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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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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
정진규 시집 / 문예중앙시선 38 / 문예중앙(2015.03.30)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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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놀이 1
정진규
왼쪽 눈이 고장 나기 시작하더니 오른쪽 눈이 턱없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관음觀音 안경을 갈아 끼웠다 새로운 보행을 시작한 징조다 내 두 손은 민첩해졌다 그림자놀이를 시작했다 그림자놀이 천수千手를 두 개의 벽에 비추기 시작했다 두 개의 벽을 설치해놓았다 동영상이다 장차 천 개의 손들이 기대된다 이승의 벽과 저승의 벽을 내왕하기 시작했다 오른쪽 눈이 이승과 저승을 열었다 비로소 회사후소繪事後素다 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
그림자 놀이 2
정진규
한 곳에 잘 버려지도록 내 주검의 몸은 염殮되어 있을까 염되어 있어도 뿔뿔이 흩어져 갈 곳이 따로 있을까 부위별 분리수거되어 부산 떨며 길 곳으로 떠나고 있을까 내 천수千手는 그걸 찾고 있다 사는 동안 실로 갑갑했다 조립되어 조여져 있었다 조여져 있는 힘, 튀어나가기는 그 힘, 내장되어 있었다 죽어서도 조여져 있는 힘, 질 좋은 수의壽衣 일습一襲, 좋은 힘 생긴다는 그 윤달에 쟁여주었다가 정장으로 차려 입으시고 저승길 점잖게 떠나셔서 잘 당도하셔서 잘 살고 계신 아버지, 아버지의 몸들도 실은 뿔뿔이 흩어져 지금 각자 제 나라에 당도해 계실까 염했으니까 망정이지 당도하기도 전에 흩어져 각자 흔적도 없어지는 고초를 겪지는 않으셨을까 서둘러 새벽에 일어나 둘러보는 아버지의 봉분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네 시의 봉분들이여, 시도 혼자 몸으로 내 양성陽性만으로도 주렁주렁 분리수거되어 한 사과밭쯤 되었으면 싶다 죽어서도 조여져 있는 힘, 튀어나가는 힘, 내장되어 있었다 실은 내 분해의 천수, 쟁여 있었다
그림자 놀이 5
정진규
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도 시 자체가 이야기시켜주기를 바란다 음악은 가능하지 않은가 음악을 이해는 못해도 듣고 있으면 무엇이 들리지 않는가 들리는 음악으로 쓰인 나의 히 한 편, 가슴에ㅐ 닿고 있다고 쓴 편지 한 통 받고 싶다 비 내리는 십일월 마지막 날 밤
그림자 놀이 8
정진규
다행이다 아직은 하늘이 펼쳐져 있고 새들이 날고 있는 마을 장차 거기 묻힐 수 있으니 새들이시여, 그릇으로 잡수시던 분들보다 큰 그릇을 지니시었도다 다행이다 아직은 저 멀리 또한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고 땅을 연방 씻어내고 계시며 물고기 비늘들이 번득이고 있으시니 장차 거기 묻힐 수 있도다 물고기들이시여, 죽어서도 그릇으로 잡수시는 분들보다 큰 그릇을 지니시었도다 벌들이 오지 않는 과수원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하얗게 꽃들에게 떼거리로 수정할 때가 그래도 아름다웠다 삐뚤 사과를 궤짝에 담아 과수원째 트럭에 가득 싣고 어디로 떠난 비어 있는 마을 그릇으로 잡수시던 분들의 마을 그릇들이 찬장 속에서도 슬픈 고요로 엎어져 있는 마을
기행 1
― 하늘 비알
정진규
건드려보니 마른 배매발톱* 꽃집 속에서 아득히 흔들리는 새까만 꽃씨 소리 여문 것들의 소리가 아찔하다 깊고 깊구나 우주가 가득 들어차 있구나 매 한 한 마리 내리꽂히는 하늘 비알, 직선이 아득히 지워지고 있다
* 이른 봄부터 한여름끼지 피는 매발톱 모양의 분홍 꽃
기행 4
― 천문학 콘서트
정진규
강화도 갔다 퇴모산 별들이 맑다 천문학 콘서트가 한창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고 쓴다
기행 8
― 깻잎 향기
정진규
아침 텃밭 이슬 젖은 깻잎, 따가지고 들어서는 아내의 손, 옆에 다가가 슬몃 잡아본다 촉촉하다 열리는 길이 보인다 깻잎 향기로
