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고려사 : 세가
우왕 3년(1377) 정사년
정월
○ 왜적이 회원창(會原倉)을 털어갔다. ○ 지용기(池湧奇)를 양광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했다. ○ 나하추가 사자 편에 양과 말을 선물로 보냈다. ○ 인해(印海)를 양광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했다.
• 2월
○ 왜적이 신평현(新平縣 :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군 신평면)을 침구했으나 양광도 도순문사(都巡問使) 홍인계(洪仁桂)에 의해 격파당했다. ○ 북원(北元)에서 한림승지(翰林承旨) 보라데이[孛刺的]편에 책명(冊命) 및 어주(御酒)와 해청(海靑)을 보냈는데 그 조서는 이러했다.
“하늘로부터 중임을 받은 황제가 모니노(牟尼奴)에게 분부를 내린다. 우리나라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세조 황제께서는 성스러운 인덕과 신령스러운 무공으로 그 은택을 만방에 두루 입히셨다. 당시 고려는 저 먼 바다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황제의 인덕을 앙모하고 대의를 지켜 앞장서서 신하로 귀순하여 충성을 다했으니 황제께서 가상히 여기사 그 공주를 시집보내셨으며 그대의 조상으로 하여금 삼한(三韓)을 다스리게 함으로써 우리의 동쪽 울타리로 만든 것이 지금까지 1백 년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가 별세한 후 그쪽 사람들은 왕위 계승을 승인해 달라는 글을 해당 관청에 올리면서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의 종사(宗祀)가 막을 내리는 것을 애처롭게 여긴 나머지 고려 왕실의 족친 가운데 훌륭한 이를 간택해 대를 이어주려고 톡토부카[脫脫不花]에게 왕위를 잇게끔 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바얀테무르에게 대를 이을 아들 모니노가 있다고 말하기에 사신을 보내 물어보게 했더니 그대의 조모 홍씨(洪氏)가 왕위계승을 요청하는 글도 함께 보내왔다. 아비가 죽으면 자식이 그 뒤를 잇는 것은 고금의 통례이니 이치에 합당하다면 다시 고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이제 모니노를 정동성좌승상(征東省左丞相)·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임명하노라. 아아! 옛일을 상고하고 현인을 본받는 것은 올바른 통치를 하기 위함이니 모니노는 짐의 백성들을 더욱 편안히 보호하도록 마음을 다하라. 또한 그대의 조상들이 우리나라의 제후로서 행한 의리를 바꾸지 않는다면 충효의 도가 그대로 지켜질 터이니 어떠한 경우에도 신중히 처신하여 짐의 책명을 더욱 빛나게 하라.”
○ 또한 북원의 황제가 윤환(尹桓) 등 여섯 명을 평장사(平章事)로 임명하였다. ○ 나하추가 문카라부카[文哈刺不花]를 보내왔다. ○ 북원에서 두마달(豆亇達)을 보내 경효대왕(敬孝大王)에 대한 제례를 거행했다. ○ 북원의 선광(宣光) 연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 왜적이 경양(慶陽 :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을 침구하고 이어 평택현(平澤縣 :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까지 침입하자 양광도 부원수(副元帥) 인해(印海)가 전투를 벌였으나 격퇴하지 못했다. ○ 우왕이 양가의 자제 가운데 궁술과 마술에 능한 자 및 군현(郡縣)의 관리 가운데 용력이 있는 자를 모아서 왜적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 각 관청의 관리로서 휴가를 요청해 귀향했다가 장기간 복귀하지 않은 자는 관직을 삭탈하고 그 토지를 몰수해 전투에서 공이 있는 자에게 지급했다. ○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조희고(趙希古)를 전라도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임명해 옷과 말을 주었다. ○ 각 도(道)의 요충지에 방호(防護)를 설치해 유민들을 저지하게 하는 한편 연해의 주군(州郡)들에는 산성을 수축하게 했다. ○ 전국에 지시를 내려 옥사(獄事)의 결정은 모두 지정(至正) 연간에 제정된 조례를 따르도록 했다.
