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희망도서가 도착했다는 알림문자를 받고 도서관에 갔다. 그 책들은 워낙 비싸 살
엄두를 못내는 책들로(한 권에 90달러가 넘는다) 거의 한달 전에 신청해 눈이 빠져라
참이었다. 27일까지만 대출이 가능하다는 문자를 받고 마침 쏟아지는 억수같은 비를
무릅쓰고 올라갔던 것이다.
헌데 대출대에서 문제가 생겼다. 학기 중이 아닌, 방학 중이라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아니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내 신분때문이다. 언젠가 "도서관 책들은 학부생을 위한
거예요."라고 태연히 말해 내 속을 긁어놓던 사서는 오늘은 수료생이라서 책을 빌려줄 수
없다고 말한다.
학기 중이면 신분 확인이 가능한데 방학 중이라 신분 확인이 안된다는 그 말은 등록을 안했으니
믿을 수 없다는 말과 대동소이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과정 수료 전에 실컷 신청하고 빌리고 할 것을
코스 밟을 때야 수업 따라가느라 바빠서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고 지금은 내가 신청해서
도서관 측에서 필요성을 인정하고 구입한 책인데 신분확인이 안되어 빌려줄 수 없다는 말이다.
해서 복사하마고 돌려주마고 사정해서 간신히 도서관내 대출을 허락받았다.
책을 들고 복사실로 간다. 낯익은 복사실 아줌마가 나를 보고 아는 체를 한다. 몇 년간 들락거리다보니
단골 중 단골이 된 것이랄까. 하기사 아줌마에게는 단골 아닌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결혼 했수?"
복사를 부탁한다는 말에 대뜸 아줌마 질문이 날아온다. 이제는 물어도 될 만큼 스스럼없다 싶었을까?
"했어요."
"저런! 저런!"
"그동안 공부한다고 신랑 등꼴 빼먹었지!"
대뜸 큰 소리가 건너온다.
그동안 보아온 바로 아줌마에게는 악의가 전혀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한바탕 했을 것이지만
이 아줌마는 워낙 쾌활하고 사심없는 사람이라 나도 별 생각없이 받아친다.
"아줌마도 참. 제가 돈 벌고 장학금 받아서 공부했어요."
"그래도 집안 일에 소홀하잖아. 신랑 뒷바라지는 어떻게 해."
"아유....저 집안 일 잘해요. 제사도 혼자 지내는 걸요."
아줌마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한다.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일갈한다.
"신랑이 공부 하라고 놓아두었으니 공부했지. 안 그럼 어떻게 공부해!"
아, 이 소리!
지겹도록 들었던 이 소리를 여기서도 들을 줄이야.
여자들은 그저 남자들 뒷바라지 하고 집안 일 돌보아야 한다는 그 사고방식. 내가 돈 벌어서
내 등록금 댄다 해도 저들에게는 그런 말이 먹히지 않는다. 남자는 자기 발전을 위해 일하고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여자는 내돈 내고 내가 공부해도 남편이 허락해야 하는 것이라는
저 사고방식.
왜 여자인 우리는 이처럼 자신을 노예 상태에 놓지 못해서 안달하는 것일까?
친척들을 비롯해 친정 어머니, 동생, 오빠, 그리고 오늘 복사집 아줌마에게 이르기까지.
왜 내가 공부하는데 남편이 허락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내 삶은 남편의 수중에 달려 있다는 뜻일까?
지금 나는 21세기에 살고 있는 것 맞는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간 엄마는 허리 휘도록 일하면서도 아이 생각에 마음을 놓지 못한다.
결국은 굴 따다 말고 바구니를 놓아둔 채로 달려와야 하는 엄마의 삶은 온전히 아이에게
매달려 있는 것.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돌풍을 일으킨 것은 한국인 누구나가
그리는 엄마가 온전히 자신을 희생하는 여인상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 엄마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가 되기도 바라지 않는다. 자신은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를 원하면서 엄마에게만 혹은 아내에게만 그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엄마가, 그 아내가 자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왜 모를까.
아니 왜 무시할까. 삶은 앞으로 나아갈수록 빛난다.
