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에서 편찬된 각종 문헌 중에서 한국 고대사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사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왕인에 관한 내용, 백제성왕의 불교 전래에 관한 내용, 백제의 오경박사 파견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백제기(百濟記)』·『백제신찬(百濟新撰)』·『백제본기(百濟本記)』·『일본세기(日本世記)』 등 백제 및 고구려 계통 사람들이 편찬한 문헌들이 자료로 인용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대단히 유용한 사서이다. 그렇지만 향기로운 장미에 가시가 있는 것처럼, 『일본서기』는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강화된 일본적인 대국의식으로 윤색되어 있어서 사료로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사료의 개별적인 이용 못지않게 『일본서기』가 갖는 사서의 성격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사서의 명칭, 편찬 과정, 편찬 자료, 특징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일본서기』의 명칭
『일본서기』에 대해서는 1) 『일본기(日本紀)』가 원래의 명칭이라고 보는 견해, 2) 일본서(日本書)의 기(紀)를 붙여서 『일본서기(日本書紀)』라고 하였다는 견해, 3) 『일본기』와 『일본서기』가 모두 일본어로는 ‘야마토부미’로 읽혔으며,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먼저 『일본기』와 『일본서기』를 동일한 명칭으로 보는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일본서기』가 『고사기』와 달리 일본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역사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측면이 있었다는 지적이 옳다고 한다면, 사서의 명칭도 중요하다. 즉 중국 사서의 관행이나 명명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전제로 사서의 편찬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만약 원래 명칭이 『일본기』라면, 중국 사서의 선례에서 보이는 것처럼 황제의 역사를 재위 기간과 연도에 따라 정리한 본기(本紀)만을 작성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 『일본서기』가 원래 명칭이라면, 이는 『일본서』라는 기전체(紀傳體) 사서를 상정하고 사서 편찬을 시작했으나, 부득이하게 본기 부분만 작성하는 데 그쳤다고 볼 수 있다.
처음부터 본기만 작성하려고 했는가, 아니면 본기·표(表)·지(志)·열전(列傳)등을 편찬할 계획이었으나 본기 부분에 그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밝히는 작업은 『일본서기』의 성격을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된다. 최초의 편찬 의도를 차치하고서라도, 『일본기』와 『일본서기』의 차이를 편찬자들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백제와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당의 병사들 중에 속수언(續守言) 등과 같은 문사(文士)들이 편찬의 최종과정에 참여한 점에서 더더욱 『일본기』와 ‘일본서 중의 기(紀)’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일본서기』의 완성에 대해서 언급한 유일한 자료인 『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 『일본기』 30권과 계도(系圖) 1권을 완성하였다고 하였고, 『일본서기』 이후의 사서도 『속일본기』, 『일본후기(日本後紀)』,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와 같이 『일본기』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였으므로, 『일본기』를 원래의 명칭으로 보는 견해가 생겼다. 그렇지만 『일본기』는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을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일본서기』가 『일본기』였다고 보기 어렵다. 다만 『속일본기』라는 명칭은 『일본기』를 이었다는 뜻이므로 이전의 사서인 현재의 『일본서기』를 『일본기』라고 칭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일본서기』가 본래 명칭이라면 새로운 사서의 이름은 『속일본서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속일본후기』를 제외하면 사서의 이름이 모두 4자로 구성되어 있는 점을 아울러 생각하면 『일본서기』가 원래의 명칭이었고, 『속일본기』에서『일본기』라고 한 것은 『속일본기』를 염두에 두고 표현한 것으로 그것이 정식명칭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일본서기』가 본래 명칭이라면 왜 『속일본기』는 『일본서기』를 『일본기』라고 하였을까? 이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본래의 명칭이 『일본서기』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일본기』에 불과하다는 『속일본기』 편찬 단계의 『일본서기』에 대한 인식을 상정할 수 있다. 