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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장 그날 밤
양주부성.
야광충은 귀영종 오대신법 중 잔백유영을 시전해서 한 줄기
바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는 관도였
지만 그가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관도의 옆에 심어 놓은 백양나무와 버드나무들이 줄지어 그의
뒤로 달리고, 말과 수레들이 거꾸로 뛰는 것처럼 그의 뒤로 사
라져 갔다.
그렇게 한 시진을 달려서 야광충은 양주부성을 바라보게 되었
다. 백리극이 빠른 말로 네 시진이나 달려온 거리를 한 시진만
에 주파해 버린 것이다.
야광충은 어둠 속에 검게 침묵한 양주부성 성벽을 한달음에
뛰어넘어 그늘로 숨어 들었다. 이제 밝은 불빛 아래 나서면 몸
을 숨겨 가며 가야 했다.
양주는 낮보다 밤이 더욱 양주답다.
굳이 기루나 주루가 아니더라도 오색 등불을 집집마다 내걸어
거리마다 휘황한 빛무리가 떠돌았다.
타지에서는 자시(子時;밤 11시)가 되면 통행이 금지되고 순포
(巡捕)들이 딱딱이를 울리며 돌아다녀, 집없는 고양이와 야행인
(夜行人)들의 천국이 되지만 여기는 자시가 넘으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낮과는 다른 양주성의 진면모, 야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거리는 그래서 지금 사람들로 끓어 넘치고 있었다. 기녀, 여
행객, 장사치들과 밤산책을 나온 양주부민(揚州府民)들이었다.
야광충은 그 사이로 걷고 있었다.
사람의 눈을 피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사람들이 보지 않
는 곳, 봐도 심상하게 여기고 지나치는 곳으로 걸으면 되는 것
이다.
오늘처럼 구경을 나와 한 시진을 걸어도 집에 돌아가 생각해
보면 기억에 남는 것은 극히 특이했던 한두 가지뿐일 때가 많은
것이다.
물론 야광충은 보면 잊지 않을 만큼 특이한 용모, 특이한 기
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약간의 요령을 부려야 했다.
기세를 숨기고 주변의 사물 속에 파묻히는 신법이었다. 그들
귀영종의 신법은 빠르게 움직이는 것보다는 사실 그것을 더 높
은 경지의 신법으로 보고 있었다.
야광충은 귀영종 최후의 신법인 미시출오종이란 이런 경지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 닿는 극점(極點)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문득 야광충이 멈춰 섰다.
그의 손은 가슴에 을라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손 하나가
잡혀 있었다. 때가 꾀죄죄하게 묻은 작은 손. 야광충의 품속에
파고들다가 잡힌 손이었다.
야광충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때는 묻고, 작았지만 그 손
에는 여러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전체적인 손의 크기에 비해 손가락이 길었다. 그리고 그 끝이
가늘고 부드러웠다.
한 달에 한번 이상은 안 썹었을 것 같은데 기묘하게도 손톱은
가지런히 정돈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붉은 살이 보일 정도로
바짝 깎아 놓았다.
야광충은 이 손이 어떤 손인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어떤 일
을 하는 손인지 알 수 있었다. 전문적으로 행인의 품을 털기 위
해 단련된 손인 것이다. 소매치기의 손.
그 손에 붙은 가는 손목과 가는 팔뚝, 그리고 가녀린 어깨를
야광충은 무심하지 않게 볼 수밖에 없었다. 고생을 한, 사부의
말대로라면 '밑천이 들지 않는 장사 를 하는 사람의 팔로는 지
나치게 가늘었다. 아직 어리기 때문인가, 아니면 못 먹어서?
그리고 얼굴.
야광충의 눈이 번뜩였다.
손의 임자는 소년이었다. 어른은 아니지만 그렇게 어린 것도
아닌 소년. 삼각형으로 좁아지는 얼굴에 보송보송한 솜털, 작은
눈에 재빠르게 구르는 눈동자가 쥐새끼를 연상시키는 용모의 소
년이었다.
도둑질을 하다가 잡힌 것인데도 묘하게도 건에 질린 눈은 아
닌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 눈 때문에 야광충이 그를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손의 임자를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똑같았다. 쥐새끼를 닮은 그 용모와 눈동자가 영낙없이 사형인
옹중서를 빼닮은 것이다.
사형이 늙은 시궁쥐를 닮았다면 이 소년은 새앙쥐를 닮았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을 뿐이었다.
야광충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이름은?"
소년은 그 질문에는 대답을 않고 변명부터 했다.
"저 아무 짓도 않헷뎌요. 봐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러면서 펴 보이는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아무것도
없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를 집기 전에 야광충이 잡았는데 그
손에 뭐가 있을 것인가?
소년은 그래도 뻔뻔스럽게 중얼거렸다.
"놔요. 저는 도둑 아니에요. 아무 짓도 않했다니까요?"
변명이라고 하는 말이 더욱 그가 도둑인 증거가 되었다. 야광
충은 아무런 추궁도 않는데 소년이 제풀에 털어 놓고 있는 셈이
었다.
"이름은?"
야광충이 다시 한번 물었다.
"이름은 알아서 뭐해요? 손이나 놔줘요. 길 가는 사람 붙들고
왜 이래요?"
묘힌 소년이었!. 댜거간한 인물들도 눈을 마주치면 겁을 집
어먹는 야광충의 기서였댜. 그런데 이 소년은 전혀 두려쉬하거
나 위축된 기색이 없었다.
적반하장(賊反荷杖) 격으로 되려 대들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소년의 손을 놓아주었다. 좀더 다그쳐 보고 싶었지
만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한마디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소년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다음에 나를 또 보면 도망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소년이 그제서야 찔끔하며 겁먹은 빛을 보였다. 그러나 야광
충이 돌아서고 몇 발자국 멀어지자 소년은 그의 뒷등에 대고 욕
을 퍼부었다.
"야 이 재수없는 백발 귀신아! 다음에 날 보면 네가 도망가야
될 거다!"
야광충은 대꾸도 하지 않고 걸었다. 아이와 싸워 봤자 자신만
우습게 되는 것이다.
'저놈, 사형과 다른 게 하나는 있군!'
하나가 아니었다. 거친 말버릇과 뻔뻔스러움, 그리고 재능이
었다.
귀영종의 신법을 사용하며 가는 그를 표적으로 주목했다는 것
이 그렇고, 비록 그가 그냥 두고 본 면도 있지만 그의 품에까지
손을 뻗쳤다는 것이 그랬다.
무공을 배우지 않은 소년이 그 정도면 대단한 눈썰미에 빠른
손을 가졌다는 증거였다.
그 생각을 하고 그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무공을 배우지 않은?'
무공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그게 가능할까? 어지간한 고수들
에게도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는 뒤돌아보았지만 소년은 이미 사라진 후떴다.
야광충은 속으로 웃었다.
문득 소년과 사형이 닮은 점이 하나 생각났던 것이다. 무모한
짓을 시도한다는 것이었다.
사형도 사부의 장원을 털려다가 잡혔다지 않는가!
'다시 만나면……!'
야광충은 그때 진운을 보았다.
"늦으면 곤란한데!"
진운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원도살이 인상을 썼다. 똑같
은 소리를 벌써 두번째 듣는 것이다. 첫번째는 그냥 넘겼지만
이번에는 한마디 않을 수가 없었다.
"자넨 당주에 대한 믿음이 없군! 온다고 했으면 반드시 올 것
이고, 흑시 못 오면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
각지 않나?"