• 3월
○ 지윤(池奫)이 처형당했다. ○ 삼사좌사(三司左使) 이자송(李子松)을 북원에 보내 책명(冊命)을 내려준 데 대해 사의를 표하게 했는데 그 표문은 이러했다
“하늘과 땅이 공평무사하게 만물을 창조하고 길러내듯이 황제폐하께서는 제후에게 큰 은총을 베푸사 경사를 내려주시니 만백성이 환호하고 만국은 공손히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관례(冠禮)를 치르지 않은 나이에 나라를 다스릴 만한 재능도 없는 터라 임시로 왕업을 이어 봉토를 지키면서 늘 두렵고 조심스러운 마음을 깊이 간직한 채 신하로서의 충성을 다해 복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러한 간절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상국에 입조하는 길이 막혀 있기 때문에 그럴 듯하게 꾸민 참언이 쉽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희들은 애절한 마음을 반드시 폐하께 아뢰겠다는 일념으로 우매함을 무릅쓰고 폐하께 하소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황제께오서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큰 은택을 내리사 관대한 은전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마침내 하찮은 저로 하여금 빛나는 영광을 입게 하셨습니다. 진왕(眞王)으로서 관작을 계승하게 해 주신데다 또한 좌상(左相)으로 올려주시는 한편 어주(御酒)를 하사하시고 진귀한 해동청(海東靑)까지 보내주셨습니다. 악행을 저지른 자를 제대로 물리치지 못한 처지에 포상을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에 넘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나라를 굳건히 보존하려는 뜻으로 먼 나라에까지 돈독한 인덕을 베푸시며, 순(舜)임금처럼 이민족에 대해 문덕(文德)을 펼치시니 양계(兩階)의 춤이 전아하며, 옛 한나라의 의례를 다시 일으키시어, 제후에게 조서를 부지런히 보내셨습니다. 천하의 형세는 갈라진 다음 반드시 합쳐지기 마련이니 지금이야말로 태평성대를 이룩할 적기입니다. 하찮은 저를 세조황제의 외손으로 인정하시고 저희나라를 태후(太后)의 고국으로 여기시어 다른 족속과 달리 각별히 우대하사 상례와 달리 훨씬 빛나는 영광을 베풀어 주셨으니 제가 어찌 한결같이 충성을 다해 제후의 도리를 준수하지 않을 것이며, 항상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으로 길이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예물을 바쳤는데, 황제에게는 백금(白金) 7정(錠)과 저포(紵布) 81필을, 황후에게는 백(白)·황(黃)·홍(紅)의 저포(紵布) 각 9필을, 제2황후(皇后)에게는 백저포 9필·황저포 5필·홍저포 4필을, 중서성(中書省) 태사(太師) 코코테무르[闊闊帖木兒]와 태보(太保) 카라장[哈刺章]과 태위(太尉) 만자(蠻子)에게는 각각 백저포 8필과 흑마포(黑麻布) 7필과 말안장 한 벌을, 평장(平章)·참정(參政)·대대부(臺大夫) 이하 내관(內官)과 소신(小臣)에 이르기까지 차등을 두어 모두에게 저(紵)와 마포(麻布)를 선물했다.
○ 예의판서(禮儀判書) 문천식(文天式)을 나하추[納哈出]에게 답방차 보내면서 마포 각 15필, 말안장 한 벌, 호상(胡床)·표피(豹皮)·병풍(屛風) 등을 선물하는 한편 그 처와 딸로부터 휘하의 관료[官人]에 이르기까지 각각 차등을 두어 저(紵)와 마포를 선물로 주었다. 또한 나하추가 송별연을 마련해 준 데 대한 답례로 백저포 80필을 보내고 나하추의 옹주(翁主)와 문카라부카[文哈刺不花]와 두마대(豆亇大) 등이 과거 제 나라에서 우리가 주는 관작을 받은 일이 있으므로 모두 녹봉포(祿俸布)를 선물로 주면서, 나하추에게는 5백 필, 옹주와 문카라부카에게는 3백 필, 두마대에게는 50필을 각각 주었다.
