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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1]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물은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은 본성상 행복하기를 갈망한다. 그러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성 토마스 아퀴나스, 「대 이교도 대전」, 4권 92장).
“우리는 행복하려고 태어났다”
얼마 전 오스트리아 빈 교구의 교구장이자 「가톨릭교회 교리서」 편찬에 결정적 역할을 하신 크리스토프 쇤보른 추기경께서 인간의 행복에 대해 쓰신 글을 읽다가 인상적인 대목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분에게는 소년시절에 들었지만 평생 생생하게 남아있는 강론 구절이 하나 있는데, 다름 아니라 병고에 있었음에도 친절과 유머, 친밀함과 사랑으로 기쁘게 본당 교우들을 돌보며 사시다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그 시절 본당신부님께서 하신 “사람은 행복하려고 창조되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말이 그에 맞갖은 인격과 삶을 담은 한 사람을 통해 증언되었을 때 한 소년의 마음은 기쁨과 자유로 벅차게 되었고 사제의 길에 응답할 확신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소년에게 성소란 바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가는 길이며, 행복한 존재로 머무는 것이라는 것이 시작부터 분명했습니다. 뛰어난 토마스 아퀴나스 연구가이기도 한 추기경에게 이러한 행복의 길의 여정에서 ‘천사박사’의 철학과 신학은 현명한 동반자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성인께선 「신학대전」 2부에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철학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탁월한 논고를 펼치시는데, 그 시작이 바로 인간의 목적으로서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행복, 단지 기쁨의 순간?
쇤보른 추기경이 행복이라는 말의 중요성을 깨달은 어린 시절의 체험을 회고하는 대목과 이에 이어지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풀이하는 대목을 찬찬히 읽으며 저에게 행복이란 개념은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추기경님과는 달리 저에게는 행복이 한눈에 사로잡힌 어린 시절 첫사랑 같은 대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가르침은 익히 알고 있었고, 성인께서 늘 그러하시듯 명쾌하면서도 치밀하게 전개하시는 「신학대전」의 행복에 대한 대목을 공들여 끈기 있게 따라 읽어갔던 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소중한 ‘학문’의 기억이었을지언정 이 단어를 나의 삶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로 삼아 스스로에게 납득되는 정의를 내려보려 진력한 실존적 체험은 아니었습니다.
「신학대전」을 처음 접했던 신학교 시절 ‘인생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늦가을 속절없이 떨어지는 낙엽들을 보며 감성과 이성을 다 끌어 모아 인생길에 대해 깊이 고민할 때 폐부를 찌르고 심금을 울리며 다가온 단어들 사이에 ‘행복’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삶의 의미나 소명, 투신, 성숙, 도야, 수덕, 비움, 버림, 섬김, 구도, 희생 그리고 죽음과 고통 같은 단어들이 일기장에, 묵상 노트에 그리고 신학교 독방 책장의 책제목에서 수도 없이 발견되고 있었습니다.
행복이라는 말은 인생의 한복판에서 만나는 필생의 주제어라기보다는 가끔씩 마음을 달래주는 위안의 언어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다 만나면 흐뭇한 좋은 성품을 지닌 그냥 ‘아는 사람’ 같다고 할까요. 그와의 사귐의 기회가 스쳐지나가도 여전히 나의 일상은 움직여가듯, 내가 행복에 대해 정색을 하며 묻지 않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에 중요한 결여가 되는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아일랜드의 록그룹 U2의 노래 제목처럼, “With or Without You!(당신이 함께이거나 아니거나!)”
