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창작과비평》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_말하는 희망 (외 4편) /김상희 말하는 희망 빵을 구웠다 오븐에서 부푼 빵을 꺼내면 얼마 안 가 푹 꺼졌다 나도 그런 모습으로 자주 희망을 잃었다 아무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하고 말하는 목소리 붙잡고 소리 지르고 싶어도 입을 다물게 되는 사람들의 표정 나 너무 감격스러워 호수공원을 걷다가 네가 말했다 푹 꺼진 빵을 찢으면 고소한 냄새와 뜨겁고 아름다운 연기가 피어오른다 먼 미래를 생각할 수 없었다 발아래의 작은 것들을 보며 걷는 것만으로도 현재가 훌쩍 지나갔다 트랙의 저 멀리에도 밟혀 죽을 것 같은 작은 것들은 너무 많았다 사랑하는 것들 나열하기 마지막엔 꼭 죽음이 붙었지만 그럼에도 호수공원 걷기는 멈출 수가 없고 호수에 비친 잎들을 보며 감격하기를 멈출 수 없고 찢은 빵을 너의 입에 넣는 것을 멈출 수 없고 빵을 접시에 담는다 할머니가 침대에 쪼그려 누워 있는 모습이다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자 할머니는 지금 있는 요양원이 전에 있던 요양원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다고 말한다 할머니 내가 오늘 빵을 구웠는데 너무 맛있었어 모양도 예쁘고 그래서 할머니 생각이 났어 자정이 되자 공원의 모든 불이 꺼진다 저 불은 곧 다시 켜질 것이다 너에게 설거지를 부탁했다 이른 아침 건조대에는 많이 낡은 희망이 깨끗하게 닦인 채 하얗게 놓여 있었다 정오의 구분
버려진 가구들과 나의 책임은 비슷하게 생겼다 무게가 무겁고 크기가 커서 지나는 나를 압도시키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누워 있다 개가 나는 그곳을 우연히 지나는 중이었지 개는 짧은 줄에 목이 묶인 채 의아할 정도로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눈을 감고 있다 이상한 장면이다 너 평화롭니 하고 물으면 평화가 깨지고 나도 더 이상 개를 볼 수 없게 될까봐 묻지 않았다 나와 개 사이에는 닫힌 문 하나가 있다 개의 세계는 문안이다 정오를 조금씩 벗어나는 시각 날이 너무 뜨거워서 이번 여름에는 그늘도 없이 목줄에 묶인 개들이 멸종할지도 모른다 개는 고요한데 나는 조급해졌다 엎드려 혀를 내민 채 조용히 헉헉거리며 조금은 뚱한 표정을 짓는 동물 개는 알까 내가 모르는 것을 나는 개에게 언질해주었다 개의 마음을 알기 어려웠다 몸에 너무 힘을 주고 있다는 걸 깨닫고 주먹을 풀었다 다시 쥐어봐도 잡히는 건 없었다 나는 문짝이 없는 가구처럼 자꾸 너덜거리는 표정이 되었다 주택가 골목 사이로 마르고 죽은 노인이 실려 나간다 너 평화롭니 나에게 묻자 평화는 깨지고 개가 고개를 든다 어떻게 생겼나요 이 인공호수는 32년간 물을 간 적이 없다 사람이 죽어도 떠오르는 것만 건졌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인공호수 주변을 걷다가 갈피를 잃었다 그런 일은 나에게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지나쳐 뛰어가는 사람들처럼 나도 종종 그랬다 길고양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길에 고양이가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들도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쳐 죽은 새들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컨베이어벨트에 사람이 끼어서 죽었다는 기사를 수십 번 보아도 컨베이어벨트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지 못했다 사람을 저렇게 많이 그것도 여러 번 죽인 것은 어떻게 생겼을까 얼마나 강한 이빨을 가졌을까 그렇지만 내가 아직도 컨베이어벨트의 생김새를 모르는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조깅을 하는 트랙 옆 인공호수에 32년간 무엇이 빠지고 또 건져졌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믿기지 않았다 자동차 아래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는 고양이에게 당신은 어떻게 생겼나요? 하고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자꾸만 죽고 다치는 것들이 있었다 트랙을 걷는데 앞서서 달리던 누군가 인공호수로 뛰어든다 인공호수는 금방 조용해진다 나는 그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금세 잊는다 당신 어디에 있나요? 그렇게 물어도 떠오르는 건 없다 사람들이 열심히 조깅을 한다 컨베이어벨트는 어떻게 생겼나요? 