○ 전국에 사면령을 내리면서 홍륜(洪倫)의 친족과 지윤(池奫)의 일당들은 제외시켰다. ○ 사헌부(司憲府)에서 수재와 가뭄과 전쟁을 이유로 금주령을 내리자고 건의하자 왕이 허락했다. ○ 왜적이 서쪽 변경을 침구해오자 해주(海州) 수미사(須彌寺)가 풍수지리상 일본의 맥(脈)이 된다 하여 거기에 문수도량(文殊道場)을 열고 액막이를 하게 했다. ○ 왜적이 착량(窄梁)을 침구하고 이어 강화(江華)까지 침구하자 개경이 크게 소란해졌다. 이에 최영(崔瑩)을 6도도통사(六道都統使)로 임명하는 한편 이희필(李希泌)을 동강도원수(東江都元帥)로, 목인길(睦仁吉)·임견미(林堅味) 등 11명을 부장(副將)으로 임명해 수성도통사(守城都統使) 경복흥(慶復興)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또한 의창군(義昌君) 황상(黃裳)을 서강도원수(西江都元帥)로, 우리 태조(太祖 : 이성계)와 양백연(楊伯淵)·변안열(邊安烈) 등 10명을 부장으로 임명해 경기도통사(京畿都統使) 이인임(李仁任)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이어 경산(京山)에서 3백 명, 양광도(楊廣道)에 1천 명, 교주(交州)·서해(西海)·평양도(平壤道)에 각각 5백 명씩의 승려를 징집해 전함을 건조하게 하면서, 그 가운데 징집을 회피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으로 처벌할 것이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 4월
○ 왜적이 울주(蔚州)와 계림(鷄林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을 침구했다. ○ 목인길(睦仁吉)·홍중선(洪仲宣)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목충(睦忠)을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 왕빈(王賓)을 밀직부사(密直副使)로 각각 임명했다. ○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이광보(李光甫)를 시켜 용진(龍津)에서 전함을 전조하게 했다. ○ 왜적이 울주·양주(梁州)·밀성(密城) 등지를 불사르고 거의 모든 재물을 쓸어갔다. ○ 가뭄과 전쟁으로 공·사의 모든 술잔치를 금지시켰다. ○ 지밀직(知密直) 이림(李琳)을 경상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임명했다. ○ 왜적이 언양현(彦陽縣)을 불사르자 계림부윤(鷄林府尹) 윤승순(尹承順)이 전투를 벌여 적 4명을 죽였다. ○ 왕빈을 안동도부원수(安東道副元帥)로, 서성군(瑞城君) 최공철(崔公哲)을 강릉도원수(江陵道元帥)로 임명했다. ○ 왜적이 서강(西江)을 침범하자 최영과 변안열이 군사를 동원해 물리쳤다. ○ 우왕이 도당(都堂)에, “지금 성변(星變)과 한재가 심각한 실정이니 유배 중인 죄수들을 석방해 하늘의 견책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라는 글을 내렸으나 석방된 자는 김현(金玄) 뿐이었다. ○ 밀직부사(密直副使) 경의(慶儀)를 서경도순문사(西京都巡問使) 겸 서북면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했다. ○ 급제(及第) 성석연(成石珚) 등을 등용했다. 근신(近臣) 김건(金虔)이 과거에 급제하자 우왕이 기뻐하면서 안장 딸린 말을 선물로 주었다. 병자일. 폭우와 우박이 쏟아졌다. ○ 이 달에 가뭄이 들었다.