기행 12
― 우듬지들
정진규
들판의 꽃, 풀, 나무, 제일 서열은 언제나 꽃이 되는 까닭이 수상하다 바로 그 꽃이 되는 것도 그러하다 스멀거린다 번진다 대여大餘* 선생의 통영 앞바다는 더욱 번져 푸르다 또한 저 푸른 우듬지들이 우주 곡선들이 밑줄 그어놓은 자리, 그 색깔들 영롱하게 서로 다른 그곳, 그곳에 가시느라고 이다지 총동원되시었다 해마다 이런 시간 상면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이다
* 김춘수 시인의 아호
규칙위반
정진규
자네는 오른손이 무사하지 않고 나는 왼쪽 눈이 무사하지 않다 자네는 오른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 언제나 소주잔을 정확히 엎지르고 나는 왼쪽 눈이 뿌옇게 안개가 끼어 새벽 산책길 좌측통행이 정확히 우측통행이 되고 있다 규칙위반이다 무섭구나 업이여 이 한쪽씩 규칙위반이 우리는 불안하지 않다 이 한쪽씩의 무너진 개성에 대하여 새벽마다 감사드리고 있다 하나씩 새 세상 열게 되었으니 합해서 또 하나씩 열게 되었으니 아득한 저 구석에서 네 오른손처럼 사실은 솔직한 새 몸 하나씩이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게 보인다 가련타 무사하지 못한 오른손과 무사하지 못한 왼쪽 눈이여
연꽃 피었다
정진규
찬탄을 두려워하라 함부로 곁에 가는 것이 나아니다 연꽃들을 두려워하라 빠진다 그 곁에서 네가 지워지고 있는 순사를 읽을 줄 알아야 하리 절대의 그늘을 두려워하라 나의 자존은 비겁하다 나는 나의 하얀 여백을 견디지 못한다
젖꼭지
정진규
엄마아, 부르고 나니 다른 말은 아 잊었다 소리는 물론 글씨도 쓸 수가 없다 엄마아, 가장 둥근 절대여, 엄마아만 남았다 내 엉덩이 파아란 몽고반점으로 남았다 에밀레여, 제 슬픔 스스로 꼭지 물려 달래고 있는 범종의 유두乳頭로 남았다 소리의 유두가 보였다 배가 고팠다 엄마아
은신처의 밤
정진규
사랑이 곤궁해진 내 은신처의 밤, 마루 밑 내 연장통의 연장들은 녹슬어가고 있다 어디 일하러 갈 곳이 없다 노숙하고 있다 반쯤은 고장 난 사용불가의 것들이다 찾지 마시라 당당했던 애 은빛 몽키스패너도 이미 오래전에 실종 신고를 스스로 냈다
날이 밝으면 내가 더욱 보이지 않는다 나를 지운다 오후 세시의 갈증이 비를 부르고 몇 개 남은 삶은 감자를 목메이게 먹으며 공책에 내가 베끼는 어휘들은 계속 어눌하다 반쯤 은 네게도 송신되지 않는다 해독되지 않는다 땅거미 질 때까지 남은 시간을 지울 연장이 없다 무작정으로 은신 중이다
그나마 다시 밤이 오면 내 은신처의 밤은 은신처다워진다 노숙인다워진다 보이지 않는 내가 보인다 은신의 내가 보인다 밤하늘의 별들이 보인다 은신들이 반짝거린다 내 은신처의 밤에 빛나는 별들아, 송구하다 너희들이 내 고장 난 연장들이다 밤하늘의 노숙인들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이시다
순산順産
정진규
초록 함성 첫 빗장이 열릴 때 맺히는 가장 충실한 살 이슬이 있다 항렬을 분별하는 첫 이슬의 맺힘이 있다 비쳤다고 한다 우주의 빛이기 때문이다 새 별 태어날 때 잡초들의 끝에 내리는 이슬의 몸이 가장 충실하다 잡초들은 제 몸으로 제 몸의 까만 씨앗을 뿌린다 종순從順을 알기 때문이다. 그걸 보려고 올해는 모종을 내지 않고 파종播種을 했다 씨앗을 뿌렸다
빛으로 두둘겨 패서
정진규
보이는 세상이 보아내지 못하던 안 보이는 세상을 내가 보아내게 되었다 안 보이는 세상에서도 자꾸 보이는 세상의 시가 보인다면 이건 틀린 시가 아니겠는가 틀린 세상이 아니겠는가 안 보이는 세상의 시가 보여야 마땅하다 그런 눈을 지니게 되었다 안 보이는 세상의 눈을 뜨려고 나는 요즈음 빛으로 두둘겨 패서 새 빛을 깨어나게 하고 있다 세상에 얻어맞아 멍든 내 눈 빛이니 빛으로 풀어내야 한다고 했다 두둘겨 패서 멍 풀고 있다 명적鳴鏑의 작살이 자욱하게 꽂히고 있다 이 고맙고 아름다운 폭력이여! 레이저여! 점성술가占星術家에게 찾아가 그 정체를 물었더니 그게 별빛의 원리라 하였다 별빛 자양은 철야를 빠듯이 통과한 빛의 태胎라 하였다 슬플 것 없구나 나는 지금 별빛을 만들고 있으니, 빛으로 두들겨 패서 방짜를 만들고 있으니, 안 보이는 세상의 시를 만들고 있으니
한일병원으로 간다
정진규