이런 질문이 호수 아래 오랫동안 잠겨 있다 아기 돌보기 아기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잘 웃고 잘 울고 속마음을 쉽게 드러냈다 아기를 정성껏 돌보았다 아기는 금세 죽어버릴 것처럼 약하다가도 어느 밤에 비친 얼굴엔 절대로 죽지 않을 것 같은 끈기가 있었다 아기를 돌보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종종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쉽게 까먹었다 카페 가기 책 읽기 오늘 저녁에 먹을 밀푀유나베 재료를 구입하기 일기를 쓰면 나는 자꾸 아기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부드러운 아기 냄새가 났다 평화로웠다 나는 정류장에 앉아 아기 돌보기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방에는 아기가 담겨 있었다 아기가 어디에서 왔을지 생각하지 않았다 아기는 내 생각을 전부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검은 눈동자로 나를 꿰뚫었다 가방 속의 아기를 위해 기도했다 모은 두 손이 자꾸 희미해졌다 진심이 아닌 것처럼 아기가 잠들고 깨는 아침마다 나는 나를 돌봐줄 언어를 잃어갔다 이미 아기를 여러 번 죽인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을 떠보면 귀엽고 순진한 아기가 또다시 내 품 안에서 웃고 있고 나는 내 아기인 것처럼 아기를 돌보았다 무럭무럭 자라서 나를 이길 수 있도록 등을 토닥였다 서커스 차를 타고 멀리 들어간다 중심지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졌다 낡은 건물의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랫동안 어두웠다 변기 안에서 죽은 벌레는 빛이 깜빡이며 켜지는 동안 잠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흐르고 고였다가 다시 흘렀다 공연장에는 창문이 없다 순환하지 못하는 공기와 생각 타국의 어른은 타국의 아이를 높이 던졌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그럴수록 아이는 더 높이 던져졌다 묘기를 보여주는 단원들의 표정은 길가에 생긴 의문스러운 구멍처럼 들여다보기 버거워서 눈을 감았다 눈을 뜨지 않는 동안 제주의 도로를 거닐었다 제주의 도로는 넓다 2차선 도로도 4차선 도로처럼 내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무단횡단을 하면 여기서 고였다가 저기까지 흐를 것처럼 무궁무진하다 나는 자꾸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제주를 걸으면 걸을수록 물에 잠긴 채 죽고 싶다고 되뇌는 이미 죽은 곤충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제주의 해변에는 창문이 없다 나는 계속 숨이 막혔다 시가 나를 높이 던졌다 눈을 떠도 아이가 무사히 내려왔는지 알 수 없다 ---------------------- 김상희 / 2001년 충남 부여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재학. 2022년 《창작과비평》 신인상 시 당선 수상작: 김상희 「말하는 희망」 외 4편
█ 심사평
올해 창비신인시인상에는 총 1057명의 응모자가 원고를 보내왔다. 상자에 빼곡히 쌓인 원고 더미를 바라보며 나무를 심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황폐한 땅을 경작해 저마다의 속도와 리듬으로 심고 기른 나무들이 군락을 이룬 세계.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긴장과 설렘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4명의 심사위원들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그 숲을 거닐었고, 최종적으로 응모자 4명의 작품을 두고 긴 대화를 나눴다. 「접속」 외 4편(민경원)의 시는 언어 운용이 자연스럽고 세련되었다는 장점이 있었다. 들리지 않는, 사라지고 깨지는 미묘한 파열의 조짐들을 알아채는 시적 기민함도 엿보였다. 다만 한편의 시에서 소화하기에는 다소 커다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 추상적 세계를 설득시키려다보니 문장들이 압축되지 못하고 설명적으로 흘러갔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바깥의 시'도 좋지만 보다 가까운 안쪽, 발붙이고 선 현실에 대한 탐색을 조금만 더 이어가보는 것은 어떨까. "너무 지루"(「바깥의 시」)한 삶이더라도, 시적 문장 안에서 그 지루함의 구체성에 기반한 통찰을 강화한다면 새로운 시적 도약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한다.