옆에서 걷고 있던 이통천이 끼여들었다.
"앞말하고 뒷말하고 다르지 않습니까?"
"뭐라고?"
"온다고 해서 반드시 오면 그것으로 끝이지 그만한 이유가 있
어서 못 올 수도 있다는 건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게 해서 이해
할 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원도살의 표정에 한기(寒氣)가 홀렀다.
말대꾸한 사람이 이통천이고,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서 돌아
온 사람이라 넘어갔지 만약 진운이 그런 식으로 대답했으면 단
박에 베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 말로 이해가 안될 사람은 하고도 많지. 자네도 그렇고,
총사도 그렇다. 온다고 해놓고 안 오면 변명 따윈 들을 필요도
없겠지. 그러나 당주는 다르다. 갑(甲)이 맞다고 하면 그게 맞
다. 다시 을(乙)이 맞다고 하면 그게 맞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니까!"
진운이 놀라서 그를 보았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소생이 보기에는 지이옹께서 평소에는
당주를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던데, 오늘 말씀은 다르십니다
그려?"
"좋아하지 않는다!"
원도살이 잘라 말했다.
"그러나 그를 믿는다. 그게 이해가 안 가나?"
진운이 감탄했다는 듯 그를 보다가 말했다.
"소생은 누군가를 좋아할 수는 있어도 믿지는 않습니다. 그건
누구랴도 먀찬갸자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다른 누구보다도 좋
아하지만 믿지는 않고 있습니다. 저 자신조차도 믿지 않는 제가
누굴 믿겠습니까?"
이통천이 물었다.
"그럼 형장은 왜 당주님을 모시는 거요?"
"두려워서!"
진운은 잠시 몸을 떠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이통천에게는 그
것이 실제로 야광충을 떠올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처
럼 보였다.
"두려워는 해도 믿지는 않는다, 가 내 생각이오!"
이통천이 다시 좌검자를 보고 물었다.
"형장도 그렇소?"
고개를 들 힘도 없는지 땅만 내려다보며 걷던 좌검자가 보지
도 않고 천천히 말했다.
"난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어!"
"그럼 좋아서?"
"나는 나 자신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지."
"그럼 믿는다는 거요?"
좌검자는 그제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통천을 보았다. 그
퀭하니 들어간 눈을 보고 이통천은 세상에 두려운 것도, 좋아하
는 것도 없다는 좌검자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눈은 야광충의 눈과는 다른 의미에서 무감동한 눈이었
다.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잿라의 눈. 차갑게 죽어 버린
잿빛의 눈이었다.
"그냥!"
"그냥?"
"그냥, 그를 보면 재미있어서!"
말하는 좌검자의 눈이 한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그 눈이 향
하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거기 야광충이 서 있었다.
어둠 속에 문득 나타난, 하지만 원래 거기 오래 전부터 서 있
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야광충이 진운을 향해 물었다.
"늦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맞나?"
"예, 아직 늦지는 않았습니다."
진운이 짓눌린 듯한 목소리로 대답햇다. 겁먹은 듯 짓눌린 목
소리!
"지금 가도 충분합니다."
"그럼 가지!"
일행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구지가는 지척이었다.
야광충이 말쌨다.
"대취옹이랬던가?"
진운이 대답했다.
"예, 정보대로 대취옹이었습니다. 과거 장강십팔타의 종타주
(總舵主)였던!"
"협조할까?"
"물론입니다."
진운은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긴장을 푼 듯했다.
"대세가 어떻게 흐르는지는 아는 사람입니다."
"통천!"
"예!"
근 반 년 만에, 그것도 천신만고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겨우
찾아온 자기를 아는 척도 않는다고 내심 섭섭해 하던 이통천이
급히 대답했다.
"대취옹에 대해 아나?"
"대취옹 당노선생 당노구 말입니까?"
별호만 듣고도 대뜸 이름을 댄다.
야광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잠시 눈알을 굴리던 이통천이 야광충의 질문에 아는 대로 설
명하기 시작했다.
"올해 여든서넛쫌 되었을 건니다. 이십 년 전 장강십팔타 총
타주의 직위를 제자도 아니고, 친인(親人)도 아닌 번강룡(飜江
龍) 강금척(姜金尺)에게 넘겨 주고 무림에서 은퇴했을 때 나부
파(羅浮派) 장로(長老) 신풍출수(神風出袖)와 공동파( 派)의
복마제일검(伏魔第一劍) 우석(愚石) 도장(道長)이 벌인 말싸움
은 대단했죠. 그 중에 대취옹의 나이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우
석 도장은 대취옹이 예순넷이라고 하고 신풍출수는 대취옹의 생
일이 아직 지나지 않았으니 예순셋이라고 했거든요."
엉뚱하게도 나이 이야기만 하는 이통천을 말릴 생각은 않고 다
들 그냥 듣고만 있었다.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원도살이 물었다.
"단지 나이 때문에 구대문파 중 두 파의 장로들이 말싸움을
벌였단 말인가?"
이통천이 묘하게 입술을 실룩거렸다. 모르면 말을 말라는 듯
한 표정.
"말씀 중에 틀린 게 세 가지나 있습니다. 첫째는 나이 때문에
싸운 것이 아니고, 둘째는 공동파는 구대문파에 들어가지만 나
부파는 아니라는 것이고, 마지막 셋째는 당시에는 신풍출수만
장로였고 우석 도장은 장로가 아니었으며 이제는 두 사람 다 자
파의 장문인이라는 것이죠. 어떻게 한마디 말로 세 가지나 틀릴
수 있으십니까? 대단하시군요."
원도살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난 촌놈이라 몰라서 그러네. 자네가 잘 설명해 보게."
이통천이 다시 설명했다.
"나이 때문에 어른들이 그렇게 싸우겠습니까? 원래는 한참 활
동할 나이에 은퇴하는 이유가 뭐냐, 제자도 아닌 강금척에게 자
리를 물려주는 이유가 뭐냐는 것에 대한 주측이 서로 달랐기 때
문이었죠. 신풍출수는 대취옹의 제자인 음앙쌍교(陰陽雙敎)가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심각하게 비방전(誹謗戰)을 벌였던 것에 실
망해서 그렇다고 했지만 우석 도장은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있느냐, 술에 중독돼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했죠. 대
취옹이라는 명호에서도 알 수 있지만 술이 좀 심했거든요.
원도살은 아무리 술에 중독될 지경이라도 그렇게 중요한 일을
술김에 결정했을까, 의문을 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바람에
그는 이통천이 말하기 시작하면서 좌검자의 낯빛이 바뀌었다는
것을 간과해 버렸다.
원도살이 말했다.
"아무래도 신풍출수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갈군!"
이통천이 다시 그를 고깝게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각파의 사람들은, 아! 이
싸움은 이십 년 전에 화산에서 열렸던 제사차(第四次) 화산논검
대회(華山論劍大會)때 있었던 일이라 각파의 사람들이 많이 옆
에 있었습니다. 각파의 후기지수들이 모여서 오 년마다 한번 여
는 논검대회인 화산논검대회에 대해서는 아시죠?"
원도살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알게 됐네. 자네 덕분에."
이통천은 대답에 신경 쓰지 않고 바로 말했다.
