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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국가대표이사
문선명(文鮮明; 음력 1920년 1월 6일, 양력 2월 25일~ ,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은 대한민국의 종교인으로, 통일교 즉,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전신)의 창시자이며 최고 목회자이다. 현재의 공식직함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총재이다.
그는 1957년 만들어진 원리강론을 통해서 구원은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의 실천을 통해 완성된다는 새로운 신학적 교리를 만들었으며, 이러한 교리를 바탕으로 세워진 통일교는 종교적 활동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스포츠, 사상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의 영향력은 대한민국보다는 오히려 미국, 일본 등의 세계 각국에서 더 강하다.[1] 1960년대 이래로 현재까지 두익사상에 의한 남북통일을 주장하며 [2] 반공 및 승공 운동을 벌여왔다.[3]
1990년 구소련의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회동을 가지고, 1991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당시 주석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고 한국의 통일 방안을 논의하는 등 세계 각국의 여러 고위 정치인들과 만남을 통해, 초종교, 초국경, 세계평화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4]
2009년 1월 30일 구순을 맞아, 천주청평수련원에서 개최된, 생일잔치에는 세계각국의 사절 1천여 명이 축하객으로 참석하였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도 90년 된 산삼을 보내와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9년 3월10일에는 국내 최대 출판사 중 하나인 김영사가 문총재 자신이 전 생애를 돌아보며 직접 구술한 최초의 저서인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를 출간하였다.
문선명은 평안북도 정주군 덕달면 덕성동에서 아버지 문경유와 어머니 김경계의 사이에 6남 7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형 문용수의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종조부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문윤국 목사로 3.1 독립운동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오산학교 직원과 생도 및 교회신도, 오산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렀다.[5] [6][7]그 이후로도 피신을 다니다 강원도 정선에서 생을 마감하였는데, 집안재산을 모두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어 집안이 파산나고 말았다. [8]
어린 시절(7-13세)에는 자연을 벗삼아 서당에서 유교의 논어, 맹자 등을 공부하였다. '차자에게 공부를 시키면 객사한다'는 집안 전통이 있어서 그도 학교를 늦게서야 가게 되었다. 14세에 신식학문을 접하기 시작하여, 15세에 오산학교에 입학한다. 1년 뒤, 정주 공립 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세(1938년)에 졸업한다. 정주의 유지들이 모인 졸업식에서 일본과 일본식 교육에 대하여 단상에서 비판하는 즉흥적인 자원 연설을 하였으며, 그 이후로 경찰들에게 주시당하기 시작한다. 본래 유교 집안이었으나, 10여 세 때에 전가족이 개신교에 입교한다. [9] 16세 부활절 아침에 예수가 계시에 나타나, '고통받고 있는 인류 때문에 하나님께서 슬퍼하고 계시니,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역할을 해 달라'고 요구를 하였다고 한다. [10]
1938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를 다니며, 조선예수교회[11] 계열의 명수대예배당[12]에서 반사(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 당시, 창경원이나 흑석동, 상도동 일대에서 전도활동을 하였다.[13]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과에 유학하였다. 이곳에서 원리와 공산주의 및 진화론에 맞선 사상체계를 정립한다. 또한, 한인학생회를 통하여 항일지하학생운동을 벌였다. [14]