• 5월
○ 가뭄이 계속되자 교수형과 참형 이하의 죄수를 사면했다. ○ 왜적이 밀성(密城)을 침구해 노략질하고 보리를 빼앗아 배에 실으면서 무인지경을 가듯 제멋대로 횡행하자 안동조전원수(安東助戰元帥) 왕빈(王賓)이 공격해 물리쳤다. 계미일.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한편 여러 절에서도 기도를 드리게 했다. ○ 개경이 해안 근처라 언제 왜적의 침구를 당할지 모른다고 우려해 내륙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국가 원로인 윤환(尹桓) 등을 소집해 ‘동(動)’과 ‘지(止)’ 두 글자 가운데 한 글자를 선택하게 함으로써 가부를 묻게 했다. 다를 내심으로는 천도에 반대했지만 뒤에 변고가 있을 때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모두 동(動)자에 이름을 썼으나 다만 최영만이 반대했다. 경복흥(慶復興)과 최영 등이 태조의 진전(眞殿)으로 가 점을 쳐서 지(止)자를 얻었는데 우왕은, “왜적이 코앞까지 침구해 온 판에 어찌 점괘를 따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정당문학(政堂文學) 권중화(權仲和)를 철원(鐵原 :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으로 보내 도읍에 적합한 땅을 살펴보게 했지만 최영의 간언으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 우리 태조(太祖 : 이성계)가 지리산(智異山)에서 왜적을 공격해 대파했다. 경인일. 큰 우박이 쏟아졌다. ○ 우왕이 홍중선(洪仲宣)과 권중화를 사부로 임명했다. ○ 왜적 1백여 기가 남양현(南陽縣 :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비봉면, 송산면, 서선면, 마도면 일대)·안성현(安城縣 :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종덕현(宗德縣 : 지금의 수원시 일대) 등지를 침구했다. ○ 시전(市廛) 동쪽 회랑을 신축했다. ○ 왜적이 다시 강화(江華)를 침구해 강화도로부터 봉화가 밤낮없이 올라오는 바람에 개경에 삼엄한 경계를 폈다. 원수(元帥)들을 동·서강(東西江)으로 나누어 파견해 수비하게 하는 한편 용사들을 모집해 모두에게 관직을 주고, 각자에게 베 50필을 미리 지급했다. 정유일. 덕녕공주(德寧公主)를 신효사(神孝寺)에 있는 충혜왕(忠惠王)의 진전(眞殿)에 합사했다. ○ 왜적이 재차 강화를 침구해 살인과 약탈을 크게 벌였다. ○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 우인열(禹仁烈)이 병으로 사직하자 배극렴(裴克廉)을 그 대신 임명했다.
• 6월
○ 문천식(文天式)이 북원(北元)으로부터 귀국해 옥으로 만든 띠와 유리잔을 바쳤다. ○ 사헌부(司憲府)에서, “최인철(崔仁哲)은 본래 천인으로서 외람되게 관작을 받아 명을 받들고 사신으로 갔다가 제멋대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또한 거짓으로 왜적을 격파했다는 보고를 올려 나라를 기만하고 분수에 넘치는 상을 받았으니 법으로 다스려서 뒷사람의 징계로 삼아야 합니다.” 라고 탄핵하니, 하사했던 은(銀)을 회수하고 장형에 처한 다음 영주(永州 :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로 유배 보냈는데 가는 도중에 죽었다. 경술일.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이 자리에서 우왕이,
“5월 29일은 태조의 기일이다. 가뭄과 물난리가 없도록 하는 것이 태조의 소원이었으므로 4백 년 동안 이날이 되면 반드시 적합하게 비가 오거나 개였는데 올해는 비가 오지 않으니 이는 내가 어리고 덕이 없어서 천심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억울한 일로 원한을 품은 사람이 있어서인가?”
라고 자책하면서 수라상의 반찬을 줄이게 했다. 그리고 재상들에게, “이렇듯 가뭄이 심하니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이는 필시 원망과 원한을 품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야기된 사태이다. 내가 인심을 다독거리려고 누차 사면령을 내렸지만 경들이 미적거리며 기꺼이 시행하지 않았으니 그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라고 꾸짖으며 교수형과 참형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했으나 김속명(金續命)만은 제외시켰다. ○ 왜적이 서해도(西海道)의 안주(安州 :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시)를 침구하자 김공세(金公世) 등 세 사람이 적 네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으므로 각각 베 50필을 주었다. ○ 왜적이 다시 장택현(長澤縣 :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군지역)을 침구하자 원수(元帥) 지용기(池湧奇)가 공격해 패주시켰다. ○ 우왕이 도당(都堂)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내렸다.
“변방 백성들 가운데 적의 포로가 되었다가 요행히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을 모조리 적의 첩자로 지목해 죽인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이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옛 고향 산천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정상 당연한 일이거니와 하물며 부모와 처자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귀향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다만 죽일까 겁이 나 적을 따라갔을 뿐이다. 금후로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 모두에게 반드시 상을 내려줄 것이며 실지로 첩자행위를 한 자라도 죽이지 말고 관청에서 생필품과 양식을 주어 살 터전을 마련해 주라. 또한 왜적을 죽이고 돌아오는 자가 있으면 상을 주어 등급을 올려주라. 변방의 고을들에 지시해 이 사실을 알리는 방(榜)을 붙이게 하고 어길 시에는 치죄하라.”