그렇다고 행복한 순간에 둔감한 삶을 산 것도, 그 말을 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행복해.”라는 말은 인생의 목적을 논하는 거창한 생각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조금 마음을 풀고 무심히 있을 때, 내게 다가오는 것들과 그냥 현재의 순간에서 자연스레 마주할 때, 불현듯 흐뭇한 미소와 함께 그냥 흘러나오곤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것을 느낄 때, 그러니까 그들의 환해보이는 얼굴을 보고, 짐을 덜어놓은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을 때 자연스럽게 ‘행복’이란 말이 나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이들과 담소하는 오후에 맘속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재즈 기타리스트 펫 메스니의 공연이나 피아니스트 머레이 페라이어의 공연에서 첫 소절이 흘러나오는 것을 듣는 순간 자연히 행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라기보다는 생각지 않게 만난 덤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붙잡아놓을 수 없는 기쁨, 그것이 바로 행복의 민낯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입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행복관에서 세상의 선의 유약성에 대한, 그리고 기쁨의 덧없음에 대한 진지한 질문에 답할 여지를 발견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행복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
행복을 덧없는 일상에 숨겨진 파랑새라고만 보는 선입견을 넘어서 오히려 삶의 중심에 두고 평생 진지하게 물어야 할 항구한 질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또 내가 긴 시간 몰두했던 삶의 비밀과 무게를 담았다고 생각했던 단어들이 사실은 행복을 ‘둘러싸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신학생, 또 사제로서 철학을 공부한 지나간 수많은 새털 같은 나날들을 통해 왔습니다. 긴 ‘철학의 시간’의 열매는 철학이란 행복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물으려고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철학은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건넬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행복의 길, ‘행복 선언’ 역시 진지한 마음 없이는 다가설 수 없는 삶의 주제이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행복을 자연스럽게 다가온 에피소드 또는 흐뭇하고 설레는 마음의 느낌을 넘어서 명료하고 내용 있는 정의가 요구되는 ‘개념’으로 대면하는 것은 사실 매우 수고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진지한 사유를 시도하고 그것이 일상의 삶에 영향을 끼치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올 한 해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수고를 하려 합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궁극의 질문을 향해 다달이 던지는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을 가톨릭 철학의 전통과 오늘날의 사상과 문화와 우리의 삶에 대한 관찰을 통해 모색하는 시도들이 독자분들께서 행복에 대해 새로 생각하게 되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질문의 출발점에 선 ‘행복에 대한 철학 에세이’는 열 달 동안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을 거쳐 한 해의 마지막에 다시 ‘행복한 삶’에 대한 조용한 성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 도달한 곳의 마음의 풍경은 출발점과 별로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열 번의 변주되는 행복에 대한 질문들은 아마 우리 마음의 어딘가에는 흔적을 남겨놓으리라 생각
합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en)’은 아리아에서 시작하여 서른 번의 변주를 거쳐 다시금 아리아로 돌아옵니다. 그 변주들을 통해 듣는 이 안에 피어났던 감성적 정신적 울림들은 이제 곡의 마지막에 다시 한 번 같은 아리아를 들으며 차원이 달라진 숭고함과 감동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행복의 질문은 늘 같지만 그 울림의 깊이는 사실 늘 다른 것이라는 것을 믿으며 여행을 떠나길 권유합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2]
행복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고 왜 여러 개인가요?
“최고의 목표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 … 그것은 행복이라고 말하며, 또 잘살며 잘 지내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무엇이 행복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4장).
“행복은 따뜻한 담요”
(찰스 M. 슐츠, ‘피너츠’에서).
찰리 브라운의 세계
슐츠는 만화 ‘피너츠(Peanuts)’를 2000년 그가 타계하기 직전까지 정확히 50년간 그려내어 세대와 국경을 넘어 거듭 읽히고 사랑받는 ‘찰리 브라운의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착하고 감수성이 섬세한 노력파이지만 반복되는 불운과 실패에 시달리곤 하여 독자의 연민을 자아내는 주인공 찰리 브라운, 그가 기르는(?) 사람보다 더 철학적인 예술애호가이자 작가 지망생이기도 한 비글종 개 스누피.
친구 찰리 브라운을 놀려먹고 동생 라이너스에게 호통 치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은 듯하고 종종 심리 상담으로 용돈을 버는 루시, 루시의 동생인 라이너스, 루시가 사랑하지만 그녀에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베토벤 경배자이며 피아노 천재인 슈뢰더.