"각파의 사람들은 우석 도장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
죠. 우석 도장이 논리적으로 자신의 추즉을 설명했거든요. 대취
옹의 성명절기가 뭐냐, 혼원주정신공(混元酒酊神功), 주전공(酒
箭功), 취우검(醉牛劍) 등, 술하고 연관이 없는 무공이 단 한
가지라도 있느냐, 술로 이만한 경지에 오르려면 처음 무공을 배
울 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마셔 댔겠느냐, 열 살 때부터 하루
에 술을 한 동이씩 마셔 댔다고 한다면 육십사 세인 올해까지
마신 술은 일년에 삼백육십 동이, 십 년이면 삼천육백에 오십사
년이면 일만 구천사백 동이, 거기에 윤년, 윤달을 포함하면 일
만 구천칠백열 동이가 아니냐, 한 동이보다 적게 마셨을 때도
있겠지만 무공이 높아질수록 그보다 더 마셨지 덜 마시지는 않
았을 테니 실제는 이보다 훨씬 더 마셨을 것이다. 그러고도 제
정신이면 그게 이상한 것 아니냐 대충 이런 요지의 말이었습니
다. 그때 신풍출수가 한마디했죠."
이통천은 쉴새없이 주절거리다가 잠깐 멈추고는 근엄한 표정
으로 말했다. 신풍출수의 흉내를 내는 모양이었다.
"도장의 말은 엉터리요. 우선 대취옹의 나이부터 틀렸잖소. 대
취옹은 올해 생일이 지나지 않아서 아직 예순네 살이 아니오."
원도살과 진운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단 칼에 우석 도장을 보내 버렸군그래!"
"보내진 것은 신풍출수였습니다. 우석 도장이 보내 버렸죠."
이통천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육십삼과 육십사라는 두 숫자를 놓고 다투던 두 사람이 결국
검을 뽑아 들었죠. 나부파는 그때 이미 극도로 약해져 있었거든
요. 그저 과거 명문대파였던 체면을 보아 초대해 준 것인데 한
참 성가를 날리던 공동파를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신풍출수는
나부파 최고의 고수라고 불렸지만 우석 도장의 손에 무참하게,
단 세 수만에 꺾여 버렸죠. 그날 이후로 나부파는 봉문(封門)했
습니다. 지금까지요."
이통천의 말은 끝나고, 사람들은 어이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감탄한 것인지 그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야광충이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대취옹이 장강십팔타의 전 총타주였다는 것이지? 제
자도 아닌 번강룡에게 자리를 넘기고 이십 년 전에 은퇴했고?
성명절기는 취우검, 흔원주정공, 주전공?"
이통천이 해연히 입을 벌렸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는 신풍출수와 우석 도장의 싸움을 이야기한 것만 기억하지
그사이에 대취옹에 대한 이야기가 다 나왔다는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둣했다.
원도살이 그의 어깨를 쳤다.
"다 아는 수가 있지! 이제 다 왔으니 그만 하세!"
그들은 이미 구지가를 걷고 있었다. 저편에 낡은 창고 몇 채
가 보이고, 그 중 하나에서는 활짝 열린 문안으로부터 불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 * *
구지가.
"유총포두께서 늦으시는군요!"
"남경에서 양주는 먼 거리다. 오실 때가 되면 오시겠지."
잠시 침묵, 그리고 조남성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무래도 우리만으로는 무리 아니겠습니까?"
"우리만이 아니면?"
모충국이 조용히 반문했다.
"남경수비대(南京守備隊)의 군사라도 끌고 왔어야 한다는 건가?"
"양주부 인근 현(縣)의 포쾌와 군사들만 모아도 삼백은 될 텐
데요?"
"자넨 전쟁을 하고 싶은 건가? 난 범인을 잡고 싶을 뿐이네!"
침묵이 지켜졌다,
모충국이 다시 말했다.
"관(官)이 나서서 힘을 행사하는 것에는 많은 군사가 필요없
어.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네. 관에 거역하는 것은 조정에게
저항하는 것이고, 반역이네. 반역은 수백 군사에게 저항하나 나
처럼 보잘것없는 추관 나부랭이에게 저항하나 마찬가지지. 난
그들의 의사를 알아보고 싶네."
"그러다가 대역무도한 놈들에게 일이라도 당하시면?"
"그래서 자네들을 데려오고, 유총포두를 부르지 않았나? 내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자네들은 신속히 도주해서 유총포두의 명에
따르면 되는 걸세!"
"하지만!"
"쉿! 왔어!"
창고 앞에 몇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 중 한 사람의 머리카
락이 은발인 것이 특이했다.
창고 안에서 몇 사람이 나와 문 옆에 도열했다. 새로 온 사람
들이 그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그래서!"
대취옹은 낮게 중얼거렸다. 앞에 앉은 흑수당과 그들 능파당
의 인물들조차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낮
은 목소리였다.
"요구가 뭐요?"
"요구라기보다는 제의올시다. 그 두 단어 사이에는 작은 것
같지만 큰 차이가 있지요."
진운이 대답했다.
"그래서 그 제의는?"
"아시다시피 양주부의 사공들, 부두의 일꾼들, 물주(物主)인
상인들, 객점의 주인들이 이미 절반 이상 우리 흑수당의 형제가
되어 있소. 애초에 우리들은 세력 확장에 관심이 없고, 그래서
능파당의 영역에 손을 대고 싶지 않았소만 일이 그렇게 되어 버
렸으니 어쩔 수가 없었지요. 형제로 받아 달라는데 거절할 순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을 하고 있는데도 대취옹은 아무
소리 않고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옆으로 배석한 능파당의 인물들은 어깨를 들썩이
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진운의 어투가 더욱 은근해지고 정중해졌다.
"같은 영역에 두 파가 있으면 반드시 되를 보게 되지요. 그래
서, 흑시 있을 수 있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우리 흑수당은 능
파당에 통합을 제의하는 바입니다. 어차피 사공들의 권익을 보
호하기 위한 단체이니 능파당과 혹수당은 목적이 같다고 할 수
있죠. 이 김에 형제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그것뿐이오?"
대취옹이 물었다. 감정의 변화를 엿볼 수 없는 담담한 어조였다.
"물론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대취옹의 담담함에 대해 진운은 호감 어린 미소를 돌려보내
었다.
"당노선생을 예를 갖춰 우리 흑수당의 어른으로 모시고 싶습
니다."
"어른으로 모신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당에는 가입하는 순서대로 항렬을
매기는 규칙이 있습니다. 원칙대로 하면 능파당의 식구들은 모
두 한 항렬이 된다는 말쏨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당노선생을 무
시하는 처사가 될 뿐 아니라 계통에 혼란을 주는 일이 될 것입
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현재의 직위에 기준해서 항렬을 매긴다
는 것이 제 제안입니다."
"항렬이라!"
대취옹은 쪼용히 되뇌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장내의 분위기는 점점 더 살벌
해지고 있었다. 진운의 제안은 결국 능파당은 항복하고, 대취옹
은 수하로 들어오라는 얘기나 다름아닌 것이다.
전날과 같이 창고의 안벽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예순 명의 사
공들, 그리고 대취옹의 옆에 배석한 세 명의 중년인들에게서 살
기가 뭉클거리며 뿜어졌다.
능파당 일, 이, 삼 당주인 호연 형제(湖連兄弟)와 능파당에
속한 사공 전원이었다. 오늘 능파당은 전인원을 동원해 흑수당
을 맞은 것이다.
그들 전원의 소맷자락 속에 감추어진, 그러나 굳이 숨길 생각
은 없는지 끄트머리 뾰족한 부분은 일부러 내놓은 아미자(蛾眉
刺)가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에 대해 흑수당은 단 일곱 명이었다.