『일본서기』는 본기만 있으므로 굳이 ‘일본서의 기(紀)’라고 할 필요 없이 『일본기』라고 불러도 상관없다고 하는 후대의 인식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속일본기』 편찬자들이 지향하고 있는 사서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속일본기』는 처음부터 본기만을 작성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일본서기』조차도 『일본기』로 인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속일본기』라는 명칭 자체가 『일본기』, 정확하게는 『일본서』의 본기 부분을 잇는다는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서기』의 본래 명칭은 『일본기』가 아니며, 또한 『일본서기』와 『일본기』가 처음부터 혼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즉 『일본서기』는 원래 ‘일본서’라는 사서를 구상하였으나 본기만을 편찬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일본서의 기’라는 뜻으로 『일본서기』라고 하게 되었고, 『속일본기』 편찬 단계에서는 이미『일본서기』라고 할 필요 없이 『일본기』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게 되어 『속일본기』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로 『일본기경연화가(日本紀竟宴和歌)』가 있다.이 책은 연희(延喜)·천경(天慶) 연간에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경연가(竟宴歌)를 모은 것이다. 경연가는 연회를 베풀고 흥이 올랐을 때 지은 노래를 말한다. 그런데 책의 제목은 『일본기』라고 되어 있지만, 서문에는 『일본서기』는 사인친왕(舍人親王)과 태조신안만(太朝臣安滿) 등이 칙을 받들어 편찬한 것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즉 원래의 책 제목은 『일본서기』인데 연희(延喜) 연간(901~923)에는 일반적으로 『일본기』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도 『일본서기』를 『일본기』라고 한 사례는 『본조월령(本朝月令)』에 인용된 연력(延曆) 11년(792) 태정관부(太政官符)와 『일본후기(日本後紀)』 연력 16년(797) 2월 및 홍인(弘仁) 3년(812) 6월 기사가 있다. 『속일본기』가 연력 13년(794)에 이미 일부가 완성되었고 연력 16년(797)에 최종적으로 완성된 점을 생각하면, 『속일본기』가 편찬되던 시기에 『일본기』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식 명칭은 어디까지나 『일본서기』에 대한 강독 결과를 모은 『홍인사기(弘仁私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본서기』’였다. 현재 확인되는 것은 『속일본기』가 편찬되는 단계에 두 가지 명칭이 함께 쓰이게 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어디까지나 『일본서기』임을 알 수 있다.
2. 『제기』와 『구사』
『일본서기』의 편찬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편찬의 직접적 단서로는『일본서기』 천무(天武) 10년(682) 3월 기사에 천도황자(川嶋皇子) 등에게 제기(帝紀)와 상고제사(上古諸事)를 기정(記定)하라고 명령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보다 8년 전에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의 서문에 따르면 각 가문이 가지고 있는 『제기』와 『본사(本辭)』가 잘못과 허위가 많으므로 『제기』를 찬록(撰錄)하고 『구사(舊辭)』를 토핵(討覈)하도록 하였고, 패전아례(稗田阿禮)가 제황일계(帝皇日繼)와 선대구사(先代舊辭)를 암송하였다고 한다.
이들 자료에서는 제기(帝紀)-제황일계(帝皇日繼)-선기(先紀) 그리고 구사(舊辭)-선대구사(先代舊辭)-상고제사(上古諸事)[천무기(天武紀)]라는 용어가 혼용되고 있다. 즉 『제기』는 『제황일계』라고 할 수 있고, 『선기』라고 할 수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천무대(天武代)에 『제기』와 『구사』가 이미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틀린 것이 많으므로 “『제기』를 찬록하고 『구사』를 토핵하여 잘못을 깎고 참된 것을 정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다만 그 작업은 완성되지 못하였는데, 원명대(元明代)에 와서 다시 “『구사』의 잘못되고 어그러진 것을 안타까워하고, 『선기』의 그릇되고 어긋난 것을 바로잡고자 하여”, “칙어구사(勅語舊辭)를 찬록하여 헌상하라”고 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고사기(古事記)』라는 것이다.
칙어구사를 찬록하라는 부분을 중시하여 『고사기』의 내용 전체가 구사적(舊辭的)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전체의 문맥에서 보면 『제기』(제황일계, 선기)와 『구사』(선대구사, 칙어구사)가 짝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으므로, 칙어구사를 찬록하라는 말에서 『제기』를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이 문제를 포함하여 천무 시기에 존재하였다는 『제기』와 『구사』는 무엇이고, 추고(推古)~황극대(皇極代)에 보이는 『천황기(天皇記)』·『국기(國記)』·『본기(本記)』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밝혀볼 필요가 있다.
