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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값보다 낮았던 노비의 몸값 : 역사학의 관점 vs 경제학의 관점
● 말 값의 절반도 안됐던 노비의 몸값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시대에도 노비의 몸값은
말, 소와 같은 짐승보다 높지 못했다.
흔히 노비를 '말하는 짐승'이라 할 정도였다.
그래서 노비를 셀 때도 -명(名), -인(人)을 쓰지 않고
가축이나 시체를 셀 때 쓰던 -구(口)를 썼다.
조선 초기의 성군이라는 세종과 성종대,
후기의 태평치세라는 영정조대에도
노비들의 처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체 인구의 10% 남짓한
소수의 양반들이 오로지 글공부나 하고
국가 백년지대계 운운하는 동안
전체 인구의 절반을 웃돌았던
조선시대의 '말하는 짐승'들은
노동에 종사하며, 주인의 필요에 따라 물건처럼 팔렸던 것이다.
노비는 인격체라기보다는
양반들에게 있어서는 재화에 가까웠다.
노비들은 심지어 말보다도 값이 쌌다.
1398년 태조에게 올린 형조의 보고를 보면 내용이 이렇다.
"요즘 노비의 몸값은 비싸봐야 오승포 150필입니다.
그런데 말 값은 4,5백필에 이르고 있습니다."
"어허, 어쩌다 가축을 사람보다 중하게 여기게 됐는가!"
"원컨대, 지금부터는 노비의 몸값을 높이셨으면 합니다.
젊은 노비들은 4백필,
늙거나 어린 노비들은 3백필로 하심이.."
"그럼 그렇게 해."
라며 노비의 몸값을 올리고자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장에서 통용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전쟁이 발발하면 노비의 값은 급격히 폭락했다.
▲ 북한 자료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는
말 한 마리와 노비 열명을 맞바꿨다고 할 정도였다.
임진왜란 당시 말 한마리 값이 은자 열냥 정도라고 했으니
노비 한명의 값이 은자 한냥에 불과했던 셈이다.
그런가하면 상속을 할 때도 노비는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던 재산의 일종이었다.
▲ 노비 문서
마음대로 처분하고 나눠줄 수 있는 대상이었기 때문에
당시 노비들은 주인집의 상속에 즈음하여
부모 자식간에 생이별을 하기도 다반사였다.
● 조선 후기 인신매매의 극성
노비 매매를 빙자하여 멀쩡한 양인을 납치하여
노비로 팔아먹는 인신매매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숙종 44년(1718년)에 사헌부가 올린 장계를 보면
이러한 인신매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북쪽 지방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지역이어서
노비의 값이 남쪽 지방보다 몇 갑절은 더 비싸,
이 지역에서 노비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신매매범들이 남쪽 내륙으로 내려와
양민과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 유랑민(도망 노비)들을
잡아다가 북쪽 지방에 팔아먹는 일들이 횡행했다.
이에 사헌부는 임금에게 청하기를
도망간 노비는 일일이 찾아서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고,
불법으로 인신매매한 장사꾼은
수소문을 하여 잡아들여야 한다고 간했다.
● 노비의 몸값이 낮은 것은 경제적으로 볼 때 당연하다
역사학에서는 노비를 인격체로 간주하여
당시 말 값보다 낮았던 상황을 비탄해한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이' 냉정한 경제학에서는
노비는 곧 노동력 그 자체로만 이해한다.
당시 노비의 시장 가격이
소나 말에 비해 1/3 수준이었다는 것은
그만큼 노비가 효율성에 있어
소나 말에 비해 1/3의 가치 밖에 못 됐다는 뜻이 된다.
물론 말귀를 알아들었던 노비는
말, 소보다 힘은 세지 않아도, 고급 인력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노동력만을 가지고는 우열을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유지비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말은 연간 30만원의 유지비가 들었지만
노비의 경우 연간 150만원 가까운 유지비가 들었다.
(화폐 단위는 모두 이해가 쉽게 현재가치로 바꾼거임.)