졸업 후 귀국한 그는 1943년 12월 최선길[15]과 약혼하였고, 1944년 3월에는 서울에 있는 가시마구미 경성지점 전기부에 취직하였다. 1944년 5월 예수교 이호빈 목사의 주례하에 결혼하였다. 1944년 10월에서 1945년 2월 사이에는 경기도경찰부에서 감옥생활을 하며, 일본에서의 활동에 대한 취조와 고문이 이어졌다. 1945년 10월에는 돈 문제 때문에 1주일 가량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후, 1946년 4월까지 김백문 목사의 '이스라엘수도원'[16][17]에 참여한다. 이곳에서 김백문 목사는 계시에 의하여 모든 신자가 보는 앞에서, 전세계의 솔로몬왕의 영광이 그에게 임하게 될 것을 축복해 주었다고 한다. [18]
1946년에는 '삼팔선을 넘으라'는 하늘의 계시를 받고 가족은 남한에 남겨둔 채 홀로 평양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1946년 6월에는 북한 정부의 신종교에 대한 탄압정책에 따라서, 종교를 사칭해 사기를 쳤다는 명목으로 허호빈의 복중교가 적발되었다. 문선명은 복중교와 관련이 있다는 죄목으로 조사를 받았으며, 남한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월북하였다는 이유로 간첩혐의가 덧붙여졌다. 간첩혐의에 대하여서는 뚜렷한 혐의가 나타나지 않아, 사회질서문란죄로 1946년 8월부터 11월까지 수감되었다. 출옥 후 종교활동을 통하여 신도 수가 점차적으로 많아졌으나, 북한의 종교말살정책과 개신교 측의 고발로 인하여 다시금 간첩혐의로 1948년 2월부터 5월까지 평양내무서 및 형무소에 수감된다. 5월에는 흥남노무자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 1950년 10월까지 강제노역을 당한다. 이곳에서 12명을 전도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 때 흥남에 상륙한 UN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10일간의 평양귀환 길에 문정빈, 박정화 등 옥중에서 전도한 네 명의 제자가 따라나섰다. 평양에서 다시 40일간 지승도, 옥세현, 정달옥, 김원필 네 명의 제자를 수습하여 평양을 떠난다. 1950년 12월 4일 평양을 떠나, 27일에 서울에 도착한다.[19][20].
서울에 1주일 간 체류 하다가 1951년 부산으로 피난을 와 토담집을 짓고 부두노동, 목공, 미군 초상화 그리는 일 등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교리인 《원리원본》을 집필하여 1952년 완성하면서 부산과 대구광역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한다. 지승도, 옥세현, 김원필, 이기완, 강현실 등이 초기의 신자였다. [21] 특히, 강현실은 문선명이 원리원본을 탈고하던 1952년 5월 10일, 그를 전도하러 갔다가 전도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2] 1953년에는 대구로 개척 전도를 하며 세력권을 넓혀 나갔다.
1954년 5월 서울로 기반을 옮기며 정식적으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설하였다. 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벌이다, 1955년에 통일교를 신앙하는 이화여자대학교와 연세대학교 학생 및 교수들에게 퇴학 및 퇴직 명령이 내려지면서 기반이 약화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한국전쟁 당시 병역기피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10월에 혐의에 대한 무죄판결이 나고, 문선명은 100일간의 수용소 생활을 마친다. 그의 아내 최선길은 수감기간 동안 문선명과 통일교에 대한 비난을 공공연히 하였으며, 교도소에 이혼장을 들고 찾아와서 이혼을 종용하였다고 한다. 그는 "3년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하였으나, 계속되는 이혼 요구에 못 이겨 석방 직후 이혼했다. 같은 시기, 청파동 본부교회로 기반을 옮기고 정착한다.
1957년 교리서 《원리해설》(1966년 《원리강론(原理講論)》으로 증보되었음)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종교활동을 시작하면서, 1958년에 일본(최봉춘), 1959년에 미국(김영운, 김상철)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초창기부터 해외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59년 청파동에 통일산업 공장을 세우며 경제사업을 시작한다.
