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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
黃進
조선 중기의 무신.
출생 1550(명종 5)
사망 1593(선조 26)
국적 조선, 한국
본관은 장수. 자는 명보, 호는 아술당. 아버지는 윤공이다. 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거산도찰방·안원권관을 역임했다.
1590년 황윤길·김성일(金誠一)·허성(許筬) 등이 일본에 통신사로 갈 때 군관으로 따라갔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재산을 털어 말을 사고 밤낮으로 무예를 익히면서 일본의 침략에 대비했다.
1592년 동복현감으로 재직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의 휘하에서 참전했으나 용인전투에서 대패했다. 그러나 이후 진안·안덕원·이치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했고, 그 공으로 익산군수 겸 충청도조방장에 임명되었다.
1593년 3월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죽산전투에서 후쿠지마[福島正則]이끄는 일본군을 대파하고 상주까지 추격했다. 그해 6월 일본군이 전열을 정비해 진주성을 공략하자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성을 굳게 지켰다. 9일 동안 격전을 치렀으나 마침내 성이 함락되면서 전사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진주 창렬사, 남원 민충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무민이다.
#역사인물#한국인물#정치가
https://youtu.be/Nw8oXa7BNmw
1592년(선조 25) 7월초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 휘하 6번대 소속의 일본군이 이치를 거쳐 전주로 향하려고 했다. 이에 전라도절제사 권율은 광주부근 군읍에서 모은 향병 1,500명을 거느리고 이치에서 진을 치고 전주방면을 지키려고 했다.
7월 8일 이른 아침부터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조선군은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의 지휘하에 용감히 맞서 싸웠다. 싸움 도중 황진은 활로 많은 적들을 죽이다가 일본군의 조총을 맞아 총상을 당하기도 했다. 종일 쉴새없이 공방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달아나버렸다.
이 전투는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금산과 웅치에서의 패배와 달리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일본군은 이 전투를 조선3대전의 하나로 꼽았다. 이때 패배한 일본군은 전라도 침공을 단념하고 금산으로 들어갔으며, 10일에 의병장 고경명의 군사에게 공격을 당했다. 권율은 이 전공으로 나주목사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으며, 황진은 익산군수에 이어 충청도 조방장에 임명되고 절충장군(정3품 당상관)에 가자되었다.→ 웅치전투
이치전투
梨峙戰鬪
요약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 8일 권율(權慄)·황진(黃進) 등이 금산(錦山) 서평의 이치(梨峙 : 배재)에서 왜군과 싸운 전투.
시대 조선
발생 1592년(선조 25) 7월 8일
성격 전투
유형 사건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관련 인물/단체권율, 황진관련
장소 금산 서평 이치
내용
당시에 아군은 전라도도절제사 권율(權慄)과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거느린 관군 1,500명이었고, 왜군은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가 거느린 6번대소속의 별군이었다.
이 전투는 일본군의 전주 침입을 막기 위한 웅치전투(熊峙戰鬪) 및 금산전투와 거의 동시에 벌어졌는데, 웅치와 금산전투에서 아군이 비록 패하였지만, 이 전투에서는 끝내 왜군을 격파함으로써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온 종일의 전투 중에 황진이 총을 맞고 쓰러지자 한때 사기가 떨어졌으나 권율이 장병을 독전하여 왜군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전라도가 보존되어 후방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한편, 왜군은 이 전투를 조선 3대전의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란중잡록(亂中雜錄)』
『백사집(白沙集)』
『임진전란사』(이경석, 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1967)
웅치전투
熊峙戰鬪
요약
1592년 5월 한성을 함락한 왜군은 전국 곳곳을 점령하고 분탕질을 했다. 이들 중 일부가 용담·진안을 거쳐 웅치를 넘어서 전주에 들어가기 위해 이치에서 전주로 향했다. 이에 권율은 직접 이치를 막고, 김제군수 정담에게는 웅치를 막도록 했다. 1592년 7월 8일 왜군이 전병력을 동원해 전면공격을 감행해, 제1·2선이 무너지고 제3선을 지키던 정담 역시 화살이 다하도록 최후까지 싸운 다음 백병전을 전개하다 전사했다. 왜군은 이 전투에서 죽은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어 그 위에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표목을 세워놓고, 웅치를 넘어 전주성으로 향했다. 전주성에서는 순찰사 이광이 도망쳤으나 이정란이 백성들과 함께 성을 지켜 왜군은 물러갔다.
1592년(선조 25) 4월 부산을 침입하고, 5월에 한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전국 곳곳을 점령하고 분탕질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산에 주둔한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 휘하의 일본군 중 일부는 용담·진안을 거쳐 웅치를 넘어서 전주에 들어가려 했으며 일본별군 1,000명은 진산을 치고 이치에서 전주로 향했다.