노비는 가축에 비해 식비도 훨씬 많이 들었고
의복비 + 주기적으로 품삯도 지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로 효용 대비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말, 소보다 노비의 값이 낮았던 것이고
이걸 두고 단순히
당시 인권이 말보다 못했니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공장에 20억짜리 기계가 있는데
종업원은 앞으로 평생 퇴직할때까지 일해야 10억밖에 못 받는다면
현대 사회는 인간을 기계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것일까?
마찬가지다.
오히려 시장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가격을 애써 부인하고
노비 몸값의 하한선을 강제로 규정하게 되면
양반들의 노비의 수요는 줄어들고
노비들의 공급은 늘어나게 되어,
암시장에서 노비들은 훨씬 낮은 값으로 거래가 되게 된다.
(경제학에서 흔히 말하는 최저가격제의 폐단이다.)
인신매매 사건의 경우도 그렇다.
재화의 가격이 지역마다 차이가 나면
필연적으로 시세차익을 위한 경제행위(?)가 나타난다.
조선이 노비를 물건으로 인식하던 사회였다면
인신매매와 같은 불상사가 나타나지 않도록
전국적으로 가격을 균일하게 해야 했을 것이다.
북부 지방에 양반의 수에 비해
노비가 적었던 것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관료들의 낮은 급료
● 조선시대 관료들의 월급은 매우 낮았다
조선시대에 관리가 된다는 것,
즉 국가에서 녹을 받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양반임은 물론
자신이 속한 가문의 자손들이 앞으로 4대 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해도
떳떳하게 양반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보증수표였다.
▲ 과거급제
그렇다면 당시 관료들은 얼마나 받았을까?
그런데 의외로 급료 수준은 열악했다.
속종실록에 보면 국가재정의 어려움으로
관료들의 녹봉을 줄여야 한다는 보고를 받게된다.
그러자 숙종은 이렇게 반박했다.
"우리나라 관리들은 원래가 녹봉을 적게 받고 있었는데,
여기서 더 줄이자니, 그럴 수는 없다능."
경국대전에 의하면 관리들의 월급은
총 18등급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가장 높은 고위 관료는 정 1품의 정승으로
당시 연봉으로 쌀 1백석, 면포나 비단으로 32필을 받았다.
오늘날 현재가치로 따지면
대략 연봉 5천만원 정도 되는 것이다.
한나라의 정승으로 겨우 품위 유지 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전쟁이나 기근이 들면
그것마저도 대폭 줄어들었으니 대략 아래와 같았다.
▲ 현재가치로 환산한 금액이다. 상평통보 1전 = 250원으로 계산된 값
때문에 유명한 청백리들이
벼슬에서 물러나자 조상 제사 지내기도 어려웠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녹봉만 받아가지는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최고위직 봉급이 저러했으니
종 9품 최하위 관리들이 받는 봉급 수준은 정말 형편 없었다.
쌀 14석, 면포 4필이 전부였다.
현재가치로 600만원 정도다.
당시 가구당 연 평균 소득은 500만원 정도였다. (출처 : 메디슨 논문)
평균보다 높았으니 괜찮지 않았나 싶을수도 있지만
관리들에게는 식솔만 있는게 아니었다.
양반이었기에 당연히 2~3명 정도의 노비들이 있었고
당시 노비들에게는 1인당 연간 150만원 정도의 비용이 필요했다. ☞ 참고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다.
때문에 쥐꼬리만한 봉급 때문에
스트레스도 장난 아니었을텐데,
그런다고 녹봉을 제때 받아가지 않으면
관리 임명장을 몰수 했으니,
아니 받아갈수도 없는 것이 당시의 관료들의 녹봉이었다.
● 관리들의 월급이 낮은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관리들의 월급 수준이 낮은 이유는
무엇보다 국가 재정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역사적으로도 세율이 무척이나 낮은 나라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조세부담률은 25% 정도로 세계 평균 수준이고
북유럽은 50%에 육박하고 있다. ☞ 참고
18세기 에도시대에 일본인들의
평균 세율은 35% 수준이었다.
