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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55)
핓빛 달, 혈월을 얻다(2)--폭참 마지막
주하연 곁으로 다가온 백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만다라(曼茶羅)
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지만 현 상황으로선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
혈뇌문의 무공을 완전하게 펼치는 경지까지는 도달한 것이다.
이제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낼 때가 되었다.
비역 안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백산과 주하연이 들어서자마자
강시들은 공격을 가해왔다.
강시들을 향해 먼저 달려든 쪽은 주하연이었다.
백산이 강시들을 통해 몸을 만들고 있을 때 그녀 또한 양천과 음천
을 번갈아 들어가면서 물의 흐름을 파악하는 공부를 했고, 어느 정도
성취도 있었다.
"그 무공을 혈우신보(血雨神步)라 부른다."
강시들의 공격을 위태롭게 피해내는 주하연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피비라는 이름과는 달리 주하연은 백색 투명한 광채를 남기며
이리저리 움직여 다녔다.
위태위태했던 주하연의 동작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가고, 간간
이 공격을 가할 때 즈음 백산은 앞으로 나섰다.
"강시를 없애는 건 간단하다. 먼저 차가운 기운으로 놈들을 얼리는
거야."
슬쩍 들어올린 오른 발목에서 빙천비가 전방으로 튀어나가고 강시의
머리를 뚫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비강은 허연 얼음을 두르며 꽁꽁 얼었다.
"얼어 있는 상태에서 강한 충격을 주거나 아니면 화천비로 뜨거운
기운을 쏟아 붙는 거야."
오른 발에 이어 왼발을 살짝 차올리자 화천비가 튀어나오더니 이내
빙천비 아래쪽으로 박혀들어 갔다.
"그럼 끝나는 거지."
파악!
파열음과 함께 강시의 머리가 산산이 부서지고 뒤이어 몸뚱이조차
파편으로 쓰러져갔다.
주하연은 일순 멍한 얼굴로 눈만 끔벅거렸다. 물론 백산의 무공이
아무나 펼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한 사람의
몸에 화기와 냉기를 동시에 수용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도 잘 안
다.
그런 것들을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난치듯 강시를 없애버
리는 백산의 능력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강시 때보다 더한 괴물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렇게 쉽게 해도 되는 거예요? 혈마가 오빠 모습을 보았다면 땅을
치고 통곡하겠네."
밖에 죽어있는 혈마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하는 말이다. 그를 따라
다닌 화려한 수식어가 전부 거짓으로 밝혀졌지만, 그래도 수라천가의
가주 신분이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비강들은 백산 앞에서는 그
저 장난감에 불과했다.
"누가 그러대? 이게 쉽다고."
어느새 10구의 강시를 전부 없애버린 백산은 주하연을 번쩍 안아들
며 말했다. 비강을 쉽게 없앨 수 있는 이유는 상극의 기운을 동시에
일으키는 광혈지옥비 때문이지 결코 내공 때문은 아니다.
단순한 공격밖에 하지 못하는 비강이지만 웬만한 고수보다 강한 것
들임에 분명했다.
"근데 왠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데?"
주하연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가 너무 간단하게 강시를 없애
버렸기 때문이었다. 비역이라 하였지만 강시를 제외하면 별다른 위험
도 없다.
이런 곳에 무엇인가 두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도 그래."
두 사람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가장 안쪽에 만들어진 석문을 밀치고
들어갔으나 석실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대 복장을 한 목 잘린 시체만이 둘을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지저만상신공이라는 무공이 필요해서 들어온 건 아니었지만 아무것
도 없자 백산은 내심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당하고 들어왔잖아?"
죽어 있는 시체의 가슴을 가리키며 주하연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시
체의 심장엔 검은 색 검 하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앉아있는 시체의 허리엔 봉선도와 비슷한 모양으로 생긴 길
다란 도가 채워져 있었다.
"하연아 저 무기 말이야, 봉선도와 비슷하지 않냐?"
"정말이네? 어디 보자."
백산의 품에서 뛰어내린 주하연은 시체의 허리춤에 달려있는 무기로
손을 내뻗었다.
스스스!
"제길, 하나같이 시체들은 옷을 벗고 난리야. 이제 15인데 이래도
되는 거야?"
몸통은 남겨둔 채 걸치고 있던 옷만 가루로 변한 모습에 주하연은
낮게 투덜거렸다. 실상 놀라야할 상황이 분명하건만 백산부터 시작하
여 비역 안의 강시들까지, 나체 시체들을 수시로 보아온 덕에 별로 놀
랍지도 않았다.
"나이만 15살이면 뭐하냐? 하는 건 60 먹은 할망군데."
"그래야 수준이 맞는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수준이 맞다니 그건 또 뭔 말이래?"
"됐어요, 오라버니. 머리 복잡하게 하지말고 이거나 한번 뽑아보세
요."
혀를 쑥 내민 주하연은 백산에게 검은색 도 하나를 내밀었다.
스스르!
"으음!"
미약한 소리와 함께 도가 뽑히자 백산은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모양은 봉선도와 흡사했으나 도신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반투명한 도
면에서는 붉은 기운이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도신 안쪽엔 핏빛
광채를 뿌리는 초승달이 들어 있었다.
반투명한 도신을 붉게 만드는 원인이 그 때문이었다.
감탄한 얼굴로 도를 주시하던 백산은 바로 옆 바위 단을 향해 일도
를 그었다.
스윽!
명도라는 말이 부족했다. 내공을 전혀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
고 석단의 귀퉁이가 잘려나갔다.
"하연아! 이거…… 엄청 비싸겠다, 그지?"
"엥?"