당시 광주목사 권율이 격문을 띄워 1,500명의 군사를 모아 훈련한 다음 북상하자 조정에서 그를 전라도절제사로 삼았다. 권율은 직접 부하를 지휘하여 이치를 막고, 김제군수 정담에게는 웅치를 막게 했다. 그리하여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이 제1선, 의병장 황박이 제2선, 정담은 가장 높은 지역에서 제3선의 진지를 구축하여 적의 진격에 대비했다.
1592년 7월 7일 수천 명의 일본군 선봉부대가 공격을 개시하자 황박과 이복남은 많은 적을 죽였다. 이튿날 일본군이 전병력을 동원해 전면공격을 감행해, 제1·2선이 무너지고 황박과 이복남도 전사했다. 제3선을 지키던 정담도 화살이 다하도록 최후까지 싸운 다음 백병전을 전개하다가 전사했다. 또한 이 전투에 참가한 해남현감 변응정은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죽은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어 그 위에 '조조선국충간의담'이라는 표목을 세워놓고, 웅치를 넘어 전주성으로 향했다. 전주성에서는 순찰사 이광(李洸)은 도망쳤으나 전전적 이정란이 백성들과 함께 성을 지킴에 따라 일본군은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 이치 전투
권율 권율장군 영정
후기
당나라부대 라는 연원이 생기게 해준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이죠... 명군의 약탈 행위를 보고 조선인이 만든 용어죠....
그리고 일본군 6군이 전라도를 침략하기 위해서 여러 방향쪽으로 들어갔지만, 조선 민병대와 관군이 격퇴시켰죠...
첫번째 시도는 [일본 6군의 별동부대는 경상도 정암진에서 곽재우가 이끄는 경상도 민병대에게 패했고,]
2번째 시도는 [경상도와 전라도에 걸쳐있는 험악한 소백산맥을 타고 전라도로 들어가려던 일본 6군 병사들에게 경상도와 전라도의 연합 민병대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결과로 그 쪽 방면으로도 실패합니다...
당시 조선민병대는 적들이 코 앞에 왔는데도
백병전을 치룰 자신이 없으니 오직 활로 대항하여 적들을 죽인 만큼 칼싸움에는 자신이 없었죠.....]
결국 일본군 6군은 마지막 수단으로 충청도로 진입해서 금산으로 쳐들어 옵니다.
그때, 일본 6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서 일본 수군과 수륙합동 작전을 펼칩니다.
금산을 점령한 일본 6군은 금산에서 전라도 전주로 들어가기 위해서 부대를 둘로 나누어
전라도로 이어진 두 고개 길로 들어섭니다. 당시 권율이 이끄는 전라도 육군은
두 고개길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합니다.
일본 한쪽부대는 웅치로 들어서서 조선육군과 육방전을 전개하여 간신히 돌파하여 전주성으로 들이 닥쳤지만,
전주성에 있던 조선군의 기세와 금산성으로 고경명이 이끄는 조선 민병대들이 들이칠 것이라는
소문에 금산으로 철군합니다.
그리고 이치로 들어선 다른 일본군 부대는 권율이끄는 관군한테 격파당하여 결국 금산으로 철군합니다.
그 같은 시간에 일본 6군과 같이 합동 진격을 하기로 한 일본수군은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수군한테 한산도에서 전멸당합니다....
웅치 이치 전투후에 재정비를 할 시간이 갖추진 못한 체 고경명이 이끄는 조선민병대의 도전을 받은 일본 6군은
금산에서 이들을 격파시킨다. 7월 10일.
그리고는 금산에서 재정비를 한 후에 전라도 침략을 노렸지만, 전라도 육군의 강력한 방어로 쉽사리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체,
8월에 들어서서 조헌과 영규이 이끄는 조선밍병대의 공격을 받는다.
조헌이 이끄는 민병대 700명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들이 금산성을 공격했고, 총 4차례 백병전투 끝에 이들은 전멸당하고
일본군의 승리로 들어갔다. 이때가 92년 8월 18일 정도 쯤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 전투로 타격이 심하여 결국 전라도 진공을 단념하고 그 전투후 한달도 채 안되어 에 경기도 쪽으로 후퇴를 하고 일본군 5군은 개성에 배치되어 서울 방어에 힘쓴다.
전라도에 위협을 가할 세력이 없음을 안 권율은 병사들을 이끌고 서울 탈환전을 위해서 1592년 9월 하순에
경기도 수원으로 진출한다. 그리고는 1593년 봄까지 있는 서울 공방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운다.
개성에 배치된 일본 6군은 이듬해 1월 하순에 벽제관에서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연합군을
격퇴시키는 데, 주력부대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우고, 명장이라는 평판을 듣는다.