중세 유럽의 농노들은 영주에게 기본 33%를 뜯겼고
남은 소득으로는 10%를 교회에 십일조 명목으로 뜯겼다.
대략 40% 수준이었다.
전통시대 대부분 국가에서는 30~40% 수준을
세금으로 뜯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는 어느 정도였을까?
초기에는 10%를 넘었다. 대략 15%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가 되면 8% 수준까지 낮춰진다. ☞ 참고
이는 유교적 검약정신에 의거해서
낮은 세율을 고수하던 조선 정부의 가치관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에 더욱 재정이 열악하게 된 원인이 있었으니,
바로 당시 만연된 뇌물 문화였다.
당시는 뇌물을 '수증'이라고 하여
관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관습적으로 착복했는데
이러한 수증은 결국 국가의 재산에서 삥을 친 것들이었다.
그리고 임금도 이를 뻔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관료들에게 뇌물을 감안하고 녹봉을 적게 줬던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게 있다.
바로 양반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됐던 것.
여기에 양반의 재산이기도 했던 노비 역시
세금을 내지 않았다.
다만 밖에서 거주하는 외거노비의 경우는 세금을 냈지만
솔거노비의 경우는 그딴거 없었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내내 양반 + 솔거노비 수가
대략 전체 인구의 절반은 됐으니 (정확한 자료는 없다. 대충 추산)
나라의 세율이 10%라면
실제로 중앙 정부가 먹는 부분은 5% 정도 밖에 안됐다는 얘기다.
그런가하면 한번 올 때마다 조선의 경제를 휘청거리게 했던
중국 사신단의 접대비 명목과
북방 국경의 군사비 목적으로
조선시대에는 인구의 1/4를 차지했던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는 아예 잉류지역이라고 해서
▲ 지도에서 누런색이 잉류지역
중앙에 세급을 바치지 않고,
직접 현지에서 군사비나 접대비로 쓰도록 했으니
결국 중앙에서 먹을 수 있는 세율이라고 해봐야
전체 GDP에서 4% 남짓한 수준이었다.
● 당시 관료들은 얼마나 삥을 쳤던 것일까?
16세기 후반 명종 때 국가 1년 총 세입이 쌀 26만 4천석이었는데(약 1000억원)
이는 당시 GDP 중 1% 수준 밖에 안되는 규모였다. (GDP는 매디슨 논문 참고 ☞ 참고)
여기에 면포 세금 + 소금 전매 등을 더하면 총 재정수입은
GDP 대비 약 2% 정도 됐을 것이다. (넉넉하게 잡은 값이다)
그런데 위에서도 계산했듯이 GDP대비 4%는
국고로 들어왔어야 했다.
헌데 2%만 들어왔다는 것은
곧 2%가 중간에 새어나갔다는 얘기밖에 안된다.
한편 명종 때는
국가 세입 중 녹봉으로만 쌀을 14만석을 지출했으니 (+ 면포나 기타 지급품도 있었다)
대략 재정수입의 50% 이상을 녹봉이 차지했었다.
즉 GDP의 1% 정도를 녹봉으로 줬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관료들이 삥을 친 금액이 GDP의 2% 정도였으니
모두 합치면 3%다.
고로 당시 조선의 관료들은
월급이 100원이라면 삥은 200원이었다는 것이고,
실제 월급은 300원이었다는 것이다.
이래야 당시 관료들이
수십명씩이나 되는 하인들을 부리고
수십칸짜리 기와집에 살았던 것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물론 당시 관료들은 녹봉과는 별개로 개인적인 재산과 토지도 있었다.)
고리대금업을 보는 역사학의 관점 vs 경제학의 관점
● 전통시대에는 이자율이 매우 높았다
오늘날 금리(이자율)는 연간 3~4% 범위다.
만약 100원을 꿨다면,
1년 후 104원으로 갚으면 되는 정도다.
그런데 여기에는 물가상승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실질 금리 수준은 연간 1~2% 범위다.