그리고 우드스탁, 샐리, 페퍼민트 페티 등 찰리 브라운과 그들의 친구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어린이들만을 열광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여기에서 향수 어린 즐거움과 인생의 통찰을 얻습니다.
이들이 만드는 이야기에는 우리를 흐뭇하게 하는 따뜻하고 천진스러운 공기가 흐릅니다. 하지만 작가는 장밋빛 낙관의 세계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유쾌한 이야기 사이로 비치는 씁쓸함과 애수 역시 찰리 브라운의 세계가 이토록 어른들을 사로잡는 이유입니다.
「장미의 이름」의 저자이자 박학다식과 촌철살인의 에세이와 평설의 대가인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언젠가 이 만화 주인공들의 행동과 성품을 예리하게 분석한 글을 썼습니다. 그는 찰리 브라운의 세계를 생생하고 설득력 있는 ‘일상적 비극’이라 칭하며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잘 숙고된 입장표명을 보게 된다고 감탄합니다.
에코의 찬사처럼 슐츠는 사람들이 인생살이에서 겪는 크고 작은 기쁨과 행복, 상실과 좌절들을 명료한 일상의 언어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찰리 브라운의 세계에서 의외로 행복에 대한 정곡을 찌르는 질문과 진지한 대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질문과 추구와 대답이 가리키는 행복에 대한 진실은 “행복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라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작은 행복은 손이 닿는 곳에, 큰 행복은 아마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행복이 여러 얼굴이 있다는 사실은 먼저 이들이 아주 쉽게 손닿는 곳에서 행복을 얻어내는 데서 드러납니다.
행복은 복잡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철자법 시험에서 100점 만점을 맞는 것, 누군가 반가운 이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것, 친구들과 놀이터 모래상자에서 사이좋게 싸우지 않고 노는 것, 이제 까치발을 하지 않고도 문손잡이에 손이 닿는 것, 맨발의 기분 좋은 감촉을 느끼며 수풀을 걷는 것, 18가지 색깔의 색연필을 가진 것이자 영화 관람비와 팝콘에 더해서 막대사탕까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이의 눈에서 보면 행복의 목록은 길고 풍요합니다. 그러나 행복이 여러 개의 얼굴이 있다는 것의 다른 뜻도 있습니다. 그들의 일상에서 우리는 또한 ‘어떤’ 행복은 정말이지 영영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슬픈 사실을 발견합니다.
찰리 브라운이 루시가 세워놓은 미식축구 공을 멋지게 차는 것을, 루시가 슈뢰더의 애정과 관심을 피아노에서 빼앗아 오는 것을, 찰리 브라운에게 루시의 심리 상담이 한 번이나마 제대로 도움이 되는 것을, 그리고 찰리와 친구들의 야구 팀이 시합에서 멋지게 이기는 소식을 기대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이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온 행복의 얼굴의 뒷모습을 찰리 브라운과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 헤아려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찰리 브라운과 라이너스의 대화 가운데 저에겐 매우 인상적이었던 한 장면이 있습니다. 라이너스는 지금 자신을 정말 행복하게 한 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9회말 경기가 패색에 짙어졌을 때 타석에 들어선 라이너스는 최강의 에이스에게 역전 홈런을 뺏어내고 기쁨에 열광한 홈 관중들은 마운드로 달려와 선수들과 얼싸안고 흥분과 기쁨을 나누는 꿈(저도 어렸을 때 자주 꾸었던 꿈입니다!)입니다.
행복감에 아직도 젖어있는 라이너스에게 찰리 브라운이 우수에 찬 얼굴로 한마디 합니다. “그 상대편 투수의 마음을 생각해 봤니?”
