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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해는 새 해 첫 날이 새 해 첫 주일입니다. 2023년 새 해 첫 주일 오늘 신년감사예배를 드리실 때 은혜가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해가 되었음에도 어떤 목표도 없고 올 해는 어떤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되겠지요라는 것이 믿음이겠지만 이 믿음속엔는 하나님과 소통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일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하나님께 알려드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듣고 하나님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믿음의 사람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기에 그냥 ‘시간이 지나면 될대로 되겠지’라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 하는 생각입니다. 새로운 때가 오면 좀 특별하게 시간을 구별하며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새롭게 출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며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인사하지만 세상의 사람들은 이 복이 어떤 복인지, 어떤 것이 진정한 복인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아무런 의미없이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인사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인사입니다. 성경에서는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올 한 해 정말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듣고 이해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정말 하나님과 소통하는 성도, 하나님과 대화가 끊어지지 않는 성도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 구절을 주제성구로 잡고 우리 고주리교회의 신년 목표를 ‘하나님과 소통하는 성도’로 정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과 소통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고 하나님과 소통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할 때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일을 계획하십니다.
예레미야 33장 2,3절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을 미리 알고 대비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겠다고 오늘 본문에서는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 우리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찾으면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도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45장 7,8절을 보시겠습니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이 말씀은 요셉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들, 자기를 애굽으로 팔아넘긴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역사를 간증하는 내용입니다. 얼마나 인간적으로 보면 형들이 미웠겠습니까? 어떻게 거의 20년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종살이하며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 억울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요셉이 어릴 때 꾸었던 꿈,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꿈은 하나님의 너무나 선명한 계획이었습니다. 이십여 년이 지난 후에 이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요셉으로 애굽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를 확연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고 우리를 위해 선한 일들을 준비하셨습니다. 삶을 살아가다보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라고 생각되는 비극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우리는 후에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위해 계획하고 계시고 그 비전을 위해서 앞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에 모든 계획을 해놓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고 그것을 또한 반드시 이루게 만들어가십니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비전은 어떤 환경과 상황속에서도 반드시 이루어지는 꿈입니다. 간혹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을 외면하고 도망간다고 할지라도 분명한 하나님의 선택과 인도하심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가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어떻게든 돌아서라도 그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가 2장 3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앞에서 범죄하는 백성들을 멸망시킬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표준새번역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계획하였으니, 이 재앙을 너희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너희가 거만하게 걸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처럼 견디기 어려운 재앙의 때가 될 것이다.”
조금 쉽게 이해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을 무시하며 세상에서 안하무인으로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계획까지 다 세워놓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계획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창조를 계획하시고 그것을 성취하신 분이십니다. 애굽의 노예로 있던 백성들을 바로 왕의 학정에서 건져내어 당신의 백성 삼으심을 계획하시고 성취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시기에 생명과 구원의 계획만 가지셨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오늘 말씀을 보니 ‘재앙을 내리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진노의 때를 준비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을 계획하시고, 위대한 창조를 계획하시는 하나님께서 재앙을 계획하신다는 것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지켜보시고 우리의 삶과 세상의 일들을 모두 계획하시는 분이신 것을 믿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할 때 둘째로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예레미야 33장 2,3절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 “부르짖으라” 말씀하시고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응답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일, 은밀한 일을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과 기도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어떤 모습으로 보이시느냐? 그것을 만드는 여호와로 보이십니다. 그것을 만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보여주신 일이 차근차근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차근차근 일이 이뤄져 갈 때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신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응답받았으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일을 해서 우리가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고 여러 사람들을 쓰셔서 일을 만들어가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궁극적인 사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전도서 7장 1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성도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입니다. 한 사람이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행동과 삶이 결정된다는 것이죠. 작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작게 행동할 것이며, 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크게 행동할 것입니다. 기복적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기복적으로 살 것이며 언약의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 언약에 신실하게 반응하며 살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고 의로운 분으로 믿는다면 우리 자신도 거룩해지기 위해 은혜를 구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자신의 욕심을 따라 움직이는 불의한 분으로 알고 있다면 우리의 삶도 불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속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라고 믿고 살아간다면 정말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고 담대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내가 모든 일을 행해서 내가 결실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보다 내가 내 일을 잘 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노력도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무의미한 노력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시편 127편 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어떤 인간적인 노력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내 노력보다 더 우선되어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품안에서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위협에서 보호해주십니다. 개인적인 삶의 위협이든, 국가적인 위협이든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과 연합한 자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큰 일을 보며 하나님의 행하시는 위대한 일의 결과를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요엘 2장 24~26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보십시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만족함을 주시고 풍성함을 주시고 차고 넘치는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외면하며 하나님을 떠나 살면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불평과 원망이 앞서고 형통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돌아오면 모든 것에서 넘치도록 풍성한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탕자이야기를 보십시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받을 유산을 다 받아 엄청난 돈을 가지고 도시로 나갔습니다. 온갖 즐비한 놀거리와 유흥, 향락에 빠진 아들은 눈이 휘둥그래지고 너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세상에서 그는 좌절과 패배,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너무나 좋은 세상에서 그는 암울함과 좌절감과 고통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가 새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며 다시 아들로서 누리는 평안함과 기쁨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앞에 돌아오면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이젠 어두움이 사라지고 빛에 거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좌절과 실패의 삶이 아닌 기쁨과 성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여 주실 때 우리가 진정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5절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아무리 큰 어려움이 우리 앞에 있고 아무리 큰 대적들이 우리를 괴롭힌다고 할지라도 저와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맡기면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속에 좌절과 낙담과 실패와 위기를 겪을 것같은 상황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행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해 평안을 누리시는 하나님께서 키우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할 때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일을 완성하십니다.