즉 100원을 꿨다면, 물가상승률을 제외하면
많아봤자 102원정도 갚는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과거의 금리는 어떠했나?
고려시대에는 광학보라는 장학재단이 있었다. (946년 설치)
불교에 입문하여 스님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부가 설치한 재단이었다.
이 광학보는 일정한 자금(곡식)을 마련한 후
일반인들에게 돈(곡식)을 빌려주고 받는 이자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당시 이자율 수준은 이랬다.
쌀 15두를 빌려주면 5두를 이자로 받았고
옷감 15필을 빌려주면 5필의 이자를 받았다.
1년에 한번씩 이자를 냈으니
대략 연 33%의 높은 이자율이였다.
(당시에는 화폐경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33%는 곧 실질 금리를 뜻한다.)
하지만 백성들 사이에서
이자율이 너무 높다는 원성이 일자,
982년에 납부한 이자의 총액이 원금과 같아지면
더 이상 이자를 받지 않고 원금만 갚도록 했다.
즉 100원을 꿨는데, 이미 이자로 100원 어치를 냈다면
앞으로는 원금 100원만 더 갚으라는 얘기였다.
이걸 전문용어로 '자모정식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가면 금리 수준은
연 5할 수준으로 급등하게 된다.
연 5할의 금리는 정부가
왕실의 쌀, 면포 등을 민간에 빌려주고 받았던
법정이자율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민가에서도 차용하였으니..
봄의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5할의 이자를 받았다.
하지만 봄에서 가을까지 7,8개월 빌려주고
5할을 받았기 때문에
연리로 따지면 7할이 넘는 어마어마한 고금리였다.
요즘 악명 높은 사채업자들도
연 금리로 따지면 5할 정도의 수준인데
그것보다도 더 높았던 것이다.
때문에 빚을 갚지 못해 노비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보니 조선시대 내내 인구의 다수가
노비로 채워졌던 사회적 병폐를 낳기도 했다.
● 조선시대의 금리 정책
조선 초부터 고리대금에 대한 원성이 많았던 터라
고려시대에 행해졌던 '자모정식법'을 시행토록 했다.
고로 원금 이상의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숙종 때인 1717년에는
금리 자체에도 상한선을 규정하게 된다.
이 시기는 조선의 경제가
쌀이나 면포로 돈을 대시하던 현물경제에서
점차 화폐경제로 이행하던 때였다.
(다만 조선시대 내내 현물 중심의 경제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따라서 돈놀이도 대단히 성행했기 때문에
정부가 직접 돈놀이에 대한 제한을 가했던 것이다.
1717년의 금리 정책을 보면
돈이나 면포는 연 2할, 곡식은 연 5할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이때 2할 짜리는 단리, 5할 짜리는 장리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에도 이자율에 대한 규제 정책은 계속되었다.
돈이나 면포에 대한 연 2할의 '단리'는
3년 이상 받지 못하게 하거나,
이자의 총액이 원금의 6할을 넘지 않도록 했고
곡식에 대한 5할의 '장리'에 대해서는
조선 초기처럼 이자 총액이 원금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1727년부터는 어떤 이자를 막론하고
이자는 1년 이상을 받을 수 없도록 했다.
이말은 곧,
10년이 지나도 1년치 이자만 받으리는 얘기였다.
하지만 경제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지는
무대포식 정책이었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이를 지키려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 조선시대 고리대금업에 관대했던 이유
조선의 유학자들은 상업이나 공업은 천시하면서
고리대금업에 대해서는 무던히도 관대했다.
왜?
자신들이 바로 고리대금업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리는 이랬다.
"만약 고리대금이 없었으면
흉년에 가난한 백성들은 어떻게 살겠는가?"
라는 논리로 5할의 장리를 오히려 옹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사건은
조선 초기의 정승 정인지에 대한 궁중의 논쟁이었다.
1478년 당시 성종은 명망이 높고 학문이 깊은 유학자들에게
'삼로오경'이라는 직위를 하사하려고 했다.
이때 거론됐던 인물이 정인지였다.