라이너스의 담요가 지닌 비밀, 행복
찰리 브라운의 세계는 손에 닿는 행복, 내 힘에선 벗어나 있는 행복, 내 능력으로 일궈낸 행복, 그 행복이 누군가에겐 슬픔이 되는 역설들을 통해 행복의 여러 얼굴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진지한 행복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탐구의 출발점이 “행복은 왜 여러 얼굴을 지녔나요?”라고 ‘질문’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여정을 라이너스의 담요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이너스는 루시의 동생인 아주 귀엽고 선량한(그리고 소심한) 아이입니다. 라이너스는 야구 팀에서 이미 당당히 자기의 자리를 얻었고 찰리 브라운과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이자 찰리 브라운의 귀여운 동생 샐리의 연모의 정을 차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대단한’ 라이너스가 가진 심각한 ‘객관적’인 문제는 그가 담요에 대한 애착을 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뜻한 담요’는 그의 행복의 원천이지만 동시에 근심의 근원이니 그걸 잃는 순간 무시무시한 불안과 노이로제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심술궂은 누나 루시와 장난을 좋아하는 스누피는 수시로 그에게서 담요를 빼앗아 숨기고 찢고 땅에 파묻곤 합니다.
어느 날 그는 사라진 담요를 찾느라 온갖 소동을 피우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피해를 입은 친구들이 그가 담요에 집착하는 것을 비난합니다. 그때 라이너스는 원망 섞인 목소리로 외칩니다. “누구나 애착하는 것 하나씩은 다 있잖아! 슈뢰더는 피아노, 루시는 슈뢰더에 푹 빠진 것처럼 말야!”
행복은 바라는 것의 충족
아하! 여기에 라이너스의 담요에 담긴 행복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 비밀은 행복은 각 개인이 정말 바라는 것들이 충족되는 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라이너스의 말처럼 사람마다 바라고 욕구하는 나름의 대상을 가지고 있기에 행복은 당연히 하나의 얼굴이 아니고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대개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원하는 것이 달라지곤 하니 이 때문에도 행복은 번번이 다른 얼굴을 가질 것입니다. 만일 하나의 대상을 여럿이 원한다면 얻는 이는 행복의 얼굴을 보겠지만 얻지 못한 이는 다른 얼굴을 보겠지요.
이 비밀을 행복에 대한 철학의 시원이라 할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행복의 다양한 얼굴 사이에서 어떤 객관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행복의 객관적 개념은 꼭 필요할까요? 이런 질문을 하며 우리는 지금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러 갑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3]
행복은 정말 변해가는 마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요?
“꽃처럼 한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그대여. 새벽바람처럼 걸어, 거니는 그대여”(심규선 Lucia with 에피톤 프로젝트).
“그런데 그것은 온 생애를 통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한 마리의 제비가 날아온다고 봄이 오는 것도 아니요, 하루아침에 그리되는 것도 아닌 것처럼, 인간이 복을 받고 행복하게 되는 것도 하루나 짧은 시일에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6장).
변해가는 마음, 사라지는 행복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이 유명한 문장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시작입니다. 몇 줄로 요약할 수 있을 법한 얼핏 보면 통속적인 소재에서 그 시대와 사람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독자들을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는 인생의 본질에 대한 절실한 통찰에 이끄는 힘에 이 소설의 비범함이 있습니다.
시작 문장 역시 걸작에 어울리게 단순하면서도 심오합니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며 등장인물들의 사상과 심리를 알아갈수록 이 문장은 명제가 아니라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아무튼 이 긴 호흡의 작품을 읽어가며 독자들은 불행만이 아니라 행복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비극을 보면서 인생이란 대체 어디서 왜 어긋나게 되는 것인지를 곰곰 따져보게 되고, 또 다른 등장인물 레빈을 통해 톨스토이 자신이 이 작품을 쓰던 40대에 고민하였을, 훌륭한 삶을 위한 ‘결정적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 함께합니다.
좋은 문학작품이 늘 그렇듯 「안나 카레니나」에서 우리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함께 체험합니다. 그 삶은 욕망과 만족과 공허가 끊임없이 서로를 끌어들이고 밀어내는 격전지입니다. 소설에서 안나는 (아마도) 한때는 그녀에게 상류사회에 자리 잡았다는 만족감을 주었을 카레닌과의 결혼생활을 점차 위선과 허위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 그녀에겐 새로운 행복의 돌파구였던 브론스키와의 격정적 사랑 역시 결국엔 환멸과 증오로 변해갑니다.