천무천황은 “『제기』를 찬록하고, 『구사』를 토핵하여”라고 명하였는데, 찬록한다는 말을 새롭게 문헌을 편찬한다는 말이고, 토핵한다는 말은 이미 존재하는 자료를 검토하여 바로잡는다는 말이다. 용어의 쓰임새를 중시한다면 『구사』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문헌이나 자료이지만, 『제기』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문헌인 셈이다. 그런데 여러 가문이 가지고 있는 『제기』와 『구사』에 잘못이 많다고 하였으므로, 이미 천무 시기에 『제기』도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있다. 그러나 『구사』는 각 씨족 집안이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할지 모르지만, 『제기』는 천황가의 계보를 중심으로 한 문헌 형태의 기록이라고 한다면 우선 일반씨족들이 집집마다 이 문헌을 가지고 있었고, 나아가서 『제기』의 내용을 마음대로 수정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각 가문이 가지고 있는 『제기』의 내용이 다르다고 한 것은 천무시기에 『제기』로 인식되었던 부분의 내용이 각 가문이 작성·보유하고 있는 본기 등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정리된 『제기』를 대왕가(천황가)에서 가지고 있었다면, 대왕가가 가지고 있는 『제기』를 기준으로 정하고 각 가문이 가지고 있는 『제기』를 폐기토록 하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도 원명(元明) 시기까지 『제기』의 잘못된 내용이 문제가 된 것은 기준이 될 『제기』가 존재하지 않았고, 천무 시기에 찬록하고자 한 『제기』가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그 주된 이유는 후술할 바와 같이 을사(乙巳)의 변(變) 과정에서 『천황기(天皇記)』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기(國記)』와 『본기』 속에 나타나는 제기적(帝紀的)인 부분, 즉 천황가와 관련된 내용을 추출하여 『제기』를 정리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추고(推古) 시기에 이루어진 『천황기』의 편찬은 곧 천무 시기의 『제기』의 편찬과 같은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천황기』가소실되면서 『제기』의 편찬이 필요해진 것이다. 소실을 면한 『국기』와 각 씨족이 가지고 있던 『본기』를 근거로 하여 『제기』를 재구성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3. 『천황기』와 『국기』
『천황기(天皇記)』와 『국기(國記)』 등은 일본에서 사서의 편찬을 위한 기초작업이 이루어진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추고(推古) 28년(620)에 황태자[성덕태자(聖德太子)]와 도대신[嶋大臣, 소아마자(蘇我馬子)]이 『천황기』와 『국기』 그리고 여러 씨족 및 공민(公民)의 『본기』를 편찬하였다고 한다. 한편 황극(皇極) 4년(645) 6월 을유에 소아하이(蘇我蝦夷)가 주살되었을 때, 『천황기』와 『국기』그리고 여러 가지 보물이 모두 불타게 되었다. 이때 선사혜척(船史惠尺)이 재빨리 위기에 처한 『국기』를 꺼내어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에게 헌상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의 『천황기』·『국기』·『본기』 중에서 『천황기』는 『천황기』가 아니라 ‘『대왕기(大王記)』’였을 수도 있다. 이 시기에는 사적으로 천황이라는 용어가 쓰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천황이란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극대(皇極代)에 존재했던 기록은 대왕가(大王家)를 중심으로 한 기록(『천황기』), 왜국(倭國)의 역사에 관한 기록(『국기』)
『國記』에 대해서는 왜국의 역사로 보는 설(坂本太郞), 각 씨족의 계보 및 유래·공적 등을 기록한 것으로 보는 설(榎英一), 왜국의 풍토 지리를 기록한 지리서로 보는 설(石母田正)이 있다.