▲ 정인지
그는 태종 때부터 관직에 나와 성종 대까지
6대 임금을 섬기면서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세종 때는 한글창제 사업에 헌신했고
문종 때는 고려사를 개편하는 등 학문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때문에 삼로오경에는 '정인지'만한 인물도 없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자꾸 딴지를 걸었다.
"정인지는 그럴 인물이 안됩니다.
실은 악덕 고리대금업자랍니다."
"성균관 유생들도 고리대금을 일삼고,
큰 집을 사들이고 있는 정인지에 대해 불만이 많사옵니다."
그러자 정인지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쉴드를 쳤다.
"백성들이 어려울 때 곡식을 꿔주는게 잘못인가요?
여기 관료 중에 고리대금 안하는 사람 있습니콰?"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불리는 것도 아니고
나라 법대로 5할의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것이
뭐가 나쁘다는 건지요?"
하지만 재차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으니..
"정인지는 이익을 탐하는 자이옵니다.
최근에 큰 집을 사들여
남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한명회가 반박했다.
"정인지가 백성들에게 곡물을 빌려줬다는 말은 들었어도
남의 재산을 탈취했다는 말은 또 처음 듣소."
"자기 돈으로 큰 집을 사들이는게
뭐 그리 잘못이라는건지."
논쟁은 끝날 줄을 몰랐고
급기야 골치 아파진 성종은 정인지의 임명을 취소하기에 이른다.
● 조선의 고리대금업 과연 무엇이 잘못인가?
보통 역사학자들은 경제논리보다는
사회적인 형평성을 더 중시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고리대금업에 관련된 글을 찾아봐도
이자율을 강제로 낮추게 한 왕들의 정책에 대해서는
잘 했다고 칭찬하면서
고리대금을 일삼는 귀족들에게는
백성들의 고혈을 빼먹는 사악한 무리로만 비난하고 있음이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이 봤다면
사뭇 다른 의견을 나타낼 것으로 사료된다.
여기서는 경제적 관점만을 말해보고자 한다.
① 먼저, 전통시대 이자율이 높은 이유는 이렇다.
1. 돈(곡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2. 금융업(전문적으로 돈을 꿔주는 곳)이 취약하기 때문에
3. 저축(곡식 저장)이 부족하기 때문에
특히 농경사회에서는 흉년이 들면
바로 생존의 문제와도 직결되어 금리는 천정부지로 올랐다.
때문에 상황이 급박할 때 농민들은
연 이자율 5할이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에서는 그걸 강제로 상한선을 잘라서
규제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만약 농촌 경제에서 금리가 연 7할 정도로 책정되었다면
그것은 수요-공급에 의거한 적정한 시장 가격을 의미한다.
▲ 보이지 않는 손
이것을 인위적으로 낮추다보면
그 값에는 절대 못 내주겠다는, 즉 꿔주려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반대로 꿔가려는 사람들은 폭증하고
그러다보면 채권에 대한 시장 자체가
형성되지 않게된다.
그러다보면 몰래 암시장이 생겨나게되고
이전의 7할 금리보다
훨씬 높은 금리수준의 사채 시장이 생겨나고 만다.
흔히 경제학에서 말하고 있는
가격통제의 폐단이 불가피하게 생기게 된다.
어쩌면 고리대금업 자체보다는
고리대금업을 규제했기 때문에
몰락한 농민들이 집단 노비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자율을 근본적으로 낮추려면
금융업이나 저축(은행)이 발달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실물경제를 금융경제로 치환시킬 수 있는
바로 '화폐'의 도입이 근본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② 금리 정책에서도 곳곳에 문제점이 보인다.
무엇보다 이자 총액을
원금 이상으로 받지 못하게 하는 방식은 도통 납득이 안된다.
이렇게 되면 채권자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된다.
가령 100원을 꿨는데,
이자율이 연 50%라고 치자.
그런데 이걸 1년에 갚으면 이자율은 50%지만
이자 총액은 원금을 넘을 수 없기 때문에
3년이 지나서 갚게되면 금리는 연 3할로 뚝 떨어지게 된다.