1960년부터 국제합동축복결혼식이라는 대규모 합동 결혼식을 진행하고 있다. 1960년에는 문 목사와 한학자 여사의 성혼식과 3쌍의 초대교인들이 참가한 '축복결혼식'이 열렸다.[23] 1961년에 33쌍이 더 축복결혼에 참여함으로써, 36 가정이 탄생하였다.[24] 같은 해, 장녀 문예진과 장남 문효진이 탄생하였다.[25]
1963년에 72가정 축복식이 있었으며[26], 1964년에는 차녀 문혜진이 탄생하였으나 1주일 만에 타계하였다.[27] [28] 1965년에는 세계 40개국을 순방하며 120개의 성지를 지정하였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회동하였다.[29] 1966년에는 종파간의 화합을 내건 초교파운동본부를 설립하여 최근 가정연합에서 추진 중인 초종교초교파운동의 효시를 마련하였다.[30] 1968년 1월 1일에는 하나님의 날을 선포하였으며,[31] 같은 해에, 국제승공연합을 창설하여 승공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그 당시 유행하던 공산주의에 반대한다’거나 ‘공산주의를 박멸한다’는 뜻의 ‘반공’(反共) 또는 ‘멸공(滅共)’보다는, 공산주의를 이기자는 뜻의 ‘승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32] 또한, 이 해 2월 22일에 430가정 축복식이 있었다.[33]
1970년 9월에는 세계반공연맹 일본대회를 개최하였다.[34] 1971년에는 기반을 미국으로 옮긴다.[35]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 때에는 닉슨 대통령을 지지했다. [36] 문선명은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전면광고를 내, 「용서하라! 사랑하라! 단결하라!(Forgive, Love and Unite)」라는 구호를 내걸고 닉슨을 옹호하였다.[37] 1974년과 1975년에는 미국 국회의 초청으로 하원의원들 앞에서 'One Nation Under God'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였다.[38]
문선명은 UN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각국의 정치, 경제, 언론, 과학, 문화, 교육 등 전분야에 걸쳐서 국제적인 사업을 펼치고 있다.[39]
문선명은 UN에는 한계점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른바 'UN 갱신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를 위해 천주평화연합(UPF)이라는 민간기구를 만들어 민간 차원에서 세계적으로 평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를 모태로 하여 기존 UN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즉, 현재까지 UN을 이끌어온 국가대표들을 하원으로 설치하고 새롭게 종교계, 문화계, 교육계의 국제적인 지도자들로 구성된 상원을 창설해 이것이 하원을 보완하고 하원이 그것을 존중하고 현실화한다는 주장이다. 이 기구는 기존 유엔이 각국 정부 대표들로 구성, 운영되는 데 반해 유엔 회원국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문화계 인사들이 자국 대표로 참여하는 세계적인 민간 기구이다. "지역주의와 국가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기존 유엔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 평화 정착, 분쟁 해결, 빈곤 추방 및 환경 보전 등 인류 보편적 가치의 실현"을 목표로 삼고 있다. [40] [41][42]
대한민국에서 평화통일가정당을 창당하여 지난 18대 총선 당시 모든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후보를 낸 바 있다. 그러나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이후 네팔에서도 같은 이름의 정당을 설립하여, 1명의 당선자를 내었다.[43][44]
(주)일화[45] 통일중공업(주)(S&T 중공업의 전신)[46], 일신석재 [47], 평화자동차 등의 여러 기업을 운영해오고 있다. 특히, 평화자동차는 북한에 자동차 공장을 세워 휘파람이라는 자동차를 판매하고 있기도 하다.[48]
세계 4대 통신사의 하나인 UPI 통신사를 경영하는 한편, 미국에서 1977년 '뉴스 월드(News World)', 1982년 '워싱턴 타임즈(Washington Times)', 대한민국에서는 1989년 '세계일보', 일본에서의 세계일보(세까이니뽀), 중동의 미들이스트 타임즈(Middle East Times), 중남미의 티엠포스 델 문도(Tiempos del Mundo) 등을 창간하여 언론 사업에 진출하고 있다.[49][50][51]
국제과학통일회의를 주관하여 종교와 과학, 사상 등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새로운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52]
유니버설 아트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세계일보 회장을 지낸 박보희씨의 딸인 문훈숙씨가 발레단 단장을 맡고 있다. 문훈숙씨는 그의 차남 문흥진씨와 영혼결혼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선화예술중, 선화예술고등학교 등을 운영하고 있다.[53]
