개념 대신 그 나라의 사회경제적인 안정이나 민주주의 발전이 더 중요한 개념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미국은 자유당 강경파의 비민주적인 전술이 남함에서 자신들의 과업을 달성하는데 악영향을 미친다고 판단, 이들을 경계하는 한편 온건파 세력을 은밀히 지지했다. 그리하여 보안법파동을 전후해 자유당 온건파와 민주당과의 협상을 국회의 정상화와 정당정치체제의 작용을 회복하는 것으로 여기고 지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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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이유들로 인해 구파는 타협적이 되었고, 신파는 자유당 협상을 계기로 더욱 투쟁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1공화국 시기 양 파벌의 상이한 정치적 행동은 정책적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당 내외의 세력관계와 정치상황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파벌대립은 비정책적인 헤게모니 쟁탈전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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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 제2공화국 시기 대립구도의 변화 - 노장파와 소장파의 대립
- 제2공화국 시기에는 1공화국 시기와는 달리 집권당인 신파가 더 수구적이고, 야당인 구파가 혁신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외형적인 대립관계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 파벌의 대립양상이 신파와 구파라는 민주 신민 양당의 대립이 아니라 대립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었던 것은 소장세력 대 노장세력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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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 시기 혁명의 주요과제 처리문제나 통일문제 등에 있어 대체로 양당의 소장세력은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 그래서 양 소장세력은 한때 보수당 혁신파(좌파)의 이념 하에 규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양당의 노장세력은 가시적인 단합이나 의견통일은 보이지 않았고 외형상 여전히 대립관계를 유지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사소한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따라서 제1공화국 시기와는 달리 제2공화국 시기에 대립의 중심축은 신 구파에서 노 소장의 대립으로 변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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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통일문제에 대해 각 당의 노장과 소장세력은 견해를 달리했다. 신민당의 소장파는 신당의 정강정책을 세우는 과정에서부터 남북의 서신왕래나 교류 등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노장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정책에 반영되지는 못했지만, 민주당과 비교해 본다면 비교적 더 구체적인 정책제시가 많았다. 즉 신민당은 통일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 정부에 통일부를 설치할 것과 당기구에 통일문제 연구기관을 신설할 것을 주장하여 민주당보다 통일문제에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물론 이것은 여러 가지 사정과 의도 때문에 제기된 것이기는 하지만민주당의 형식적이고 안이한 정책을 비판하고 그들과 일정 정책대결을 할 수있었던 사실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또 실제로 신민당의 통일문제 전문기구 설치 주장이 받아들여져 1961년 3월 8일 외무부 감사에서 통일국을 설치하기로 합의를 보았던 것은 당시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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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민당의 이런 진전된 통일정책이 소장파의 주장 때문이었음은 물론이다. 노장세력은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부흥할 때까지는 일정의 협상적 남북통일을 배격한다며 통일논의 자체를 유보하자는 입장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노장세력의 견해가 민주당 노장파의 견해와 대차가 없는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반면 민주당 소장파는 이에 비해 훨씬 유연한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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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노 소장의 대립은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심하게 드러났다. 반민주행위자 처벌문제의 경우 민주당 노장파는 '자동'규정을 폐지하고 '심사'규정도 대폭 축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신민당의 노장세력의 경우 이 보다는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국회의원은 구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가 하면 점차 '자동'조항과 '심사'규정의 범위도 대폭 축소할 것을 주장하는 등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양 당의 소장파는 '자동'조항을 폐기하지 않고 처리하는 것이 4월혁명 과업 완수의 관건이며, 혁명적인 상황이니 만큼 이것은 위헌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현역의원 구제조치도 만인평등의 법정신에 위배된다고 반대하였다.(민주당 김응수 의원의 발언({민의원회의록} 제37회 49호, 민주당 이만우 의원 발언({민의원회의록} 제37회 50호, 3-4쪽 {경향신문} 1960.12.6) 참조. 이들의 주장은 동당의 노장세력인 조재천의원({민원회의록} 제37회 50호, 13쪽)과 성태경 의원 ({민의원회의록} 제37회 50호, 10-13쪽)발언과 매우 큰 대조를 이룬다.)
이 외에도 데모규제법과 반공법을 제정하려는 장면정권의 주장에 구파는 표면적으로는 반대하면서도 그 필요성을 일부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 반면, 소장세력은 적극 반대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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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양 당의 노장파와 소장세력은 통일정책과 혁명과제 처리문제에 있어 각 당의 당의를 초월하여 의견차이를 보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신민당과 민주당의 표면적인 대립보다는 노장파와 소장파의 대립이 실제적인 정책 수행 과정에서 더 주요한 대립관계로 드러났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보수 혁신의 대립이라는 균열구조가 기성의 보수적인 정치공간에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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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정치행태상의 차이에 대해 1 2공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제1공화국 시기에는 신파는 진취적 투쟁적인 태도를 보였고, 구파는 보수적 타협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들이 서로 다른 정치행태를 보였던 원인은 그들의 집단적 성격의 차이에 기인한다기 보다는 당시의 정치적 힘의 관계의 산물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이 시기 대립은 비정책적인 헤게모니 쟁탈전의 성격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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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제2공화국 시기에는 신파가 더 수구적이며 구파는 진일보한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신파가 집권여당이고 구파가 야당으로 전락한데 일차적으로 기인하지만, 구파의 혁신적인 정책들은 그 내부의 소장파의 주장 때문이었다. 신파의 소장세력도 노장세력에 반발하며 개혁적인 성향을 보였지만 집권세력인 노장세력에 부딪혀 정책으로 흡수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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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제2공 시기에는 외형상 구파와 신파가 신민당과 민주당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용적으로는 주요 사안을 둘러싸고 양 당의 노장세력과 소장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오면 파벌대립이 어느정도 실질적 내용을 가지고 진행되었으며, 따라서 정책적 대립도 가능했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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