5년 지나서 갚게되면 금리는 연 16% 수준이 된다.
10년이 지나서 갚게되면 금리는 연 7% 수준이다.
20년이 지나서야 갚게되면 금리는 연 3.5% 수준이다.
늦게 갚을수록 채무자들만 좋은 일이다.
결국 채권자들은 공급을 줄일테고,
채무자들의 수요는 폭증하고
역시 암시장이 생겨나는 등 경제적 폐단이 발생하여
실제 거래되는 이자율 수준은 기존의 50%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 책정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흔히 경제학에서 말하는 최고가격제의 폐단이 나타나게 된다.)
③ 곡식의 금리는 연 5할을 받게하면서
화폐와 면포의 금리를 연 2할로 책정한 것 또한 크게 잘못됐다.
당시 곡식과 면포는 시장에서 화폐로 통용되던 물품이라
두 재화는 교환에 있어 절대적으로 차이가 없어야 한다.
1원어치의 곡식과 1원어치의 면포는
같은 금리를 형성해야 경제적으로 바람직하다.
하지만 금리가 다르다는 것은
약간만 꼼수를 쓰면 엄청난 차익을 남길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령 돈 100원을 꿔서
그 것으로 쌀 100원 어치를 사고
쌀 100원을 다른 사람에게 꿔준 다음에
1년 뒤 이자와 원금으로 돈 150원을 받고
다시 꿔간 돈+이자 120원을 갚게되면
돈 한푼 안 쓰고도 30원을 벌게되는
희안한 상황이 발생한다.
결국 시간이 지나다보면 경제가 교란되고
사람들은 화폐 사용을 꺼리게된다.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아닐 수 없다.
④ 고리대금업이 왜 욕먹을 짓인가?
생산의 기본적인 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이다.
'고리대금'은 곧 자본이다.
경제활동을 하면서 자본을 공짜로 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자본을 빌려 쓴 사람들은 그 대가로
채권자에게 이자를 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높은 이자는 당시의 경제적 상황에 맞춰진
균형가격 수준일 뿐인데,
이를 두고 어찌 고리대금업 자체만을 탓할 수 있겠는가?
어떤 학자들은 조선이라는 사회가
상업과 공업 등 부를 증진시키는 기초 산업을 천시하면서
고리대금업에는 관용적이었다고 대차게 까고 있는데
오히려 상업과 공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라면
무엇보다 선도적으로 해야 할 것은
고리대금업과 같은 금융업의 발달이다.
왜냐하면 금융업 등으로 거대 자본이 만들어져야
경제는 더 큰 생산기회와 함께
규모의 이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고리대금업을 패악으로 생각하는 것은
경제 생산의 기본요소이기도 한 '자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조선이라는 사회는 오히려 고리대금업 등에
강력한 철퇴를 휘두르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후기 신흥 부유층도 생기고
고질적인 계급질서도 무너지는 등 긍정적인 효과를 맞았다.
[정리] 역사학의 비판은 경제학적인 시각으로 볼 때 다르다.
1. 노비의 몸값이 낮은 것은 '유지비'가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노비의 의식주 제반비용을 몸값에 포함시키면 결코 소, 말보다 낮지 않았다.
2. 노비 인신매매 발생 원인은 지역별로 노비의 가격이 달랐기 때문이고
국가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지역별로 인구구성을 맞춰야 했다.
3. 관리의 급료는 피상적인 것처럼 낮지 않았다.
대충 추산해봤지만, 대략 봉급의 2~3배 이상을 뇌물로 착복했으리라.
4. 세율이 무척이나 낮았기 때문에
왕실은 가난하고 백성은 그런대로 살만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자면 세율이 낮았기 때문에
조선은 국방력이 약했고 인프라가 낙후됐고, 발전이 없었다.)
5. 고리대금업이 나쁜게 아니라
금리를 강압적으로 규제한 왕들에게 문제가 있었다.
6. 고리대금업 때문에 오히려 조선후기는
그나마 상업이 발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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