아까 당주라고 소개한 은발의 사내와 도맡아 나서서 말하고
있는 지사생을 제외하면 아무도 소개를 않았지만, 대취옹은 그
중 한 명은 소개없이도 알아볼 수 있었다. 유항경자가의 떠돌이
늑대 좌검자였다.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정말 이 사내마저 혹수당에 가입했단
말인가?'
좌검자는 무시해도 좋을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적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보다도 두려운 것은 그들에게 좌검자를 끌
어들일 정도의 흡인력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취옹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진운의 제안에 관심을
보이는 질문을 했다.
"내 항렬은 그럼 어떻게 되오?"
"현(玄) 자 의 삼(三)을 쓰게 됩니다."
"현 자의 삼?"
"우리 당에는 현 자 항렬은 둘밖에 없지요. 현일과 현이라는,
당노선생이 현삼이 되시는 거지요."
'천(天) 자는 당주가 쓰겠고, 그심 지 (地) 자는 누군가?'
"같이 오신 분들을 소개해 주시짓소?"
'늙은 여우가!'
진운은 조금 짜증이 났다. 얘기가 잘 돼서 능파당이 그들의
일원이 된다면 상관없지만 잘못하면 흑수당의 내부 사정만 알려
주고 마는 게 아닌가!
'좋아, 네가 원한 것이라면!'
진운은 입가에 묘한 빛을 띠며 같이 온 일행을 한꺼번에 소개
해 버렸다.
"진작에 소개드렸어야 하는 건데, 결례를 했군요. 여기는 지
자의 이(二)를 쓰시는 원도살, 지 자의 오(五)를 쓰는 이통천,
지 자의 육(六)과 칠(七)을 쓰는 도신과 도귀 형제, 그리고 현
일, 유항경자가의 좌검자입니다.
대취옹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좌검자 외에는 어차피 전부 처음 들어 본 이름이니 놀랄 것이
없지만 원래의 명호까지 댔다는 자체가 놀라운 것이었다.
'이놈이!'
그는 진운을 노려보았다. 능파당의 전수하 졸개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그들이 비밀로 지켜 온 명호를 대었다는 것은 만약의
경우 단 하나초 남겨 두지 않고 죽이겠다는 위협이나 다름없었
기 때문이었다.
진운은 자기 소개를 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억기 소생은 지 자의 사(四)를 쓰고 있습니다만 원
래는!"
"알고 있소!"
대취옹이 그의 말끝을 잘랐다. 진운이 약간 놀란 빛으로 그를
보았다.
"무림에 대명이 자자하신 사사 중 일 인, 사유라 불리는 음양
산인 진운, 진선생 아니시오?"
진운의 침착이 무너졌다. 스스로 명호를 대는 것과 상대에게
간취당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생과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명호를 다 아시다니, 당노선
생의 견식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군요!"
"노필부의 견식이야 보잘것없지만, 이번에는 알 만한 이유가
좀 있어서!"
대취옹의 그 말이 신호였던 것처럼 사람들의 뒤에서 한 사내
가 주줌주춤 걸어나왔다.
진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놈인데?'
구련자에게서 점을 보던 그 사내 아닌가!
'그가 왜 여기 있지?'
진운은 마원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능파당 제삼 당주 호연각이 진운을 가리키며 물었다.
"맞나?"
사내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맞습니다, 맞아요! 그 사기꾼!"
그는 이까지 갈아붙이며 손가락질을 했다.
"저놈 때문에 통인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집안은 파산을 했습죠!
마누라는 도망가고, 딸년은 저 사기꾼을 찾기 위한 노잣돈 때문에
기루에 팔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원수놈을 당장……!"
사내는 입에 거품을 물며 소리를 질렀다. 뒤에 선 능파당의
사내가 잡지 않았으면 달려들 기세였다.
진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내가 누군지 기억해 낸 것이다.
'그 통인놈 아냐? 마…… 뭐랬던가?'
사기꾼이 피해자를 만나는 것보다 재수없는 일이갚 없다. 예
전에 입혔던 피해를 보상해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사
기를 실패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사기꾼임을 알고서도 누가 그의 말을 믿어 쭐 것인가?
'젠장!'
진운은 이런 경우에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를 보이기로 했
다. 어차피 한두 번 당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중원은 이런 경우 정말 좁은 공간인 것이다.
"어이, 그러고 보니 마형제, 그래 마형제 아닌가? 그 동안 어
렇게 지냈다고? 난 자네가 그날 돈 좀 벌었는 줄 알았지. 적도
들을 놓치긴 했지만 그거야 자네 잘못이 아니지 않았나!"
"뭐, 뭐라고? 이 파렴치한!"
마원은 어찌나 기가 막힌지 거품을 물고 넘어갈 뻔했다.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저렇게 뻔뻔스럽게 나올 줄이야!
진운은 자신의 태도가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경
우에는 먼저 훙분하면 당하는 것이다. 통인놈이 조금만 더 훙분
하면 죽여 버려도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가 더 말하려 하는데 누군가의 손이 어깨를 눌렀다.
원도살이었다.
진운이 이유를 물으려 하자 원도살은 입을 막는 시늉을 쌨다.
그 눈이 심상치 않아 진운은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원도살이 말했다.
"이 친구를 데리고 나온 이유가 뭐요?"
대취옹은 잠깐 인상을 쓰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 평생 몇 개의 이름을 가졌었지. 이제 와서 또 하나의 이
름을 가진다고 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그는 마원을 가리켰다.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는구려, 이런 일도 있고 보니!"
그는 다시 진운을 바라보았다.
"이런 일에는 신뢰가 전제되는 것이 아니겠소?"
손 하나가 탁자 위에 올려졌다.
대취옹은 이건 뭐냐는 듯이 그 손을 바라보았다. 손은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장갑이 얇은 탓인지 손가락과 손의 모습을
섬세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 귀하!"
손의 임자, 야광충이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대취옹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듯한 감을 받았다.
'이놈은 뭔가 다르다!'
야광충이 말했다.
"조금 전까지는 권고였다."
대취옹이 물었다.
"지금은?"
"협박으로 바뀌었다."
야광충은 손바닥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살 텐가……."
그는 손을 돌려서 손등을 보였디.
"아니면 죽을 텐가?"
대취옹이 조용히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선택은 그것뿐이오?"
"그렇다!
"어쩔 수가 없겠군요!"
대취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을 보기 전에는 눈물을 홀리지 않는다는 말도 있긴 하지
만, 때로는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지금 어떤 상황인가?"
유소백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의 음성이 모충국의 귀를 간
지럽혔다.
"창고 안에서 모종의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타
협하거나, 아니면 싸우겠죠."
"후자가 맞는 모양이군!"
창고 안에서 사람들이 줄줄이 질어나오고 있었다.
"부탁이 있는데."
"거절하겠다!"
대취옹은 쓰게 웃었다.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당해 본 것은 팔
십 평생에 처음이었다.
"말이 필요없단 얘기요? 나도 늙었나 보군 어린애처럼 떼를
쓰려 들었다니 말이외다. 하나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은 알면서
도 어쩔 수 없이 그럴 때도 있는 법이지요. 들어주고 안 들어주
고는 당주의 맘이네만 노필부는 부탁을 하는 수밖에 없겠소."
그는 자신을 따라 나온 육십삼 명의 능파당 식솔들을 둘러보
았다.