아침에 일어나 아픈 곳이 없으면 나는 나를 의심한다 지난 저녁 나의 사랑을 의심한다 지난밤 써 놓은 내 시가 믿어지지 않는다 일을 뻐근하게 끝낸 뒤라야 개운하다 몸이 풀리는 아픔이 온다 개운한 몸살이 온다 이후 아프지 않다는 말을 의사 앞에서 나는 쓴 적이 없고 아프지 않으면 내사 섭섭하다 실직을 한 것 같다 내가 의사의 문진에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답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때 그는 서운해 하는 것이 사실이다 자꾸 묻는다 내 몸에 할 일을 찾는다 나는 갈 곳이 있다 나는 오늘도 한일병원으로 간다 내가 몸시詩를 쓰기 시작한 지 17년 전부터 나는 한일병원으로 갔다 17년 전부터 나는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연꽃 피는 날
정진규
저마다 제 주인 한 분씩 모시고 있는 꽃들이 잇다 보체리 연못 연꽃 필 때 와 보시면 그분들의 환영을 받으실 수 있다 화안해지실 수 있다 가득한 부처님들이시다 거기 오신 분들 벌써 자마다의 꽃, 저마다의 부처님을 배알하시느라고 눈이 한껏 밝아지고 있으시다 분주하시다 연화대로 꽃 피시고 있다 아무래도 말을 못 참겠다 이 연못은 내가 파고 내가 심어 가꾼 연못이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물론 내 연꽃 내 부처님은 저 모서리에 아득히 숨어 계시다
한소식 만진 날
정진규
바뀌는 내 목소리, 색깔, 들리는 한소식, 떨리는 목젓, 속소리, 마침내 천둥의 하늘로 올려주시네 좌악 내리는 소나기의 손에 좌악 담기는 한소식 손! 그때 왜 슬픔이 몸으로 함께 쏟아져 내렸던 것일까 한소식은 슬프게 온다 비에 젖는 우리 집 느티께서 몸으로 눈짓으로 일러주는 한소식, 깨닫는 말씀으로 일러주는 저분의 한 소식, 그 분 몸에 나 홀로 비 맞고 기대 서 있다 말씀에 기대는 겸허를 눈치채고 있다 수척한 글씨를 짐작하고 있다 한소식 체體는 수척하다 시수詩瘦다 한소식 만진 날 ‘육肉달月’이 몸으로 뜨고 여자들의 바다가 때 묻은 기름바다 그 대천 바다로 뒤채길 때 저도 기름 젖어 함빡 젖고 나서야 속 하늘 날아가는 저어새의 임계속도를 보고 말았다 비 내리기 직전直前 느티께서 보여주셨다
설거지
정진규
요즈음 우리집 설거지를 내가 맡아하면서 그것도 석달 열흘이나 지나서야 내가 터득해가고 있는 게 있다 그릇은 씻어져야만 그릇이다 그릇은 깨어져야만 그릇이다 위대한 나의 동사動詞여, 나를 설거지하고 있다
참음, 교활한
정진규
왜 참았을까 참고 참다가 사랑을 참아둔 여자에게 심장이 아픈 여자에게 병문안 전화를 걸고 나니 그렇게 시원했다 자유의 돌기가 온몸에 오소소 솟았다 큰 빚을 갚은 기분이어서 죄를 탕감한 느낌이어서 오늘 하루가 개운하게 저무는 저녁노을을 아주 좋은 색깔로 내가 칠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참았을까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실천이었을까 나는 결코 윤리적이지 못하다 그런 참음이 아니었다 참음이란 유보留保다 이런 미결이 이런 미수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을까 직전直前의 위기까지 가야만 왜 직성直星이 풀릴까 나를 부풀게 할까 단언하자면 내 참음의 질은 범죄의 참음, 교활한 도망침, 나는 그 맛을 즐겨왔다 꽃 피는 것들의 곁에서 둥근 우주로 부풀고 있는 것도 그러하다 죄를 짓고 섰다
손가락질
정진규
우리 큰형님 용산중학교 동창생 그 친구 나를 한 번도 바로 바라보지 못하였던 그 손가락질 친구 마침내 세상 뜨셨다는 부음을 받았다 거기서는 어디를 손가락질하고 있을까 용산중학교 교복 오른팔 소매 속에서 평생 시리고 저리게 감춰져 있었던 그 손가락질 하나 그 역사가 마침내 묻혔다 장렬했으리 그 손가락질로 의용군 붙잡혀잔 내 큰 형님 숨어 있던 외갓집 마루 밑 역사고 묻혔으리 장렬했으리 실종 신고된 내 큰형님, 미은 이 세상 큰형님들의 손가락질 역사가 거기 함께 묻혔으리 장렬했으리 거기서는 어디를 손가락질하고 있을까
DMZ 삼대
정진규