,중앙의 호족 및 유력 씨족[신(臣)·연(連)·반조(伴造)·국조(國造) 등]의 『본기』 등이다. 이들 기록은 공통적으로 ‘기(記)’라고 불린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각 기록의 차별성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본기』는 주로 중앙 유력 씨족들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후대의 가전(家傳)과 같은 성격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일본국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역사를 편찬한 것이 아니라, 일본열도 내부의 대왕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이나 지역의 역사를 개별적으로 정리한 단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황기』와 『국기』·『본기』 등이 편찬된 것이 추고(推古)·서명(舒明)·황극대(皇極代)이고, 이 시기에 이들 문헌이 존재하고 있었다면 천무(天武)는 서명과 황극의 아들이므로 두 시기는 크게 떨어져 있지 않다. 또한 이들 문헌이 전래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에 많은 개변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천황기』·『국기』·『본기』가 곧 『제기(帝紀)』와 『구사(舊辭)』로 불릴 수 있었을 것이다. 통설적인 주장처럼 흠명대(欽明代)를 중심으로 한 시기에 『제기』와 『구사』가 편찬되었다고 하는 것은 별다른 근거가 없으며, 설령 후대에 『제기』와 『구사』로 불릴 만한 자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천황기』·『국기』·『본기』를 편찬하는 단계에 그 내용으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제기』와 『구사』라는 표현이 처음 나타나는 시기가 바로 천무 시기이며, 그 한 세대 내지는 두 세대 앞에서 『천황기』 등이 편찬되었기 때문에 천무가 말하는 『제기』와 『구사』가 곧 『천황기』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천황기』·『국기』가 『제기』·『구사』로도 불릴 수 있는 문헌이라면, 『제기』와 『구사』에 문제가 있다고 한 것은 흠명대 이래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생긴 조작이나 변개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추고·황극대의 『천황기』·『국기』·『본기』 단계에서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던 문제를 거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호족에 대하여 대왕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호족들과 병렬적인 모습 혹은 극히 인간적으로 묘사된 그 자체를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호족들의 우열과 질서에 대해서도 천무 자신의 의중을 반영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임신(壬申)의 난 과정에서 자신에게 협조한 지방호족들을 부각시키는 한편, 천무에 맞섰던 중앙의 유력호족은 견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천무 시기에는 소실을 면한 『국기』와 각 가문이 가지고 있던 『본기』를 통해서 제기적(帝紀的)인 내용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고사기』의 편찬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사기』는 천황가의 계보 및 그와 관련된 씨족들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고사기』는 천황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씨족들의 계보를 재구성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처럼 다양한 전승이나 서로 다른 계보를 극력 배제하는 방향으로 편찬되었다. 이에 대해서 『일본서기』는 천황가나 유력 호족의 계보 정리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일본이라는 국가의 역사, 그것도 중국 왕조의 역사서와 비견될 수 있는 사서를 편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일본국의 지배자인 천황의 위상을 높이고 그 지배의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거기에 중국적인 사서 편찬의 소양을 가진 중국계 인물들이 편찬에 참여하면서 중국적인 사서 편찬원리, 즉 다양한 전승이나 이전(異傳) 중에서 하나만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병치(竝置)시켜두고 후대인의 판단에 맡기는 편찬방침을 취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대(神代)의 내용도 『고사기』는 단일한 줄거리를 가진 신화로 정리된 모습을 갖고 있는데 비해 『일본서기』는 여러 가지 전승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일본서기』에 수록되어 있는 ‘일서(一書)’ 등의 이전(異傳)이야말로 천무 시기에 토핵(討覈)의 대상이 되었던 『제기』와 『구사』(『국기』와 『본기』)의 실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천황기』에서 『제기』로
을사(乙巳)의 변 당시에 소아하이(蘇我蝦夷)의 저택이 불타게 되었는데, 선사혜척(船史惠尺)이 『국기』만을 화재로부터 구해내어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 후의천지천황(天智天皇)]에게 헌상하였다고 한다. 즉 『천황기』는 이때의 화재로 불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기』의 경우는 개별 씨족이 각각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아하이의 집에 있지 않았으며, 그래서 이 기사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국기』와 『본기』 속에도 천황과 관련된 내용들이 당연히 들어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내용들은 『국기』와 『본기』가 서로 상이할 수도 있었을것이다. 