을묘일. 큰 비가 내렸다. ○ 지문하(知門下) 박보로(朴普老)를 서해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임명했다. ○ 사은사(謝恩使) 이자송(李子松)이 북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원나라 조정의 신료들은 이자송이 조복(朝服)을 입고 사신의 의례를 행하는 것을 보고 다들 울면서, “우리가 곤궁한 처지로 피난 온 이후 지금 다시 이러한 의례를 보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소.” 라고 하며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 밀직부사(密直副使) 이인립(李仁立)을 서경부원수(西京副元帥)로, 판밀직(判密直) 한방언(韓邦彦)을 안주원수(安州元帥)로 각각 임명했다. ○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안길상(安吉祥)을 일본으로 보내 해적(海賊)을 단속해 줄 것을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전달하게 했다.
“우리나라는 귀국과 이웃으로 있으면서 비록 큰 바다로 격해 있긴 하나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경인년(충정왕 2, 1350)부터 해적이 준동하기 시작해 우리 섬 주민들을 못살게 굴면서 양쪽다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있으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이 때문에 병오년(공민왕 15, 1366)에 만호(萬戶) 김용(金龍) 등을 시켜 사정을 알리게 해 즉시 귀국의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부터 단속하겠다는 확약을 받아냄으로써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년들어 갑인년(우왕 즉위년, 1374) 이후부터 해적들이 다시 심하게 창궐하기에 재차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나흥유(羅興儒)를 시켜 해적의 침구는 양국간의 틈을 만드는 불상사라는 뜻을 귀국에 전달하게 했습니다. 그 후 나흥유 편에 보낸 귀국의 답신에는, ‘그 도적은 우리 서해(西海)의 한 지역인 구주(九州)의 난신(亂臣)이 서쪽 섬을 할거해 완악스럽게 침구를 자행하는 것이며, 실제 우리의 소행이 아니기 때문에 당장 단속하겠다는 약속을 드릴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참작해 생각해 보더라도 백성을 다스리고 도적을 단속하는 것은 국가가 당연히 시행해야 할 일이니 앞서 말한 해적의 침구에 대한 단속 약속도 외교 도리상 반드시 따라야 할 것입니다. 두 나라 우호 관계의 유지와 해로의 안정은 우리 요구를 귀국이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왜적의 배 2백여 척이 제주(濟州)를 침구해오자 전라도 수군도만호(水軍都萬戶) 정용(鄭龍)·윤인우(尹仁祐)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기다렸다가 배 한 척을 노획하고 적을 섬멸하니 우왕이 정용 등에게 옷 한 벌씩을 내려 주었다. ○ 왜적이 서해도(西海道)의 영강현(永康縣 : 지금의 황해남도 옹진군)과 장연현(長淵縣 : 지금의 황해남도 장연군) 등지를 침구해 오자 원수 세 사람이 적을 협격했다. ○ 왜적이 풍주(豊州 : 지금의 황해남도 송화군)와 안악(安岳 : 지금의 황해남도 안악군)을 침구했다. ○ 우왕이 도당(都堂)에 글을 내려, “지금 전란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데다 기군까지 겹친 판에 토목 공사로 우리 백성들에게 거듭 고통을 겪게 할 수 없다. 금후로 전국 각처의 건축공사를 일절 중지시키라.” 고 지시했다. ○ 왜적이 함종현(咸從縣 : 지금의 평안남도 증산군)·삼화현(三和縣 : 지금의 남포직할시 룡강군)·강서현(江西縣 : 지금의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등지를 침구했다. ○ 우왕이 재상들에게, “왜적이 비록 극악한 도적떼이긴 하지만 시체는 묻어주어야 마땅하다. 하물며 강화(江華)와 서해(西海)의 우리 백성 중에 왜적에게 죽임을 당해 그냥 내팽개쳐진 시신이 매우 많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니 내탕(內帑)의 재물을 내어서 매장하는 비용으로 쓰라.” 고 지시했다. ○ 야성군(野城君) 김보일(金寶一)의 첩인 박씨(朴氏)가 김보일의 적손(嫡孫)인 김자(金孜)와 토지 문제로 다투다가 김자가 자신의 누이와 간통했다고 무고했다. 이에 사헌부(司憲府)에서 박씨의 죄를 낱낱이 밝혀 내 교수형에 처했다. ○ 앞서 사자를 하삼도(下三道)로 파견해 한산(閑散)의 자제를 징집하자 심지어 자식을 팔아 말과 바꾸는 자까지 생겨났다. 명분상 한산을 징집한다고 내세웠지만 그 절반은 농민과 개인 집의 노비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도당에서는 사실을 조사해 모두 돌려보냈다.