소리치지 마라 시인이여! DMZ를 기억하라고 나의 병력을 뒤적거릴 필요도 없다 내 군번軍番은 0029760이다 1960년대 초입이 나의 시력이며 그리로 통하는 동행이 DMZ철조망 병력이다 나의 시력 초입은 연병장이다 ‘병사의 새벽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우리네 가슴 속에 한 번쯤 울렸어야 할 쟁쟁한 새벽의 음성音聲’, 나팔소리가 울린다 훈련병은 졸병이 되어 향로봉까지 올라가 DMZ를 바라보며 M1 소총을 잡은 손이 얼었다 지난 겨울은 입대한 손자 면회를 다녀왔다 철원 문혜리에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고라니와 멧돼지가 건너다니는 북한 건천리가 하얗게 건너다 보였다 나의 DMZ는 삼대째다 나의 DMZ는 나의 몸시詩다 내가 맞던 그날의 눈을 맞으며 한밤의 철조망을 완전 무장으로 나의 어린 손자가 돌아왔다 어느새 푸른 청년의 그날의 내가 되어 돌아왔다 할아버지 DMZ와 손자DMZ가 함께 문혜리의 눈길을 걸었다 그가 좋아하던 통닭을 먹여주는 동안 그의 군복에서 지금도 1960년대 박봉우 시인의 시「휴전선」이 흘러 나왔다 갇혀 있는 막혀 있는 짙게 늙은 자유의 냄새가 거기 얼어 있었다 자유가 왜 이렇게 철조망에 익숙할까 자유를 한번 그려보라고 하면 이 나라 아이들은 어김없이 배경으로 철조망을 그려 놓을 것 같다 그렇게 늙은 이 땅의 슬픈 자유여, 지난 겨울엔 DMZ에 지원 근무하고 있는 손자를 면회 다녀왔다 가서 함께 눈을 펄펄 맞고 왔다 늙은 DMZ, 아직 이 땅에서 고라니와 멧돼지와 산비둘기만이 자유의 냄새가 났다
환희라는 꽃
정진규
풀릴 때가 제일 위험하다 해동 때를 대비하라 제일 위험할 때가 환희의 시절이니라 큰 돌이 무작정 구른다 도처에 푸른 멍투성이다 너를 만날 때가 네가 다녀갈 때가 제일 위험하다 위험의 향기를 아느냐 벌써 초록 먼동이 번져오기 시작한다 풀내를 맡는 방식을 나는 안다 나는 물들 줄 안다 죽음의 암내가 풍긴다 상여 소리 넘어간다 봄은 날렵하게 죽음을 입력한다 화훼사전花卉辭典에도 없는 풀꽃, 환희라는 이름의 꽃, 너의 이름을 환희라 지었다 나는 너에게 입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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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담금질이여,
새벽 겨울 방죽으로 갔다 꽁꽁 얼어 있었다
만당滿塘으로 연꽃 그토록 채우더니
소름 꼭지까지 가득가득 식어 있는 물의 금강金剛이여
어제는 눈 내린 겨울 솔숲으로 갔었다
저를 차곡차곡 쟁이고 있는 냉기,
싸아한 금강이여,
태胎를 끊던 그 순간도
금강으로 그렇게 식지 않았던가,
벼락이여, 첫 번째 이별이여
을미년 2015년 새봄
석가헌에서
정 진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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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규 詩集 [※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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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비)白碑의 시학과 금강金剛의 언어
- 직전 시집에 대하여
오 태 환(시인)
선생님, 안녕하신지요. 삼동 설한雪寒의 뒷모습이 슬며시 비쳤나 싶었는데, 벌써 봄기운이 소맷자락까지 적시는 듯합니다. 석가헌 뜰의, 선생님께서 손수 품계를 매기신 산수유 영산홍이며 들국 같은 초목들도 저마다 눈엽嫩葉을 매달고 화판花瓣을 건사할 채비로 분주하겠습니다.
아침에 발간한 시집『무작정』의 자서에서 선생님은 “≪현대시학≫25년의 내 역정을 마감”하며 “그 백비白碑로 이 시집을 대신한다”고 쓰셨습니다. 삶의 한 매듭을 덜컥 마주한 소회의 황황함과 신산스러움을, 무욕과 겸허의 메타포로 스스로 에둘러 위로하시는 듯이 읽히기도 합니다.
‘백비白碑’는 대개 선비의 염치와 개결을 표상해 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백비’라는 비장하기까지 한 언표에서 발견한 것은 선생님의 시공간을 종심으로 간섭하는 사유의 한 형식일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의 표현법을 빌리면, 바로 ‘비어 있음의 충만’에 닿아 있겠지요.
선생님의 초기시「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에 보이는 빗소리의 “비애의 어깨들”과 “차가운 한 잔”술에 비장된 황막한 실존적 외로움은, 몸시․알시․율려 연작이 내통하고 연대하는 삶과 우주의 비밀스런 낭하를 거치고, 종당에는 시집『무작정』에 이르러 자연의 법法과 도度에 푸른 맨발로 다가서려 합니다.