첫댓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그런가보다 해야지요.^^*
그렇죠. 자신을 노예의 영역에 넣어놓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면서 자신을 배려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분노를 느끼면서 살아 온 거지요.
남자들은 술을 마셔도 밖에서 놀아도 쉬는날 방바닥하고 친구를 해도 식구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느라 그렇다고 말하지요. 여자들도 식구들을 위해서 쉬고 싶을 때가 있고 하고 싶은게 있는데...실은 저도 복사 아줌마랑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나봐요. 친구나 아는 여자가 어딜 간다, 뭘 한다 그러면 남편이 하게 하냐고 물어 보거든요. 제 자신도 그렇구요..에휴..........
그러게요. 왜 남자들 노는 건 식구들을 위한 것이고 여자들 노는 건 죽을 죄가 되는 걸까요?
모두가 숙제입니다. 풀지못한 숙제, 풀어야할 숙제...생각대로 살아지지 않을때도 많은것같아요. 때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제 생각을 접을때도 있구요..내 마음이 조금 덜 부댖기는 쪽으로 생각하게 되지요..
전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우리가 받은 교육은 항상 타인을 위해 살라고 가르쳤지요. 종교 역시 그러했구요. 그 강압은 여성에게 더 심한 것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지요. <엄마를 부탁해>에 등장하는 엄마는 그런 교육을 고스란히 실천한 여성이었구요. 단 하나 다른 점이라면 딸 역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는 것이지요.
제목을 보고는 감상적인 글인줄 알고 며칠을 미루었다 읽었는데..... 그래요, 서글프죠. 비단 이 일뿐만이 아니라 생각과 가치관이 다른 이들과 섞여 살아야한다는 건 정말 힘겹습니다. 희야님, 쏘주 하시나요? 여기 쏘주병 따 두고 가니 마음껏 드시고 저를 위해 한 모금만 남겨두세요. ^^*
아이구 쏘주는 못마시지만 다른 술은 마셔요. ^^ 저 정도로 내려앉지는 않아요. 이미 무수히 거쳐온 과정인걸요. 사실 저런 사고방식 때문에 제가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이거든요.
역시나입니다. 저도 소주는 못 마시니 다른 술로 준비하지요. ㅎ 맞아요, 세상이 나를 만들어주지요.
저도 여자들 스스로 더 심한 그런 사고방식들 땜시 맨날 분통이 터지는데~~~~~~
그래서 여자의 적은 여자라 하나 ㅎㅎ
어릴적 할머닌 손녀인 절 손자인 남동생보다 더 귀히 여기셨고 결혼해서도 남편은 늘 자신보다 처자식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 어릴 때 명절에 시댁가면 큰시동생이 우리 아이 업고 함께 찌짐 굽고 했어요
와아 연화님은 축복받으셨군요. 저 어릴 때 어머니는 기집애는 쓸모 하나도 없어 라고 구박하시기 일쑤였고 학교 다닐 적에는 아버지 등꼴 빼먹는다고 일쑤 구박하셨죠. ^^
제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 "조선에서 나만 손녀 본 것 같더라고...." 하지만 제게도 여울이 있답니다 사랑하는 어여쁘신 희야님!
이런 남존여비 타파하기 위해서 여자들이 단합하여 데모를 하고 있는 중이죠. 여자들의 id 가 암암리에 작용하여 딸 생기면 떼고, 아들이면 낳고. 이런 일을 십수년 해 왔지요. 즉 남자의 값을 떨어뜨리는 건 남자의 숫자를 확 늘리면 대번에 가능해 진다는 논리죠. 그래서 지금 고등학교 1~2년 정도의 남녀 성비는 126:100 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1/4이 더 많은 것이죠. 금세 여자들이 대접받는 세상이 올겁니다. 전 남자지만, 우리 마눌 편이걸랑요.^^ 마눌은 평생을 남자들 션찮은 거 질타하고 윽박지르고 무시하고 살고 있습니다. 이점 참 존경스럽습니다. 같이 살다보니 전 물이 들어서 여자 편을 들기로 했습니다.
ㅎㅎㅎ 여자들이 단합해 아들만 낳는다는 그 발상이 참 신선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