七月 以歲旱, 國用虛竭, 除生日進馬. ▶遣崇敬府尹陳永世, 相宅于漣州, 永世還曰, “漣州五逆之地, 不可建都.” 北元遣宣徽院使徹里帖木兒來, 請挾攻定遼衛. 禑贈金帶鞍馬, 不受. 倭寇豐州, 西海道上元帥朴普老進擊之, 副使趙天玉等十餘人死. 遣使諸道, 修築山城
• 7월
○ 가뭄 때문에 국가 재정이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었으므로 왕의 생일에 말을 바치는 것을 면제시켰다. ○ ▶숭경부윤(崇敬府尹) 진영세(陳永世)를 연주(漣州 :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로 보내 도읍을 세울 땅을 살펴보게 했는데, 진영세가 돌아와 연주는 오역의 땅[五逆之地]이라 도읍을 세울 수 없다고 보고했다. ○ 북원에서 선휘원사(宣徽院使) 테리테무르[徹里帖木兒]를 보내와 정요위(定遼衛)를 협공할 것을 요청했으며 우왕이 금대(金帶)와 안장 얹은 말을 선물로 주어도 받지 않았다. ○ 왜적이 풍주(豊州)를 침구하자 서해도 상원수(上元帥) 박보로(朴普老)가 나아가 공격했는데 부사(副使) 조천옥(趙天玉) 등 10여 명이 전사했다. 사신을 각 도로 보내 산성을 수축하게 했다.
• 8월
○ 진천군(晋川君) 강인유(姜仁裕)를 계품사(啓稟使)로 북원에 보냈다. ○ 찬성사(贊成事) 양백익(梁伯益)을 서해도 원수로 임명했다. 무오일. 우박이 쏟아졌다. ○ 왜적이 신주(信州 : 지금의 황해남도 신천군)·문화(文化 : 지금의 황해남도 신천군)·안악(安岳 : 지금의 황해남도 안악군)·봉주(鳳州 :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를 침구했는데, 원수(元帥) 양백익(梁伯益)·나세(羅世)·박보로(朴普老)와 도순문사(都巡問使) 심덕부(沈德符) 등이 공격했으나 패배하자 장수를 보내 전투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우리 태조(太祖 : 이성계) 및 임견미(林堅味)·변안열(邊安烈)과 밀직부사(密直副使) 유만수(柳曼殊)·홍징(洪徵)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임명해 그 지역으로 급파했다. 태조가 원수들과 함께 해주(海州)에서 왜적을 공격했는데, 변안열과 임견미 등은 전투에 패해 후퇴했다. 태조가 전투에 앞서 백 수십 보 밖에서 활로 투구를 쏘아 승패를 점쳤는데 세 발이 모두 투구를 관통하니 “오늘 전투의 승패는 이미 결정되었다.”고 말했다. 해주 동쪽 정자(亭子)의 전투에서 한창 격전이 벌어졌을 때 한 길이 넘는 진창을 만나게 되자 태조의 말은 단번에 뛰어 넘었는데 따르던 자들은 모두 건너지 못했다. 태조가 대우전(大羽箭)으로 쏘는 족족 적을 명중시켜 거꾸러뜨린 다음 승세를 타 군사를 풀어 마침내 적을 대파했다. 태조가 자신의 전공을 내세우지 않자 임견미 등은 자신들이 패배한 사실을 숨기고 승리를 스스로의 공적이라고 떠벌리면서 관작과 상을 가로채려 했다. 이 전투에서 태조는 애초 대우전(大羽箭) 20발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투가 끝날 즈음에 세 개의 화살을 남겨두고서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내가 적들의 왼쪽 눈언저리를 모조리 쏘았으니 너희들이 가서 보라.” 고 하기에 가서 보았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나머지 적들이 험한 지역을 막고서 섶을 쌓아 버티고 있자 태조가 말에서 내리더니 호상(胡牀 : 의자)에 걸터앉아 풍악을 울리게 했으며 승려 신조(神照)는 고기를 썰고 술을 올렸다. 이어 태조가 군사들을 시켜 섶에 불을 지르게 하니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가렸으며 궁지에 몰린 적들이 뛰쳐나와 사력을 다해 돌진하면서 쏜 화살이 의자 앞에 놓인 술병에 명중했다. 그러나 태조는 태연히 앉은 채 일어나지 않고서 김사훈(金思訓)·노현수(魯玄受)·이만중(李萬中) 등을 시켜 공격하게 해 적을 거진 섬멸시켰다. ○ 일본국에서 승려 신홍(信弘)을 답방차 보내면서, “그 도적떼들은 우리에게서 도망쳐간 무리들이라 우리 명령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단속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는 내용의 답서를 보냈다. ○ 삼사우사(三司右使) 최공철(崔公哲)을 의주원수(義州元帥)로 임명했다. ○ 왜적이 해주(海州)를 침구했다.