비명碑銘이라는 것은 결국 치장하고 남기려는 욕망의 표현입니다. ‘백비’는 치장하고 남기려는 욕망을 뛰어넘는 어떤 정신의 가열한 순도純度를 지향합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충만할 수 있다’는 명제의 냉랭한 물증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노자의 ‘무위無爲’를 인정하지 않을망정, 계절의 변전에 따라 부르지 않아도 비와 눈이 오고, 시키지 않아도 꽃이 피고 지는 자연의 이치에 육박합니다. 올해로 50성상星霜’ 선생님의 시업에 대한 시업을 ‘백비의 시학’으로 간추릴 수 있다면, 『무작정』에서 마주치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우레 같은 윤리학은 필연일 수밖에 없습니다.
얼음담금질이여, 새벽 겨울 방죽으로 갔다 꽁꽁 얼어 있어다 만당滿塘으로 연꽃 그토록 채우더니 소름 꼭지까지 가득가득 식어 있는 물의 금강金剛이여, 어제는 눈 내린 겨울 숲속으로 갔었다 솔잎 바늘로 저를 촘촘하게 누벼 빳빳이 자알 식어 있었다 저를 채곡채곡 쟁이고 있는 냉기, 싸아한 금강金剛이여, 태胎를 끊던 그 순간도 금강으로 그렇게 식지 않았던가 벼락이여, 첫 번째 이별이여
-「이별」전문
이 시는 연꽃을 매개로 하는 유미적 가치의 배후에 대한 탐험을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화자는 아름다움의 이면에 도사린 엄중한 내핍과 화려한 견인堅忍을 목격합니다. 화자에게 그 감동은 ‘벼락’처럼 황홀한 충격파와 다르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생애의 첫 이별이라는 벼랑 끝에서 만날 수 있는 절박한 깨달음의 자세를 환기합니다.
선생님의 뜻과 무관할지라도 제가 한편 여기에 추리한 것은 시와 언어를 향한 선생님의 냉엄한 기개와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7월 연꽃의 “만당滿塘”한 개화를 시로 본다면 한겨울 못의 결빙은 언어의 부단한 조탁을 의미하겠지요. 그 과정이 “얼음담금질”로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겨우내 “얼음담금질”을 거친 견고한 결빙이 한 편의 시로 거듭나는 찰나는, 그것이 ‘금강金剛’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시는 현금에 이르기까지 그 기氣와 운韻의 여름숲처럼 도도한 생동生動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발묵潑墨은 여전히 종잇장을 뚫을 듯하고, 설채設彩는 여전히 늠름한 향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까닭의 많은 부분을 ‘금강金剛’의 언어를 꿈꾸는 선생님의 치열한 ‘얼음담금질’에서 찾습니다.
선생님께서 발굴하신 언어 가운데 ‘생가生家’ ‘가담加擔’ ‘명적鳴鏑’ ‘비백飛白’ ‘본색本色’‘내색內色’ 등은 선생님다운 언어의 각법刻法을 채현하고 있습니다. 결코 낯설지 않은 낱말일지언정 이들은 선생님 시의 얼개와 질서 안에서 애초의 뜻 너머로 의미주파수를 확장합니다. 그리고 그 획들의 섬세한 윤곽과 소리맵시의 그늘들이 어울리면서 언어미학의 새 경험을 선사합니다. 모국어의 공간에서 한갓 진부하게 여겨질 수 있는 한자어가 예술의 질료로 오연히 성공하는 흔치 않은 사례입니다. 이는 선생님 시작법의 매우 두드러진 특징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올해는 선생님이 데뷔하신 지 쉰 해가 됩니다. 또 시집 『무작정』말고도 ‘율려정사律呂精舍’라는 언어의 집도 새로 마련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선생님의 시업이 석가헌에 드리운 늘 젊은 느티의 그늘처럼 그 자리에서 늘 젊은 시와 언어의 빛나는 파라곤이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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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탕에 그리는 천 개의 그림자
전 형 철(시인)
1. ‘예감’의 순간
역사는 균질적이라고 믿어지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여러 변곡점에 의해 기억되는 이미지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이미지, 또는 인상印象이란 역사를 추체험적으로 그려내 세계를 재구성하고, 세계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역사는 선형적일 수 없다. 이는 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한 예술적 생生이 균등한 높낮이를 가지고 진행되거나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거기에는 분명한 계기가 있고 그에 대한 시인의 다각적 경험이 예술적 환금성에 의해 규정될 때 다시 ‘사건事件’으로 재명명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건은 시인의 시 전반에 걸쳐 다시 새로운 추동력으로 작용해 판 전체를 흔들어버리기도 한다. 물론, 그 충격 자체의 경중은 존재할 터이지만, 과정은 매번 파국에 이른다는 자기결단을 필요로 한다.
