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발명품 ,가시철조망】
미국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목동이 된 13세 소년 조셉은 어느 날 목장 주인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다.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몇몇 양들이 울타리를 넘어가 이웃 농장에서 재배하는 농작물을 망쳐 놓았던 것이다
그 후로 조셉은 어떻게 하면 양들을 도망칠 수 없게 할까 고민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장미넝쿨이 많이 우거져 있는 울타리로는 양들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조셉은 직접 실험에 나섰다.
장미넝쿨을 조금씩 잘라서 양들이 잘 넘어가는 울타리에 붙여 놓은 것.
그러자 한동안 양들은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양들은 장미넝쿨을 뿔로 비벼서 떨어뜨린 후 다시 넘나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던 조셉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가시넝쿨처럼 가시가 박힌 울타리를 만들면 양들이 절대 넘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즉시 대장간을 하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커피원두를 가는 데 사용하던 날카로운 금속 조각들을 철사를 이용해 매단 가시철조망이었다.
조셉 부자는 목장 주인의 도움을 받아 1874년 11월 24일 특허를 취득했으며, 이 발명품은 ‘더 위너(The Winner)’이라는 상품명으로 탄생했다.
더 위너가 일반인들에게 처음 선보인 곳은 텍사스 주의 샌 안토니오에서였다.
광장에 자신들의 발명품인 가시철조망을 치고 소떼들을 몰아넣은 후 소떼들이 철조망을 뚫고 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직접 시연해 보인 것이다.
시연회는 대성공이었다.
소떼들은 한 마리도 철조망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으며, 시연회에 참가한 근처의 목장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공기보다 가볍고 위스키보다 세고 먼지보다 값싸다’라는 광고 문구를 붙인 가시철조망은 그 후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사실 조셉 부자의 가시철조망은 최초의 발명품이 아니다. 1859년 존 크렌니거는 나무 울타리에 날카로운 금속조각을 박아 넣었으며, 1860년 그라생 발르당은 창살 철사로 특허를 신청했다. 1867년에는 루시언 스미스가 쇠기둥 사이에 줄을 잇고 날카로운 금속조각을 걸었으며, 1873년 헨리 로즈는 나무 난간에 날카로운 금속 조각들을 박은 울타리를 선보였다.
그 후로도 수백 가지의 철조망 특허가 출원됐다.
그러나 조셉의 철조망이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고 비용이 저렴해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 특허 및 대량 생산에서의 과정이 누구보다 신속했던 것도 조셉을 철조망의 원조 발명가로 기억되게 한 이유였다.
시판 첫 해 약 4500㎏이었던 조셉의 철조망 생산량은 불과 3년 후인 1877년에는 583만㎏, 1882년에는 4500만㎏으로 증가했다.
목장주들은 물론 동물들의 철로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 철도회사들도 대량으로 사들인 덕분이다.
철조망을 설치한 목장주들은 인건비 절약이라는 부수적인 효과도 함께 얻었다.
소떼들을 대규모 목초지에 가둘 수 있게 됨에 따라 카우보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
일자리를 잃은 카우보이들은 로데오 선수로 변신했으며, 철조망이 목축 붐을 일으켜 서부 개척을 더욱 앞당겼다.
남북전쟁 때 군사용으로 변신한 철조망은 참호전 위주로 전개된 1차 세계대전에서 기병대의 돌격을 저지하는 전쟁 도구로서 위력을 떨쳤다.
철조망은 1차 세계대전 때 가장 많이 수출된 미국제 전쟁물자였다.
이후 기병대가 사라지고 철조망 방어를 돌파하기 위해 탱크가 등장했다.
그 무렵 조셉 부자는 미국 최고의 갑부 자리에 올랐다. 특허권이 완료될 때까지 조셉 부자가 벌어들인 돈은 미국의 공인회계사 10여 명이 1년 동안 계산해도 끝내지 못했을 만큼 거액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