"노필부와 이 세 아이는 어찌 되었건 귀당의 사람들과 싸우겠
소만, 나머지 아이들은 결과에 상관없이 살려 주는 것이 어떻
소? 그들은 우리가 없으면 어차피 귀당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으
니 말이오."
야광충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대취옹을 향해 까
닥거렸을 뿐이었다.
대취옹은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땅
에 누워 버렸다.
"취팔선보(醉八仙步)!"
"취우검을 쓰려 하는군요!"
작은 대화가 오갔다.
대취옹의 몸은 눕고, 나무토막처럼 뻣뻣이 일어나고, 바닥에
뒹굴고, 비틀거리고, 다시 쓰러지듯 기대어 왔다. 흐느적거리는
것 같지만 종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현란한 신법이었다.
그의 손에는 짧은 낚싯대가 들려 있었는데, 이 순간 그것은
날카로운 장검보다도 더욱 날카로운 경기를 일으키며 야광충과
그를 중심으로 한 방원 삼 장여의 공간을 물샐틈없이 휘감고 있
었다.
한오라기 한오라기가 가는 면도날로 만들어진 듯한 그물망이
야광충을 둘러싸고, 휘감아 흐르며, 소리 내어 울부짖다가 한
순간, 폭발적으로 좁혀졌다.
처음의 두 배로 길어진 낚싯대가 만월처럼 휘어지고, 어느새
풀려진 은빛 바싯줄은 공간을 몇십 토막으로 잘라 갔다. 그 줄
끝의 한 점 섬광은 낚싯바늘일 것이다. 야광충의 목덜미를 찢어
발길 낚싯바늘!
야광충은 그제서야 손을 내밀었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은라 섬광을 한 손으로 막아 가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귀찮다는 듯 낚싯줄이 만든 그물을 잡아당기는 듯했다.
대취옹의 눈이 번뜩였다.
'가소로운! 천잠사로 만든 줄을 잡으려 들어?'
낚싯줄이 더욱 날카롭게 당겨지고, 한 점 섬광은 살아 있는
파리처럼 묘하게 날아 야광층의 손을 비껴 목을 노렸다.
야광충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다가 한 순간 빨라지는 듯싶었
다. 그리고 멈주었다.
천라지망이 갈갈이 찢겨졌다. 삼 장의 공간을 뒤덮은 섬광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한 손에는 낚싯줄이 감겨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대취
옹의 목덜미가 잡혀 있었다.
단 한 수였다.
단 한 수만에 전대의 무림고수, 혹도 십대고수 중의 하나이자
장강십팔타의 전대 총타주가 목덜미를 잡혀 제압당한 것이다.
대취옹의 눈이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였다가 곧
절망감으로 물들어 갔다 그리고 그는 체념한 듯 자신의 목을
잡은 그 팔과 야광충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야광충이 조용히 말했다.
"보법이나 신법으로는 무리지."
귀영종의 신법, 보법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취팔선은 아니
었다. 대취옹은 야광충의 장점을 공격한 것이다.
대취옹이 중얼거렸다.
"귀영종인가? 언젠가 그게 고수의 손에 들어가면 큰일을 저지
를 것이라고 봤었네!"
야광충이 눈을 빛내었다.
"귀영종을 아는가?"
"야유신 예충을 안다고 해야겠군."
야광충은 그의 목덜미를 놓아주었다. 대취옹이 물러서며 고개
를 갸웃거렸다.
"설마 그의 제자라는 것은 아니겠지? 그에게 자네 같은 제자
가 있을 리가 없는데? 기질이 전혀 달라."
야광충은 호연 형제들과 싸우는 도신 도귀, 그리고 원도살을
보며 짧게 대답했다.
"제자를 잘못 두는 경우도 있지."
대취옹은 야광충의 시선을 따라 싸움터를 보더니 체념한 빛으
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노필부가 그 경우가 되었군!"
마원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 창고 옆, 횃불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그늘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저 사기꾼을 반드시 잡는 줄 알았는데 헛된 기대가 되
고 말았다. 고수라던 늙은이는 단번에 목덜미를 잡혀 버리고,
그 제자라는 중년인들도 목에 칼이 겨눠진 채 꼼짝도 못하고 있
지 않은가?
쌍둥이 형제 도신 도귀와 험상궂게 생긴 노인 원도살의 손에
그들은 완전히 제압당해 버린 것이다.
아직 사람들은 많았지만 마원이 보기에는 제대로 덤벼들어 이
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도 귀주성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온갖 고생을 한 덕에 그 정도 눈치는 볼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속담도 주워 들은 것이 있었다.
'청산(靑山)이 있으면 땔나무 걱정은 없다!'
일단 살아만 있으면 복수는 가능할 것이다. 언젠가는 말이다!
그는 어둠 속에 들어가자 뒤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저런 엉
터리 집단에 도움을 청하라고 한 점쟁이를 찾아가 혼을 내 줄
산이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지!"
야광충이 말했다.
대취옹이 고개를 저었다.
"이 늙은 몸을 움직여 다시 체조를 해보란 말인가? 사양하겠네!"
"그럼?"
대취옹은 대답 대신 돌아서서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들도 봤겠지? 오늘부로 능파당은 해체다!"
그가 다시 돌아섰다.
"이젠 됐나?"
야광충은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귀에는 대취옹말고 다른 사
람의 목소리도 들려 오고 있었다.
야광충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말했다.
"나와라!"
"들킨 걸까요?"
"그런가 보군!"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니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같이 나가세!"
유소백이 모충국의 팔을 잡고 말했다.
"이미 들린 처지에 숨어 있다가 끌려나가면 더 창피하지!"
보이지 않는 압력이 그들의 등에 가해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미 그들의 뒤에서 노리고 있는 것이다.
운하의 옆으로는 십여 척의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대부분이 능
파당의 사공들이 저어 온 것이지만 그 중에는 다른 것도 있었다.
구멍나고, 낡아서 버려진 배들이었다. 그 중 하나의 그늘에서
세 사람이 걸어나왔다.
모충국, 유소백, 그리고 조남성이었다.
그들의 복장을 보고 진운의 낯빛이 변했다.
"포쾌?"
유소백이 허리춤의 금라 포승을 들어 보였다
"본관(本官), 남칠성 총포두 유소백이다. 너희 불손한 무리를
'공포의 밤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한다. 반항은 곧 반역임을 알
면 순순히 포승을 받으라!"
원도살이 야광충의 옆에 와서 섰다.
"죽여 버릴까요?"
그것도 한 방법일 수 있었다. 남칠성 총포두든 뭐든 죽여서
묻어 버리면 한동안 찬바람은 불겠지만 귀찮음을 면할 수는 있
을 것이다.
야광충은 원도살의 제안을 심각하게 고려 하기 시작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유소백이 호통을 쳤다.
"결국 반항할 셈인가? 이 주변 일대가 남경수비대 병사들로
천라지망(千羅地網)이 쳐져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때 몇 란 떨어진 곳에 있는 창고에서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유소백은 그쪽을 힐끗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연락원으로 남겨 두었던 등적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저 바보 같은 놈!'
속으로 욕을 하던 유소백은 등적의 팔을 꺾어 잡고 있는 그림
자를 보고서는 혀를 찼다.
'이건 저 녀석을 탓할 것이 아니라 이놈들의 준비성이 대단하
다고 볼 수밖에 없겠군!'
등적이 그들의 앞에 쓰러졌다. 그의 팔을 잡고 온 자가
밀어 버린 것이다.
분명 불빛 속에 서 있지만 어쩐지 모호한 그림자로만 보이는
자였다.
