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2월17일 (로이터) 이수완 기자 - 민주당 노무현 후보(56)는 풍운아로 불린다.
인권 변호사 출신인 노 후보는 80년대 후반 정치에 입문한 이후 6번의 선거에 출마, 이 중 4번이나 낙선했다. 이번 대선에도 우여곡절 끝에 민주당 후보로 확정되었고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와 단일화를 이루었다.
노 후보는 사람을 쓸 때 자신이 지향하는 노선이나 살아온 길을 중요시한다. 또한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적인 화법을 구사하며 자신의 메시지를 부각시킨다.
노 후보는 가장 시급한 과제가 낡은 정치를 타파하는 정치개혁이라고 주장하며, 젊은 유권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또한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대화와 협상으로 북한 핵문제를 해결할 것을 호소하면서 강경한 정책은 한반도에 전쟁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노 후보는 1946년 8월6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으로 부터 10리쯤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빈농인 아버지 노판석씨(76년 별세)씨와 어머니 이순례씨(98년 별세)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부산상고에 진학한다. 졸업(1966년, 53회) 후 모 작은 회사에 취직을 했으나 변변치 않은 대우로 실망, 고향으로 돌아가 고시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1968년 군에 입대, 전방 을지부대에서 복무한 뒤 1972년 상병으로 제대한다. 그는 1973년 1월 고향 진영에서 같이 자라면서 사귄 권양숙씨와 결혼한다.
노 후보는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 합격한 후 2년간의 연수원 생활을 마칠고 1977년에 대전 지방밥원판사로 일한 후 1978년 변호사를 개업한다.
그는 1984년 발족된 '부산공해문제연구소'의 이사가 되었고, 85년에는 송기인 신부를 중심으로 한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의'를 만들면서 재야운동에 나서다가 87년 6월 항쟁에 참여하게 된다. 87년 9월 대우조선 근로자가 파업중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에 개입했다가 장례식 방해혐의로 구속되었다가 23일만에 풀려난다
그는 1988년 통일민주당 공천으로 부산 동구에 출마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5공비리 조사특위에서 정주영, 장세동씨 등의 증인신문에서 예리한 추궁으로 청문회 스타로 부각된다.
1990년 1월 민정ㆍ민주ㆍ공화 3당의 합당에 반대하며 민주당내 잔류하며 당시 김대중 총재의 민주당과 야권통합운동 전개한다. 그는 이어 1991년 9월 통합민주당 출범하며 통합민주당의 대변인으로 발탁된다.
노 후보는 92년 3월 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도전하지만 민자당 허삼수씨에 패배하고 만다. 또 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민자당 문정수 후보에 패배한다.
1999년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되자 민주당에 잔류한다. 그는 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 출마했으나 낙선하게 된다. 이후 국민통합추진회의(상임대표: 김원기) 활동을 하다 97년 새정치 국민회외에 입당, 부총재가 된다.
1998년 7월 치러진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국민회의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종로 지역구를 포기하고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나라당 하태열 후보에 패배한다.
이후 노 후보 지지자들과 네티즌들이 '노사모' 결성하게 된다.
노 후보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 해양수산부장관 역임하게 된다. .
그는 올해 초 '노풍'을 타고 민주당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국민경선제에서 승리한다. 월드컵 이후 '노풍'이 '정풍'으로 바뀌었으나 가능성이 희박하게 보였던 정몽준 대표와의 후보 단일화에 성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