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과 거부
(로마서 15장 7절)
오래 전에 일본 단기 선교에 갔을 때 아내와 저는 부채에 복음의 내용을 적어 가지고 부채를 돌리는 전도를 했습니다. 큰 대형 쇼핑몰 앞에서 했는데 이상하게 우리 집사람 부채는 잘 안 받고 제 부채는 잘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채를 잘 안 받으니까 우리 집사람에게 그것이 상처가 되더랍니다. 자꾸 거부당한 느낌을 받으니까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여러분 거리에서 누군가가 무엇을 나누어줄 때 정성을 생각해서 다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죽어도 안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부채를 잘 받아서 제가 우리 집사람에게 어깨가 으쓱해져서 “내가 당신보다 인상이 좋아서 이렇게 잘 받는다”고 하니까 해석이 중요한데 우리 집사람이 말하길 “워낙 제가 노인처럼 보여서 거부할 수 없어서 받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것을 받을 때 잘 수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까다로워서 주는 족족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용성이 크고 넓은 반면에 어떤 사람은 수용성이 적고 좁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수용과 거부는 성경의 대주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는 수용하고 큰 아들은 거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인과 탕자를 수용하는 것이 복음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18~19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만 있고 “아니오”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잘 수용하셨고,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잘 수용하셨습니다.
반면 성경에 보면 성령을 방해하고 거부하는 것이 큰 죄가 된다고 나옵니다. 사도행전 7장 51절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말씀합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함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5장 6절에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수용과 거부는 구원과 멸망을 가르는 성경의 대주제인 것입니다.
수용은 평화의 방향이고 거부는 충돌의 방향입니다. 한번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거부를 받으면 거리의 불량배가 되기 쉽습니다. 많은 학생을 죽인 조 승희는 혼자 외롭게 컸습니다. 또 부부가 서로 거부하기 시작하면서 가정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평화를 남편이 단점이 있더라도 아내가 어떻게 수용하는가? 그리고 아내가 단점이 있더라도 남편이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교회의 분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다른 성도를 거부하거나 목사가 성도를 거부하거나 성도가 목사를 거부하면 교회 분규가 생깁니다. 거부당하면 외로워지고 허탈해지기 때문에 파괴적인 과잉반응을 나타내기 쉽습니다. 또한 자기와 다른 문화권을 거부하면 인종차별이 됩니다. 한국 사람들이 서양 세계로 이민을 가면 백인들에게 거부당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잘 받아주어야 그곳에서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용 곧 받아준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건강한 신앙과 인격을 가지고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용하는 것도 순서가 있습니다. 우선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기를 수용하는 것이 자존감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수용 못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상담학 클래스를 듣고 있는데 어떤 학생이 자신은 백인이 되고 싶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에 제 눈에 그 학생이 매우 측은하게 보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에 자신감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자존감이 생기고 자신감이 생깁니다.
인간의 자존감은 외부 의존적인 자존감과 내부 의존적 자존감이 있습니다. 외부 의존적 자존감은 외부의 칭찬과 인정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내부 의존적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자기가 수용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있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면 병적 교만이 됩니다. 있는 것 이하로 생각하면 열등의식이 생겨 병적 열등감이 됩니다.
또한 인간은 타인을 잘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합니다. 인간이 타인을 수용할 때 우리는 그것을 배려와 이해라고 합니다. 타인을 잘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또 잘못을 수용할 때 우리는 그것을 용서라고 합니다. 잘못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덮어줄 때 그것이 용서가 됩니다. 또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쁜 일도 있지만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이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을 낙관주의자라고 합니다. L. P. 잭스는 “비관주의자는 모든 기회 속에 있는 어려움을 본다. 그러나 낙관주의자는 모든 어려움 속에 있는 기회를 본다”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일본에 가서 단기 선교할 때 일본 사람들은 공짜를 싫어해서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총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의심 없이 수용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분은 의심이 많고 까다로워서 하나님의 은혜를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천국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을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어린 아이는 무슨 이야기만 하면 의심 없이 믿고 받아들입니다. 믿음도 그래야 생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수용과 거부는 우리 인생의 방향, 신앙의 방향을 갈라놓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로마서 15장 7절에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다 수용하고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도 이 세상 사람이 다 무시하는 사람도 예수님은 다 받아들이십니다. 이 세상에 정말 오갈 데 없으면 예수님께로 오십시오. 예수님께서 다 받아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인간을 모두 다 받아주심 같이 여러분도 서로 수용하고 이해하고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준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는 신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가 서로 받아주고 서로 사랑하는 것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 자신을 못박은 사람들조차도 하나님께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탄원하며 그들을 수용하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사랑에 근거하여 우리도 모든 사람을 다 수용하며 사랑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웃을 무조건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1~7에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