그 그림자, 둥평이 말했다.
"주변에 있는 관부의 무리는 이자가 마지막입니다."
"잘됐군!"
원도살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모충국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날카로운 콧대가 불빛에 두드
러져 보였다.
대취옹이 중얼거렸다. 야광충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신임 추관이군!"
그 말은 필요없었다. 모충국은 불빛 속에 나서더니 자기 소개
부터 했던 것이다.
"양주부 신임 추관 모충국이다. 본관은 오늘 한 가지를 확인
하러 왔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며 무건게 말했다,
"너희들이 도대체 여하한 마음으로 역모(逆謀)를 획책(劃策)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역모라!'
대취옹이 피식, 헛읏음을 터뜨렸다.
"나으리, 그런 일은 좀더 고상한 분들이 하는 것입죠. 저희
같은 무지랭이들이 입에 올릴 일이 아닌뎁쇼?"
"무지랭이는 아니지만!"
진운이 대취옹의 말에 토를 달앗다.
"확실히 역모 같은 일은 좀더 부지런한 사람들이 하는 일임에
는 틀림없지. 당신네 관헌들은 아무에게나 역모라는 말을 갖다
붙이면 그걸로 끝이지. 어떤 일도 그때부터는 가능해지니까 말
이야!"
"그게 아니라면!"
모층국은 강하게 끊어 말했다.
"역모를 획책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근 양주부성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도대체 무어라 변명할 텐가? 대낮에 칼부림을 부
려 수십 명을 도륙하고, 운하에는 연일 시체가 떠다니게 만들었
다. 급기야는 선량한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하지 않았는가!"
진운이 따져 물었다.
"그게 역모란 말인가?"
"그럼 아니란 말이냐?"
"이것 보시게 추관나리! 트집을 잡으려거든 좀더 그럴둣한 것
으로 잡게나. 창기들 등쳐먹고, 소금 몰래 팔아먹는 건달들 몇
좀 손봐 줬기로서니 그게 어떻게 역모의 증거가 되는가?"
"나라에는 국법이 있다. 너희들이 법을 집행하는 자가 아닐진
데 살인과 폭력을 임의로 자행하여 성내에 흉흉한 공기를 떠돌
게 하고, 백성들로하여 불안에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은 역모를
위한 전초공작이 아니었던가!"
대취옹이 다시 나섰다.
"나으리, 본분을 행하셔도 한계가 있고, 고지식하셔도 분수가
있습죠. 저희 무림인들이 다툼이 있으면 법보다는 칼로 해결하
고, 관헌의 눈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구석에서 나름대로 규칙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으실 텐데요 그걸 역모로 몰
아붙이면 걸리지 않을 무림동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요?"
"말이 길어지는군!"
야광충이 한걸음 나섰다.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주관?"
모충국이 야광충을 노려보았다. 위엄이 가득한 눈빛, 많은 사
람을 다스리는 관리의 힘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 시선을 맞받았다. 관리의 그것이 그에게
위협이 될 수는 었는 것이다.
모충국은 천천히 말했다.
"네가 흑수당주인가?"
"그렇다면?"
"흑수당을 해체하고 순순히 나를 따라 관아로 따라오라!"
"가면?"
"법에 의거해 네 죄를 밝힐 것이다."
"싫다면?"
땅바닥에 구르다가 일어난 등적이 소리쳤다.
"체포 압송의 명에 거역하면 주살(誅殺)만이 합당한 보상이다!"
"주살?"
원도살이 피식, 웃었다.
"또 그런 말을 듣다니, 나도 말년에 재수가 없는 편이군!"
몽고에서 탈출하며 그들이 당한 상황이 바로 그것 아니었던가!
원도살의 눈릿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갔다.
"너회들은 해선 안둬 말을 너무 많이 했어!"
유소백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나섰다.
"무공은 무림인만이 하는 게 아니지! 우리 관리 나부랭이들도
손발 놀리는 것은 조금 배웠다네."
놀리둣 빈정거리둣 말하던 그가 돌연 안색을 굳히고 외쳤다.
"무림인은 황토(皇土)에 살지 않느냐? 너희들은 충효의 법칙
에서 흘로 벗어난 종자들이냐? 나라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 누
구고 부모의 몸을 빌어 나오지 않은 자 누구냐? 있으면 나와
봐라!"
야광충의 눈에 불빛이 번뜩였다. 유소백의 말이 그의 심기를
심하게 건드린 것이다.
"나라? 부모? 그런 자가 있다면?"
그의 눈이 차츰 푸르게 불타올랐다. 야수의 눈빛과도 같은 가
공할 살기가 장내에 짙게 깔렸다.
"오륜을 말했나? 그런 건 인간끼리나 지키라고 해!"
유소백은 그의 살기에 압도되어 버렸다. 그는 더듬거리며 물
었다.
"너는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아직 몰랐나?"
야광충이 대답했다.
"우린 그림자다!"
살기가 뻗쳤다.
유소백은 전신을 찌르는 그 살기에 예민하게 반응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별호인 신응은 괜히 붙여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성명절기인 창응십팔박(蒼鷹十八搏)은 공중에서 열억덟
번이나 몸을 회전시키며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무공
으로 그 방면에서는 가히 무림일절(武林一絶)이라 불리고 있었
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독수리는 채 날아오르기도 전에 날개를 꺾이고
말았다.
유소백이 공중으로 떠올라 막 두번째의 회전을 시작하려는 찰
나에 야광충은 이미 그의 앞을 가로막고 손을 뻗쳐 오고 있었다.
"컥!"
쿵!
유소백의 몸이 땅에 그대로 쑤셔 박혔다. 야광충이 그의 목을
움켜잡아 그대로 찍어 내린 것이다.
그렇게 땅에 반쫌 몸을 굽히고 있는 그를 향해 나머지 세 사
람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유소백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피융!
두 개의 철환이 야광충의 등을 향해 날았다. 등적이 쏘아 보
낸 것이었다. 그가 항상 손바닥에 넣고 굴리는 물건이었다.
조남성의 별호는 양주알섬, 본인은 그리 빠르지 않다고 하지
만 양주부 일대에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지금 그 경공술
이 발휘가 되었다.
그는 낮게 바닥에 깔려서 달렸다. 그의 한 손이 야광충의 다
리를 치고, 다른 한 손은 유소백의 옷자락을 잡아채었다.
모중국의 손이 야광충을 향해 뻗었다. 처음에는 그저 맨손으
로 비스듬히 뻗어 장력을 격사하는가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소맷자락 속으로부터 한 줄기 섬광이 번뜩이더니 그것은 한
자루 검이 되어 야광충의 목을 노리고 찔러 들었다. 모충국의
무기는 야광충의 유리환검처럼 팔에 감고 다니는 환검(幻劍)이
었던 것이다.
세 가지 공격을 동시에 받는 야광충을 보고 대취옹이 짧은 경
호성을 내뱉었다.
날아오는 철환이나 조남성의 공격은 갑작스럽긴 했지만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충국의 공격은 갑작스러울 뿐더러 극도로 날카롭고
현기(玄氣)가 섞여 있는 것이었다.
야광충은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돌리며 손을 뻗었다. 두 개
의 철환이 그의 묵린수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튕
겨 나갔다.
파팍!
조남성이 한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그의 손은 야광충에게도, 유소백에게도 닿지 않았다.
야광충이 튕겨 보낸 철환이 그의 양손을 뚫어 버렸던 것이다.
모충국의 검이 야광충의 비구에 부딪쳐 멈추었다.