순간은 어디로부터 오고 주제 자신에게 어떻게 판단되고, 결과로 도출되는가는 온전히 시인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그것은 외부든 내부이든, 감각의 중심에서 회오리치게 마련이다. 이 회오리를 갈무리하는 방식이 시인의 시세계의 격절을 이루고 하나의 쇄신을 담보하게 되는 것이다.
시력詩歷 반세기의 시인의 시를 살피면서, 문득 하나의 충격파를 떠올리게 된다. 이 묵직함과 진정성은 익히 우리 시단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적으로 자신의 예술적 태도를 의사擬似하고 희박함의 절정에서 몸부림치는 외침과는 다른 결심과 발원이 시 편편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지금은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애틋한 ‘예감’을 내재하고 있다. ‘한정적인 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라는 생각 앞에 시인은 “이승과 저승을 가볍게 내왕”한다고 말하고 있다. 수선을 부리지 않고 그렇다고 죽음을 완강히 부인하지도 않으면서 “저 곳에 대한 응답”마저도 담담하게 수신하는 자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을 끝내는 하나의 시작법으로 부려내는 모습을 시인은 겸허한 ‘예감’으로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2. 희바탕, 비로소 시를 말할 만하다
정진규 시인의 새로운 보법을 살피기 위해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회사후소繪事後素이다.『논어』팔일八佾편에는 미인의 모습을 그린 시경의 대목에 대한 제자인 자하子夏와의 문답이 나온다. “곱게 웃는 모습에 보조개 예쁘고 아름다운 눈동자 흑백이 분명하네. 흰 바탕에 고운 무늬를 들인 듯하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라는 자하의 물음에 대해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뒤에 할 일이다”라는 공자의 대답이 바로 회사후소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자하의 “예는 그 후”라는 답에 공자가 자하에게 “나를 일으키는 자는 그대로다. 비로소 너와 함께 시를 말할 만하다”라고 답한 점이다. 물론 원문을 이론적 측면에서 접근하자면 예禮와 인仁의 선후와 강조점에 대한 분석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를 예술적, 시적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의 원형적 초발심初發心으로의 귀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본질을 차치하고 형식에 치우치게 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시라고 볼 수 없다는 원론적인 인식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반세기의 시업을 통해 시인이 다다른 깨달음 또한 이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시에 대한 근원, ‘시다운 시’의 그 태극과 조화에 대한 성찰이 시인의 새로운 믿음이 된 것이다.
왼쪽 눈이 고장 나기 시작하더니 오른쪽 눈이 턱없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관음觀音 안경을 갈아 끼웠다 새로운 보행을 시작한 징조다 내 두 손은 민첩해졌다 그림자놀이를 시작했다 그림자놀이 천수千手를 두 개의 벽에 비추기 시작했다 두 개의 벽을 설치해놓았다 동영상이다 장차 천 개의 손들이 기대된다 이승의 벽과 저승의 벽을 내왕하기 시작했다 오른쪽 눈이 이승과 저승을 열었다 비로소 회사후소繪事後素다 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
-「그림자놀이1」전문
연작시 첫 작품에 해당하는 이 시는 시인의 새로운 귀환에 대한 충실한 안내서로 읽힌다. 시인에게는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왼쪽 눈이 잘 보이지 않자 오른쪽 눈이 더 밝아졌다는 점이다. 이는 한 눈이 밝아졌다고 다른 눈이 좋아졌다는 일차적 의미라기보다는 한 눈의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새로운 것들 또는 기시하던 것들을 정성스레 보게 되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어쩌면 사소할 수 있는 감각의 변화를 통해 시인은 그것을 사건으로 인지하고 “새로운 보행을 시작한 징조”라 말한다. 신체의 불편함에 무너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건을 받아들임으로써 시인의 한 눈은 이제 이쪽이 아닌 다른 한쪽으로 트이게 된다. 때문에 시인은 “두 개의 벽을 설치”할 수 있었고, 이승과 저승에 대한 탈경의 놀이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인에게 이것은 시적인 것 이전의 시에 대한 운명적 귀환으로 다가온다. 회사후소의 정신 아래 시인은 실체가 하얀 그래서 하나이며 모두인 우주. 그 무엇도 아니면서도 모든 무엇인 우주의 본체를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천상 시인인 그는 천 개의 손을 가지 보살처럼 실체에 대한 만남을 수행하게 된다. 그럼에도 시인이 그것을 “놀이”라고 표현한 것은 대상을 결박하고 제멋대로 뭉개버리는 위악적 태도를 지양하는,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화자 우월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화두에 의거한 것이다. 집착하지 않고 우주의 운행을 바라보는 자에게 시는 하나의 움직이는 놀이가 되는 것이다. 목적성을 지닌 노동이 아니라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놀이, 그리고 감히 실체라 하지 않고 “그림자”라 말하는 시인은 비로소 시를 말할만하다고 낮은 자세로 겸사하고 있는 것이다.
