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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5월 13일 수요일
[(백)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파티마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아레오파고스에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하여 증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제자들을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 이르신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7,15.22─18,1
그 무렵 15 바오로를 안내하던 이들은 그를 아테네까지 인도하고 나서,
자기에게 되도록 빨리 오라고 실라스와 티모테오에게 전하라는
그의 지시를 받고 돌아왔다.
22 바오로는 아레오파고스 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3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24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25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그분께서는 또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7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 하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29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30 하느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31 그분께서 당신이 정하신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시어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주셨습니다.”
32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
33 이렇게 하여 바오로는 그들이 모인 곳에서 나왔다.
34 그때에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가 있고,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18,1 그 뒤에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2-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학창 시절에 ‘수포자’, 곧 ‘수학을 포기한 자’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수학 교과서는 수준이 높고 내용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학생들의 학습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진도만 나가니 학생들이 배우기를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본당 특강도 수준이 너무 높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듣기를 포기하고 졸게 됩니다. 좋은 선생님은 제자들의 수준을 잘 고려합니다. 너무 어려워 처음부터 포기하지 않게 하고, 너무 쉬워서 흥미를 잃지 않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제자들의 눈높이를 고려하는 좋은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의 완급을 조절하실 줄 아십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처럼 완급 조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의 완급을 성령을 통하여 조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히브리 말로 ‘루아흐’입니다. 이 말은 ‘숨’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루아흐가 이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숨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를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것이라고 말해 주는 듯도 합니다. 밤을 새워 모든 것을 내가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물러날 줄 알고, 쉬는 법을 알 때 성령의 바람이 다시 우리에게 진리를 따라 살아갈 힘을 주실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일상생활에서 완급 조절 없이 바쁘게만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성령의 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숨을 쉬고자 교회에 모입니다. 성령의 숨을 쉬고, 예수님의 진리를 쉬엄쉬엄 세상에 전파합시다.(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한 마리 어여쁜 나비 같은 진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그분이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사전적 의미로 진리란? 조금 아리송합니다. 명제가 사실에 정확하게 들어맞음을 의미합니다. 또는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아니하는 바른 판단을 말합니다.
그런에 진리가 그리스도교 신앙 안으로 들어오면 그 의미가 더 풍요로워집니다. 진리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겠지요.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이시라는 진리입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로서 그분으로부터 파견되신 분이라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뵙는 것이 곧 하느님을 뵙는 것이라는 진리, 그분 안에 하느님에 계신다는 진리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라는 진리, 그분 손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는 진리, 그분은 모든 율법과 계명 전체를 수렴하고 완성하신다는 진리, 그분은 우리 인생의 최종 목표요,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이유라는 진리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수록 눈물겹고 감사한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하느님이시라는 진리,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고 챙기신다는 진리, 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언제나 노심초사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윤곽이 잡히지 않는 멀고 먼 당신이 아니라 내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진리, 오늘도 내 바로 등뒤에 서계시면서 나를 바라보시고 나와 함께 움직이신다는 진리, 내가 고통과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도 항상 나를 떠받치고 계신다는 진리입니다.
결국 영원불변한 최종적인 진리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그분과 하나이신 예수님이 진노하시고 징벌하시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절친한 친구보다도 더 살갑고 다정다감하신 분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 어떤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매일의 삶 속에서도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대자유를 만끽하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는 웬만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에 포착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산들바람 같습니다. 잘 보이지도 않고, 잡으려고 다가서면 도망가는 한 마리 나비 같습니다. 특히 우리가 세상사에 푹 빠져 살아간다면, 우리의 시선과 안테나가 오로지 돈이나 명예, 자리에만 쏠려있다면 진리를 찾기란 요원합니다.