후에 천황 및 천황가에 대한 내용은 『제기』로, 지방호족과 중앙의 유력씨족에 관련된 내용은 『구사』로 인식하게 되면서, 『국기』와 『본기』에 실려 있는 천황과 관련된 내용들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천지(天智)에게 전해진 『국기』는 천무(天武)에게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천무 시기에 언급되고 있는 『제기』는 천황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관념적인 인식일 뿐 현실적인 문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구사』 역시 호족들에 대한 내용을 지칭하는 용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비로소 『고사기』 서문에서 ‘칙어구사(勅語舊辭)’를 편찬케 하였다는 말이 제자리를 찾게 된다. 칙어구사란 바로 천무가 칙명(勅命)으로 인정한 구사적(舊辭的)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사기』가 『구사』만을 편찬한 것인데 『제기』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이유도 알 수 있다. 결국 『제기』와 『구사』라는 용어는 천무 시기에 형성된 천황 우위의 정치질서를 반영하는 용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사기』가 편찬되는 최후 단계까지 『제기』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하는 것은 『제기』의 찬록이 각 가문이 가지고 있었다는 『제기』의 이동(異同)만을 바로잡은 작업이 아니었음을 반영한다. 또한 『제기』가 계보적인 기록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국기』나 『본기』와 마찬가지로 『천황기』나『제기』가 대왕을 중심으로 한 계보를 비롯해서 대왕의 중요한 사적이 망라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호족들의 기록보다도 간략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추고(推古) 황극대(皇極代)에 편찬된 문헌들은 『천황기』·『국기』·『본기』와 같이 기(記)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계체 흠명대(欽明代)에 정리되었다고 하는 문헌들이 『제기』와 같은 이름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천황이라는 용어는 이미 추고 시기에 율령법적인 근거를 가진 용어로서가 아니라 사적인 용어 혹은 미칭(美稱)으로 쓰였을 가능성도 일찍부터 제기되고 있으므로, 『천황기』라는 용어 전체를 추고·황극대의 것으로 보아도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천황가와 유력호족이 서로 대등하다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천황기』와 『국기』·『본기』라고 한다면, 천황과 유력 호족 사이의 차별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용어가 『제기』와 『구사』라고 할 수 있다. 기(紀)는 천자·황제의 역사를 편년체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바로 중국 사서에서 보이는 본기(本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제기』는 황제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기록한 것이며, 동시에 이것은 시간을 인식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구사』는 『천황기』·『국기』와 병렬적이었던 『본기』가 천황을 정점으로한 국가 질서 속에 재편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천황기』라고 하지 않고 『제기』라고 한 것은 바로 천무 시기부터 종래의 대왕과는 구별되는 한 차원 높은 권력자로서 천황이라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왕과 호족 등이 각각의 역사를 차별 없이 기(記)라고 했던 의식을 극복하고, 천황에 대한 기록을 한 단계 높여서 기(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 선기(先紀)라는 표현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선기 즉 ‘이전의 기(紀)’라는 말이 제황일계(帝皇日繼)와 동일시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구사』는 『국기』와 『본기』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러한 기록이 갖는 권위와 위상을 천황의 그것과 선명하게 대비시키기 위해서 『상고제사(上古諸事)』, 『구사』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천무가 공식적·법적으로는 최초의 천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황이란 용어가 법제화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천무의 사후인 지통(持統)의 시대일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므로 천무 시기에는 천황이라는 용어보다는 제(帝)·제황(帝皇)같은 용어가 유력씨족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용어로 선호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천무가 임신(壬申)의 난을 통하여 중앙의 유력호족을 통제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대왕가(大王家)의 역사를 호족들의 역사와 차별화하면서 『제기(帝紀)』라고 부르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 종래에 『천황기』와 더불어 나란히 『국기』·『본기』라고 하였던 유력호족들을 중심으로 한 기록은 『구사』 혹은 상고제사로 더욱 격을 낮춘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천황기』·『국기』·『본기』의 계통을 이은 것이 『고사기』이고, 『제기』 즉 천황을 중심으로 한 기록을 축으로 일본국의 국가사로 편찬된 책이 『일본기』 즉 『일본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사기』라는 용어 자체도 상고제사+『구사』+기(記)로 구성된 말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칙어구사(勅語舊辭) 혹은 상고제사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호족들에 관한 기록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천황기』 내지는 『제기』의 내용도 함께 담고 있다.