야광충은 다른 한 손을 등적을 향해 뻗고 있었다. 그 손이 주
먹을 쥐려는 순간, 그리고 양인장이 발출되려는 순간 그가 잠시
멈추었다.
끼리릭!
모충국의 검이 뱀이 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듯 야광충의 팔을
휘감았다. 그의 검은 환검일 뿐만 아니라 휘고 꾀지는 것이 자
유로운 연검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미 가까이 다가온 등직의 손이 다시 펴졌다. 두 개의 철환
이 지척지간에서 발출되었다.
야광층의 눈빛이 번뜩이더니 주먹을 펴고 다가오는 철환, 그
리고 그 뒤의 등직을 향해 뻗었다. 다른 한 손은 모층국의 검을
움켜쥐었다.
끼리릭!
모충국의 검이 중간 부분을 야광충의 손에 잡힌 채 멈추었다.
원래는 야광충의 팔을 난도질하고 지나가 심장에 꽂혔어야 했을
검이었다. 그런데 그의 검은 장갑, 묵린수에 잡혀 버린 것이다.
펑!
등적이 던진 철환이 야광충의 손에 맞아 비스듬히 튕겨졌다.
눈이 날카로운 사람들은 그것이 정면으로 맞아 튕긴 것이 아니
라 비스듬히 아래 부분에 파고든 야광충의 손이 만들어 낸 작품
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다음 순간 야광충의 손은 등적의 목덜미를 움켜잡아 유소백의
위로 쑤셔 박았다. 미리 방어하던 등적의 손은 야광층의 간단한
손동작에 양쪽으로 벌어진 다음의 일이었다.
모충국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그는 야광충의 손에서 검을 빼려고 했지만 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검에서 손을 떼려 해도 아교에 손이 달라붙은 것처럼
떼지지도 않았다.
야광충은 그제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 반쫌 허
리를 구부린 자세에서 세 사람을 제압한 것이다.
야광충은 한 발로 유소백과 등적의 등을 포개어 밟고, 한 손
으로는 모충국의 검을 움켜증 채 조남성을 노려보았다.
조남성은 양손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채로, 겁먹은 눈으로 그
를 보고 있었다.
야광충이 모호한 그림자, 등평을 보았다.
"왜지?"
조금 전 등적이 다가올 때 양인장을 쓰려고 했던 그였다. 그
런데 그 순간 등평이 전음을 발해 그를 말렸던 것이다. 그 바람
에 한 수씩을 더 써야 하지 않았던가!
야광충의 귓가에 전음이 들려 왔다. 등평의 음성이었다.
"비밀로 해주시길, 친동생입니다."
야광충은 등적을 내려다보았다.
"그런가?"
그는 다시 모충국을 보았다.
"누구에게서 배웠나?"
모충국의 얼굴은 붉게 달라올라 있었다.
"죽여라!"
"아니! 난 네게 누구에게서 천산파의 검법을 배웠나를 묻고
있다."
모충국의 검법은 천산파의 검법이었던 것이다.
모충국이 고집스럽게 외쳤다.
"알 필요 없다. 죽여라!"
그의 얼굴은 손상된 자존심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야광충의 얼굴에 스산한 그늘이 스쳤다.
"죽여 달라? 어렵지 않은 부탁이군!"
야광충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으으윽!"
둥적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등평의 신형이 약간 흔들렸다. 그러나 야광충의 성격을 잘 아
는 그로서는 더 이상 용서를 빌 수는 없었다.
땅에 처박히는 충격으로 잠시 움직이지 못하던 유소백이 이를
악물었다. 그가 받은 충격은 단지 육체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렇게도 쉽사리 당할 줄이야!'
오늘의 일은 확실히 그들이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사전에 마음의 준비라도 했다면 이렇게 쉽게 당할 수는 없는 일
이었다.
둥에 가해지는 압력이 점차 강해졌다.
으드득!
자신의 몸 위에, 그리고 야광충의 발 아래 바로 깔려 있어서
충격을 더 직접 받고 있는 등적의 늑골이 부러지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렸다.
'이렇게 죽는가? 이렇게 비참하게!'
그렇게는 안될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그때 나타나 말했다.
"사정을 봐주십시오, 당주!"
장내에 백리극이 나타나 있었다.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야광충의 발과 손에서 세 사람이
풀려난 다음이었다.
백리극이 말했다.
"제자가 역모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유소백이 괴로운 빛을 떠올렸다. 누가 백리극이 역모를 꾀했
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를 역모로 몬 그 당사자들뿐일
것이다. 유소백은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그리고 그 사건의 이
면어! 어떤 내막이 있는지 백리극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우리 흑수당도 아닙니다."
"우리 혹수당?"
백리극이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덕였다.
"예, 우리 흑수당입니다."
유소백이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대명군부 최고의 고수, 정무장군 백리극이 무림 흑도의 마두
로 전락해 있는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 말도 더 할 수가 없었다.
대취옹이 모충국에게 다가갔다.
"노필부는 이곳 양주에서만 이십 년을 살았지요. 그래서 볼
것 안 볼 것을 여럿 봤습지요.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내시는 것이
좋겠군요. 오늘을 마지막으로 소란도 더 없을 것이고, 양주의
밤은 이미 새 주인을 맞았으니까 말입죠."
"새 주인이라!"
모충국은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관이 이렇게 흑도를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삶들을 법을 집행하는 그가 용납하고
넘어가야 한단 말인가?
대취옹의 말이 그의 고민에 쐐기를 박았다.
"여태까지처럼. 그렇죠, 여태 네 개 파와 관부가 암묵적으로
인정하며 지내 왔던 것처럼 이제는 흑수당과 그렇게 지내면 되는
것이죠. 변한것은 얼굴뿐, 관계에 달라진 것은 없는 것이죠."
'그랬던가? 그렇게 여태 지내 왔단 말이지!'
모충국은 관부, 아마도 사실은 지부대인이 중심이었을 것이다.
그 관부가 기존의 흑도 네 개 파와 암묵적으로 거래를 했다는 것
은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흑도를 토벌하려면 먼저 지부부터 족쳐야 하게 생기지
않았는가.
그는 고개를 들어 야광충을 보며 물었다.
"이제 돌아가서 토벌령이 내릴 것이 두렵지 않은가?"
대답은 대취옹이 했다.
"우리 흑도인에게 그것은 항상 있는 일입죠. 바람이 불면 수
그리고, 지나가면 다시 서죠. 그게 흑도인이고 백성입니다. 하
지만 기억해 두십시오. 얼굴은 달라져도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는 것을!"
모충국과 유소백 일행은 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야광충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좌검자는?"
좌검자가 아까부터 보이지 않았다.
야광충이 진운을 보았다.
진운이 약간은 위축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를 쫓아갔습니다. 그!"
야광충은 좌검자가 누굴 쫓아갔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없어진 사람은 좌검자말고도 있었던 것이다. 마원이었다.
원도살이 말했다.
"제가 보냈습니다. 여러 가지로 안 좋은 냄새가 나서!"
"그를 죽이라고 했나?"
"아닙니다."
원도살은 고개를 저었다.
"그를 보낸 자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누구?"
"점쟁이입니다."
원도살은 구련자에 대해 설명했다.
"몇 가지 사안이 그와 연결됩니다. 당주님에 대한 암살 시도
와, 지사를 향한 음모 등!"
야광충은 진운에게 물었다.
"그와 통천방이 무슨 관계가 있지?"