따지고 보니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매일 동고동락하는 가족들이나 동료 인간들 안에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들 안에도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시니 그렇습니다. 때로 그들의 입을 통해 진리가 선포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천박한 물질만능주의, 경제 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 문화 속에 깊이 빠져들어 살아가다 보니 진리고 뭐고 뒷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입만 열면 돈돈! 하고 외치다 보니 돈의 노예가 되어 진리와는 완전 담을 쌓고 살아가는 짐승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생산력이 있든 없든, 건강하든 환자이든, 청춘이든 노인이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존재 자체로 주님께서 살아 숨 쉬는 성전으로 여기며 존중해드리고 배려해드리는 사람이야말로 진리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연히 유튜브에서 ‘시니어 지킴이’라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신학과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우리를 영적으로 이끌어줍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중에도 인류와 역사 앞에 큰 울림을 주었던 말씀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말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두 가지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나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알게 된다.’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삶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진리를 찾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서양철학에서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찾았습니다. 정치가에게 정의를 물었습니다. 군인에게 힘을 물었습니다. 예술가에게 아름다움을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물었지만, 참다운 대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는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안다고 하지만 사실 모르는 것이 많다. 소크라테스는 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소크라테스에게 진리는 어쩌면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것인지 모릅니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을 전하는 것을 막으려는 재판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길을 택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예수님처럼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스승의 죽음을 보면서 이 세상에는 ‘진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진리가 있다면 스승이 억울하게 죽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서양철학 합리론의 기본이 되는 ‘이데아론’을 이야기합니다. 움직이고 변화하는 세상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진리’를 망각한다고 합니다. 마치 동굴에서는 그림자만 볼 수 있는 것처럼, 동굴을 나와야 비로소 밝은 빛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육체를 벗어나야만 비로소 진리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플라톤에서 진리는 ‘개념’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진리는 ‘관계’입니다. 화가의 마음에 있는 작품이 그림을 통해서 드러나듯이, 진리는 진리인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소크라테스가 했던 것처럼 탐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플라톤이 했던 것처럼 개념으로 정의를 내려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좋은지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유혹이 있어서 그렇고, 나약해서 그렇고,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선을 알고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나를 악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진리인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굶주린 백성을 측은하게 보셔서 빵을 나누어 주는 길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모범을 보여 주시는 길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던 겸손의 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던 지혜의 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듣고 몇몇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이웃을 만나면, 우리는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환한 미소는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는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고 기다리면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이 함께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먼저 가겠다고 신호를 보내는 사람에게 차선을 양보하면 그 사람은 지금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가족의 마지막 순간을 볼 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이렇게 관계 안에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함께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 위로의 성령, 굳셈의 성령, 지식의 성령,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한 걸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ㄱ)
이끌리는 이
못 따라올세라
이끌어 주시는 분
한 걸음 앞에
이끌리는 이
따르는 한 걸음 앞서
이끌어 주시는 분
여는 한 걸음이
이끌리는 이
뒤서가는 그만큼
이끌어 주시는 분
앞서가시니
이끌어 주시는 분
뿌듯한 한 걸음마다
이끌리는 이
설레는 한 걸음으로
이끌어주시는 분
이끌리는 이
함께 걷는
영원을
향한
길
오늘의 축일
파티마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축일
Beata Vergine Maria di Fatima
Blessed Virgin Mary Our Lady of Fatima
파티마의 성모
파티마의 어린이들에게 동정 마리아께서 발현하신 것은 세계 제1차 대전 중인 1917년 여름이었다.
레이리아 교구의 작은 마을 주민들은 대개가 가난한 사람들이고, 또 소농이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들과 가축들을 돌보아야만 했다.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어린이들도양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세 아이들은 비록 가난했으나 순진했고 티없이 맑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루치아 도스 산토스는 10세이었고, 그녀의 나이어린 사촌 동생 프란치스꼬와 히야친타가 곧 그들이다.
그들은 루치아의 책임아래 양을 쳤는데, 자주는 아니지만 들판에서 무릎을 꿇고 로사리오 기도를 즐겨 바쳤다고 한다.
1916년 여름에는 한 천사가 몇 차례 발현하여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1917년 5월 13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날 정오경, 한줄기 밝은 빛이 아이들을 비추었는데, 그들은 코바 다 이리아의 나무 위에서 찬란한모습의 어떤 부인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이 첫 발현때, 그 부인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그리고 전쟁의 종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이르시면서, 매달 13일에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 발현은 6월 13일과 7월 13일에도 일어났다.
네 번째 발현일인 8월 13일에는 어린이들이 지방 당국으로부터 방해를 받고 코바 다이리아로 가지 못했으나, 19일에는 그 부인을 만났다.