톨스토이의 냉정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욕망이 충족을 통해 행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변해가는 마음과 함께 또 다른 욕망으로 바뀐다는 것을 생생히 느끼게 됩니다.
욕구의 충족이 행복의 비밀이라는 상식이 이렇게 변해가는 마음 앞에서 좌초하는 것은 소설의 일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끊임없이 만나는 현실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마음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질주하는 욕망은 나의 주위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나의 세계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그러기에 변화 안에서 행복은 순간과 한철의 즐거움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우리의 ‘올바른’ 상식은 우리에게 항구함에서 행복을 찾으라 합니다. 그러기에 욕망에서 행복을 찾는 생각은 모순에 빠집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이러한 모순을 인식하는 것을 바로 행복에 대한 철학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나라인 마케도니아 출신으로서 고대 그리스 시대 학문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 정착해 활동한 철학자입니다. 스승 플라톤, 플라톤의 스승이자 철학자의 대명사 격인 소크라테스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지닌 진정한 의미의 고전철학을 세웠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서양철학에는 크게 세 가지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먼저 서양철학은 지중해의 여러 도시들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의 궁극적 이치를 탐구한 자연철학자들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어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라는 두 명의 천재적인 철학자들이 존재와 생성이라는 철학의 심오한 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에는 철학을 인간사로 이끌어와 수사학과 권력의 기술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대중화시킨 소피스트들이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선 철학자들이 내세운 질문들과 논증들을 비판하기도 하고 심화시키기도 하면서 존재와 인간사 모두를 포괄하는 철학의 전통을 이루었습니다.
인간사에 관련해 그들은 무엇보다 특별히 삶의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행복에 대한 질문 역시 이러한 성찰에 속합니다. 그들의 철학의 내용과 태도는,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 대한 예리한 관찰에서 시작해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가치의 세계로 다가가고 반대로 윤리적인 가치를 깨닫는 것과 매일매일의 삶을 만나게 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고전적 철학을 가장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종합하였고, 우리는 우리 탐구의 주제인 행복에서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와의 ‘대화’를 통하여 적절한 출발점을 발견하고 긴 여정의 안내를 받게 됩니다.
행복의 자리는 선에 있는가, 욕망에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행복을 우선 욕망이라는 현상을 통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현상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의해 윤리학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좋음(선)”이라는 개념과 연관시킵니다. 그런데 스승들의 철학적 탐구를 이어받되 사람들의 상식과 접점을 찾아서 행복을 ‘인간의 선’ 안에서 이해합니다. 여기서 선이란 도덕적 가치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로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건강, 부, 지위, 성공, 좋은 인간관계들, 긴 수명, 미모, 행운 모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애써 살아가는 이유가 좋은 것들을 추구하고 욕망하는 것이기에 어느덧 ‘좋음’이 곧 욕망의 대상인 것으로 쉽게 오해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오해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욕망과 행복 사이의 관계를 반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생각이 오해인 이유는 욕망과 좋음에 대한 관계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좋음’을 통해 욕망에 대해 말하고 평가할 수 있지만, 반대로 욕망을 통해 ‘좋음’의 내용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한 욕망과 행복 사이의 모순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인식의 전도에 있습니다. 욕망이 선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기에 반성되지 않는 욕망의 충족은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참으로 좋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이런 불일치의 이유를 욕망에서 찾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입장에서 볼 때 행복의 탐구를 위한 출발점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됩니다. 먼저 행복이 지속성을 요구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 하나의 사건만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바라봐야 하고 이러한 인생을 규정짓는 삶의 방식에 입각해 행복을 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욕망이 좋음에 의해 질서 있게 정향될 수도 있지만, 또한 우리가 반성되지 않은 욕망에 의해 단지 좋은 것으로 보이는 대상에 고착되어 살아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복은 좋은 삶이며 그것이 가능한 삶의 방식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바로 행복에 대한 탐구입니다. 그런데 이런 순간이 아닌 생 전체를 말하는 행복의 정의는 충분한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어떤 삶이 다른 삶보다 낫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을 기다려봅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4]
행복이란 말에 어울리는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요?