5. 구분론
712년에 완성된 『고사기』와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고사기』는 일본적인 변형 한문체인데 비하여, 『일본서기』는 정형적인 한문체이다. 그런 점에서 『고사기』는 대내용, 『일본서기』는 대외용, 즉 일본이라는 국가의 성립과 그 역사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1 『일본서기』 권별 내용, 분량 및 분류
권
내용
쪽수
글자 수
쪽당 글자 수
구분
1
神代 上
49
11,306
230
β군
2
神代 下
44
10,388
236
3
神武紀
23
5,670
246
4
綏靖~開化
16
2,915
182
八代
5
崇神
15
3,505
233
6
垂仁
19
5,077
267
7
景行·成務
30
7,055
235
二代
8
仲哀
7
1,653
236
9
神功
24
6,297
262
10
應神
16
3,832
239
11
仁德
28
6,516
234
12
履中·反正
11
2,400
218
二代
13
允恭·安康
20
4,304
215
14
雄略
35
8,762
250
α군
15
淸寧·顯宗·仁賢
23
5,694
248
三代
16
武烈7
1,681
240
17
繼體23
5,571
242
18
安閑·宣化
10
2,283
228
19
欽明
50
12,952
259
20
敏達
16
3,970
248
21
用明·崇峻
14
3,430
245
22
推古
34
7,862
231
β군
23
舒明
15
3,473
232
24
皇極
23
5,695
248
乙巳의 變
α군
25
孝德
42
11,166
266
大化改新
26
齊明
18
5,404
300
27
天智
23
5,733
249
28
天武 上
20
5,138
257
壬申의 亂
β군
29
天武 下
57
14,044
246
30
持統
38
9,516
250
이처럼 『일본서기』는 정격 한문으로 쓰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한문 속에 많은 기용(奇用)과 오용(誤用)이 있다. 또한 기용과 오용은 1~13권, 22·23권, 28·29권에서 현저하다. 『일본서기』의 각 권별 어구 및 어법, 가요(歌謠), 가명(假名) 표기에 사용된 한자, 분주(分註)의 수, 출전과 소재(素材) 등의 특징을 바탕으로 하여 통상적으로 1~13권, 22·23권, 28·29권을 β군, 30권을 제외한 나머지 권을 α군, 30권으로 세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서기』 각 권의 특징을 찾아내어 몇 개의 그룹으로 구분하는 연구를 구분론(區分論)이라고 한다.
구분론의 출발점을 이루는 연구는 강전정지(岡田正之)의 『近江奈良朝の漢文學』(1929)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용서를 제시하는 방법의 차이에 주목하였다. 1~13권까지는 一書曰, 一書云, 一曰, 一云, 或云, 或曰이 주류를 이루는데, 14권 이후에서는 一本云, 一本, 舊本云, 別本云, 或本云이 주로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전자와 후자의 편찬자가 다르다고 보았다. 이렇게 『일본서기』가전체적인 통일성을 갖춘 게 아니라, 편찬자의 차이에 따른 여러가지 상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된 것이다. 이후 ‘之’의 용법, 貢職·先(조상이라는 뜻)·皇祖·宮室·朝貢·幣帛·因以·歌之曰·群卿·群臣·公卿百寮人 등의 어구 분포, 宮의 기재형식, 皇子·皇女의 기재형식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서기』를 구분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일례로 일본어의 や, く, も를 나타내는 한자로 椰·區·茂(β군)와 耶·矩·謀(α군)가 있는데, 이를 기준으로 나누어 보면 1~13권과 22~23권(β군)과 14~19권, 24~27권(α군)으로 구분된다.
또한 일본어에서는 한자의 아음(牙音)과 후음(喉音)이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말에서도 訶(가 혹은 하), 河(하), 胡(호), 許(허), 虛(허)는 모두 ‘ㅎ’ 음가를 가지고 있는데 비하여, 일본어에서는 訶(か), 河(か), 胡(こ·ご), 許(きょ·こ), 許(きょ·こ)가 か행의 음가를 가지고 있다. 『일본서기』 속의 가요(歌謠)는 당시 일본어를 한자의 음가로 표기한 것인데, 아음과 후음을 구별할 수 없는 일본인과 아음과 후음을 구별할 수 있으며 일본어의 か행 음가가 아음이라고 간주한 중국인 사이에는 가요에 사용한 한자가 서로 구별된다. 이처럼 아음과 후음을 구별한것은 α군이고, 구별하지 못한 것은 β군이다. 표 2 가요의 음운을 통한 구분론
假名/卷
牙音
喉音
分布
カ
コ(甲)
コ(乙)
カ
コ(甲)
コ(乙)
10種
5種
6種
曉母
匣母
曉母
訶
河
胡
許
虛
1
2
10
1
3
1
●
3
12
4
4
2
●
4
5
8
2
1
2
●
6
7
7
1
2
3
●
8
●
9
10
2
1
2
3
●
10
11
3
1
3
1
3
●
11
29
7
1
4
19
●
12
1
13
5
3
4
2
2
3
●
14
20
7
8
15
3
1
16
19
4
3
17
10
2
3
18
19
2
2
20
21
22
6
3
6
1
1
2
●
23
1
2
●
24
7
2
8
25
6
2
1
26
14
4
27
3
6
2
6. 편수론
구분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상박달(森博達)은 일본어를 표기한 한자의 음운(音韻) 및 오용(誤用) 등을 근거로 β군은 일본인들이 편찬한 부분이고, α군은 중국인들이 편찬한 부분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구분론의 성과로 편찬자에 관한 논의는 물론이고 편찬 순서 등을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리 히로미치는 1~13권(β군)이 14권 이후보다 나중에 편찬된 것으로 보고 있다. 14권의 웅략기(雄略紀)에는 안강(安康)이 미륜왕(眉輪王)에게 살해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보인다. 그런데 13권의 안강기(安康紀)에서는 안강이 미륜왕에게 살해되었다는 기사만 있고 자세한 것은 대박뢰천황기(大泊瀨天皇紀)(웅략기)에 있다고 하였다. 13권이 나중에 편찬된 증거다.
