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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34) 마귀, 그 기묘한 존재
현대의 마귀 들린 사람들은 종종 뉴스에 나옵니다
■ 성경에 마귀 들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는데, 오늘날에도 마귀 들린 사람들이 있나요?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팔자를 타고난 동물을 꼽으라고 하면 돼지를 손꼽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마귀가 돼지형상으로 표현될 때가 자주 있어서입니다.
마귀라는 존재는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오래된 종교들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마귀는 선에 대항하는 존재, 악의 세력을 이끄는 존재 등으로 묘사돼왔습니다. 중세 때에는 실제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고 지금도 구마영화에서 마귀의 흉물스런 모습이 묘사되고 있어서 마음 약한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곤 합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귀에 대한 기억을 날려버리는데, 일부 종교인들이 신자들에게 마귀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함으로써 마음 약한 신자들을 신경증적인 상태에 빠지게 하기에 마귀에 대한 고찰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모든 것을 마귀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은 자기 문제를 볼 힘이 없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사람 마음 안에는 어두운 부분이 있는데 이것을 직시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그 어두움에 대한 공포심을 마귀 탓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전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신앙이 깊은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취약해서 그런 것이니 이들을 대단한 신심가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두 번째 주의할 것은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무조건 마귀 탓으로 돌리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를 초래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마귀 들림 상태는 거의 대부분 조현병 증세들이란 것이 현장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입니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환청, 환시 등등의 증세가 나타난다면 마귀라고 단정 짓지 말고 정신과를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간혹 일부 종교인들이 마귀를 쫓아낸다고 기도를 해서 심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정말 마귀가 들렸다는 착각을 하게끔 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고, 무지한 종교인들이 구마예식을 한다고 하면서 환자를 학대하거나 구타해서 사망케 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그렇다면 마귀들은 없는 것인가? 아닙니다 지금도 존재합니다.
현대판 마귀들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비존재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것들도 진화를 해서 예전에는 자기 실체를 드러냈으나 지금은 자신들이 마치 사람 마음 안의 양심인 양하면서 사람들을 조종하는 자리에 머무른다고 합니다.
이렇게 현대판 마귀 들린 사람들을 정신의학에서는 ‘사이코패스’라고 개념짓습니다. 이들은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아귀처럼 권력욕에 사로잡혀서 닥치는 대로 먹어치웁니다. 그래서 옛날 마귀보다 신종마귀가 더 무섭다고 하는 것입니다.
■ 마태 8,28-34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중략)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35) 중풍 병자
몸도 못 가누는 환자를 누가 주님께 데려갔나요
■ 최근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제가 바치는 기도의 내용을 원하지 않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도 기도를 들어주시나요? 성경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 한 사람을 주님께 데려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내용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우선 주님께서 중풍 병자가 아닌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셔서 치유를 해주셨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느님께서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위해 해주는 기도에도 응답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미사 때에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하는데 바로 복음의 이 부분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인지치료, 즉 병든 생각을 바꾸어주시는 치료를 해주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 말씀은 이 병자가 걸린 중풍이 심리적 요인에서 온 것임을 말해주신 것입니다.
병적인 죄책감.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나 자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어’ 하는 생각. 이렇게 죄책감이 강한 사람들은 자기를 비난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정신적·육체적으로 학대하기에 몸과 마음이 병듭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이 다른 사람들은 다 용서해줘도 자기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란 병적인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더욱이 그 당시 사람들은 병이 그가 지은 죄로 인한 것이란 병적인 신념을 가지고 살았기에 그의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중풍은 그가 가진 내적인 고통이 신체적으로 드러난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내면을 보시고 그의 병적인 죄책감을 덜어주시는 말씀으로 치유를 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에서 놓치기 쉬운 내용은 ‘왜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주님께 데려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가’하는 것입니다.
만약 중풍 병자가 동네 사람들의 인심을 잃은 사람이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무도 그를 위해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한 몸 챙기기도 바쁜 세상에 누가 남의 일에 나서겠습니까. 그런데도 여러 사람이 그를 주님께 데려왔다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한 사람이 될 것을,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될 것을 누누이 강조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이 중풍 병자와 같은 처지가 됐을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셔도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호감 대상이 되면 어려울 때 아무도 그를 돕지 않습니다.
독재자 스탈린, 그가 쓰러졌을 때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죽기를 바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그가 죽은 후에 아무도 애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는 곳을 우리는 지옥이라고 합니다.
■ 마태 9,1-8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중략)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36) 선한 사람?