“뭐가 의미 있나 뭐가 중요하나 정해진 길로 가는데 / 축 처진 내 어깨 위에 나의 눈물샘 위에 / 그냥 살아야지 저냥 살아야지 죽지 못해 사는 오늘 / 뒷걸음질만 치다가 벌써 벼랑 끝으로 / 어차피 인생은 굴러먹다 가는 뜬구름 같은 / 질퍽대는 땅바닥 지렁이 같은 걸 / 그래도 인생은 반짝반짝하는 저기 저 별님 같은 / 두근대는 내 심장 초인종 같은 걸, / 인생아”(옥상달빛, ‘하드코어 인생아’).
“행복은 오락 속에 깃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 행복한 삶은 덕스러운 삶을 말한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0권 6장).
좋은 삶, 행복 그리고 인생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좋은 삶’으로 정의합니다. 행복에 관해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좋은 삶의 ‘기준’을 되도록 명료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그는 좋은 삶에 대해 생각하는 데에 한 가지 분명한 출발점을 두는데 그것이 바로 매일의 삶을 인생 안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곧, 행복은 지금 눈앞에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라 우리 과거의 삶의 역사, 미래의 전망, 삶의 궁극목적을 아우르는 ‘인생 전체’라는 지평에서만 의미 있게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
삶의 사건들에 대한 즉각적 반응과 해석에 제한되지 않는 이러한 지평은 당연히 꽤 높은 차원의 성찰력과 반성력을 통해서만 얻어집니다. 그래서 좋은 삶을 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존과 생명의 관점과 관련된 ‘조에’라는 그리스 단어가 아니라 품위 있게 자신을 도야해 온 인간의 전 생애를 가리킬 수 있는 ‘비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과 관련해서 말하는 인생은 단순히 순간이 긴 시간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수련하고 활동하여 마침내 인간의 궁극적 목적에 다다른 역동적인 완성의 여정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행복을 생각하는 것은, 한 인간의 인생을 생존의 영역과 구분되는 좋은 삶이라는 규범적 이상을 통해 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생과 좋은 삶의 상관관계에 대해 분명하고도 섬세하게 추적해 가는 것을 보면서 감탄하고 머리로 납득하지만, 무엇인가 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나 일종의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매일매일 마주하는 실제의 삶이 철학자에게서 배우게 되는 성찰을 통한 품격 있는 인생의 한 장면이라기보다는, 한 치 앞을 알기 어려운 거칠고 절실한 생존의 영역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좋은 삶을 생각하는 아름다운 시간만이 인생은 아닙니다. 인생 안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듯, ‘벌거벗은 존재’로서 살아남고자 투쟁하고 고통을 견디며 인생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좋은 삶으로서의 행복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인생은 언제나 그 심연에 살고자 하는 생명의 절실함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 - 살아내는 것, 살아남는 것
‘인생’이라는 말은 자주 우리의 ‘심간’에 파문을 일으키며 ‘미혹’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고작 두 음절의 이 짧은 단어를 혼자 앉아 천천히 발음해 보면, 갑자기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뒤엉켜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회에 젖는 이유입니다.