• 9월
○ 왜적이 영광(靈光 :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장사(長沙 :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모평(牟平 : 지금의 전라남도 함평군)·함풍(咸豊 : 지금의 전라남도 함평군) 등지를 침구하고 이어 해주(海州)·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를 침구했다. 최영에게 월(鉞)을 주어 지휘권을 부여하는 한편, 원수 이희필(李希泌)·김득제(金得齊)·양백연(楊伯淵)·변안열(邊安烈)·우인열(禹仁烈)·박수년(朴壽年)·조사민(趙思敏)·강영(康永)·유영(柳濚)·유실(柳實)·박수경(朴修敬) 등과 함께 왜적을 격퇴하게 했다. ○ 밀직부사(密直副使) 배언(裴彦)을 화평부윤(和寧府尹)으로 임명했다. ○ 북원에 체재 중인 강인유(姜仁裕)가 사람을 보내와, “평장(平章) 문전성(文典成)과 대참정(大參政) 장해마(張海馬)가 승상(丞相) 나하추와 함께 군사를 훈련시키고 말을 먹이면서 고려군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정요위(定遼衛)를 공격하려 합니다.” 라고 알렸다. 당시 우리가 정요위를 협공하자는 북원의 요청에 불응했기 때문에 다시 독촉한 것이다. 이에 군부판서(軍薄判書) 문천식을 북원에 보내 날씨가 춥고 사료용 풀이 말랐기 때문에 군사를 출동시킬 수 없다고 알렸다. ○ 왜적이 악양현(岳陽縣 :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을 침구하자 원수 이림(李琳)이 공격해 적선 두 척을 노획했다. ○ 전 대사성(大司成) 정몽주(鄭夢周)를 답방차 일본에 보내는 한편 또한 해적을 단속해달라고 요청하게 했는데 그 서한은 이러했다.
“우리나라는 위치상 북쪽으로 원나라와 연해 있고, 서쪽으로 명나라와 접해 있는 관계로 항상 군관(軍官)을 훈련시켜 수비에 충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적들의 침구에 대해서는 다만 연해의 주군(州郡)들에게 방어를 일임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 때문에 적도들이 틈을 엿보다가 갑자기 침구해 민가를 불태우고 사람들을 약탈하다가 우리 관군을 보기만 하면 바로 배를 타고 도망쳐 숨어버리니 그 피해가 적지 않습니다. 이제 대장군(大將軍)의 글을 보니 그 곡진한 성의를 잘 알겠고 또한 홍장로(弘長老)로부터 귀국의 후의를 자세히 들었으니 앞으로 더욱 노력해 줄 것을 당부드립니다.”