내가 보기엔 일본의 각 부대들 중에서 1592년 임진년에 조선인들과 그렇게 많이 싸운 부대는 6군이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1. 웅치 전투의 배경[편집]
일본군은 한성을 함락한 후 임진강 회의를 통해 전쟁이 장기화 될 것에 대비하여 조선을 분할통치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이에 따라 5월부터 일본군은 호남을 향해 공격을 해오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일본군 제 6군의 장수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한성으로부터 출발해 충청도를 지나 경상도를 지난 뒤 전라도 금산[2]으로 공격해 들어왔으며 그의 부장인 안코쿠지 에케이는 창원에서 출발해 정암진을 건너 삼가, 함양을 지나 전라도로 진출하려 했으나 정암진에서 곽재우에게 일격을 당하고 성주 방향으로 우회해 금산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와 합세하는 것을 계획으로 진군을 시작했다.[3]
당시 전라도의 군대는 용인 전투에서의 궤주로 이미 많이 소진된 상태였으며 거기에다가 의병장 김천일과 전라 병사 최원이 2만 2천의 병력을 이끌고 북상해 병력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왜군의 공격을 감지한 전라감사 이광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을 금산에, 이계정은 육십령에, 장의현은 부항에, 마지막으로 김종례는 동을거지에 배치해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6월 17일 무주 경계에 출현한 고바야카와 군은 6월 22일 금산의 제원에 도달해 조선군과 교전을 벌였다. 금산 군수 권종은 전사했고 곽영과 김종례는 고산현으로 퇴각해, 6월 23일 금산성이 왜군의 손에 들어갔다.
금산을 점령한 고바야카와 군은 진안과 용담을 함락한 뒤 전주로 향하기 위해 남하했다. 용담에서 진안을 거쳐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한 웅치고개에는 김제 군수 정담, 동복 현감 황진, 나주 판관 이복남, 전 전주 만호 황박이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들중 황진은 남쪽 장수 방면을 지키던 조방장 이유의가 달아나자 남원 방어를 위해 내려갔다 7월 5일경 다시 웅치로 귀환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2. 웅치 전투의 경과[편집]
전투 이전에 조선군은 제 1방어선인 산 아래에는 의병장 황박을 배치하였고, 제 2방어선인 산 중턱에는 나주 판관 이복남을, 최종방어선인 산 정상에 제 3방어선에는 정담이 배치되었다.
일본군은 7월 7일 새벽 야음을 틈타 조총을 앞세워 공격해왔지만 조선군이 사력을 다해 싸워 막아내었다. 하지만 해가 뜨자 일본군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고 1선의 황박군이 밀려났다. 이에 따라 2선의 이복남 군이 나서 맞섰지만 제쳐졌고 산 정상의 정담군과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정담군은 사력을 다해 맞섰으며 지휘관인 정담이 직접 활을 쏴 적장을 쏘아 맞힐 정도의 혈전이었다. 치열한 육박전이 전개되었고 날이 저물고 일본군의 피해가 막심하자 퇴각했다. 하지만 이내 조선군의 화살이 다 떨어진 것을 알게 되자 재공격해왔고 치열한 전투속에 정담, 강운, 이봉 등이 전사하였다.
3. 웅치 전투 이후[편집]
날이 밝은 뒤 왜군은 조선군의 시체로 덮인 언덕을 넘어 전주로 향했다. 남은 조선군을 이끈 이복남은 군사를 수습해 전주 동쪽 10리에 위치한 안덕원에 방어선을 쳐 재차 왜군을 맞았다. 때마침 귀환 명령을 받고 북상한 황진의 군사가 합류해 지친 왜군을 공격해 간신히 왜군을 저지할 수 있었다. 간신히 한숨을 돌린 조선군은 이광의 지시를 받은 의병장 이정란 지휘하에 전주성에서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전주 공략에 실패한 왜군은 진안에 머무르다 7월 17일 금산으로 물러났다.
왜군도 조선군의 분전에 감명을 받았는지 퇴각하는 길에 조선군의 시신을 모아 조 조선국 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비석을 세워주어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고 한다.
4. 웅치 전투의 결과[편집]
조선군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총지휘관이 전사하는 패배를 겪었다. 전투에 참여한 왜군의 규모와 피해상황은 알 수 없으나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본대가 곧이어 벌어진 1차 금산전투에서 6천의 고경명군에게 가볍게 승리하고 웅치 전투에서 한달이상 지나 벌어진 이치 전투에 권율군을 압도하는 병력을 투입한 것을 감안하면 웅치에 투입된 병력이 대군은 아니었을 것이다. 난중잡록에서 앞서 곽재우와 교전한 안코쿠지 군의 진로를 기록하며 현풍의 쌍산역(雙山驛, 현풍 북쪽 15리)을 거쳐 뱃길로 경북 성주로 향한 안고쿠지 군의 배가 18척이었다. 그리고 험한 고갯길을 점거하고도 그런 왜군에게 밀린 조선군은 그보다 더 적었을 것이다.
[1] 전투가 종료된 뒤 언덕이 조선군의 시체로 덮였다고 한다[2] 조선시대 이래 금산은 계속 전라도였으며 금산이 충남에 속하게 된 건 박정희 정권기 때 와서의 일이었다.[3] 곽재우는 성주까지 안고쿠지 군을 추격해 교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수급 몇급만 얻고 퇴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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