시,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어도 시 자체가 이야기시켜주기를 바란다 음악은 가능하지 않은가 음악을 이해는 못해도 듣고 있으면 무엇이 들리지 않는가 들리는 음악으로 쓰인 나의 시 한 편. 가슴에 와 닿고 있다고 쓴 편지 한 통 받고 싶다 비 내리는 십일월 마지막 날밤
-「그림자 놀이5」전문
시인은 시 쓰기 자체를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닌 시 자체에 의한 것이라 말한다. 이는 나와 대상의 분리적 인식이 아닌 불이不二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라는 강력한 주체의 힘을 내려놓는 순간 시는 제 스스로 말하고, 움직이며 창조되는 활물活物이 되는 것이다. ‘시가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다’는 인식은 바로 ‘시를 쓴다’와 ‘나’라는 주체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부작용을 반의하며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시 자체가 하나의 음악과 같이 되는 것을 환기하고 있다. 이것은 곧 율려律呂의 사상과 닿아 있다. ‘음’과 ‘양’의 우주적 질서가 내재되어 있는 소리, 소우주인 인간의 내면에서 작용하고 있는 우주의 리듬과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시가 나아가야 할 길임을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와 그 울림의 음악이 결합되었을 때 다른 사람과의 교감이 가능함을 시인은 “가슴에 와 닿고 있다고 쓴 편지”라는 구절을 통해 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결국 시인이 의도한 흰 바탕은 인간의 우주적 내면과 이어지며, 시는 바로 그 자장 안에서 스스로 놀며 운동하고 있는 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천수千手의 동력과 맨살의 사랑
연작시 일곱 편의 부제는 “이제 천 개의 손이 남아 있다는 예감이다”이다. 시인의 말처럼 천 개의 손은 시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천 개의 시란 결국 천 개의 대상을 보고 매만지고 그것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천 개의 손은 긴장과 탄력을 읽지 않아야 가능한 것이다. 음과 양을 분절하지 않고 물결의 문양을 이루는 것도 그 어느 쪽도 ‘음’, ‘양’이라 갈라 단정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될 수 있다는 가능태를 담지해야 한다는 주문이 오늘의 태극문양의 핵심인 셈이다. 정진규 시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삶과 죽음의 분별마저도 하나의 움직임으로 인식하고 그로부터 타진되는 전율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한 곳에 잘 버려지도록 내 주검의 몸은 염殮되어 있을까 염되어 있어도 뿔뿔이 흩어져 갈 곳이 따로 있을까 부위별 분리수거되어 부산 떨며 갈 곳으로 떠나고 있을까 내 천수千手는 그걸 찾고 있다 사는 동안 실로 갑갑했다 조립되어 조여져 있었다 조여져 있는 힘, 튀어나가는 그 힘, 내장되어 있었다 죽어서도 조여져 있는 힘, 질 좋은 수의壽衣 일습一襲, 좋은 힘 생긴다는 그 윤달에 쟁여두었다가 정장으로 차려입으시고 저승길 점잖게 떠나셔서 잘 당도하셔서 잘 살고 계신 아버지, 아버지의 몸들도 실은 뿔뿔이 흩어져 지금 각자 제 나라에 당도해 계실까 염했으니까 만정이지 당도하기도 전에 흩어져 각자 흔적도 없어지는 고초를 겪지는 않으셨을까 서둘러 새벽에 일어나 둘러보는 아버지의 봉분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내 시의 봉분들이여, 시도 혼자 몸으로 내 양성陽性만으로도 주렁주렁 분리수거되어 한 사과밭쯤 되었으면 싶다 죽어서도 조여져 있는 힘, 튀어나가는 힘, 내장되어 있었다 실은 내 분해의 천수, 쟁여 있었다
-「그림자놀이2」전문
이 시는 스스로의 주검을 통해 우주에 자재自在한 어떤 힘에 대한 전언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검”과 “몸”을 등가로 연결시킨 점도 흥미롭지만, 그것이 결국은 우주의 한 물질로써 “부위별 분리수거”되는 것이라는 주해 또한 시인의 통찰이 발견되는 지점이다.