• 10월
○ 판사(判事) 최무선(崔茂宣)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화통도감(火 都監)을 설치했다. 최무선이 같은 마을에 사는 원나라 염초(熖硝) 기술자인 이원(李元)을 잘 구슬려 그 기술을 은밀히 물은 다음 가동(家僮) 몇 명으로 하여금 익혀 시험해 본 후 왕에게 건의해 설치하게 된 것이다. ○ 개경의 성곽을 수리했다. ○ 왜적의 배 40척이 동래현(東萊縣)을 침구했다. 경신일. 우레가 쳤다. ○ 왜적이 함열현(咸悅縣 :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을 침구했다. ○ 정당문학(政堂文學) 권중화(權仲和)가 서연(書筵)에서 왕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론하다가 위징(魏徵)이 당나라 태종에게 응대하는 구절에 이르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감정은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같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이는 감정이 지나치지 않게 절제하는 반면 어리석은 자는 마구 감정을 분출해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법입니다. 폐하께서 항상 스스로 끝까지 감정을 잘 절제하신다면 아득한 후대에까지 그 덕을 입을 것입니다.” 이에 우왕이, “정말 훌륭하신 말씀이오. 경은 참으로 위징을 본받아서 나를 잘 가르치시오.” 라고 하니 권중화는, “전하께서 저의 말을 용납하시기만 한다면 제가 어찌 심력을 다하지 아니하오리까?” 라고 응대했다. ○ 찬성사(贊成事) 양백연(楊伯淵)을 상원수(上元帥)로 임명했다.
• 11월
○ 전 개성윤(開城尹) 황숙경(黃淑卿)을 북원에 보내 절일(節日)을 축하하게 했다. ○ 인해(印海)를 청주옥(淸州獄)에 수감한 후 이산(伊山) 전투에 패배한 죄를 다스렸다. 정해일. 짙은 안개가 끼었다. 기축일. 월식(月食) 때문에 팔관회(八關會)를 중지시켰다. ○ 우왕이 유모 장씨(張氏)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내렸다.
“돌이켜 보면, 모후께서 불행하게도 홀연 별세하자 네가 유약한 나를 온갖 노고를 아끼지 않고 조심스레 보호해준 결과 오늘의 경사를 맞게 했으니 너의 노고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이에 토지 백결과 노비 열 명을 하사하며 비록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열 번까지는 모두 용서할 것이다.”
○ 장녕공주(長寧公主)와 장씨에게 각각 쌀과 콩을 합쳐 60석을, 지신사(知申事) 양이시(楊以時)에게는 40석을 주었다. ○ 왜적이 부여(扶餘)·정산(定山 : 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홍산(鴻山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을 침구한 데 이어, 왜적의 배 130척이 김해(金海)와 의창(義昌)을 침구하자 도순문사(都巡問使) 배극렴(裴克廉)이 맞아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 왜적이 수안현(守安縣 :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월곶면 일원)·동성현(童城縣 :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통진현(通津縣 :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 등지를 침구했다. ○ 성변(星變)과 월식(月食) 때문에 교수형과 참형 이하의 죄수를 사면했다.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을 시켜 당태종(唐太宗)의 백자비(百字碑)에 주석을 달아 올리게 했다.
• 12월
○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을 북원에 보내 신년을 하례하게 했다. ○ 중랑장(中郞將) 지우연(池遇淵)이 판서(判書) 민백훤(閔伯萱)과 토지 문제로 다투다가 판도사(版圖司)에 소송을 제기했는데, 판도정랑(版圖正郞) 이양중(李養中)이 과거 지우연이 합포(合浦)에 있을 당시 관청의 물품을 훔쳤던 일을 추궁했다. 지우연이 원한을 품고서 이양중이 도관정랑(都官正郞)으로 있을 때 사람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무고했다. 이에 지우연을 순군(巡軍)에 하옥하고 국문하려 하자 도주했다가 체포되어 사형 당했다. ○ 명나라 황제가 우리나라 사람 정언(丁彦) 등 358명을 돌려보냈다. ○ 달명(達明)이라는 자가 안주(安州)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스스로 충숙왕(忠肅王)의 친동생인 덕흥군(德興君)의 아들이라고 떠벌리면서 은밀히 반역을 도모하기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경보(慶補)를 시켜 그를 체포해 국문했더니 본래 선주(善州 :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사람 왕가물(王加勿)로 판명되었다. 이에 일당 다섯 명과 함께 참형에 처했다. ○ 삼사좌사(三司左使) 이희필(李希泌)이 죽자 충정(忠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나하추가 사자 편에 양 160마리와 모우(毛牛) 세 마리를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