앞서 언급한 예술학교는 물론 경복초등학교, 선정중학교, 선정고등학교, 선문대학교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청심국제중, 청심국제고등학교 등 특수목적고등학교도 설립하였다. 미국에서는 UTS(Unification Theology School)를 설립하였으며, 브리지포트(Bridgeport) 대학을 인수받아 경영하고 있다.[54][55]
그는 (주)일화를 모기업으로 하며 연고지를 경기도 성남시로 하는 성남 일화 축구팀을 만들었다. 성남 일화는 대한민국의 프로축구 리그인 K-리그를 7차례나 우승할 정도로 명문팀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또한 브라질 상파울루에도 소로카바라는 프로축구팀을 인수받아서 운영하고 있다. 2000년에 A그룹 3부 리그의 팀을 인수받아서, 2002년에 2부 리그로, 2004년에 1부 리그로 승격하였고, 2008년에 상파울루 주 챔피언전에서 우승하였다.[56]
또한,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념하기 위하여, 피스컵이라는 세계 명문 프로팀들간의 경기도 만들었다. 2003년부터 2년 주기로 대회가 열렸으며 2007년 제3회 피스컵까지 열렸다. 1회 대회에 PSV 에인트호벤, 2회 때 토튼햄 핫스퍼스, 3회 때 올림피크 리옹이 우승했다. 2009년 제4회 대회는 스페인 마드리드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이 대회는 올림피크 리옹, 레알 마드리드, 세비야 FC, 리가 데 키토, 유벤투스, F.C. 포르투, 성남 일화 등이 참가할 예정이다.[57] 이 대회가 성공하자 2006년부터 국제 여자 축구 대회인 피스퀸컵(Peace Queen Cup)도 2년마다 개최하고 있다.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과 설악면 일대에 1995년부터 천주청평수련원[58], 청심국제병원[59], 천정궁박물관[60] 등을 세운 데 이어, 2006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화교육기관인 청심국제중·청심국제고등학교를 설립 인가받아 새로 개교했다.[61] 한편, 2005년 무렵에는 여수세계박람회를 유치하기 위한 정부의 기업도시 건설 계획에 참여하여,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일대에 대규모 부지의 매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62] 현재는 여수엑스포 유치에 큰 도움을 준 여수 화양지구 해양관광 레저단지 개발이 문 총재의 계획하에 (주)일상해양산업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다.
2008년 7월 19일, 서울 서초구 반포에서 회의를 가진 뒤 그와 그의 일가족과 몇몇 통일교도들이 탄 전용헬기가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의 청심국제병원 방면으로 귀환하던 중 악천후 속에 헬기가 장락산 정상 부근에 추락, 불시착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문선명의 일가족을 비롯하여 헬기 승무원까지 탑승자 전원이 헬기로부터 무사히 대피했고, 그 후 헬기는 폭발하여 전소되었다. 승무원을 포함한 총 16명의 탑승자는 모두 무사하며 중경상을 입은 3명을 제외한 문 총재를 포함한 나머지 일행들은 경미한 상해만 입고 전원이 청심국제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세계적으로 이와 같은 규모의 헬기 사고는 전원 사망하는 경우가 많고, 전원이 사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유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그 날은 청심국제병원에서 외과의사들이 모이는 학회가 있어서 수준 높은 진료로 전원이 빠르게 완쾌하였다고 하여 통일교회 내부에서는 매우 기적적인 사건으로 간주되어지고 있다.[63]
2009년 1월 31일은 문선명의 90세 생일이었다. 이 날은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미국의 조지 부시 전 대통령, 한승수 국무총리 등 전세계 지도자들이 축하인사 및 선물을 보냈으며,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화자동차 박상권 사장을 통하여, 90년, 80년, 60년짜리 산삼 세 뿌리와 함께 축하의 글을 자수로 새긴 리본,장미 90송이와 백합 90송이를 담은 화병과 화환 등을 보냈다고 한다.[64]
2009년 3월 기독교 서적을 많이 출판하던 김영사가 그의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65] 를 펴내, 기독교계로 부터 반발에 부딪혔다. 이 책은 한달간 베스트 10에 오르는 등 화제가 되었으며, 그는 자서전에서 "우리나라가가 세계의 무대로 나아가면서 리드하려면, 더 큰 비전을 갖고, 더 큰 통찰력을 갖고, 더 큰 예지력을 갖어야 하며, 세계를 진정 사랑하는 하나님과 한몸을 이루며 진정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우리모두가 변해야 한다"고 설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