이 낱말을 담담함과 단순한 긍정에서 말할 수 있는 이라면, 다른 모든 외적 기준과 상관없이 이미 좋은 인생을 살아온, 살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훨씬 많은 이에게 인생이란 말은, 단순한 기쁨이나 우아한 관조이기 이전에 고뇌와 처절함의 상흔이 어린 생존의 시간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현실에서 인생은 ‘좋은 삶’의 성찰과 실천의 아름다운 결실 이전에, 우선은 ‘살아남는 것’이라는 절박함 속에서 견뎌내고 살아낸 시간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동서와 고금의 성현들이 밝혀낸 인생에 대한 아름답고 영롱한 지혜를 대할 때 감탄하면서도, ‘그들의 인생은 왜 나의 인생과는 이리도 다른가!’ 하고 탄식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삶이라는 기준에 나의 인생을 비추어보며 부끄러워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인생을 살아낸 것이, 생존 투쟁에서 자신과 가족을 지킨 것이,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살아남는 것’ 자체의 소중함과 가치를 말해주는 이를 만날 때 한없이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꽤 여러 해가 지났지만 제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걸작애니메이션 ‘원령공주’를 잊지 못하는 것은, 인간에게 죽음을 안겨다 줄 수 있는 문화와 기술의 시대에서 ‘살아남아라.’라는 단순하지만 엄숙한 가르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몇 해 전에 읽은 뛰어난 두 편의 중국 소설들을 통해, 곡절 많은 인생에서 살아남는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나라에도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현대 중국의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위화의 「인생」이라는 소설입니다(중국의 대표적 영화감독 장예모가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주인공 푸구이가 파란만장하고 쓰디쓴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작품은 위화보다는 한 세대 앞선 작가 모옌의 대작인 「인생은 고달파」입니다. 천 쪽이 넘는 이 소설에서 저자는 구비문학적 향기가 가득한 입담으로, 주인공 서문뇨가 현대 중국의 격동의 50년을 관통하여 견뎌내고 ‘살아내는’ 인생길을 슬픔과 해학, 설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냅니다.
절실하게 좋은 삶을 생각한다는 것
위화와 모옌의 소설은 살아남는 것 자체의 고귀함을 예찬하고 응원하고 위무합니다. 그런데 살아남음을 정말로 진실하고 절절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역설적으로 좋은 삶에 대한 절실한 갈망을 말없이 전합니다.
인생이 살아내는 것, 견디어내는 것, 살아남는 것이라는 무거운 진실을 외면하는 철학과 사상은 공허한 말잔치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좋은 삶이라 말하는 것은 생존의 시간과 격리된 곱디고운 순수한 사유의 결과만이 아니라 오히려 절실한 마음의 일이어야 합니다.
또한, 좋은 삶을 바라고 묻는 것이 인생의 고통을 잊는 한순간의 위안의 방식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바꾸려는 결심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살아남음의 장함’은 결국은 좋은 삶의 길에서만 충만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납득하는 사람만이, 행복을 탐구하는 여정에 절실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설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생존의 시간의 무게와 좋은 삶의 절실함을 아는 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5]
현명함이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브로콜리 너마저, ‘졸업’).
“현명함은 인간적인 좋음에 관계하며, 숙고할 수 있는 것이 관계한다. … 잘 숙고하는 사람은 인간적 행위로 성취될 수 있는 것들 중 최선의 것을, 헤아림에 따라 적중시키는 사람이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 7장).