‘나는 죄인’이란 생각에 갇혀있는 이를 구하는 일
■ 성경에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은 죄를 짓고야 마는 제게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만, 거꾸로 생각하면 ‘의인은 부르시지 않는 건가’하는 의문도 듭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공동번역 성서 마태 9,13)
그렇다면 선한 사람들은 주님께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말씀인 것인지…. 이 대목을 두고서 신자분들이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이 성경의 말씀들 중에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한 것들이 많습니다. 주님께서 역설적인 비유를 하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사람이란 정말로 선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주님 당대에는 바리사이들이 그러했습니다. 바리사이 같은 자들은 스스로를 정의롭고 선하다고 생각하면서 자가당착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고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하면서 대화하길 거부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심지어 자신들은 신의 영역에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자부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구원 여부에 대해 자신들이 판단할 권한을 가졌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단 종교계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오만한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많습니다. 이들은 정의감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들을 단죄하거나 심지어 학살하기조차 합니다. 자신들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사실 이들 마음 안에는 하느님의 현존은 없고 악의 세력만 존재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스스로 선한다고 하는 자들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들인지를 잘 알고 계셔서 그들과 거리두기를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이 깨끗한 삶을 살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어떻게 보면 소심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문제가 많음을, 스스로 죄 중에 사는 사람임을 자인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삽니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단죄하기보다는 그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사람의 탈을 썼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의 내적 수준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정서적 양반과 상것들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돌아봅시다. 어떤 사람들이 많은가요?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 자기 반성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요, 아니면 매사 남의 탓만 하면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싸잡아 매도하는 사람들이 많은가요?
애석하게도 신종 천민들이 늘어나는 듯합니다. 교사 학대, 대리기사 폭행 등등 스스로 갑이라 여기는 천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업신여기는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요?
■ 마태 9,10-13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3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미래로 흘러가지 못하고 과거에 묶여있는 사람들
■ 성경에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새 부대는 어떤 것을 의미하나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가끔 곡해돼서 악용되기도 합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제거하려 할 때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은 삶의 방식에 대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사람의 삶의 상태는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거나 하지, 정지한 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흘러가는 강물에 띄운 배와도 같은 것이 사람의 삶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매여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내디디질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사에 매달려서 사는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인가? 그것을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행위가 역설적으로 지금의 고통을 경감시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강박적 회상의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거의 손실에 대한 회상 - 신체적·정신적 긴장 고양 - 욕구 좌절과 무기력 - 눈물을 흘리면서 긴장 방출 - 무감각한 상태에서 잠시의 평온함을 체험’
이런 과정에 익숙해지면 과거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과거에 매여 있으면 현재의 삶이 방향성을 잃게 되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피곤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사는 흘려보내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정치제도적인 것입니다. 인류의 생존은 끊임없는 생각과 그 생각을 실행해나가는 과정에서의 시행착오를 통해 이뤄져 왔습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고 구태의연한 나라들은 역사 안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간혹 새로운 것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면서 구관이 명관이란 식으로 과거지향적인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과거에 실패한 것들을 다시 사용하려고까지 합니다.
이들은 언어조차 오래전 폐기된 것들을 다시 사용합니다. 새로운 언어가 아닌 구닥다리 언어와 사고방식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그 나라를 퇴행하게 하는 것인데도 새로운 공부를 하지 않는 무지함으로 인해 과거로, 심지어 왕조시대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국가성장의 걸림돌입니다.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해묵은 논쟁을 해왔습니다. 빨갱이 논쟁. 신상털이용 피 냄새가 나는 용어,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잔인한 학살을 자행하게 한 용어인데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런 퇴행적이고 극단적이고 적대적인 용어들은 그 나라를 성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침몰하게 합니다. 극단적이고 잔인한 용어는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쓰게 되는데 이것은 사람을 괴물로 만듭니다. 역사상 수없이 많은 학살극이 극단적인 언어에서 비롯됐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2000년 전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볼 시간입니다.
■ 마태 9,14-17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38) 나의 믿음?
자신에 대한 믿음이 절망에 묶인 우릴 구해줍니다
■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종종 하시는데,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요?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자 주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복음에 나오는 믿음에 대한 말씀과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보통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시는데 여기서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말씀을 하시니 영성심리학자들은 주님께서 심리치료 원리를 아시는 분이라고 감탄하기도 합니다. 심리치료에서 강조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힘든 일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외적 원인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생기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잘 안 됐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비난합니다.
“내가 하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면서. 심지어 자신을 학대하기조차 합니다. 스스로 잠을 안 재우고 술을 퍼 먹이고 심지어 마약을 집어넣기도 합니다.
인간관계를 맺을 때에도 자신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보다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 밑에서 몸종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그 삶이 궁상맞기 이를 데 없고 시간이 갈수록 나락으로 굴러 떨어집니다. 이런 분들은 이 복음에 나오는 여인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그런 병에 걸렸는지는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병을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진 벌이라거나 자신의 팔자인양 하지 않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병을 얻으면 하느님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쳐다보지조차 않으시는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까지 자신의 병을 고치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마음 안에서 자아를 조이는 병적인 생각과도 싸워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인의 행동을 보면서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하십니다. 이 여인이 자기를 학대하거나 팔자 탓을 하지 않고, 또 무기력한 삶을 살지 않고 적극적으로 삶의 의지를 보인 것에 대해 감동과 감탄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자아가 위축되면서 “내가 죄를 많이 지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하거나 “내 팔자가 기구해서 이런 병을 얻는구나” 하면서 한탄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방정맞은 생각이 마음 안에서 널뛰기를 하면서 자아를 흔들어댈 때 복음의 이 부분을 묵상하고 여인의 모습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소리치면 사람들이 바라봅니다. 힘들 때 주님이 나를 바라보지 않는 듯이 여겨질 때 이 여인처럼 과감하게 주님께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 마태 9,20-22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