진운이 놀란 빛을 보였다.
"그걸 어떻게?"
이통천이 나서서 대답했다.
"그자는 통천방의 팔대당(八大堂) 당주 중 하나입니다. 통천
방의 팔대당은 내사당(內四堂)과 외사당(外四堂)으로 나뉘는
데……!"
"그렇다면 짐작 가는 점이 있다!"
야광충은 이통천의 말을 끊고는 진운을 향해 명령했다.
"그가 양주로 온 이후의 행적을 조사해 보도록!"
"알겠습니다."
진운이 대답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곳으로 달려왔다.
진운이 그를 알아보았다.
"무슨 일이오?"
나타난 사람은 월몽영이었다.
그녀는 진운은 쳐다보지도 않고 야광충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
려 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들이 경연루에 왔어."
"누구?"
"소림사!"
"그래서?"
"혈문룡이 졌어!"
* * *
남부동로(籃阜東路).
북문 가에 있는 구지가에서 남동쪽에 있는 단자가로 가는 길
은 유항경자가를 통하지 않고도 많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동문
가로 통하는 남부동로(籃阜東路)였다.
남부동로.
이 거리에 푸른 언덕[籃阜]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곳이
양주부에서 가장 부호들만 사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약간 경사진 거리를 따라 높은 담과 붉은 대문만이 보이는 호
화로운 저택들이 있고, 그 저택.마다에는 중원에서도 유명한 양
주의 정원들이 있는 것이다. 멀리 성벽에 올라야 비로소 보이는
푸른 언덕과 연못이 이 거리의 이름이었다.
양주성의 다른 곳과 달리 주루나 객점은 보이지 않고, 성내의
부호들만 사는 곳이라 낮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지금 그 중 한 저택의 담 옆에서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마원과 구련자였다.
"도장께서 시키는 대로 했다가 저만 큰일 났습니다요, 이제
그놈이 저만 보면 죽이려 들 텐데 어쩝니까요 전 이제 죽은 목
숨입니다요. 그냥 관가에 고변(告變)하고 말 것을!"
마원은 금방이라도 목이 떨어질 것 같은지 울상이었다.
그러나 구련자는 태연했다.
"걱정 말게! 내가 보기에 자네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걸세."
마원이 금세 표정이 달라졌다.
"그렇습니까요? 제가 그렇게 오래 산단 말씀입니까요?"
구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그럴 걸세. 뭐 어떤 사람은 나이 서른에 노망들어 벽에
똥칠한다고도 하네만 자넨 오래 살아서 그럴 걸세!"
마원이 재수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똥칠 얘기는 그만 하시고요, 그렇게까지 살고 싶지도 않습니
다요. 저는 그저 그 사기꾼놈 목을 비틀어 버릴 때까지만 살면
됩니다요. 우선 이 위기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지나 알려 주십
시오."
"생과 사는 원래 하늘에 달린 거라 마음대로는 못하니, 자네
라고 별수 있겠나. 그 사기꾼놈인들 또 별수가 있으랴?"
구련자는 시 음듯 흥얼거리더니 문득 긴장해서 멈추었다.
골목 저편에서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반바지만 입은 깡마른 사내, 한쪽 소매는 바람에 휘날리는 것
으로 보아 외팔이임이 분명했다.
구련자가 마원을 홀겨보았다.
"미행당했구나!"
골목에 나타난 사내는 좌검자였다.
마원이 급히 손을 저었다.
"제가 데려온 것이 아닙니다요. 그리고 아무도 안 따라왔는뎁
쇼?"
구련자는 한숨을 쉬었다.
마원이 누가 따라오는지 어떻게 알았을 것인가?
이런 경우를 생각 못한 그의 잘못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 사내를 보낸 그, 진운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눈을 라내었다.
"여보게, 자네에게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지."
마원이 벽에 기대어 물러서고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방법입니까요?"
"오늘 봤던 사람들 기억하지? 그 중 하나에게 혹수당에 가입
시켜 달라고 부탁하게. 자네가 보기에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으
로 말이야!"
"예?"
마원은 혼비백산했다.
"지금 저보고 호랑이굴로 들어가라고 하신 말씀입니까? 거기
가면 그놈에게 죽을 텐데요"
"지금 자세한 말을 할 여유가 없네!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자넨 목숨도 부지하고 원한도 갚을 수 있을 걸세.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는 말은 자네도 알!지?"
좌검자가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진운이 보냈느냐?"
좌검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걸어오는 속도를 늦추지 않
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구련자는 깃발을 움켜쥐며 말했다.
"대답을 않아도 상관은 없지. 온 곳으로 돌려보내면 되니까."
좌검자는 여전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전신에서 보이지 않는
기가 거미줄처럼 가닥가닥 뿜어져 나왔다.
구련자는 켕기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말은 여전히 침
착하게 나왔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이 보낸 것이지. 그러니 이제 하늘로 돌
아가면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겠지. 자네 돌아가거든 생사
복 구련자가 하늘의 뜻을 대신 이행하는 수고를 해줬다고 말 좀
전해 주게나."
좌검자는 여전히 다가서고, 거미줄은 점점 더 많아지고, 질겨
졌다.
구련자의 표정이 완전히 변했다.
단지 다가서기만 하는데도 온몸을 압박해 오는 이 살기와 기
세는 무명소졸의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점을 쳐 보고 싶어졌다.
"기다리게! 점괘나 한번 뽑아 보지."
구련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산통을 흔들더니 산가지 하나
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우는 듯, 웃는 둣 묘한 표정.
"내가 왜 생사복인 줄 아나?"
대답은 없었다.
"다른 점괘는 몰라도 생사를 가르는 점괘는 완벽하게 맞추기
때문이지! 이제 점괘가 나왔네! 궁금하지 않나?"
좌검자는 여전히 무응답이었다.
"자넨 생사의 문제에 관심이 없단 말인가?"
좌검자가 처음으로 대답했다.
"없어!"
구련자는 인상을 썼다.
"없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생과 사는 인간인 이상 누구에게
나 초미(焦眉)의 관심사인데 왜 관심이 없어? 넌 죽음이 두렵지
도 않으냐?"
좌검자가 대답했다.
"내겐 죽음이란 별의미가 없어. 삶이라는 것이 별가치가 없으
니까!"
"좋아! 어쨌든 점을 켰으니까 결과를 가르쳐 주지. 확실한 죽
음이다!"
죽음이라는 말과 동시에 그는 좌검자를 향해 깃발, 사실은 그
의 독문병기인 생사번(生死幡)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누런 깃폭이 한 순간 좌검자의 사방을 점하고 덮어 버렸다,
좌검자가 왼손을 뻗쳐 어깨 위로 올라온 검자루를 잡았다_
파앙!
검캉이 번뜩이고, 생사번의 깃폭이 길게 찢어져 나갔다. 그
사이로 구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피 한 방울!
구련자는 이마에서 흐르는 피 한 방울을 느끼지 못하는지 다
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봐! 이렇게 죽잖아. 내 점괘는 생사에 관한 한 틀린 적이 없
어!"
그의 이마로부터 턱까지 한 줄기 혈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그
혈선은 피의 분수로 바뀌었다.
구련자는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그의 마지막 점괘는 자신
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좌검자의 눈이 마원에게로 향해졌다
마원이 갑자기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 저도 흑수당에 받아 주십시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합니다.``````````````````
ㅈㄷㄱ~~~~~~~~````````````````
잘읽었습니다
즐감
잘읽고 있습니ㅏ