인간은 ‘조립’되어진 존재이고 그것을 지탱하는 것은 “조여져 있는 힘”과 “튀어나가는 힘” 때문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립이 아니고 힘의 내장에 있다고 보인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힘에 대한 성찰이 이 시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악력과 척력, 또는 원심력과 구심력은 그 자체로 힘의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함께 모둠을 이뤄 균형을 이룰 때 의미가 있는 것임을 시인은 보여주고 있다. 동력 그 자체가 아니라 동력이 이루는 조화로움, 그리고 그 힘이 내장되어 있는 것, 그리고 그 시스템 안에 소프트웨어로 기능하는 천수의 총체가 시인이 새롭게 발견의 시의 복원저깅고 실제적인 모습인 것이다. 그것은 시인 자신에게도 대상에게도 우주 전체에게도 “쟁여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직후 일단 언 송장으로 있다가 땅속에 묻히게 될 것이다 맨몸 언 송장을 더 원한다 살 닿고 싶다 불은 싫다 얼음 봉분하나 요행 지어 놓았다 그간 살펴보니 미이라를 원하는 것이 내 마음의 정체正體였다 그간 시베리아에 혼자서 다녀왔다 좋은 얼음 만나고 왔다
-「그림자놀이」전문
사랑은 살 대패질이다 밀리는 삶의 살 대팻밥 너와 나의 쌓이는 대팻밥 뼈까지 갈 작정이다 선명해지는 살결, 환해지는 뼈마디에 뭐라고 쓰고 싶다
-「그림자놀이7」전문
그리고 시인은 죽음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말한다. 죽음이 하나의 강력한 사건이지만 시인은 그저 냉동실에 있을 3일과 매장을 “직후 일단 언 송장으로 있다가 땅속에 묻히게 될 것이다”라며 담담하고 건조하게 서술하고 있다.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살 닿고 싶”은 맨몸이기 때문이다. 맨몸이란 어떤 가식이나 꾸밈없이 자신을 보전하는 일이고 타인과의 교섭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을 상징한다. 시인은 그렇게 미이라가 되는 것이 “내 마음의 정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소멸의 불이 아니라 기다림과 보존의 “좋은 얼음”이 그가 생각한 사랑, 곧 대상애對象愛인지도 모른다.
이는「그림자놀이7」에서 보다 명확하게 불거진다. “사랑은 살 대패질이다”는 잠언적 명제는 시인이 생각하는 관계와 사랑. 천 개의 손의 본질일 것이다. 껍질을 벗기고 존재의 맨얼굴을 비빌 때, 깎아지면서 하얗게 “선명해지는 살결”과 “환해지는 뼈마디”야말로 진정한 사랑에 대한 자세이자 준비물이며 “시다운 시”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4. 혼자서 열리는 것들
극단과 파국은 체험한 자만이 경험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법이다.
오랜 세월 시의 길을 오롯하게 걸어온 시인의 시업이 이제 새로운 예감과 응답으로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정진규 시인의 새로운 시편들이 정위定位한 자리는 ‘흰 바탕’의 무변측후의 광활한 우주의 세계이며 ‘그림자놀이’는 우주의 동력이란 정체에 대한 응답으로 거듭될 것이다.
시인은 닫힌 문을 여는 것은 자기가 아니고 ‘혼자서 저절로 열리는 문’(「그림자놀이6」)이고 ‘혼자서 펼쳐지는 훈민정음해례본’ 그 자체라고 우리에게 나직한 미소로 말하고 있다. 눈 내린 후의 송백의 푸름을 생각하는 세한歲寒의 마음으로 시인의 ‘그림자놀이’ 천 번째 시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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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하이데거의 지적대로 ‘손’은 내 절대적 존재다. 내가 ‘시’를 쓰다 보면 내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가 시를 쓰게 하는 운동의 정체正體가 된다. 그 ‘나’와 시의 정체가 바로 나의 몸, ‘손’이다.
내 나이 여든을 바라보고 있다. 한계의 나이지만 탄력과 긴장을 잃지 않는 상태의 절대적 존재, 시다운 시에 응답할 수 있는 예감을 가지고 있다. 화자 우월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평소 나의 화두에 충실코자 하는 그 자체다.
[그림자놀이 1]에 보면 나는 이제 이승과 저승에 가볍게 내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드나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겁 없이 삶을 굴신자재屈伸自在하고 있다. 죄송하다. 두 개의 벽을 설치해 놓고 있다. 마침내 회사후소繪事後素다. 거기 "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라고 고백하고 있다. 거기 이승과 저승의 동영상을 내 천 개의 손이 비추는 것이 [그림자놀이]다.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곳에 대한 응답만이 아니라, 저곳에 대한 응답도 나는 받고 있다. 내 손이 종전의 시를 쓸 때 받던 전율과 다른 응답을 받고 있다. 실체가 있는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다. 겸허의 뜻으로 속 그림자를 깊고 깊게 드리우고자 하였을 뿐 그 그림자는 날로 깊어가고 있음을 확인한다. 비로소 나는 소통의, 아포리아의 나이에 들어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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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규 시인∥
∙ 1939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 1964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 제1시집 『마른 수수깡의 평화』 이후 『有限의 빗장』,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매달려 있음의 세상』, 『비어 있음의 충만을 위하여』, 『연필로 쓰기』, 『뼈에 대하여』,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몸詩』, 『알詩』, 『도둑이 다녀가셨다』, 『本色』, 『껍질』, 『공기는 내 사랑』, 『律呂集·사물들의 큰언니』, 『무작정』 등 17권의 시집과 여러 권의 시선집이 있다.
∙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 공초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이상시문학상, 만해대상, 혜산박두진문학상, 대한민국문화훈장수훈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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