“글쓰기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는,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쓸 것인지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남들이 가는 길은 걷고 싶지 않았다”(마쓰모토 세이초[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시조]).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대한 논증의 요약
우리는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관한 생각에 공감하면서 그의 논증을 따라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통념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그 본질을 예리하게 드러냅니다. 그 결론으로 다다른 행복이라는 개념의 핵심적 내용들을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행복은 순간적이고 사라지는 것들에만 의존할 수 없고, 또한 부분적인 목적을 위한 도구적인 유용성을 가진 것들을 얻는 것만으로 충족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행복은 삶 전체를 그 목적으로 삼고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좋은 삶’ 자체를 뜻합니다. 여기서 좋은 삶은 삶의 한순간의 스냅사진 같은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뜻하지만 그것은 또한 특별한 순간에 체험되는 ‘생동감’이나 ‘기쁨’과 대립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좋은 삶은 살아있는 기쁨의 순간들이 파편이나 고립된 체험으로서 허무하게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맥락 속에서 견고한 자리를 부여받고 지속적이고 항구히 발생할 수 있게 하는 샘이자 지평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전체적 관점에서의 좋은 삶은 정지된 추상적인 것이거나 단지 가능성으로서만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활동’ 자체를 말합니다. 비유하자면 꽃들이 한철 찬란하게 피었다가 속절없이 지는 것이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전체적 안목에서 보면 언제나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정원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 각각의 꽃들 없이 정원의 근사함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꽃 하나하나의 ‘화양연화’가 정원의 아름다움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듯이, 인생의 폭죽 같은 희열의 순간들 자체를 숙고된 의미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행복의 숙고’에서, 비트런드 러셀의 표현을 빌린다면 ‘행복의 정복’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좋은 삶의 지속성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방식을 발견하고 자신의 것으로 익혀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삶으로 가는 길 - 현명함
아리스토텔레스가 사회 안에서 행위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적 존재이자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로서의 인간에게 가능한 좋은 삶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 ‘실천적 삶(bios praktikos)’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실천이란 마치 소수의 사회참여적인 사람들에게만 관련되는 삶의 방식으로 들리지만,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모든 자유인은 실천적 삶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능성과 능력을 실현하고 행복이라 일컬어질 만한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천적 삶이란 공동체 안에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가지고 의미와 가치를 공유하고 나누며 자신과 타인을 위해 인간에게 고유한 좋은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좋은 삶의 실현을 위해서 여러 가지 조건들이 요구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재화나 직업적 보장 같은 현실적인 기반이기도 하겠고, 건강이나 화목한 가정, 명예 같은 무형의자산, 그리고 인격으로 대표되는 윤리적 덕성들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조건들의 조화 없이는 좋은 삶으로서의 실천적 삶의 방식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이러한 통합의 능력, 곧 실천적 삶의 영역에서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지적인 능력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현명함(프로네시스)’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현명함’이 현대인들에게 자주 오해되는 것은 그의 개념이 포괄하고 있었던 실천적 삶의 현실적 조건과 윤리적 가치가 역사적 과정을 통해 점점 양립되기 어려운 상반된 선택지로서 이해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군주론」의 작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이래로 자주 현명함은 생존과 성공을 위한 영리함과 책략의 기술로 환원되곤 합니다. 그리고 근대철학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할 이마누엘 칸트의 입장처럼 자주 현명함은 도덕성과 구분되는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인 영역의 능력으로 폄하됩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현명함은 훌륭한 실천적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차원의 지적인 능력을 모두 아우릅니다. 그는 단기적으로 부여된 과제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명민함으로서의 그러니까 생존과 성공의 수완으로서의 현명함의 모습을 인정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 안에 살아남고 나의 자리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시작일 따름입니다. 그러한 능력은 더 높은 단계의 현명함, 곧 그때그때의 선택을 훌륭한 인생이라는 더 큰 맥락에서 수행할 수 있는 전체적 안목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고 사람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명함의 가장 심오한 능력은 다름 아닌 모든 덕을 덕이게 하는 도덕적 판단력입니다. 인생을 전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사실 윤리적 가치가 체화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명하게 견지하는 입장입니다.
그러기에 생존과 성공과 도덕을 대립시키는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결코 ‘현명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현명함의 개념은 곱씹을수록 인생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합니다. 인간 삶의 현실을 냉철히 인정하면서도 이상을 간직하는 대단한 식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감탄하면서도 현명함만으로 행복을 해명하기에는 뭔가 허전한 데가 있습니다. 이처럼 모범답안으로 주어진 행복의 길에서 나의 자리는 정말로 있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객관적 행복만큼 나의 길을 걷는다는 주관적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이 의미를 묻는 순간 우리는 ‘자기 진실성’ 또는 ‘진정한 나’라는 개념과 대면하게 됩니다.
지난 세기 가장 중요한 철학자들이었던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누구보다 심오한 사유를 하였고, 그러기에 그들은 행복의 윤리학을 의미물음의 인간학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하는 이들에겐 매우 귀중한 대화의 상대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과 또 다른 몇몇 현대 철학자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여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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