9월 13일,부인은 전쟁이 끝나도록 로사리오를 바치라고 이르셨다.
끝으로, 10월 13일, 그 "부인"은 당신을 "로사리오의 모후"라고 알려 주시고, 기도하고 보속하라고 다시금 이르셨다.
그날, 놀라운 천상적인 현상이 일어났다. 태양이 빙빙 돌면서 하늘에서 떨어져 땅에 쳐박히는 듯한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어린이들은 첫 발현날인 5월 13일처럼 일찍이 그 곳을 향하였다.
약 3만 명의 대군중들이 어린이주변에 몰려 있다가 신비로운 이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코바 다 이리아에서 본 환시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1930년 10월 13일이다.
레이리아의 주교는 오랜동안 조사 검토한 뒤에 고바 다 이리아에서 로사리오 성모 공경을 허가했던 것이다. 발현 얼마뒤에 두 어린이는 선종하였다.
발현은 보았으나 말씀은 듣지못했던 프란치스꼬는 1919년 4월 4일 선종했고,동생 히야친따는 1920년 2월 20일에 하느님 품에 안겼으며, 유일한 생존자인 루치아는 수녀가 되었다.
파티마의 세 어린이 (루시아,프란치스코.히야친다)
(파티마 대성당(Sanctuary of our lady of Fátima)
('태양의 기적'을 보도한 당시 신문)
파티마의 세 어린이 (루시아,프란치스코.히야친다)
오늘의 성인
성 세르바시오(Servatius)
활동년도 : +384년
신분 : 주교
지역 : 통그레스(Tongres)
같은 이름 : 세르바시우스, 세르바티오, 세르바티우스, 쎄르바씨오, 쎄르바씨우스
아르메니아(Armenia) 출신인 성 세르바티우스(또는 세르바시오)는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가 유배당했을 때 그를 극진히 보살피면서 위대한 교부의 가르침을 옹호하고, 사르디카(Sardica) 공의회에서 가톨릭 신앙을 굳세게 보호하는데 앞장섰다. 359년에 그는 리미니(Rimini)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쟁(Agen)의 주교인 성 파이바디우스(Phaebadius, 4월 25일)와 더불어 아리우스(Arius) 이단과 대적했다. 그는 벨기에의 통그레스(Tongres, 오늘날 림부르흐 지방의 통게렌 Tongeren)에서 선종하였고, 그의 유해는 통그레스가 침략을 당했을 때 오늘날의 네덜란드령 림부르흐(Limburg) 지방 마스트리흐트(Maastricht)의 성 세르바티우스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성 세르바티우스 대성당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이다. 교회미술에서 성 세르바티우스는 보통 나무로 만든 신을 신고 있거나, 한 손에 열쇠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주교 지팡이로 용을 누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복녀 율리아나 (Juliana)
활동년도 : 1342-1423년
신분 : 신비가
지역 : 노리치(Norwich)
같은 이름 :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영국 노리치의 성 율리아누스(Julianus) 성당 벽 외곽에서 베네딕토회 규칙을 따르는 은수자가 될 때까지 율리아나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1373년 그녀는 16차례나 계시를 경험하였는데 이때마다 탈혼 중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삼위일체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그녀는 그 후 20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위의 두 신비를 묵상하였다. 그 결과로 그녀는 '하느님의 사랑, 강생, 구속, 죄, 보속 그리고 하느님의 위로' 등에 관한 글들을 썼다. 이것들은 영문학에서도 매우 중요시하는 저서들이다.
복자 제라르도 (Gerard)
활동년도 : 1174-1242년
신분 : 3회원
지역 : 빌라마냐(Villamagna)
같은 이름 : 게라르도, 게라르두스, 제라드, 제라르두스, 제라르드
잘 알려지지 않은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기원에 대해서 게라르두스(Gerardus, 또는 제라르도)의 전기가 다소 알려준다고 한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에서 태어나서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로부터 3회 입회를 허가받았다. 그 후 그는 여생을 고향 인근의 빌라마냐에서 은수자로서 엄격한 생활과 관상생활에 주력하였다. 그는 거의 20여 년 동안 은수 생활을 했는데 수많은 기적과 예언으로 인해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3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승인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