그런데 웅략기에는 안강천황이 황후를 매(妹)라고 하였고, 이 부분에 편찬자가 주를 달아 처를 매라고 하는 것은 고속(古俗)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처를 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본서기』가 편찬되던 나라[奈良]시대까지도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이 주석을 단 사람은 중국인일 수밖에 없다.
『일본서기』 편찬에 참여한 중국인 후보로는 7세기 말(691)의 음박사(音博士)였던 속수언(續守言)과 살홍각(薩弘恪)을 들 수 있다. 속수언은 660년에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포로가 되어 왜로 건너갔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들 두 사람은 지통(持通) 3년(689)에 반포된 「정어원령(淨御原令)」 편찬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살홍각은 「대보율령(大寶律令)」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691년 9월 4일에 두 사람과 함께 서박사(書博士)인 백제인 말사선신(末士善信)에게 은(銀)이 하사되었으며, 직전에는 대삼륜씨(大三輪氏) 등 13씨 선조의 묘기(墓記)를 바치도록 하였다. 『일본서기』 편찬의 자료다. 692년에는 다시 두 사람에게 논 4정(町)이 지급되었다. 천무의 의도에 따라서 지통 시기에 『일본서기』 편찬이 실제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각 권에 사용된 역법을 보면 3권에서 13권까지는 새로운 의봉력(儀鳳曆)이고, 14권 웅략기부터는 원가력(元嘉曆)이다. 이 또한 β군이 α군보다 나중에 편찬된 사실을 보여 준다.
원가력은 송(宋)의 원가 22년(445)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역법으로, 왜는 송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였으므로 직접 송으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송서(宋書)』에 보이는 왜왕 무(武)가 웅략으로 추정되고 있고, 『일본서기』의 내용 중 가장 먼저 편찬되기 시작한 14권의 웅략기가 원가력에 의거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원래 인덕력(麟德曆)으로 불렸던 의봉력은 당의 인덕 2년(665)에 시행되었으며, 신라를 거쳐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지통 4년(690) 11월에는 원가력과 의봉력을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상적인 목적을 위해서 동시에 두 개의 역법을 사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상적으로는 의봉력, 사서의 편찬을 위해서는 그대로 원가력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문무(文武) 2년(698)에 이르러 의봉력만을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β군에서 의봉력을 사용한 것은 빨라도 690년, α군의 편찬이 완료된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면 698년 이후로 볼 수 있다.
α군 내에서도 14~21권과 24~27권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문헌을 인용할 때 ‘一本云’이라고 한 경우가 스물한 번 있는데, 모두 14~19권에서만 보인다. 또한 조상을 뜻하는 선(先)이라는 글자도 열세 번 사용되었는데, 모두14~21권에만 보인다. 반대로 천황의 조모(祖母)를 뜻하는 황조모(皇祖母)는 열네 번의 사례가 모두 24~27권에서만 나타난다.