황당하다는 듯이 주하연은 백산을 쳐다보았다. 바위를 두부처럼 잘
라내는 명도를 보며 가격 운운하는 백산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기 때문
이다.
"천자문만 익혀서 그런 거니까 너무 놀라지 마라. 그리고 척 봐도
돈 좀 나가게 생겼잖아."
어색한 듯 백산은 얼버무렸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나
이에 어울리는 말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쩝! 굉장한 보물(寶物)을 얻었다고 호탕하게 웃어야할 판에, 그렇
지?"
"맞아요, 거기다 '강호야 기다려라 내가 간다!' 그러면 금상첨화지
요. 갈수록 어려지는 것 같아 한편으론 마음이 놓이네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주하연은 목 없는 시체가 향해 있던 벽면으로
다가갔다.
벽면 한 면에 깨알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한참 동안 집중하여 글을 읽어 내려가던 주하연은 이내 벽에서 물러
나며 백산 등에 다시 업혔다.
"고대 제문(祭文)으로 쓰여서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저기 목잘린
사람은 예맥(濊貊)가의 가주였고, 그 도(刀) 이름은 예도혈월(濊刀血
月)이란 건 알아냈어요. 그리고 이곳이 지저만상신공을 둔 곳은 맞는
것 같고요."
"그것밖에 없어? 이건 혈가(血家)에서 만든 물건인데?"
백산은 수신가 가주라 하였던 자의 가슴에 박힌 검을 끌어당기며 물
었다. 검 또한 상당한 명검인 듯 검은 광채를 쏟아냈다.
"그래요? 그런데 그건 뭐 하려고?"
백산이 검은색 검을 챙기자 주하연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 마라엽도 대신 설련에게 검을 하나 사주기로 했는데 돈이 없잖
아. 또 돈이 있다고 해도 이만한 검은 살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은은한 광채를 뿌리는 검을 보여주며 말했다. 검 또한 혈월만큼이나
명검임에 분명했다.
"하연인!"
백산의 말을 듣고 있던 주하연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기분이
상한 듯 그녀의 얼굴은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백산은 찔끔한 얼굴로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니 그 말이 아니고, 설련 그 아이한텐 하나 사주지 뭐. 이 검 하
연이 너 해라."
"싫어욧! 그냥 설련 언니 줘요. 대신 난 다른 것 사줘요."
"알았어, 임마. 천상 이곳에서 야명주 몇 개 떼 가지고 가야겠네."
내심 쓴웃음을 지은 백산은 비역을 나와 지난 6개월 간 살았던 동굴
로 향했다. 지저사령계에 들어왔던 목적은 달성했고 이제는 나갈 시간
이 되었다.
"저기……. 오빠."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뜸을 들이시나?"
"다른 게 아니고, 그 빙천비(氷天匕) 말이야."
"머리 좋은 것도 병이다, 병. 알았다 동굴에 가서 해주마."
백산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웃고 말았다. 10성을 끝으로 더 이
상 진전이 없는 빙천수라마공 때문이란 사실을 금방 알아 차렸다.
뛰어난 머리를 가진 그녀가 빙천수라마공을 완성하기 위해선 음천보
다 더 강한 빙극지기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 해법을 주하연은 빙천비에서 찾아낸 것이리라.
굳이 그녀의 말이 아니더라도 완성시켜 주려고 했었다. 강한 무공이
지만 빙천수라마공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12성 완성하지 못하면 점점 석녀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여자로서는
최악의 무공이 빙천수라마공이라 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오빠. 근데 빙천수라마공을 완성하면 환골탈태를 하게
되나?"
"맞아 환골탈태를 이루게 되고, 하연인 더욱 예뻐지겠지."
"그럼 문제네……."
"뭐가 문제야? 얼굴 예뻐지고 무공 강해지면 일거양득이구먼."
"누가 그것 땜에 그러나. 환골탈태를 하게되면 옷이 얼음가루로 부
서질 테고, 그럼 입고 나갈 옷이 없잖아."
"내 장포 입고 나가면 되지. 나야 나가면서 시체 옷 한 벌 벗겨 입
으면 되고."
"우이씨! 이젠 오빠 더 이상 시체 옷 안 입게 한다니까 그러네. 습
관 되면 정말 빨리 죽을 수도 있다고. 그냥 옷 벗고 할래."
냅다 고함을 지른 주하연은 백산의 등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입고 있
던 옷을 사정없이 내던지며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하여간 대책이 안서. 어린 녀석이 그런걸 다 믿고 그러냐? 누가 애
늙은이 아니라 할까 봐."
주하연의 등을 보고 앉은 백산에게서 천비들이 튀어나와 허공으로
떠올랐다. 유영하듯 허공을 맴돌던 천비들은 일제히 동굴 바닥으로 박
혀 들었고, 주하연의 명문혈에 장심을 밀착시키며 혈풍뇌전심법을 끌
어올렸다.
"난 말야, 점쟁이도 믿고, 꿈도 믿어. 자꾸 불길한 걸 몸에 지니고
다니면 불행이 닥친다는 말도 믿고."
백산의 손이 와 닿는 걸 음미하며 주하연은 낮게 중얼거렸다.
"믿는 건 좋은데 너무 광신하지는 말아라. 그리고 지금부터 정신 집
중해서 빙천수라마공을 끌어올려."
백산이 하고자 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우선은 빙천비로 빙극지기
를 끌어올려 주하연의 몸에 주입시킴과 동시에 풍천비의 기운을 불어
넣을 참이었다. 빙극지기만으로도 빙천수라마공을 대성할 수 있지만
요정이 준 대환단 기운마저도 내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바람의 기운
이 반드시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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