예레미야 33장 2,3절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 “부르짖으라” 말씀하시고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응답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일, 은밀한 일을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이 세상은 모두 완벽한 결론이 나와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은 바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을 만들고 성취하는 여호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모든 것이 여호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의 생사화복, 이 세앙의 모든 역사, 이 세상의 모든 환경의 주인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결론이 난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초조하고 불안하고 오늘도 걱정과 염려로 살아갈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기도의 삶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행하심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르짖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부르짖으면 응답할 것이고 응답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한 기쁨이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뭐가 염려이고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수도가 어디인지 아시죠? 수도의 이름이 뭡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의 뜻이 뭘까요? ‘예루살렘’을 히브리어로 정확히 발음하면 “예루살라임”입니다. 이 단어는 “예루엘”과 “살렘”이 합성해서 만든 단어입니다. 이중 “예루엘”은 “야라”와 “엘”로 구분해볼 수 있는데 히브리어로 “야라”는 “던지다, 비를 내리다”라는 뜻입니다. “엘”은 우리가 잘 알 듯이 “하나님”이라는 뜻이고요. “엘”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던지셔서 완성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분석하면 ‘야라’와 ‘엘’ 그리고 ‘살렘’인데 ‘하나님이 완성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명칭 자체가 “완성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살렘’이라는 단어는 ‘완성’이라는 의미외에 회복, 약속이행, 화해, 평화체결이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살렘’에서 ‘샬롬’, ‘셸렘’, ‘샬람’이라는 단어도 생겼는데 ‘평화’, ‘화목제’, ‘평화의 언약을 맺다’등의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완전한 성취를 보여주십니다. 모든 일에 있어 완전한 결과를 이루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 마지막 말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구약에서 예언되어져 왔고 신약에 이르러 완전한 “하나님과의 회복을 위한 화목제의 제사를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막힌 문을 여시는 귀한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의 역사때부터 요한계시록의 역사때까지 모든 일을 계획하셨고 모든 일을 진행하셨고 모든 일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0장 7절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22장 13절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류 역사의 시작이시며 인류의 완성이신 하나님”,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완전한 시작이시며 완전한 끝이신 하나님”, “알파와 오메가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일을 언제 시작할 지도 모르고 어떻게 끝낼 지도 확실히 모르는 인생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진행하시며 완벽한 끝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결과에 대해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며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우리에게는 완벽한 결과를 허락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왜 부르짖어야 할까요? 옛날 우리 선조의 말에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란 말이 있는데 우리의 정성을 다 하면 우리의 노력의 결과를 얻기 때문에 그럴까요? 세상 사람들은 정성이 들어가야 약도 효과가 있고 음식도 맛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것처럼 기도에 정성을 쏟으라는 말로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주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런 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 기도를 받으실 분, 이 기도를 응답하실 분, 이 기도의 결과를 우리에게 주실 분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면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시며 “기도하면서 낙심하지 말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록이 있습니다. 어느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뿐더러 약자에 대해 전혀 배려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원래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람을 존중하며 공명정대하게 판결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그 재판관은 불의했고 부패했고 신망을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재판관에게 과부가 자꾸 찾아옵니다. 자신에게 억울한 일이 있어 원한을 풀어달라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너무 억울해서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제대로 판결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고아와 과부는 사회의 소외계층이고 멸시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과부는 법정을 찾아왔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돈이 있는 사람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과부는 돈도 없고 권력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과부는 포기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가 ‘자주 그에게 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하였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너무나 귀찮을 정도로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이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청원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부가 계속해서 끈질기게 찾아오자 그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귀찮아서입니다. 이 재판장은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6~8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본문 예레미야 33장에서 일을 계획하시는 하나님,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결국 일을 완성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보이리라”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상황을 알려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우리가 전혀 꿈꾸지도 못했던 일을 보여주시고 이루어주시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체험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올 한 해 2023년 우리 교회의 표어 “하나님과 소통하는 성도”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을 깊이 가슴에 두고 낙담하지 말과 좌절하지 말고 불평과 원망을 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며 꾸준하게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께서 일을 만드시고 행하시고 이뤄주시는 위대한 역사를 체험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