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몽항쟁 전승기념탑
주소 :충주시 종민동 산6-51
대몽항쟁전승기념탑(탑신 15m, 기단부 지름 10m)은 고려시기 충주산성에서 몽고군과 싸워 승전한 김윤후 장군과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해 2003년 건립하였다.
기념탑은 산성의 성벽을 상징하는 화강암으로 조성하였고, 상단부에는 승전 년도인 ‘1253’을 동판에 새겨 부착하였다. 탑신은 5인의 군인상과 충주백성의 대몽항쟁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부조벽에는 70여일 간 충주백성이 어떻게 결사항쟁하여 승리했는지를 기록하여 호국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부조벽 전문
1253년 몽고군은 다섯 번째로 고려를 침략하여, 충주산성 공격에 나서게 됩니다.
산성에는 침략군을 피하여 들어간 이 지역의 관리, 군병, 농민, 승려, 노비 등이 함께 있었고, 방호별감 김윤후는 이들을 지휘하여 몽고군의 대공세에 맞서게 됩니다. 공방전이 석달째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성안에는 식량조차 바닥이 났고 바야흐로 위기는 목전에 당도하여 있었습니다. 그때 김윤후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외쳤습니다.
“만일 힘을 다해 적을 막는다면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벼슬을 내리겠소”
성안의 사람들은 아래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사력을 다하여 싸웠습니다. 견디지 못한 몽고군은 포위를 풀고 고려땅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싸움이 끝나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약속대로 신분에 관계없이 관직이 내려졌습니다.
이때 이곳 충주는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한 충주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고려의 승려 김윤후]
김윤후는 고려 후기 대몽항쟁 때 처인성과 충주성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승려 출신 무신이다. 승려로서 처인성전투에 참여하여 몽골의 장군 살리타이를 죽이는 공을 세웠다. 이후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충주성 전투에도 참여하여 일반 민과 더불어 승리로 이끈 전공을 세웠다.
이런 공로로 종6품의 섭랑장, 정3품의 상장군⋅병마사⋅추밀원부사⋅예부상서로 승진하였고, 마침내 정2품의 수사공 우복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고려 후기 대몽항쟁 때 처인성과 충주성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승려 출신 무신.
김윤후의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김윤후는 승려 출신으로 백현원(白峴院)에 살았는데, 1232년(고종 19)에 몽골군이 침입하자 처인성(處仁城)으로 피난하였다. 이때 몽골군의 장군 살리타이〔撒禮塔, 살리타〕를 활로 쏘아 죽였다. 이 공로로 상장군(上將軍, 정3품)에 임명되었으나 굳이 사양하여 섭랑장(攝郎將, 종6품)에 보임되었다.
이런 김윤후의 공적을 조선 후기 안정복(安鼎福)과 정약용(丁若鏞)은 "백현원의 승려가 처인성 전투의 승리로 무반직을 받아 환속해 김윤후라는 이름으로 대몽항쟁의 일선에 나섰다."라고 칭송하였다.
이후 1253년(고종 40)에 충주산성 방호별감(忠州山城防護別監)이 되어, 충주성 전투에서 몽골군과 맞서게 되었다. 그때 몽골군이 충주성을 포위한 지 70여 일이 되어 군량이 거의 바닥났다. 김윤후가 괴로워하는 군사들을 북돋우며 말하기를, “만약 힘을 내어 싸울 수 있다면,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작(官爵)을 제수하려 하니 너희는 불신함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관노(官奴)의 문서를 불사르고 또 노획한 소와 말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마침내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몽골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 공로로 감문위 상장군(監門衛上將軍, 정3품)이 되었고, 그 나머지 군공이 있는 자들은 관노와 백정(白丁)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작을 차등 있게 받았다. 이 사실은 중앙 정부와 일반 민(民)이 결합하여 대몽항쟁을 수행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1258년(고종 45)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정3품)가 되었으나, 그때 동북면이 이미 몽골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이어서 1262년(원종 3)에는 추밀원부사 예부상서(樞密院副使禮部尙書, 정3품)가 되었으며, 이듬해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 정2품)로 벼슬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