한편 제명기(齊明紀) 7년 11월 무술의 분주에 『일본세기(日本世記)』를 인용하여 “11월에 복신(福信)이 사로잡은 당나라 사람 속수언 등이 축자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동시에 다른 책을 인용하면서 신유년(661)에 백제 좌평 복신이 바친 당나라 포로 106명을 근강국(近江國)에 거주하며 논을 개간하도록 하였다는 내용과 경신년(660)에 이미 복신이 당나라 포로를 바쳤다는 두 가지 내용을 다 기록하여 후대 사람이 확인해 줄 것을 바란다고 하였다. 만약 속수언이 이 부분을 기록하였다면 자신이 왜에 온 시점을 분명하게 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24~27권은 살홍각이, 14~21권은 속수언이 편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살홍각이 제명기를 편찬할 당시에는 이미 속수언은 활동을 중지한 것으로 보인다. 「대보율령」 완성에 따른 논공행상에서도 살홍각만 나타난다.
원래는 속수언이 고대의 중요한 획기라고 할 수 있는 14권의 웅략기부터 23권의 서명기(舒明紀)까지, 살홍각은 소아마자(蘇我馬子)가 주살되고 대화개신(大化改新)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기 위하여 24권 황극기(皇極紀)부터 집필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속수언은 21권[숭준기(崇峻紀)]을 다 완성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일본인이 집필한 숭준기의 후반에는 한문의 오용(誤用)이 많이 나타난다.
「대보율령」 완성 직후에는 살홍각도 더 이상 문헌에 보이지 않으므로 700년 직후에 그도 은퇴하였거나 죽은 것으로 생각된다.
α군의 당 출신 편찬자들이 모두 사망한 후 『일본서기』의 편찬은 일시적으로 중단된 상태였다. 한편 경운(慶雲) 4년(707) 4월 15일에 학사(學士)를 우대하는 의미에서 정6위하 산전사어형[山田史御形, 어방(御方)·삼방(三方)으로도 표기됨] 등에게 포(布) 등을 하사하였다. 그는 『일본서기』가 완성된 720년에 종5위상이 되었다. 사(史)라는 낮은 직책에도 불구하고 그가 종5위하를 거쳐 종5위상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배경은, 역시 『일본서기』의 편찬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β군 편찬의 주역은 바로 산전사어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원래 신라에 유학한 승려였으나, 지통 6년(692)에 무광사(務廣肆)(종7위하)에서 위 되었다. 그의 문필능력을 활용하기 위해서 환속(還俗) 시킨 것이다. 특히 β군에는 미경기년(未經幾年)과 같은 어구들이 보이는데, 이러한 표현은 『경률이상(經律異相)』·『법원주림(法苑珠林)』과 같은 불교 분야의 유서(類書)에서 비롯된 것이다. 승려였던 산전사어형이 불전이나 유서에서 익힌 표현을 β군에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β군의 편찬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β군이 의봉력을 사용하고 있는 점과 「대보령」에서 규정된 천황의 공식 호칭인 ‘명신어우천황(明神御宇天皇)’과 관련된 용어들이 β군과 효덕기(孝德紀)에 보인다. 한편 α군에서는 ‘치천하(治天해제 39下)’라는 용어가 보인다. 도하산(稻荷山) 고분 출토의 철검 명문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궁치천하(宮治天下)’라는 표현은 율령제 이전에 사용된 표현이다. ‘치천하’라는 표현은 α군과 지통기(持統紀)에서만 보인다. 이는 β군의 편찬이 「대보령」 이후에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아울러 이때 α군에 대한 윤색도 함께 이루어졌을 것이다.
한편 권30 지통기는 α군에도, β군에도 속하지 않는다. 『일본서기』에는 군신(群臣)이라는 용어가 109차례 보이지만 지통기에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공경백료인(公卿百寮人)이라는 표현은 아홉 차례 보이는데 모두 지통기에만 보인다. 또한 대진황자(大津皇子)와 같이 이름을 먼저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지통기에서는 황자대진(皇子大津)이라고 하여 황자를 앞세우고 있다. 그런데 화동(和銅) 7년(714)에 기조신청인(紀朝臣淸人)과 삼택신등마려(三宅臣藤麻呂)로 하여금 국사(國史)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기조신청인은 715년에 종5위하에 올랐고, 이 해와 717년에 학사를 우대한다는 뜻에서 각각 벼 100석을 하사받았다. 또한 721년에는 산전사어방(山田史御方)과 더불어 동궁(東宮) 학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