「먼지로부터」 외 9편(장민기)의 몇몇 작품은 서사와 이미지를 조화롭게 엮어내는 역량이 돋보였다. 「변성기」 「러닝」은 감각적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시적 정념을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어 몰입감 있게 시를 전개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명랑」처럼 화자가 고백적 발화를 빌려 내면의 토로를 반복하거나 시적 정념을 설명하려는 진술들이 개입되어 긴장감을 잃은 경우도 없지 않다. 한편 '신' '죄' '죽음' '영원' 등의 묵직하고 추상적인 시어들이 시를 쓰는 이의 감각적 경험으로 육화되지 않은 채 등장하면 상투성이 느껴지고 시의 흐름은 탄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시 전반에서 이와 같은 장단점이 선명하게 나타나 기대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주었는데, 이는 응모자의 시 쓰기가 미학적으로 도약하는 지점에 와 있음을 느끼게 하는 충분한 근거로도 읽혔기에 응모자의 전진을 응원하게 했다.
「템플 스테이」 외 4편(공지혜)은 당선작과 나란히 두고 마지막까지 고민한 작품이다. 언어감각이 세련되고 안정적이라는 점, 화자의 어조가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들린다는 점, 응모작 5편이 편차 없이 고른 수준을 보여준다는 점을 장점으로 주목했다. 특히 「메리노는 양의 이름」에서 보여준 우아하고 세련된 시적 전개와 참신한 발상은 응모자가 탄탄히 쌓아온 습작시간을 짐작하게 했다. 다만 시의 마지막 행이 대체로 평이하게 끝난다는 점, 현실에 징 박듯 머무르는 결론이 아쉽다는 지적이 있었다. 일부 시에서 표현한 성장통이나 사춘기적 감성, 안정적이지만 평이한 서술이 기성시에서 읽어온 감각이라는 점도 미흡함으로 남았다. 「메리노는 양의 이름」에서 보여준 예측 불가능한 언술과 리듬, 아슬아슬한 시적 걸음걸이를 살려 새로운 감각으로 충만한 시편들을 더 많이 써낸다면 곧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는다.
김상희의 「말하는 희망」 외 4편의 작품은 처음 읽었을 때는 언뜻 거칠게 느껴지지만 여러번 곱씹어 읽을 때 비로소 그 속에 담긴 시적 에너지와 함께 시가 거느린 넓은 세계가 오롯이 드러났다. 담백하고 힘있는 문장들이 서로 이어지면서 긴장감을 만들어냈고, 단단한 문장들의 역시 단단한 연결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그 세계 속의 개인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시적 화자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과 깊이 연루되어 있으면서도, 화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균열까지 이처럼 정교하게 한편의 시로 완성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면모를 표제작뿐 아니라 함께 응모한 작품에서 두루 확인할 수 있어, 그것이 고유하고 신뢰할만한 개성이라는 데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더구나 개성을 마음껏 뽐내는 대신에 낮고 편안한 목소리로 오히려 덜 말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읽는 이가 시에 바짝 다가서도록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단지 기발한 발상이나 감각적인 표현이 아니라 한편의 시로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이러한 시를 찾기 힘들 뿐 아니라 이러한 시를 쓸 수 있는 시인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예사롭지 않은 개성과 매력을 높이 사기로 했다. 이에 심사위원들은 「말하는 희망」 외 4편을 제22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으로 정한다. 당선자께서는 드물고 귀한 개성을 잘 간직하고 아껴주시길 바란다.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인을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쁘다.
심사위원 : 박연준(시인), 안희연(시인), 유병록(시인), 장은영(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